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_자스민과 블루문 로즈의 사연
사람이 태어나면 하늘에는 별이 하나 태어나고 땅에는 꽃이 하나 피어난다. 그 별과 꽃의 이야기를 듣는 소녀는 어느 날 슬픈 비밀을 알게 된다.
<77화>
자스민과 블루문 로즈의 사연
* * * * *
해가 질 무렵이었다.
엄마와 아빠는 오빠와 벼리를 남겨두고 외출하였다.
민수에게 벼리를 잘 보라고 했지만 민수도 어린 아이였다.
민수는 게임하느라 심심한 벼리를 돌보지 못했다.
“오빠, 놀아줘. 심심해.”
“바빠, 게임 조금만 더 하고.”
“심심하단 말야. 오빠, 오빠....”
벼리는 몇 번이나 오빠를 불렀지만 민수는 게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평소 꽃들과 노는 걸 좋아하는 벼리는 마당으로 나갔다.
5월이었다.
온갖 꽃들이 활짝 피어서 여기저기서 벼리를 불렀다.
나비가 나풀거리듯이 이 꽃 저 꽃 사이를 날아다녔다.
벼리는 나비가 되어 조잘거리는 꽃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벼리가 혼자서 꽃들 앞에 앉아 중얼거리는 것으로 보였다.
그때 마당에 있는 보랏빛 블루문 장미가 벼리를 불렀다.
“벼리야.”
“아, 블루문이다. 맞지? 이름도 예쁘다. 엄마가 네 이름을 알려줬어.”
“영리하게도 내 이름을 기억하는구나.”
“참 예쁘다. 색깔이 신비해. 누굴 닮았니?”
“내가 예쁘니? 나는 너를 닮았지.”
“난 널 매일 보는 걸.”
“나도 알고 있어. 사랑이란 멀리 보고 있어도 그 이끌림은 알 수 있는 법이니까.”
“나도 네가 항상 먼저 보였어. 너의 향기는 과일처럼 달콤해. 내가 아주 좋아하는 향기야.”
“누구나 자신의 꽃이 있는데, 아마도 내 향기를 좋아하는 걸 보니까 네가 나의 이야기를 가장 잘 알 것 같아. 누구나 하늘에 자신의 별이 하나씩 있다고 하잖아. 하늘에 별이 있다면 지상에는 누구나 자신의 향기를 닮은 꽃이 있단다.”
“나에게 맞는 향기는 너의 향기일 거야. 나는 너의 향기가 너무 좋아. 넌 나의 꽃이야.”
“나도 네가 나의 인간이라니 너무 행복해.”
“블루문, 넌 예뻐. 특별해.”
“벼리야, 너도 특별해. 예뻐. 그런데 건너 집에 가보지 않을래?”
“왜?”
“그곳에 우는 아이가 있어. 그 아이의 곁에 나와 같은 장미가 있는데 그 장미가 그 아이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아. 한 번 가보지 않을래?”
“가볼게. 우는 아이는 가봐야 해.”
“너는 아직 어린데 혼자 갈 수 있을까?”
“난 씩씩해. 혼자서 잘 갈 수 있어.”
어린 벼리는 대문을 열고 집을 나섰다.
바로 맞은 편 집은 2층집이었다.
높은 담과 까만 기와가 있는 집이었다.
조금은 무서워 보이는 집이었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집이었다.
“저 집은 좀 무섭게 생겼어. 저긴 가지 마.”
민수가 말했었다.
벼리는 오빠가 보지 않도록 살금살금 걸어서 맞은 편 집 쪽문을 바라봤다.
쪽문이 열려 있었다.
“벼리야.”
벼리를 부르고 있었다.
꽃은 향기로 벼리를 부르고 있었다.
담장 너머로 향기가 있었다.
블루문 로즈였다.
블루문 로즈는 사랑스런 꽃이었다.
다른 꽃보다 사랑에 훨씬 적극적인 꽃이었다.
어린 벼리를 보고서도 망설임이 없는 꽃이었다.
꽃잎이 파란색을 띤 장미는 현실에 실존하지 않았다.
식물의 꽃에 푸른색을 내게 하는 색소는 델피니딘인데, 장미에는 델피니딘을 생산하는 유전자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푸른 장미는 일찍부터 '신비로움'이나 '불가능'의 상징이 되었고, 푸른 장미를 얻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설화도 생겨났다.
블루문 로즈는 어쩌면 불가능을 극복한 꽃이었다.
블루문 로즈는 소원을 이뤄주는 꽃이 되었다.
블루문 로즈가 사랑하는 인간의 아이 벼리는 꽃의 향기를 이야기로 듣는 아이였다.
벼리는 블루문 로즈의 향기와 소리에 이끌러 2층 기와집 뒤뜰 쪽문으로 들어섰다.
향기가 소리가 되어 계속 벼리를 불렀다.
“벼리야, 벼리야.”
벼리는 향기를 따라 나비가 팔랑거리듯 토끼가 깡총거리듯 호기심에 가득 찬 얼굴로 담장을 따라 걸어 들어갔다.
어린 벼리는 한 마리 나비와도 같았다.
언뜻 보면 발을 땅에 딛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꽃을 찾아가는 나비는 가벼운 날개 짓이었다.
벼리가 한참 걸어가자 향기가 더욱 짙어졌다.
벼리를 부르는 소리는 더욱 잘 들렸다.
“벼리야, 벼리야.”
향기의 끝에 블루문이 있었다.
푸른빛이 도는 블루문은 향기가 달콤해서 사랑을 가득 품고 있었다.
그곳에 남자 아이가 하나 울고 있었다.
민수 오빠와 비슷해 보였다.
그 아이는 무릎에 얼굴을 묻고 울고 있었다.
블루문 로즈는 옆에서 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의 울음을 슬퍼하는 것처럼 보였다.
“오빠, 왜 울어?”
울던 아이는 놀라서 벼리를 봤다.
“너, 넌 누구야?”
“오빠, 왜 울어?”
어린 벼리는 웅크리고 있는 오빠의 등을 토닥였다.
“엄마가 없어서 울어.”
“엄마가 어디 갔어?”
“멀리 갔어.”
“기다리면 올 거야. 우리 엄마도 늦게 들어오는 걸.”
“우리 엄마는 없어. 이제 돌아오지 않아.”
“왜? 멀리 갔구나. 오빠. 슬퍼하지 마.”
벼리는 도현의 등을 토닥였다.
이때 옆에 있던 블루문이 벼리에게 말을 걸었다.
“벼리야.”
“블루문, 안녕? 네가 날 불렀어?”
“벼리야. 내 말을 저 아이에게 전해 줘.”
도현은 벼리가 혼잣말을 하자 벼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왜 혼잣말을 해?”
“이 장미가 오빠에게 할 말이 있대.”
“장미가 어떻게 말을 해? 내가 울어서 위로해 주고 싶어? 아가야, 괜찮아.”
“아니야, 오빠. 장미가 나에게 말했어. 오빠에게 전해주라고.”
“거짓말하지 마.”
블루문은 몸을 약간 흔들며 향기를 더 뿜었다.
“벼리야, 내 말을 저 아이에게 그대로 전해줘. 내가 하려는 말은 내가 그 아이에게 하는 말이 아니야. 내가 전하는 말은 그 아이의 엄마가 하는 말이야.
“오빠, 블루문이 말하는데 오빠의 엄마가 오빠에게 할 말이 있대.”
“꽃이 어떻게 말하니? 거짓말하면 혼난다.”
“오빠,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꽃이 있어. 이 장미는 오빠 엄마가 아끼는 나무래.”
“맞아. 이 장미는 우리 엄마가 좋아했어. 떠날 때까지 이 장미를 사랑했어. 장미가 잎을 다 떨군 다음에도 춥지 않도록 지푸라기를 덮어줬어. 그런데 엄마는 오지 않았어. 사람들이 이 장미를 자르려고 했을 때 내가 부탁했어. 절대 자르지 말라고. 울면서 지켰어.”
“지금부터 오빠 엄마의 말을 전할게.”
“농담하지 마.”
벼리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도현의 어머니가 된 듯 도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영애의 말을 전했다.
이때 블루문의 꽃잎들은 향기를 뿜어냈다.
슬픔이 묻어나는 향기였다.
벼리의 말은 슬픔이 묻어나 있었다.
영애의 목소리가 슬픔을 담고 있기 때문이었다.
벼리는 눈물을 흘리며 이야기했다.
“아들아, 도현아.”
도현은 놀라 벼리를 바라봤다.
“아들아, 엄마야. 엄마는 지금 이 아이의 꽃인 블루문에게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전하는 거야.”
“엄마...”
“도현아, 이 이야기를 듣는다면 엄마는 이미 이 세상을 떠났겠지? 엄마가 떠났다고 슬퍼하지 마. 엄마는 이 세상을 떠나는 게 아냐. 네가 엄마를 기억한다면 엄마는 언제까지고 네 가슴에 살아 있을 거야.
“엄마... 진짜 엄마 맞아요?”
“도현아, 엄마를 잊지 마.”
“엄마는 왜 나를 떠났어요? 나 혼자 어떻게 하라고. 엄마가 없이 어떻게 혼자 살아요?”
“엄마는 네 곁을 떠나지 않았어. 네가 엄마를 잊지 않는다면 엄마는 영원히 살아 있을 거야.”
“어떻게요? 어떻게 살아 있어요?”
“지금 이 꽃이 엄마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지? 이 꽃은 이 아이의 꽃이란다. 사람들은 누구나 태어나면 하늘에 자신만의 별이 있는 것처럼 자신만의 꽃이 있는 법이란다. 사람들은 가까이에 있는 자신만의 꽃을 모르고 살아. 향기가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만의 꽃이 있어.”
“엄마의 꽃은 어떤 꽃이에요? 엄마의 꽃이 있어요?”
“엄마의 꽃은 자스민이야. 너도 알지? 엄마가 늘 집안에 자스민을 두었잖아.”
“엄마의 꽃은 자스민이에요? 하지만 집에는 자스민이 없어요. 엄마가 가져갔어요?”
“아니야. 장 여사가 엄마의 꽃을 모두 없애 버렸어. 엄마가 힘을 얻으려면 자스민이 있어야 했었어. 자스민을 모두 없애버려서 엄마는 엄마의 이야기를 남길 수 없어 집에 있는 블루문에게 엄마의 이야기를 남긴 거야.”
“엄마의 꽃을 찾으면 엄마를 만날 수 있어요?”
“엄마의 꽃은 미리 죽어 버렸어. 장 여사가 죽였어. 하지만 꽃은 어디서든 다시 피어나니까. 곧 너의 곁에서 피어날 거야. 네가 잊지 않는다면.”
“엄마, 난 영리해요. 잊지 않을게요 .엄마의 꽃을 잊지 않을게요. 엄마의 자스민을 잊지 않을게요.”
“자스민은 엄마의 꽃이란다. 엄마의 말을 전해주는 꽃을 블루문이야. 이 아이의 꽃이란다. 이 아이를 잊지 말아라. 이 아이가 너에게 길을 안내해줄 거야. 엄마의 이야기를 전해준 것처럼.”
“엄마, 보고 싶어요. 엄마를 어떻게 볼 수 있어요?”
“도현아, 지금은 아니란다. 넌 반드시 잘 자라서 이 엄마를 다시 살아나게 해줘야 한단다.”
“엄마를 어떻게 살려요?”
“엄마는 죽지 않았단다. 그것만 잊지 말아줘.” 엄마는 이만 잠시 너를 떠날게.”
“아악, 안 돼요. 엄마. 나를 떠나지 말아요. 난 혼자예요. 엄마가 있어야 해요.”
도현은 벼리를 마구 흔들었다.
하지만 벼리는 이제 더 이상 블루문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지 않았다.
“오빠, 아파.”
“어서. 어서 빨리 엄마의 이야기를 전해 줘.”
“무슨 말? 오빠, 아파.”
실제 벼리는 자신이 잠시 어떤 말을 전했는지 인지하지 못했다.
벼리는 다시 어린 아이였다.
도현은 벼리를 붙잡고 다른 이야기를 전해달라고 했지만 벼리는 더 이상 블루문의 이야기를 전하지 못했다.
그때 담 쪽에서 벼리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벼리야, 벼리야.”
“오빠.”
벼리는 소리에 대답하며 자신을 부르는 소리 쪽으로 뛰어갔다.
도현은 벼리를 붙잡지 못했다.
대신 벼리 뒤를 쫓아갔다.
자신의 또래 아이들이 여럿 있었다.
“벼리야, 어디 갔었어?”
“정민 언니, 연이 언니. 나 잠시 저 오빠네 집에서 꽃이랑 이야기했어.”
벼리는 도현을 가리켰다.
도현은 이미 담 너머로 사라지고 없었다.
민수는 벼리의 머리에 꿀밤을 주며 나무랐다.
“이 쬐끄만 게. 무섭게 아무 데나 가고 그래. 엄마한테 이른다.”
“그만 해. 어린 동생에게 그렇게 무섭게 말하면 어떡해?”
“어서 들어가자. 혼자 돌아다니면 안 돼.”
도현은 어린 시절 벼리를 만났었다.
도현은 어린 시절의 기억을 잘못 하고 있었다.
도현의 엄마는 분명히 말했었다.
“엄마의 꽃은 자스민이야. 엄마의 말을 전하는 꽃은 이 아이의 꽃인 블루문이야.”
도현을 자라면서 이 말을 잘못 기억하고 있는 것이었다.
블루문이 벼리의 꽃인 것은 잘 기억했다.
하지만 엄마의 말을 전해준 꽃이었음을 기억하지 못했다.
도현은 엄마의 부활의식에서 가장 큰 오류를 범하고 있었다.
벼리는 어린 시절의 한 순간이 떠올랐다.
도현의 엄마는 아들에게 자신을 잊지 말라고 했었다.
‘왜 잊지 말라고 했을까?’
‘왜 자신을 살아나게 해달라고 했을까?’
모든 것이 의문 투성이었다.
벼리는 다시 온힘을 다해 소리쳤다.
“도와줘.”
블루민이 대답했다.
“벼리야.”
“난 어떻게 하면 돼?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넌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다만 꽃들을 불러줘. 네가 부르면 꽃들이 움직일 거야.”
“하지만 꽃이 없어.”
“지금 너의 곁에는 우리들이 있어. 우리들은 땅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아서 힘을 발휘할 수 없어. 하지만 다른 꽃을 부를 수는 있어. 다만 벼리 네가 힘을 내서 계속 불러줘야 해.”
“난 얼마든지 부를 수 있어. 여기 부활의식을 막아야 해. 잘못된 의식이야.”
“부활의식 때문에 슬픈 나무가 생기는 거야. 슬픈 나무를 막아줘.”
소멸하고 싶지 않은 자와 소멸이 되고 싶은 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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