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_그린섬 설계의 비밀
사람이 태어나면 하늘에는 별이 하나 태어나고 땅에는 꽃이 하나 피어난다. 그 별과 꽃의 이야기를 듣는 소녀는 어느 날 슬픈 비밀을 알게 된다.
<19화>
그린섬 설계의 비밀
* * * * *
벼리의 가족은 벼리가 연애한다는 말에 모두 찬성했었다.
그렇다.
연애는 찬성했었다.
결혼은 아니었다.
"안 돼."
"절대 안 돼."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모두 말렸다.
할머니가 엄마에게 하신 말씀이 있었다.
“첫정은 그냥 둬야 해!”
“첫정요?”
“첫정을 막잖아? 평생 혼인을 못할 수 있어. 그런 것들이 평생 혼자 살면서 부모 원망하는 거야.”
“아무리 그래도 맘에 안 들면 어떻게 해요?”
“사랑이란 것이 떨어질 정은 가만 놔두면 저절로 떨어지게 되어 있어. 그걸 억지로 막으면 안 돼. 사랑이란 것이 그래.”
“에이, 그래도 아닌 건 아닌 거죠. 난 맘에 안 들면 반대할 거예요. 기를 쓰고.”
“아이들 연애할 때 첫정은 절대 뭐라고 하지 마.”
벼리의 할머니가 엄마에게 하신 말씀이 있었다.
그래서 아이들의 첫정은 그냥 두는 것이 가족의 룰이 되어 버렸다.
아들 민수는 어려서의 친구가 첫정이었다.
결국 둘은 결혼했다.
“첫사랑과 결혼이라고? 너무 멋없어.”
“뭐, 어떠냐. 너네 오빠랑 나는 그냥 멋없이 첫사랑 커플로 마감할란다. 너는 제발 부탁이니 첫사랑이니 뭐니, 그런 것과 상관없는 연애를 해야 한다.”
“첫사랑의 저주야. 어쩔.”
“너나 조심해. 알았지? 절대 첫사랑과 결혼은 안 된다. 그냥 사귀는 것까지만.”
“나는 절대. 네버. 어림없지. 첫사랑? 그까짓 거 던져 버릴 거야.”
벼리의 가족에게 첫사랑은 약간의 진지함이었다.
그래서 가족들은 벼리의 첫사랑이 누구일지 내심 궁금해 하고 기다렸다.
벼리가 오랫동안 모태솔로로 남친 없이 지냈기 때문이었다.
그런 와중에 남친이라고 누군가 데려온 사실은 환영할 일이었다.
할머니의 말씀이 너무 큰 주문이 되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할머니의 축원이었는지 나쁜 주문이었는지 벼리 역시 첫사랑에 붙잡힌 것이었다.
만들어낸 연애였지만 가족들이 알기에 그러 했다.
엄마는 휴일에 모처럼 안방에 누워 음악을 듣고 있었다.
벼리가 툭 던지듯 말을 꺼냈다.
“엄마, 결혼할래요.”
“뭐라고? 너 뭐 잘 못 먹었어? 실없는 소리 그만 하고 어서 가서 설거지나 좀 해라. 엄마 오늘 피곤하다.”
“나, 결혼한다고!”
엄마는 2층을 향해 연이를 큰 소리로 불렀다.
“연이야!”
“연이야, 벼리 지금 뭐라고 그러는 거냐? 설거지하기 싫으니까 괜히 쓸데없는 소리로 대충 넘어가려고 하는가 보다.”
“결혼한다니까.”
“연이야, 너 설거지해주지 말아라. 오늘은 벼리 담당이야.”
벼리는 설거지를 하러 갔다.
그릇이 부딪치는 소리에 불만이 가득 묻어 있었다.
“참내, 엄마는 일륜지대사인 결혼과 설거지를 어떻게 연결시켜? 격이 다르잖아. 설거지는 한다고 해. 참내, 설거지가 뭐라고.”
엄마는 안방에 누워 있다가 벌떡 일어났다.
처음엔 농담인 줄 알았다.
그런데 벼리의 목소리가 진지했던 것이 갑자기 떠오르며 생각이 달라졌다.
“연이야, 연이야... ”
벼리의 엄마는 갑자기 목소리가 바빠졌다.
연이가 엄마의 급박한 목소리에 2층에서 서둘러 내려왔다.
긴장한 목소리는 멀리까지 전파력이 있는 법이었다.
밖에서 화분 분갈이를 하고 있던 아버지까지 서둘러 집으로 들어왔다.
“왜? 무슨 일이야?”
주방에서 설거지하던 벼리는 가족들이 거실로 서둘러 모여드는 소리를 들었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말해야지.’
벼리는 심호흡을 했다.
‘침착하게. 아무렇지 않게. 잘 할 수 있어.’
가족들의 눈이 둥그레져 있었다.
모두 벼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엄마, 아빠, 저 결혼하려고요.”
“들었죠? 이거 농담 아닌 거죠? 진심으로 들리는 건 뭐죠?”
“결혼? 무슨? 결혼이 뭐야?”
“저, 결혼하고 싶어요.”
엄마가 벼리의 등짝을 한 대 때렸다.
“결혼은 무슨 결혼? 깜짝 놀랐네. 정신 차려. 그 나이에 무슨 결혼을 한다고. 그냥 연애를 해. 네 연애에 대해 아무도 뭐라 안 하잖아.”
“아이, 아파. 엄마도 참. 내가 아직 어린 줄 알아.”
“결혼? 진짜? 너희 그린섬 대표랑?”
“응, 재인 씨랑 결혼하기로 했어. 저녁쯤 인사드리러 올 거야.”
“넌 결혼이 무슨 얘 이름이니? 결혼이라니? 갑자기? 넌 아직 나이가 어려서 안 돼.”
“이런 속물. 너 혹시 대표가 돈이 많아서 결혼하는 거 아냐? 이런 순수 실종자야.”
“벼리야, 너 아직 어리다. 결혼은 조금 더 생각해 보자. 세상에 좋은 남자 더 많을 수 있다.”
“안 된다. 결혼? 네 나이 이제 겨우 스물넷이야.”
이런저런 가족들의 놀라움을 듣는 것은 너무 당연했다.
엄청난 반대도 당연했다.
하지만 역시 할머니가 엄마에게 남긴 말씀이 있었다.
“혼인은 당사자가 원하면 하는 거야. 말리지 말아라. 그런 것이 바로 운명을 거스른다고 하는 거야.”
할머니가 남긴 말씀이 문제였다.
할머니는 벼리의 인생에 너무 많은 것을 관여하셨다.
결국 가족들은 벼리의 결혼을 인정하고 말았다.
결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결혼에 대한 진행은 모두 재인의 집에서 알아서 했다.
혼수니 뭐니 하는 것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나 있는 것이었다.
박 여사가 펜트하우스에 들어갈 온갖 신접살림을 알아서 준비했다.
벼리의 취향을 물어보기는 했으나 거의 혼자 알아서 했다.
벼리는 위장결혼이기 때문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아무래도 살림이니 뭐니 하는 것은 자신의 일이 아니었다.
벼리는 갑자기 신부가 되어 버렸다.
아무리 계약결혼이라고 해도 신부가 되기 위해선 해야 할 일이 많았다.
피부 관리도 받아야 했다.
피팅 관리도 받아야 했다.
요리교실과 차밍스쿨도 다녀야 했다.
결혼식을 위한 드레스도 맞춰야 했다.
결혼하는 신부는 그냥 신부이기 때문에 예쁜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신부가 하루 예쁘기 위해서는 해야 할 일이 많았다.
벼리는 예쁜 신부였다.
재인은 멋진 신랑이었다.
결혼 전날이 되었다.
둘은 펜트하우스에 들러 신혼집이 된 방들을 둘러 봤다.
벼리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결혼이란 파도에 자신이 올라탔고 자신이 어느 섬에 갑자기 떠밀려 온 것 같았다.
“벼리, 고생했어. 고마워.”
“뭘요, 대표님도 결혼준비로 고생하셨네요.”
둘은 방을 둘러 보다 안방의 침실을 보게 되었다.
아주 커다란 침대는 달달한 신혼부부를 위해 핑크빛 침구가 꽃처럼 피어 있었다.
벼리는 너무 피곤해서 침대에 벌렁, 누웠다.
“아, 정말 좋아요. 편안하고.”
벼리는 침대에서 한 바퀴 몸을 돌렸다.
핑크빛 침구에 손과 얼굴을 부볐다.
“아, 보들보들. 잠도 저절로 오겠어.”
재인은 침대에서 뒹굴거리는 벼리를 팔짱 끼고 바라보고 있었다.
“벼리, 설마 나랑 한 침대를 쓴다는 것은 아니겠지?”
“한 침대요? 안 되죠. 한 침대라뇨. 우린 위장결혼이잖아요.”
“맞아. 위장결혼.”
“혹시 나랑 한 침대를 생각한 것은 아니지?”
“대표님, 그런 거 안 돼요. 한 침대니 뭐니. 그런 말 안 돼요.”
“그런데 그 침대에서 뒹굴거리면 어찌 하나? 그 침대는 내 침대인데?”
“안 되죠. 이건 핑크 침대잖아요. 여자인 제가...”
“이거 원래 내 방이라고. 신혼방이라고 박 여사가 꾸몄는데, 난 이 방에서 자야 해.”
벼리는 당황했다.
그럼 자기는 어디서 자란 말인가 조금 슬퍼졌다.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아, 아니. 그렇게 울 일은 아니고. 자, 이리 와바. 벼리의 방은 따로 있어.”
재인은 벼리를 다른 방으로 안내했다.
재인의 방은 정원이 보이는 위치였다.
통유리로 정원이 훤히 보이는 방이었다.
재인의 방이라고 한 말은 맞을 것이다.
벼리의 방이라고 한 곳은 다른 위치에 있었다.
부부침실 정도의 화사함은 아니었지만 딱 별이에게 알맞을 정도의 인테리어가 되어 있었다.
“우리 집에서 아침 해가 가장 잘 드는 곳이야. 아침이 가장 아름다운 곳에 우리 벼리 씨의 침실을 배치했지.”
벼리는 아침 해가 잘 보인다는 말에 기분이 좋았다.
자신은 아침에 침대로 볕이 들어올 때를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맘에 들어?”
벼리는 방에 있는 옷장도 열어봤다.
벼리에게 어울리는 옷들이 옷장에 가득했다.
화장실을 열어봤다.
연핑크 벚꽃 타일로 화사한 신부에게 잘 어울리는 욕실이었다.
욕조에는 장미꽃이 띄워져 있었다.
“사람이 아직 없는데 욕조에 물이 받아져 있어요.”
“벼리 씨를 위해서 아마도 항상 준비되어 있을 거야.”
벼리는 장미꽃이 있는 욕조 물을 손으로 휘이, 저어 보았다.
꽃향기가 은은하게 퍼졌다.
“아, 좋아요. 맘에 쏙 들어요..”
“다행이야. 맘에 들어서. 박 여사가 최선을 다 해서 준비했어.”
“하지만.”
“하지만?”
“재인 씨는 이곳에 들어올 때는 꼭 노크하셔야 해요. 우린 침실이 다르니까.”
“이 아가씨 상당히 위험한데? 혹시 내 침실로 노크 없이 오려는 거 아냐?”
“제가 지금 경고하는 거잖아요. 조심하시라고요.”
“하하, 벼리 씨가 조심해야 할 것 같아. 난 완벽한 젠틀맨이니까.”
“치이...”
“그리고 내가 워낙 섹시하고 멋지잖아? 덮치고 싶을 만큼?”
“에잉, 응큼...”
어쩌면 벼리는 재인과 함께하는 달콤한 시간을 상상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저절로 이어지는 의식의 흐름일 것이었다.
재인과 벼리의 결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방해요소가 없었다.
김 회장은 재인의 여자가 평범한 사람인 것을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결혼을 통해 평범하고 행복한 결혼생활을 이어가길 바랐다.
고 여사는 재인에게 진정 야심이 없는 것이 확인되자 결혼을 적극 도왔다.
벼리에게 다정하게 대하는 것은 물론이었다.
시어머니로서 며느리에게 해줄 수 있는 패물에 신경을 써서 애정을 과시하기도 했다.
정신없는 결혼이 끝나고 재인과 벼리는 펜트하우스에서 같이 지내게 되었다.
신혼부부였다.
벼리는 그린섬에서 미술관과 꽃달에 자주 들렀다.
벼리는 재인의 미술관이 좋았다.
그린섬 미술관 전시는 벼리가 보기에 좋은 주제가 많았다.
재인과 처음 만나서 보았던 ‘실연’ 관련 주제가 매우 인상적이어서 다음 전시가 마음에 끌렸을 수 있었다.
지금 재인의 그린섬 미술관 전시의 주제는 ‘처음과 다시 시작’이란 주제였다.
벼리는 하루의 일과 중 꽃달에 들르는 시간을 가장 좋아했다.
꽃달에는 랜디가 있었다.
민 실장과 자연 팀장도 있었다.
그리고 많은 꽃들이 있었다.
꽃들과 이야기를 좋아하는 벼리에게 꽃들은 너무도 다정한 벗이었다.
벼리의 가족과 연이는 벼리의 계약결혼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알 수도 없는 일이었다.
다만 벼리의 너무 빠른 결혼은 가족에게 걱정이었다.
그린섬 빌딩이 벼리의 집과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것은 다행이었다.
그린섬 빌딩 경비실엔 벼리의 아버지가 있는 것도 다행이었다.
연이가 벼리에게 자주 들렀다.
연이는 신혼집인 펜트하우스에 자주 올라갈 수는 없었지만 꽃달은 자주 들를 수 있었다.
자연다큐 기자로 꽃과 나무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자주 들르기엔 이유가 좋았다.
벼리와 연이는 경비실의 아버지에게 들렀다.
가족들은 벼리의 아버지가 사위의 건물에서 경비로 일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아빠.”
“아버지.”
“우리 벼리..... 우리 예쁜 연이도 왔구나. 이렇게 자주 볼 수 있으니 좋다."
“그런데 힘들지 않으세요? 재인 씨도 아버지 힘드실까봐 걱정해요.”
“아냐. 난 이 일이 좋아. 일이 있는 것도, 사람들에게 인사하는 것도 좋아.”
“그래도 힘들게 출근도 하셔야 하고...”
아버지는 고개를 흔드셨다.
“괜찮아. 충분히 일하는 게 재미있고 좋아.”
“그래도..”
“그리고 사실 다른 이유가 또 있어.”
“다른 이유요?”
“겸재 있잖아? 아빠 친구.”
“아버지 친구분 겸재 아저씨, 잘 알죠. 정민 언니 아빠였잖아요.”
“맞아. 그 겸재가 이 건물을 설계했잖아.”
“겸재 아저씨가 그린섬을 설계했어요?”
“응, 그런데 사고로 그만 겸재가 죽고 말았지. 그 친구가 죽기 전에 날 여기 경비실로 취직시켜줬잖아. 그때 당시 나는 일자리를 잃어서 힘들었던 때였거든.”
“그런데 겸재 아저씨가 정말 그린섬을 설계했어요?”
소멸하고 싶지 않은 자와 소멸이 되고 싶은 자의 이야기
Comment '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