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_첫사랑은 라일락 여린 빛깔
사람이 태어나면 하늘에는 별이 하나 태어나고 땅에는 꽃이 하나 피어난다. 그 별과 꽃의 이야기를 듣는 소녀는 어느 날 슬픈 비밀을 알게 된다.
<29화>
첫사랑은 라일락 여린 빛깔
* * * * *
벼리는 침대로 돌아와서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그로부터 한참 후 재인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잠결이었을까?
재인이 무거운 숨을 내쉬고 있었다.
“휴우......”
긴 한숨이었다.
무거운 한숨이었다.
재인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아는 척할 수 없었다.
벼리의 한숨도 깊어지고 있었다.
다음 날, 벼리는 일찍 정원으로 향했다.
밤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했다.
불안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고 했다.
변화가 있었다.
나무 한 그루가 늘었다.
라일락이었다.
라일락은 우리말로 수수꽃다리란 고운 이름을 갖고 있었다.
라일락 꽃잎을 연인이 함께 씹어 먹으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다는 교수님 말씀이 있었다.
첫사랑이란 꽃말에 어울리는 이야기였다.
도종환의 라일락꽃이란 시가 있었다.
꽃은 진종일 비에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
빗방울 무게도 가누기 힘들어
출렁 허리가 휘는
꽃의 오후
꽃은 하루종일 비에 젖어도
빛깔은 지워지지 않는다
빗물에 연보라 여린 빛이
창백하게 흘러내릴 듯 순한 얼굴
꽃은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
꽃은 젖어도 빛깔은 지워지지 않는다
연보라 어린 빛이 창백하게 흘러내릴 듯 순한 얼굴이 정원에 있었다.
라일락이었다.
이상했다.
재인은 집에 꽃이 있는 걸 싫어했다.
“아주 어렸을 때 어떤 향기를 좋아했던 것 같은데 기억이 없어.”
“어느 순간 향기가 사라졌어.”
“향기를 맡는 감각에 이상이 있는 건가? 병원 치료를 오래 받은 적이 있어.”
“향기가 내게서 도망갔어.”
재인은 분명 향기를 싫어한다고 했다.
그런데 정원에 심은 나무는 향기가 있는 나무였다.
구골나무만 하더라도 은목서 종류였다.
은목서는 샤넬NO.5 향수의 원료가 되는 나무였다.
그만큼 향기가 진한 나무였다.
구골나무는 자신의 어머니가 좋아했던 나무라고 했다.
그런 나무라고 하니 향기와 무관하게 생각했었는데 정민이 좋아했던 때죽나무가 심어지고 라일락이 심어졌다.
‘구골나무는 재인 씨 어머니, 때죽나무는 정민, 그럼 라일락을 좋아했던 누군가가 있었을까?’
벼리는 재인이 집에 들어오지 않았던 때를 떠올렸다.
지난 번 때죽나무가 심어질 때였다.
벼리가 정원에 뜸하게 들르던 시기였다.
완전하게 일치한다고 할 수 없었지만 어떤 연관이 있을 것 같았다.
아주 늦은 한밤이었다.
그린섬 재인의 작업실에서 회합이 있었다.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치러지는 회합은 조금 괴이했다.
사람들은 늦은 시간에 회합을 갖지 않는다.
일반적인 회합은 그렇다.
늦은 밤의 회합이란 숨겨야 할 일의 어떤 모의일 것이다.
선하거나 좋은 일의 회합일 리가 없었다.
무슨 사건이 있지 않은 이상 사람들은 늦은 시간에 회합을 하지 않았다.
상갓집 역시 요즘은 늦은 시간에 조문을 받지 않는다.
늦은 밤의 조문은 이제 옛날의 일이 되어 버렸다.
죽은 자가 아닌 산 사람을 위해 장례 절차가 진행되었다.
지난 번 때죽나무가 심어질 때 재인의 작업실에서는 회합이 있었다.
그날 밤 벼리는 도현의 차를 봤다.
도현의 차는 눈에 띄었다.
이번에 새로 뽑은 차로 국내에 딱 5대가 들어왔다고 했다.
사람들은 한정판이란 말에 솔깃한다.
하지만 한정판이 엄청난 가격의 자동차에 쓰인다는 말은 일반인에게는 낯선 이야기였다.
“벼리야, 차 빛깔 끝내주지? 멋지다. 승차감도 끝내줘.”
도현이 벼리와 연이를 데려다 준 날 연이가 한 말이었다.
도현의 차는 어디를 가든지 눈에 띄었다.
깊은 밤, 도현의 차는 그린섬으로 오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린섬을 돌아서 그린섬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있었다.
다른 곳으로 가고 있는 차를 보면서 벼리는 어쩐지 그린섬으로 가는 다른 길로 접어들 거란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린섬에 비밀 통로가 있지는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밤새 모임이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그 다음 날 재인의 작업실에서는 다시 회합이 있었다.
재인은 밤샘을 한 상태였다.
“피곤한데 왜 모임을 해요?”
“괜찮아. 회복을 위해서 하는 거야.”
“휴식과 회복이라는 것은 모임이 아니라 집에서 릴렉스하는 거죠.”
“익숙한 일이야.”
“걱정돼요.”
“알아서 할게. 참, 오늘 김 교수님 오시기로 했어.”
“재인 씨 지도교수님요? 아직 파리에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응, 지난달에 들어오셨어. 오늘 저녁에 그린섬에 오실 거야.”
“안 피곤한 날 모시지 그랬어요? 재인 씨 걱정돼요.”
“하하, 벼리가 날 그렇게 생각했어?”
“인사하러 갈게요. 김 교수님도 오신다고 하니.”
“괜찮아. 벼리 씨 피곤할 테니 그냥 있어.”
“인사는 가야 할 텐데.”
“다음에. 다음에 부를게. 오늘은 편히 쉬어.”
재인은 벼리가 피곤하니 오지 말라고 했지만 완곡하게 오면 안 된다는 암시도 포함했다.
벼리는 재인에 대해 갑자기 폭발적으로 이상한 생각이 커져가고 있었다.
벼리는 궁금한 일이 많아졌다.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일들이 쌓이고 있었다.
벼리의 생각을 재인은 알았던 것일까?
재인은 벼리에게 의미 있는 일침을 놓았다.
“벼리, 혹시 내게 궁금한 일이 있어?”
“네? 아니요, 그런 거 없어요.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아니, 난 벼리 씨가 이런저런 일로 신경을 안 썼으면 좋겠어. 세상사는 일이야 여러 가지 사건들이 있게 마련이지. 그런데 소소한 일들에 신경 쓰다 보면 중요한 일을 놓치게 될 때가 있거든.”
“중요한 일요?”
“중요한 일이란 가령 이런 거지. 내가 벼리 씨를 사랑하는 일? 이런 일들이 중요한 일인 거지. 나머지는 사실 소소한 일이야. 별로 의미 없는 일이야.”
“하지만 작은 일들이 재인 씨의 모든 것일 수 있어요. 작은 것들이 하나하나 모여서 실체를 이루니까요.”
“정작 중요한 것은 어떤 사소함에도 내가 벼리 씨를 믿고 사랑한다는 믿음이야. 그 믿음이 깨지면, 사랑은 아무 소용도 없어. 사랑이란 온전한 믿음을 말하니까.”
“상대를 믿는다는 것은 사랑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이긴 해요. 하지만 맹목적 믿음은 위험한 것이 아닐까요?”
“난 온전한 믿음이 없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해. 당신은 날 사랑해?”
“우린 계약결혼이에요. 사랑과는 다른.”
벼리는 계약결혼이란 말을 꺼내고 아차 싶었다.
재인도 벼리의 계약결혼이란 말을 듣고 멈칫거렸다.
하지만 금세 괜찮은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 해도 믿음을 전제로 한 계약이잖아.”
“물론이에요 당신을 믿어요, 재인.”
“나도 당신을 믿어. 제발 당신이 언제나 나를 온전히 믿었으면 좋겠어. 세상은 믿음 속에 있을 때는 안전해. 하지만 믿지 못하면 그때 위험해져.”
“믿지 못하면 위험한가요?”
벼리는 재인이 믿음 이야기를 할 때 푸른 수염이란 동화가 생각났다.
푸른 수염의 남자는 커다란 성에 수많은 재산을 가졌다.
하지만 그에게 시집을 간 여자들은 어느 날엔가 모두 실종이 되었다.
푸른 수염의 아내가 된 여자들은 어느 순간 실종되었고 아무도 그 사유를 알지 못했다.
푸른 수염은 그녀들이 먼 지중해, 따뜻한 곳으로 떠났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그 말을 믿지 못했다.
하지만 푸른 수염의 권력과 힘이 무서워서 그 누구도 그 사연을 따지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가난한 집의 둘째 딸이 푸른 수염에게 시집을 갔다.
푸른 수염은 둘째 딸에게 친절했다.
둘째 딸이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줬다.
둘째 딸의 가난한 집을 구제해 주었다.
푸른 수염은 어느 날 먼 길을 떠나며 당부를 남긴다.
집안 어느 문이든 다 열어도 좋지만 지하에 있는 방 하나는 절대 열지 말라는 것이었다.
다른 곳은 모두 괜찮다고 말했다.
둘째 딸은 푸른 수염이 멀리 떠나자 언니들과 아는 사람들을 불러 파티를 열고 즐겁게 지냈다.
그러다 지하의 방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그 방에 아마도 어떤 비밀이 있을 거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둘째 딸은 궁금증과 의심을 견딜 수가 없어 지하의 방문을 열었다.
여자들의 의심은 무엇인가?
맹목적 믿음으로 진행되는 것이 사랑의 진실인가?
하지만 여인들의 의심과 행동이 없었던 들 세상이 어떻게 지켜질 수 있었겠는가?
여인들은 삶에 있어 주도적 성향을 가졌다.
주변을 살펴보고 의심하고 다시 두드려 보며 새로운 것들을 시험하는 것이 여인이다.
이것이야말로 주도적 성향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벼리의 의심은 무엇인가?
재인은 벼리에게 자신을 무조건적으로 믿으라 했다.
“재인 씨는 푸른 수염이야. 힘을 갖고 있고 비밀이 많아.”
언젠가 연이가 벼리에게 했던 말이었다.
벼리는 재인에 대한 생각이 어지러울 때마다 꽃에게 달려갔다.
꽃들은 벼리의 마음을 금방 알아차렸다.
꽃들의 페로몬의 변화를 감지하는 능력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벼리도 재인의 마음의 무게를 알 것 같았다.
이것은 벼리에게 있는 꽃들의 능력과 일맥상통했다.
그린섬 정원에 라일락이 심어졌다.
라일락꽃은 무슨 의미일까 궁금했다.
그러다 재인의 친구 영진이 떠올랐다.
영진은 파리에서 재인과 함께 공부한 S4 멤버였다.
레스토랑 랑데부에서 영진의 여자 친구를 본 적이 있었다.
“미화예요. 반가워요.”
미화는 매우 발랄했다.
영진과는 어울리지 않는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내 첫사랑이야. 그리고 영원한 사랑이고.”
“영진 씨, 누가 영원한 사랑이야? 첫사랑이 뭐가 중요해?”
“첫사랑이 중요하지. 사랑이라면 난 하나의 사랑만 할 거야. 미화 씨는 나의 유일한 사랑이야.”
“첫사랑이니 유일한 사랑이니, 그런 것은 낭만주의자들에게나 어울리는 말이야. 영진 씨, 날 버려. 영진 씨는 나랑 어울리지 않아.”
“각인이라고 알아? 각인을 한 사람은 평생 그 사람에게 예속된다는 거. 나는 미화에게 예속된 사람이야. 미화는 나에게 그런 존재야, 각인된.”
“제발 부탁이야. 그 각인에서 지워줘. 그런 구속 딱 싫어. 사랑은 자유로운 게 좋아. 만약 사랑이란 게 단 하나의 사랑이라면 난, 사랑 없이 살래. 안 그래요, 정우 씨?”
정우가 와인잔에 와인을 따르며 답했다.
“역시, 미화 씨는 나랑 생각이 아주 똑같아요. 저 미련한 영진이 말고 저랑 사귀는 건 어때요? 사람은 자기랑 비슷한 부류랑 사귀어야 하는 거예요.”
“............”
정우가 장난처럼 말했다.
영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평소 농담을 잘 하는 영진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 농담이야. 농담. 우리 영진의 첫사랑을 누가 감히 넘봐? 안 되지.”
“아, 싫어. 이런 첫사랑. 난 언제나 새로운 사랑이 좋아.”
미화는 라일락의 연보라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미화, 원피스 색깔 예쁘다. 라일락 빛깔이야. 내가 아주 좋아하는 순수의 빛깔이야. 라일락의 꽃말이 첫사랑인 거 알지? 미화랑 어울려.”
미화의 깨끗한 피부와 발랄함이 연보라 빛깔과 아주 잘 어울렸다.
“순수?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야. 정우 오빠, 영진 오빠한테 여자 친구 하나 소개시켜 줘. 정말 갑갑하다.”
“하하, 네가 영진이 좀 사랑해줘라. 저렇게 너를 좋아한다잖아.”
“첫눈에 반했던 그 사람, 나만의 영원한 첫사랑.”
영진은 노랫가락에 얹어 말을 이어갔다.
“하하하”
모두들 영진의 애교에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영진의 그녀는 라일락꽃 빛깔의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그린섬 정원에 라일락이 새로 심어졌다.
소멸하고 싶지 않은 자와 소멸이 되고 싶은 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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