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_향기를 잃은 겨울의 아이
사람이 태어나면 하늘에는 별이 하나 태어나고 땅에는 꽃이 하나 피어난다. 그 별과 꽃의 이야기를 듣는 소녀는 어느 날 슬픈 비밀을 알게 된다.
<71화>
향기를 잃은 겨울의 아이
* * * * *
구골나무는 벼리에게 눈을 감아보라고 했다.
벼리는 눈을 감았다.
구골나무의 향기가 유리온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향기가 짙어지면서 벼리는 어느 순간 겨울의 어느 골목이었다.
아주 작은 아이의 벼리였다.
빨강 코트를 입은 벼리가 집 대문을 살짝 나왔다.
어디선가 벼리를 불렀다.
“벼리야...”
벼리는 두리번거렸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벼리야...”
벼리는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걸어갔다.
벼리가 언젠가 낯선 곳에 가서 길을 잃은 적이 있었다.
엄마는 절대 낯선 곳에 가지 말라고 했다.
지난번도 누군가 벼리를 부르는 소리를 따라간 적이 있었다.
엄마는 누군가 벼리를 부르면 귀를 막고 집으로 뛰어 들어오라고 했다.
그러나 벼리를 부르는 소리는 너무 간절하게 들렸다.
“벼리야...”
벼리를 부르는 소리와 함께 꽃향기가 가득했다.
이것은 꽃이 부르는 소리였다.
연이는 다음에 꽃이 벼리를 부를 때는 무슨 일인지 꼭 물어보라고 했다.
향기롭고 아름다운 꽃들이 벼리를 해칠 리가 없다고 했다.
벼리는 꽃향기로 사람을 부를 때는 믿어도 된다고 생각했다.
할머니도 늘 꽃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골목을 두 번 돌자 그곳에서 진한 꽃향가가 펴져 왔다.
꽃향기가 있는 곳은 꽃잎들이 날아다니며 벼리를 부르고 있었다.
“벼리야....”
“벼리야....”
어린 벼리는 신기하고 예뻐서 그 집 앞으로 갔다.
예전에 왔었던 집이었다.
예전에 어떤 오빠가 엄마를 기다리던 집이었다.
문은 열려 있었다.
문을 열고 마당으로 들어섰다.
마당에 구골나무가 있었다.
구골나무에 꽃이 가득 피어 있었다.
그 꽃들이 나비가 되어 꽃잎들이 나비처럼 날아다녔다.
아주 작은 꽃송이들은 나비를 닮아 있었다.
아주 작은 하얀 나비들이 향기를 날리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예쁘다.”
“벼리야, 저기 집에 들어가 볼래? 아이가 위험해. 그 아이를 구해줘.”
“누가 아파요?”
“남자 아이가 있을 거야. 지금 아주 위험해. 그 아이를 구해줘.”
“전 아직 어려요. 제가 어떻게 해요?”
“네게 있는 꽃잎을 그 아이에게 전해 줘.”
“제게 꽃잎이 있어요?”
“벼리야, 네 왼쪽 손바닥을 펴봐. 그곳에 꽃잎이 있을 거야.”
“제 손에는 아무 것도 없어요.”
“눈을 감고 네가 좋아하는 꽃잎을 떠올리며 주먹을 펴봐.”
벼리는 블루문 장미를 떠올렸다.
작년 봄에 할머니가 벼리에게 선물로 주신 꽃이었다.
할머니는 겨울에 돌아가셨다.
올해 봄에 블루문 로즈가 피었었다.
가을까지도 벼리네 집 마당에 피었던 꽃이었다.
할머니가 벼리에게 말씀하셨다.
“벼리야, 이 블루문 로즈는 벼리의 꽃이란다. 예쁘지?”
“예뻐.”
“우리 예쁜 벼리야, 이 꽃은 너를 사랑한단다.”
“응.”
“벼리야, 이 꽃은 네가 아름다운 영혼을 갖도록 매일매일 맑은 이슬로 목욕을 하며 기도할 거란다.”
“착한 꽃이야.”
“혹시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이 꽃을 떠올려봐. 블루문 로즈가 너에게 좋은 생각들을 줄 거야. 알았지?”
“응, 할머니. 꽃이 예뻐. 난 블루문 장미가 아주 좋아요.”
벼리는 가시가 있는 장미를 살살 쓰다듬으며 말했다.
“난 벼리야. 넌 정말 예쁘다. 널 잊지 않을게. 널 꼭 기억할게. 사랑해.”
블루문 로즈가 별안간 꽃을 일시에 피우며 향기를 벼리에게 보냈다.
벼리는 꽃들이 한꺼번에 피며 향기로 말하는 것이 너무 좋았다.
“할머니, 꽃들이 말을 해요. 와, 꽃들이 말을 해요.”
그때 블루문 장미의 꽃잎들이 날아다녔었다.
벼리는 그때 나비처럼 함께 나풀거리며 향기 속에서 행복했었다.
구골나무가 벼리에게 좋아하는 꽃을 떠올리며 주먹을 펴보라고 했다.
벼리는 블루문 로즈를 떠올렸다.
“손을 펴봐.”
손바닥에 블루문 로즈의 꽃잎이 나비처럼 나풀거렸다.
“예쁘다.”
“벼리야, 그 꽃잎을 그 아이에게 줘. 블루문 로즈 꽃잎이 있어야 그 아이가 살 거야. 아니면 그 아이는 죽을 지도 몰라.”
“이 꽃잎을 어떻게 줘요?”
“그 남자 아이의 심장에 꽃잎을 놓아줘. 얼어버린 심장이 다시 뛸 거야.”
꽃잎은 벼리의 손바닥에서 향기를 뿜으며 여전히 나풀거리고 있었다.
손을 오므리면 꽃잎은 다시 손바닥 안으로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벼리야, 그 꽃잎을 주게 되면 넌 블루문 로즈의 사랑을 잃게 될 거야.”
“괜찮아요. 아이를 구해야 해요.”
“네가 블루문 로즈를 그 아이에게 주면 대신 그 아이의 꽃향기 빠져나와 너에게 갈 거야.”
“괜찮아요. 난 아무 것도 안 줘도 돼요. 그 아이를 구하고 싶어요.”
“아니란다. 그 아이의 향기가 너에게 가게 될 거야.”
“네가 블루문 로즈를 그 아이에게 주면 그 아이는 살아나게 될 거야. 대신 향기를 잃게 되겠지. 모든 향기를 맡을 수 없을뿐 아니라 사랑도 잃게 될 거야.”
“가엾어요.”
“그 아이가 사랑을 느끼게 되는 것은 그 아이의 향기를 가져간 너에게서만 느낄 수 있을 거야.”
“사랑을 잃지 않으면 좋겠어요.”
“벼리야, 넌 너무 어려서 이 일을 곧 잊게 될 거야. 하지만 언젠가 네가 위험에 빠지게 되면 꼭 이 일을 기억해내야 한단다.”
“기억을 꼭 하고 있을게요.”
“어린 시절의 기억은 누구나 다 잊게 된단다. 하지만 간절하게 떠올리려고 하면 오늘의 이 일이 떠오를 거야.”
“전 아이를 구하러 갈게요.”
“벼리야, 미안하다. 네가 블루문로즈를 그 아이에게 준다면 너는 꽃들과 늘 가까이 지내야만 한단다. 꽃들과 멀어지면 넌 위험에 빠질 거야. 너의 꽃이 사라졌기 때문이야. 하지만 넌 그 아이가 가지고 있는 꽃의 향기를 대신 얻었으니 꽃들이 널 보호할 거야.”
“괜찮아요. 꽃들과 늘 가까이 할게요.”
“벼리야, 꽃들을 늘 가까이 해야 한다. 꽃들을 믿어야 한다.”
“꽃들을 꼭 믿을게요.”
구골나무의 하얀 나비들이 벼리의 주변을 온통 날아다니고 있었다.
벼리는 집안으로 들어갔다.
방은 얼음장 같았다.
남자아이가 엄마 옆에 꼭 붙어 누워 있었다.
엄마는 온몸이 얼음장이었다.
남자아이는 아직 몸이 따뜻했다.
하지만 숨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벼리는 남자아이 옆으로 갔다.
남자아이는 예전에 숨바꼭질할 때 작은 장난감 집에 자신을 숨겨줬던 재인이었다.
벼리가 재인의 품에서 잠이 들었을 때 재인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때 벼리는 눈을 감고 잠이 들려는 참이었다.
“누군가와 함께 기다린다는 것은 정말 좋은 일이구나.”
“함께 기다려줘서 정말 고마워. 내 이름은 재인이야. 네가 내 이름을 기억해 주면 좋겠다. 자고 있어?”
벼리는 살풋 잠들고 있었다.
“내 이름은 재인이야. 재인. 네가 기억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그 아이 이름은 재인이었다.
“재인...”
재인은 심장이 멎어 있었다.
심장은 이제 금방 멎은 것 같았다.
아직 체온이 남아 있었다.
벼리는 작은 몸으로 힘이 모자랐지만 끙끙거리며 재인을 반듯이 눕혔다.
그리고 손바닥을 폈다.
블루문 로즈가 팔랑팔랑, 날아다녔다.
벼리는 손바닥의 꽃잎을 재인의 가슴에 댔다.
꽃잎들이 팔랑거리더니 재인의 가슴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재인의 가슴으로 스며들었다.
잠시 멎어 있었던 재인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쿵쿵쿵쿵>
그리고 재인은 큰숨을 뱉어냈다.
그 숨 속에는 재인이 품고 있었던 향기가 함께 밖으로 빠져 나왔다.
향기는 벼리의 숨으로 스며들었다.
벼리의 블루문 로즈는 재인의 심장을 들어가 재인의 심장을 뛰게 했다.
재인의 향기는 벼리의 숨으로 들어가 벼리가 꽃들의 향기를 들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벼리는 정신을 잃었다.
재인의 옆으로 쓰러졌다.
어느 순간 어른들이 재인의 집으로 뛰어들었다.
재인의 담임이었다.
재인의 어머니가 사망했을 당시 재인과 다른 여자아이가 그 곁에 쓰러져 있었고 둘 다 병원으로 실려 갔는데, 그 아이가 왜 그곳에 있었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 아이의 부모가 와서 아이를 데려갔고 그 여자아이에 대해선 모두 신경 쓰지 못했다.
“벼리야, 향기를 잃은 아이의 향기를 찾아줘야 한다.”
구골나무가 말했다.
향기를 잃은 아이는 재인이었다.
재인의 향기는 자신이 품고 있었다.
“향기를 어떻게 돌려줘요? 향기를 돌려주는 게 어떤 의미예요?”
“벼리야, 사랑을 믿어야 한다. 네가 향기를 돌려주는 일은 너의 사랑이 완성되는 순간일 거야. 네가 그 일을 해낼 수 있길 바란다.”
어느 순간 구골나무는 사라지고 없었다.
랜디의 숲도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베르자르당의 커다란 야자나무가 열어주었던 작은 통로도 이미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재인이 어느새 카페에 들어와 있었다.
벼리에게 손짓했다.
커피를 주문하라는 말이었다.
벼리는 재인의 곁으로 갔다.
어려서 만났던 그 아이가 재인이었다는 사실에 벼리는 가슴이 새롭게 뛰었다.
“사랑을 믿어야 한다.”
나무의 말들이 벼리의 가슴이 뛰어도 된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새롭게 뛰는 가슴은 달콤한 케이크가 어울렸다.
벼리는 치즈케이크, 딸기초코케이크를 골랐다.
그리고 벼리는 달콤한 케이크를 음미하고 싶어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재인은 캐나다의 가장 아름다운 도시인 몬트리올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홍차인 몬트리올을 시켰다.
몬트리올은 메이플 시럽의 진한 풍미가 느껴지는 달콤한 홍차로 달달한 시간과 어울렸다.
둘은 달콤한 케이크와 커피와 차를 느긋하게 마셨다.
베르 자르당 카페에서 벼리는 가슴이 다시 설렜다.
의심과 불안으로 얼룩진 가슴은 어느새 녹아서 사라지고 없었다.
여자에게 사랑은 이런 것인가 생각이 들었다.
<카톡>
카톡이 왔다고 알람이 울렸다.
벼리는 재인에게 미안해서 소리를 진동으로 눌렀다.
<지잉, 지잉, 지잉, 지잉.....>
몇 번의 카톡 진동이 더 울렸다.
아마도 연이 언니나 민수 오빠가 보낸 카톡일 것이었다.
무언가 사건에 대한 연락일 것이었다.
하지만 벼리는 지금 이 순간 재인과의 데이트를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벼리, 제부도 참 좋다. 그렇지? 이곳 온실정원 카페도 멋지다.”
“우리 다음에 또 와요.”
“또 올 수 있을까?”
재인은 이 말을 하고 아차 하는 것 같았다.
“왜요? 마음만 먹으면 올 수 있는 곳인데요. 다음에 또 같이 와요. 전 오늘 아주 좋았어요.”
“나도 좋았어. 제부도 물길이 안 열리면 좋겠다.”
“우리 제부도에서 나가지 말고 여기서 둘이 그냥 살까요?”
“하하, 여기가 그렇게 좋아? 이제 물길이 닫힌 시간이야. 그만 돌아가자.”
돌아가자고 말할 때 재인은 어두운 표정이 되었다.
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재인은 말이 없었다.
둘은 제부도 바닷길을 지나서 육지로 나왔다.
자동차로 지나는 길은 똑같이 육지인데, 어떻게 어느 순간 제부도는 섬이 되는 것인지 벼리는 신기하다는 생각을 했다.
제부도에서는 한없이 좋은 표정이더니 재인은 돌아오는 길에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 휴게소에 잠시 들러서 재인은 생수를 사왔다.
벼리에게 생수 뚜껑을 따서 건넸다.
벼리는 재인이 건넨 생수를 마셨다.
차는 덥지 않았지만 달콤한 것을 먹어서인지 생수가 시원했다.
그런데 벼리는 생수를 마시고 어느 순간 목이 갑갑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소멸하고 싶지 않은 자와 소멸이 되고 싶은 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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