35화_눈처럼 하얀 수국꽃을 주세요
사람이 태어나면 하늘에는 별이 하나 태어나고 땅에는 꽃이 하나 피어난다. 그 별과 꽃의 이야기를 듣는 소녀는 어느 날 슬픈 비밀을 알게 된다.
<35화>
눈처럼 하얀 수국꽃을 주세요
* * * * *
그린섬 주차장은 빌딩 왼편으로 출입한다.
정원 쪽은 차량 출입로가 없다.
그런데 난데없이 한밤에 정원 쪽에서 차량 불빛이 연이어 나왔다.
이상했다.
그곳은 주차장으로 이어진 통로가 아니었다.
“저거 봐. 분명 정원과 연결된 것처럼 보이잖아. 정원에 통로가 따로 있는 건가?”
“우리 내려가 볼까?”
벼리와 연이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서둘러 내려갔다.
그린섬 빌딩을 나서서 바깥으로 나와 차량이 나왔던 곳으로 향했다.
그들이 갔을 때는 이미 지나다니는 차가 없었다.
그곳은 일방통행의 작은 도로로 차량이 어딘가에서 갑자기 나타날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다.
둘은 빌딩을 나와 정원 쪽으로 한 바퀴 걸어서 돌았다.
어디에서도 차량이 드나들 수 있는 문이나 장치가 없었다.
대체 그 차들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알 수 없었다.
둘은 새벽, 모두들 잠든 시간에 넋을 놓고 그린섬 정원 담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벼리는 이런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특별한 장치가 있을 거야.’
자신이 그린섬 정원에 들어갈 때면 특별한 신호가 있어야 열리는 문처럼 차가 드나들 수 있는 어떤 특별한 장치가 있는 것은 아닐지 살피게 되었다.
지금 시간은 인적이 없는 시간이었다.
문득 위험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둘은 다른 날 보기로 하고 집으로 올라왔다.
집으로 올라왔을 때 재인이 집에 있었다.
“어디 갔었어? 깜짝 놀랐어. 불도 다 켜놓고. 무슨 일 난 줄 알았어. 전화했더니 핸드폰은 두고 가고.”
벼리는 걱정하는 재인의 말에 당황한 듯 물었다.
“어떻게 여기 있어요? 출장 아니에요? 언제 왔어요? 파리에 출장 간다고 하지 않았어요? 무슨 일 있어요?”
“미리 말하지 않아서 미안. 놀래켜 주려고 했어. 오늘 출국하려는데 다른 급한 일이 생겨서 출국 못했어. 출장은 다음에 가기로 했어. 그런데 어딜 다녀온 거야? 놀랐어.”
“연이 언니가 잠이 안 온다고 잠시 바깥바람 좀 쐬러 가자지 뭐예요. 그래서 잠시 바람 쐬러.”
“도시에서 바람 쐬러 이 밤중에 나간단 말야? 위험해.”
재인의 걱정에 연이가 무서웠다는 듯 말했다.
“그렇잖아도 무서워서 잠깐 나갔다 들어온 거예요. 도시라도 한밤은 무서워요.”
연이의 대답이 어이없다는 듯 벼리가 웃었다.
조금은 자연스럽게 보이고자 했다.
“하하하, 연이 언니, 들어오자고 한 건 나인 거 알지?”
“그랬던가? 하하하.”
“재인 씨, 연이 언니는 말만 저렇고 겁이 하나도 없어요.”
“어머, 난 연약한 여자란다. 나, 연분홍 여자....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연이는 연분홍 치마를 팔락였다.
“무늬만 연약한 여자지. 연분홍 원피스 입은 모습 보면 영락없이 야리야리한데, 한밤의 무법자야.”
“재인 씨, 벼리가 나를 이렇게 거친 여자로 만들려는 음모를 꾸미네요. 이래도 돼요?”
“하하, 연이 씨야 말로 여자 중의 가장 부드러운 여자죠. 난폭한 벼리 씨와는 전적으로 다르다고 봐야겠죠?”
“재인 씨가 연이 언니 편이란 걸 이제 알았네요.”
“하하, 재인 씨가 예의 있는 남자라 그렇죠.”
“역시 연이 씨가 잘 아는군요.”
“신혼이신 곳에 제가 눈치 없이 왔는데 이 시간에 갈 수는 없고 저는 이만 방으로 들어갈게요. 잘 자요. 마저 자야죠. 재인 씨가 오니 잠을 자야 할 것 같은 분위기죠?”
“아냐, 언니, 나 언니랑 같이 잘 거야.”
“무슨 말이니. 신혼인데. 난 혼자 잘 테니 넌 재인 씨한테 가야지. 말이 되니? 나를 얼마나 눈치 없다고 구박하겠니, 재인 씨가.”
“아, 아니, 괜찮아요. 오랜만이니까 벼리 씨랑 같이 자는 것도.”
“에잇, 무슨 말씀. 자자, 이 몸은 방으로 들어갑니다. 두 분 좋은, 스윗한 밤 보내요.”
연이는 벼리를 재인의 방으로 밀어 넣고 방으로 들어갔다.
벼리는 얼결에 재인의 방으로 들어갔다.
“미, 미안해요. 어떡하죠? 제가 나가면 이상하게 생각할 거예요.”
“무슨 말이에요. 벼리 씨는 나와 함께 자야죠.”
재인은 아무렇지 않게 벼리를 안고 침대로 향했다.
벼리는 마음이 복잡한 상황이었다.
재인이 자신을 번쩍 들어 침대로 데려가자 어찌할 바를 몰랐다.
벼리의 불안한 마음은 재인의 행동으로 더 불안했다.
불안을 감출 수도 없었다.
재인은 그런 벼리의 마음을 아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쓰다듬을 뿐이었다.
그리고 아주 부드러운 키스를 했다.
벼리는 재인의 키스와 쓰담 쓰담이 이어지자 다시 아무 생각도 없어지고 말았다.
세상의 모든 그림자는 사라지고 재인과 단 둘만의 달콤한 세상만 남았다.
이런 것이 사랑일까 생각이 들었다.
재인과 벼리는 불안한 마음을 지우려는 듯 서로 몰입하고 빠져들었다.
둘의 불안과 슬픔이 깊이만큼이나 둘의 밤은 뜨거웠다.
둘의 사이에 결코 어두운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수없이 많은 꽃들이 피어나고 향기가 퍼져 나가고 있었다.
그들의 밤은 온 세상의 꽃들을 깨우고 있었다.
사랑의 씨앗이 온밤의 우주를 떠돌아 떠돌았다.
아침이 되자 성 부장은 일찍 펜트하우스에 왔다.
전날 출국하지 못한 일들에 대해 상의할 것이 있다고 했다.
재인은 아침도 먹지 못하고 나갔다.
민 실장이 식사하지 못하는 재인을 위해 주스를 준비했다.
재인은 먹지 않고 그냥 나갔다.
연이는 재인이가 나가고 한참 후에야 일어났다.
“남의 집에서 이렇게 늦잠 자도 되는 거야?”
“우리 집이 아니니까 늦잠을 자지. 민수 오빠 몰라? 평생 늦잠을 몰라요, 늦잠을. 늦잠이 얼마나 매력이냐고. 직장인에게 늦잠이 얼마나 꿀이야. 미인은 잠꾸러기란 말이 괜히 생겼겠어? 아내를 미인으로 만드는 남자들은 절대 아내의 아침을 깨우지 않는다고. 그런데 너의 오빠 민수는 아침마다 나를 깨워. 그것도 아주 일찍. 말이 되냐고.”
“하하, 언니가 쌓인 게 많네. 오빠는 알아?”
“오빠는 말해봤자 소용없어. 본인은 아침밥이 가장 중요하대. 아침을 먹을 때 살아 있다는 것을 느낀다나?
“우리 엄마의 훈련 덕분이잖아. 조건반사야 포기해. 아침마다 깨워서 정성스럽게 아침을 먹이는 엄마한테 길들여져서 그래. 나도 그런 걸. 언니가 이해해.”
“조건반사? 하하하, 말이 된다. 그런데 네 방에선 정원이 안 보이더라.”
“재인 씨 방에서 그렇게 잘 보인다는 걸 나도 이제 알았어.”
‘우리 한 번 더 보자.“
“아침에는 어떤지 한 번 볼까?”
둘은 창가로 가서 정원을 봤다.
뭔가 변화가 있었다.
나무가 한 그루 더 심어져 있었다.
분명 새벽 2시까지는 없었다.
재인 씨는 2시 이후로 계속 자기와 같이 있었다.
재인 씨가 심은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럼 누가 심었을까?
둘은 정원에 심긴 나무가 기이했다.
아무도 안 보는 한밤에 심어진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그럼 그 밤에 정원 주변을 지났던 차량 행렬의 불빛은 무엇이었지?”
”
“출국한다던 재인의 발목을 잡은 것은 무엇이었지?”
도무지 궁금한 것들 투성이었다.
재인은 성 부장과 함께 일찍 김 회장의 집으로 갔다.
요즘 김 회장은 부쩍 재인을 불렀다.
재인은 김 회장 일가의 일에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하지만 맘대로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재인은 다시 그린섬에 없었다.
둘은 아침을 간단히 먹고 정원에 가기 위해 내려왔다.
민 실장을 1층 엘리베이터 앞에서 만났다.
“안녕하세요? 어디 가세요?
“잠시 랑데부 준희 셰프를 만나보려고. 준희 씨가 꽃을 주문했어.”
“레스토랑에서 쓰는 꽃들을 셰프가 주문하기도 해요?”
“아니, 개인적 부탁이라고 했어. 지난 주 부탁했는데 오늘 꽃이 오면 알려달라고 했어.”
“전화로 하시지 왜 직접 올라가세요?”
“톡도 안 읽고 전화를 안 받아서 직접 말해주려고.
“무슨 꽃이에요?”
“눈처럼 하얀 수국꽃!”
“커다란 송이의 수국꽃요? 하얗고 파랗고 핑크핑크한?”
“연이 씨가 잘 아네.”
“저도 좋아해요. 언젠가 민수 씨가 저한테 수국꽃을 한 다발 선물한 거예요. 수국 꽃말이 변덕이잖아요. 그래서 제가 변덕부려서 놀리는 거냐고 화를 냈거든요.”
“수국, 예쁘지 않아?”
“우아하고 예쁘죠. 예쁘고 좋긴 했는데 꽃말이 변덕이라고 들은 것 같아서.”
“그건 수국의 진심을 몰라서 하는 소리야. 수국의 다른 꽃말은 진심과 처녀의 꿈도 있어. 아름답지 않아? 처녀의 꿈. 그리고 진심.”
“그런 아름다운 꽃말이 있었어요?”
“수국은 피는 동안 색깔이 변해. 처음은 연한 자주색이었다가 하늘색으로 변하고 그 다음은 연한 핑크색으로 변해. 하지만 그 탐스러운 꽃송이는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제 모습을 잃지 않아. 겨울이 되어 수국꽃을 본 적이 있어?”
“겨울에도 수국꽃이 피어요?”
“아니, 겨울이 되어 나무에 달려 있는 수국꽃을 본 적이 있어? 수국꽃은 겨울이 되어 색깔을 모두 잃고도 꽃 모양은 흩트리지 않아. 그대로 간직하고 있지. 동그랗게. 꽃모양이 하나도 흔들리지 않고 아주 동그랗게 그대로 있거든. 이런 것이 흔들리지 않는 진심이 아닐까? 그래서 수국은 끝까지 자신의 형태를 잃지 않으며 자신이 간직했던 처녀의 꿈을 지킨다고 할 수 있지.”
“그렇게 아름다운 사연이 있는 꽃이었어요? 몰랐어요.”
“수국처럼 솔직한 사랑은 없다고 봐. 수국은 물을 정말 사랑해. 수국에게 물은 사랑하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야. 수국은 물이 있을 때는 자신의 온힘을 다해 꽃을 활짝 피우거든. 그런데 물이 없으면 바로 시들어 버려. 그러다 다시 물속에 담가 두면 한 시간도 안 돼 다시 살아나거든. 수국은 물만 있으면 자신을 언제나 꽃피울 준비가 되어 있는 꽃이야.”
“사랑이 정말 많은 꽃이네요. 민수 씨한테 다시 고맙다고 해야겠어요.”
준희는 하얀 색 수국꽃을 준비해 달라고 했다.
하얀 색 수국꽃을 준비한 준희는 어떤 마음이었는지 궁금했다.
민 실장을 따라 벼리와 연이는 랑데부에 함께 올라갔다.
며칠 전에 준희가 이야기한 것들이 마음에 걸렸었다.
꽃을 주문했다고 하니 좋은 일이 있는가보다 생각했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랑데부의 주방은 점심 준비를 위해 바쁠 것이었다.
전화는 당연히 받기 어려울 것이다.
기다린 꽃이 왔다고 조금이라도 빨리 소식을 주고 싶었다는 민 실장은 랑데부 직원에게 준희 셰프를 불러달라고 했다.
그런데 준희 셰프는 없었다.
2일 전부터 휴가라고 했다.
갑자기 일이 있어 당분간 쉰다는 연락이 왔다고 했다.
“그런데 쉴 것을 미리 계획했었나 봐요. 준희 셰프 대신 일할 셰프가 어제부터 출근했거든요. 미리 준비해 줘서 남은 사람은 고마웠죠. 갑자기 셰프 빠지면 정신없거든요.
“언제 나올지는 모르겠어요. 파리에 갔다고 하니까 시간이 좀 걸리겠죠? 이렇게 대체 셰프까지 구하고 갔으면 장기간 휴가죠. 딱 각이 나오잖아요.”
“정우 대표님은 어제, 오늘 급한 일이 있으시다고 나오지 않았어요. 내일은 나오신다고 한 것 같아요. 정우 대표님 오시면 오셨다고 전해 드릴까요?”
벼리와 연이는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뭔가 불안한 일이 생긴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랑데부에서 불안을 표현할 수는 없었다.
벼리와 연이, 민 실장은 꽃달로 내려왔다.
꽃달에 눈처럼 하얀 수국꽃이 한아름 곱게 피어 있었다.
민 실장은 꽃을 준비했는데 꽃을 받고 싶었던 사람이 사라지자 아쉬워했다.
벼리는 수국을 자신의 펜트하우스로 배달해 달라고 했다.
그러다가 순간, 재인이 꽃을 들이지 말라고 했던 일이 생각났다.
연이에게 수국꽃을 한아름 안겨줬다.
연이는 꽃의 사연을 알게 되니까 꽃이 너무 사랑스럽다고 좋아했다.
벼리와 연이는 정원에 들를 생각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연이와 함께 정원에 가는 것은 마음에 걸리는 일이었다.
연이에게 수국 한아름을 선물하고 펜트하우스로 올라왔다.
준희는 수국꽃을 주문해 놓고 갑자기 파리로 떠났다고 했다.
정원에 가봐야 했다.
어떤 나무가 새로 심어져 있는지 확인해야 했다.
재인의 방으로 가서 그린섬을 내려다 봤다.
구골나무 옆으로 때죽나무, 라일락이 심어져 있었다.
이제 새로운 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소멸하고 싶지 않은 자와 소멸이 되고 싶은 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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