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_정민의 실종
사람이 태어나면 하늘에는 별이 하나 태어나고 땅에는 꽃이 하나 피어난다. 그 별과 꽃의 이야기를 듣는 소녀는 어느 날 슬픈 비밀을 알게 된다.
<22화>
정민의 실종
* * * * *
연이에게서 오랜만에 전화가 왔다.
요즘 새로운 취재를 하느라 바쁘다고 뜸했었다.
“벼리야, 잘 지내?”
“언니도 민수 오빠랑 잘 지내? 민수 오빠는 집에 잘 들어오고?”
“나야 늘 잘 지내지. 민수 오빠가 야근이 많아서 집에 잘 안 들어오는 것 빼고 괜찮아. 나도 요즘 취재로 바빠.”
“언니가 바쁜 것 같았어.”
“재인 씨는 잘 있지?”
“재인 씨도 요즘 바빠.”
“............”
연이는 잠시 말을 끊었다.
“왜 전화했어? 항상 문자하잖아.”
“일이 있어.”
“말해. 저녁에 그린섬에 한 번 와. 랜디가 언니 궁금하다고 했어.”
“시간되면 들를게. 근데 혹시 정민이 거기 왔니?”
“정민 언니? 안 왔는데? 지난 번 같이 본 후로 두 번인가 더 왔는데 나는 아니고 꽃달 민 실장님하고 이야기를 더 많이 하고 갔어. 그리고 아빠에게 인사하고?”
“..............”
“무슨 일이야?”
“정민이가 이틀째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정민이 엄마가 나에게 연락했어.”
“이틀이나? 어디 여행 갔을까?”
“이틀 비우려면 어디를 간다고 할 것 아냐. 그런 것도 없이 그제 아침에 나갔다가 들어오지 않았대.”
“어디 갔을까?”
“정민이가 너한테 간다고 했대. 그래서 너한테 확인해 달라고 해서 내가 전화한 거야.”
“나한테? 오지 않았어.”
“그렇구나. 정민 엄마께 좀 더 기다려 보시라고 했어.”
벼리는 연이와 전화를 끊고 정민에게 전화했다.
<지금 거신 전화는.......>
정민의 전화는 전원이 꺼져 있었다.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전화를 다시 하려고 보는데 부재중 전화가 있었다.
열어 보니 정민에게서 부재중 전화가 와있었다.
세 번이나 부재중이 찍혀 있었다.
벼리는 핸드폰으로 전화가 오면 전화를 잘 받는 편이었다.
그런데 왜 못 받은 건지 이상했다.
다시 확인했다.
핸드폰에 분명 부재중 전화가 세 번 찍혀 있었다.
어젯밤 늦은 시간에 걸려온 것이었다.
그 시간에 벼리는 샤워하고 있었다.
벼리는 연이에게 전화했다.
“연이 언니, 어젯밤 정민 언니한테서 전화가 온 걸 몰랐어. 그런데 전화해보니 꺼져 있는데?”
“나도 해봤는데 연락이 닿질 않아. 별 일 없겠지?”
“별일이야 있겠어. 갑자기 무슨 급한 일이 있어서 그런가봐. 저녁이 되면 연락 오겠지.”
“그래도 걱정이야. 혹시 다시 연락 오면 나에게 연락해줘.”
연이가 전화를 끊었다.
벼리는 갑자기 불안해졌다.
불안은 본능적 직감과 함께 오는 것이었다.
정민은 연락이 없다고 했다.
벼리는 정민의 연락이 없다고 하는데 이상하게 재인이 들어오지 않은 지난 밤이 신경 쓰였다.
재인은 어젯밤 들어오지 않았다.
비 오는 밤이었다.
가끔 재인은 늦게 들어오거나 밤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 날은 작업실에서 일이 있다고 했다.
재인이 늦게 들어오는 날은 비 오는 밤이 많았다.
이상하게 그런 날이 몇 번 있었다.
어제는 비가 온 날이었다.
그런데 어젯밤 정민에게 연락이 왔었다.
벼리는 전화를 받지 못했다.
벼리는 샤워할 때 언제나 전화기를 욕실로 갖고 들어갔다.
전화나 문자를 확인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음악을 듣기 위해서였다.
핸드폰은 선곡을 편하게 할 수 있었다.
벼리는 욕실에서 음악 듣는 것을 너무 좋아했다.
욕실에서 전화기가 없었던 적은 거의 없었다.
전화를 못 받은 것이 이상했다.
재인은 어젯밤 들어오지 않았다.
아침이 되어 아주 피곤한 얼굴을 하고 들어왔다.
재인은 비 오는 밤 다음 날은 말이 늘 없었다.
어떤 다른 것에 힘을 다 뺏기고 돌아온 사람처럼 기가 없었다.
"피곤해 보여요. 어제는 안 들어온 거예요?"
“미안해. 어젯밤 작업실에서 그림 좀 그렸어.”
“미리 말을 하지.”
“미안, 어제 잠든 줄 알았어.”
“별일 아니면 괜찮아요. 그런데 어디 아파요?”
“아냐, 어제 밤새 작업했다고 했잖아. 못자서 그래. 한숨 자고 나면 괜찮을 거야.”
“그럼 어서 자요. 난 오전에 꽃달에서 민 실장님이랑 보기로 했어요.”
“아냐, 지금 일이 좀 있어. 나가봐야 해.”
재인이 나가야 한다고 말하는데 성 부장이 들어왔다.
성부장은 재인이 나가야 하는 것을 알고 미리 온 것 같았다.
성 부장은 재인의 모든 일을 돌봐주고 있었다.
재인이 무엇을 하든 그림자처럼 따라 다녔다.
재인이 나갔고 성 부장도 뒤를 따랐다.
벼리는 아침에 조금 피곤했다.
밤새 정민은 연락이 없었다고 했다.
무슨 일인지 걱정도 되고 재인의 피곤한 얼굴도 마음에 걸렸다.
우울하거나 피곤한 사람이 곁에 있으면 전염되는 법이었다.
우울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기운을 먹고 산다고 했다.
언제나 위로와 사랑이 필요한 우울은 다른 사람의 사랑과 관심을 빨아 들였다.
그들은 잠시 사랑과 관심과 위로의 힘으로 바짝 생생해졌다.
그러다 그 시간이 잠시 흐르고 나면 그들은 다시 사랑과 관심의 기아에 허덕이는 얼굴이 되었다.
어김없었다.
상대의 사랑과 관심이 담긴 기운을 다 먹은 이들은 그것을 저장하지 않았다.
어쩌면 저장되는 장치나 효소가 결핍되었을 수 있었다.
이들은 사랑과 관심의 힘을 저장하지 않고 곧바로 쏟아버렸다.
결국 사랑과 관심의 기아가 이들을 옭아맸다.
우울이란 그런 것이었다.
피곤 역시 같이 있는 사람의 위로를 받으며 조금은 회복된다.
휴식이 피곤을 회복시켜 준다고 하지만 우울이 가져다주는 피곤은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못했다.
재인의 우울과 피곤이 마음에 걸린 벼리는 저절로 우울해지고 피곤해졌다.
표현하지 않으려고 해도 숨겨지지 않았을 것이다.
벼리는 꽃달로 들어섰다.
민 실장이 반겼다.
“벼리 씨, 어서 와. 그런데 어디 아파? 못 잤어?”
"좀 못 잤어요."
벼리의 목소리는 피곤했다.
이때 꽃들의 소리들이 벼리에게 쏟아졌다.
“벼리야, 벼리야, 벼리야...”
“벼리야, 벼리야, 벼리야...”
꽃집 가득 많은 인사들이 날아다녔다.
벼리란 글자들이 음표처럼 떠다니는 것 같았다.
벼리란 이름이 꽃잎처럼 떠다니는 것 같았다.
꽃들이 벼리란 이름을 불렀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꽃집에 향기들이 쏟아졌다.
“이거 뭐지? 꽃향기가 마구 쏟아져. 벼리 씨가 오니까 꽃들이 기분 좋은가 봐.”
민 실장이 꽃들의 향기에 놀라고 있을 때 어디선가 푸른 숲의 나무향이 짙어지고 있었다.
“안녕, 벼리.”
“안녕하세요, 민 실장님..”
초록머리 랜디가 푸른 숲을 몰고 들어왔다.
벼리만 알 수 있는 푸른 숲이었다.
“랜디, 어서 와요. 벼리가 와서 온 거죠?”
“아셨네요. 벼리 만나러 왔어요.”
민 실장은 카페로 향했다.
"내가 차를 준비할게요. 벼리가 기운이 없어 보여요."
"아니에요. 내가 왔잖아요. 내가 왔으니 괜찮아요."
초록머리 랜디가 말하자 민 실장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벼리는 랜디랑 이야기하며 쉬어. 커피나 차 필요하면 말해. 내가 맛있게 준비해 줄게."
"감사해요. 랜디가 왔으니 차는 다음에 할게요. 랜디가 숲을 데리고 왔으니까요. 그리고 난 무엇보다 꽃들이 있으면 기운이 나요. 여기 있는 꽃님들로 충분해요.”
랜디가 벼리의 말을 듣고 웃으며 말했다.
“그럴 줄 알고 내가 고운 꽃들 단장을 잘 시켜놨어. 아주 경쾌한 아가씨들로.”
“호홋, 꽃들을 단장해요?”
“꽃들도 단장을 해야 더 빛나고 예쁘지. 그냥 저절로 예뻐지는 것은 없어. 나름의 노력이 있어야 더 빛나고 고와져. 그래야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사랑을 받겠지?”
“꽃들은 예쁘게 태어나서 저절로 예쁜 줄 알았어요.”
“노력 없이 예쁜 것은 없어."
"그냥 예쁜 것이 아니에요?"
"이거 봐. 더 좋은 빛을 받으려고 노력하고 더 좋은 자세를 취하려고 노력하는 꽃들의 모습이 보이지?"
"와, 정말 꽃들이 노력하고 있었네요."
"당연하지. 노력하는 모습들이 꽃들을 사랑스럽게 만드는 거야.”
“그런 이야기를 듣고 보니 꽃들이 더욱 사랑스러워요.”
꽃들이 일제히 향기를 뿜었다.
“사랑에 최선을 다하는 꽃들을 더 사랑스럽게 봐줘서 고마워.”
벼리의 기운이 없고 우울한 마음들이 꽃들 사이에서 어디론가 사라지고 있었다.
벼리는 꽃들 가까이 다가갔다.
꽃들이 벼리를 기다렸는지 모두 벼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작은 향기들이 떠다녔다.
작은 소리들도 떠다녔다.
물론 벼리만 들을 수 있었다.
“안녕, 어여쁜 꽃님들.”
벼리가 속삭이듯 말했다.
꽃들이 일제히 향기를 쏟아냈다.
기쁨을 표시하는 꽃들의 표현방식이었다.
꽃들은 아마도 벼리의 불안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화려한 꽃들이 앞다투어 자신을 보라고 웃었다.
꽃을 보면 사람들은 마음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실내에 있는 꽃들은 스트레스와 불안을 줄여주었다.
조용한 백합이 목소리는 키우지 않고 향기를 더욱 진하게 쏟아냈다.
백합의 향기는 불안과 초조를 완화시켜 주었다.
백합은 자신의 향기로 괜찮냐고 벼리에게 물어보고 있었다.
“랜디, 백합이 제 마음을 알고 인사해요.”
“그럼, 아주 사랑스러운 아가씨지?"
"하얀 빛깔이 우아하고 예뻐요. 향기는 더 기품이 있어요."
"백합은 특별히 관리에 힘을 쓰지 않아도 잘 자라고 번식도 잘 해. 그리고 추위나 더위도 잘 견디며 저렇게 깔끔하고 어여쁜 꽃을 피우는 매력덩이야. 사람들에게 보살피는 어려움을 주지도 않으니 더욱 사랑스럽지."
벼리는 꽃들을 향해서 인사했다.
“백합아, 고마워.”
백합은 꽃송이를 숙이며 향기를 한 번 더 뿜어 주었다.
“우리가 어떤 사건이나 인물에 대해 기억할 때 후각이 끼치는 영향력은 정말 큰 것 같아. 인간의 후각은 미각보다 1만 배나 더 정교하다고 하잖아. 그래서 이 향기로 인해 어떤 대상에 대해 호불호가 결정되기도 하는 걸 보면 후각은 정말 중요해.”
랜디는 백합을 바라보며 말했다.
벼리는 랜디가 현재 자신의 일에 대해 모두 알고 말하는 것 같았다.
재인은 이상한 일에 휩싸여 있었다.
벼리가 잘 알 수는 없었지만 불안이 있었다.
하지만 랜디에게 이런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랜디는 벼리의 불안한 마음을 모르는 척 감싸주었다.
랜디가 말을 아껴서 벼리는 위로가 되었다.
뭔가 명확한 일이 아닌 막연한 불안이었다.
이런 날은 묵묵히 감싸주는 마음이 필요했다.
정민이 이틀째 연락이 되지 않았다고 했다.
이틀은 다 큰 성인에게 별로 큰일이 아닐 수 있었다.
하지만 정민이 그린섬에 온 것은 뭔가 문제를 안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어떤 사건이 일어날 것 같은 불안을 몰고 있었다.
소멸하고 싶지 않은 자와 소멸이 되고 싶은 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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