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_사랑처럼 자랑스러운 것이 있을까
사람이 태어나면 하늘에는 별이 하나 태어나고 땅에는 꽃이 하나 피어난다. 그 별과 꽃의 이야기를 듣는 소녀는 어느 날 슬픈 비밀을 알게 된다.
<27화>
사랑처럼 자랑스러운 것이 있을까
* * * * *
“정말 데이트를 하는 거야?”
혼잣말을 하며 벼리는 상큼한 연분홍 드레스를 입었다.
어쩐지 달달한 연애 감정이 묻어나는 색깔이었다.
재인 역시 연분홍 빛깔의 남방이었다.
“앗, 깔맞춤?”
벼리의 깔맞춤이란 소리에 재인은 한참 웃었다.
“하하하, 깔맞춤? 색깔 맞춤이라는 거야? 처음이야. 깔맞춤이란 소리.”
“핑크핑크, 봄에 딱이에요.”
“그럼 깔맞춤 커플은 데이트를 나가 보실까요? 자, 벼리 씨, 제 손을 잡으시죠.”
재인이 춤을 신청하는 신사처럼 손을 내밀었다.
“좋아요, 기사님, 그럼 데이트를 가보실까요?”
재인은 장난처럼 손을 내밀었는데 벼리가 손을 내밀자 그 손을 얼른 잡았다.
둘은 숲이 있는 곳으로 떠났다.
벼리가 숲을 좋아한다고 말했었다.
자동차를 타고 가는 동안 음악이 잔잔했다.
‘음악이 아름다운 건가? 이렇게 좋은 기분. 아, 날씨도 좋아.’
벼리는 자신도 모르게 창문을 열고 차창 밖으로 흐르는 풍경에 손을 내밀었다.
차는 어느새 교외였다.
재인도 기분이 좋아보였다.
“벼리 씨, 그렇게 좋아?”
“엄청 좋아요. 완전 멋져요.”
“벼리 씨가 그렇게 좋아하다니 자주 나와야겠다.”
재인은 벼리가 좋아하는 모습을 좋아했다.
둘은 한적한 오솔길에 다다랐다.
봄빛이 쏟아지는 계절이었다.
벚꽃 터널이 있는 곳이었다.
“봄은 벚꽃 아래에 서 봐야 봄인 거죠.”
“벚꽃 아래 서 봐야 봄이라.”
재인은 한국에 돌아와서 벚꽃 아래 서 보기는 처음이었다.
벚꽃이 이렇게 고왔었나 생각이 들었다.
때마침 작은 바람이 불었다.
꽃잎이 흩날렸다.
자신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꽃잎을 잡으려고 했다.
“재인 씨, 떨어지는 꽃잎을 잡으면 떠나는 사랑도 잡을 수 있대요.”
“그런 말이 있어? 그럼 반드시 꽃잎을 잡아야지.”
재인은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을 잡으러 이리저리 뛰었다.
이리저리 움직이며 꽃잎을 좇았다.
재인의 그런 모습을 보며 벼리는 너무 행복했다.
이런 풍경 속에서 재인과 같이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했다.
“잡았어. 꽃잎을 잡았어. 이것 좀 봐.”
재인은 흥분해서 소리쳤다.
벼리는 기뻐하며 꽃잎을 보려고 다가갔다.
다시 바람이 불어 꽃잎이 날아갔다.
“어? 어? 꽃잎이...”
“괜찮아요. 이미 잡은 꽃잎이잖아요.”
“놓쳤어.”
“한 번 잡은 꽃잎이에요.”
“날아갔어.”
“아마도 그 꽃잎은 자신을 잡았던 사람을 기억하고 반드시 돌아올 거예요. 자, 보세요. 바닥에 꽃잎이 많죠? 많은 꽃잎들이 바닥에 흩날리지만 모두 잊혀지는 것은 아니에요. 바닥을 뒹굴면서도 그 추억은, 그 기억은 사랑하는 이의 가슴으로 들어가 다시 꽃이 된다고 해요. 실체는 사라지지만 기억과 추억으로 영생을 얻는 거죠.”
“기억과 추억으로 영생을 얻어?”
“그럼요. 영생이란 이렇게 가슴에 남는 거죠.”
“하지만 꽃잎이 날아갔는데?”
“재인 씨. 꽃잎은 누군가의 가슴에 남기 위해 날아간 거예요. 바람이 데려간 거고요. 바람이 데려간 것은 밤이 되면 누군가의 꿈으로 데려 간대잖아요.”
“밤이 되면 꿈으로.......”
“그럼요. 꿈으로.”
이 대목에서 재인은 무슨 말인가를 더 하고 싶었지만 그만 두었다.
벼리도 무언가를 더 말하고 싶었지만 그만 두었다.
지금은 둘만의 시간이었다.
재인은 벼리의 손을 살짝 잡았다.
벼리는 재인의 손이 닿자 온몸에 전율이 흐르는 것 같았다.
숨 막히는 떨림이었다.
얼굴로 열이 올라왔다.
사랑을 하는 사람들은 이런 숨 막히는 순간을 얼마나 견뎌야 하는 건지 궁금했다.
‘사랑이란 열병이구나.’
누군가의 가슴을 이렇게 태우고서 사랑이 자라는 거였다.
벼리는 뜨거운 가슴을 붙잡고 싶었다.
재인이 붙잡은 꽃잎처럼 흩날리는 재인과의 시간을 꼭 붙들고 싶었다.
바람을 타고 흩날리는 꽃잎처럼 벼리의 사랑은 재인의 손짓과 말투, 몸짓에 흔들렸다.
가슴을 꼭 붙잡아도 흔들렸다.
벼리는 재인의 손을 꼬옥 잡았다.
흩날리는 재인의 마음을 붙잡듯이 살며시 꼬옥 잡았다.
재인도 벼리의 손을 더욱 꼭 잡았다.
둘은 한동안 말하지 않고 걸었다.
세상이 순간 고요해졌다.
둘의 심장소리가 음악으로 퍼지고 있었다.
바람이 불지 않는데도 심장의 박동이 바람을 몰고 퍼지고 있었다.
벚꽃은 둘의 심장박동에 따라 음악처럼 흩날렸다.
둘은 어느 순간 꿈을 꾸듯 걸음을 멈췄다.
마주 봤다.
재인의 숨결은 뜨거웠다.
벼리는 차마 재인의 눈길을 피하지 못했다.
재인이 벼리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벼리는 재인에게 안겼다.
벼리는 순간 숨을 참았다.
재인의 얼굴이 벼리의 얼굴에 점점 가까워졌다.
벼리는 자기도 모르게 숨을 참고 눈을 꼭 감았다.
재인의 입술이 천천히 벼리의 입술에 닿았다.
꽃잎이 입술에 닿듯, 하얀 눈이 녹아내리듯 벼리의 입술에서 녹아들었다.
벼리는 재인의 부드러운 키스에 저절로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주먹은 저절로 쥐어졌다.
허리에 가 있던 재인의 손이 벼리를 바짝 껴안았다.
벼리는 주먹을 풀어 재인을 붙잡았다.
재인과 벼리의 키스는 한참동안 이어졌다.
오래도록 해가 저물지 않았다.
둘의 행복한 시간은 주변을 고요로 감쌌다.
재인과 벼리는 그 저녁 집에 함께 돌아왔다.
둘은 차에서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집에 도착하자 벼리는 여느 때처럼 차에서 내리려고 했다.
그때 재인이 잠시 손을 잡았다.
“잠깐 기다려.”
재인은 차에서 먼저 내리더니 벼리의 차 문을 열어줬다.
평소에는 하지 않던 행동이었다.
“내려.”
재인은 벼리가 차에서 잘 내릴 수 있도록 섬세히 보살폈다.
뜻밖의 친절에 벼리는 행복했다.
벼리를 향한 친절이 사랑으로 살살 녹아들었다.
다시 품에 안기고 싶었다.
키스하고 싶었다.
재인과 벼리는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펜트하우스로 갔다.
둘은 펜트하우스에 들어서자마자 깊은 키스를 나누었다.
벼리는 어쩌면 재인과의 이런 시간을 오랫동안 꿈 꿨던 것 같았다.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재인의 손길에 따라 자신이 저절로 녹아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재인은 서둘지 않았다.
천천히 벼리를 알아가려는 듯이 움직였다.
벼리는 재인의 손길이 두렵지 않았다.
언제부터 시작된 일이었는지 모른다.
벼리는 재인에게 온전히 자신을 맡기고 있었다.
이런 자신이 벼리는 놀라웠다.
자신의 어디에 이런 사랑이 숨겨져 있었는지 놀라웠다.
재인도 벼리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이토록 따뜻하고 간절했음을 미처 알지 못했다.
자신은 언제나 사랑에 대해 자격이 없는 남자라고 생각했었다.
어떻게 벼리와 이런 뜨거움을 갖게 되었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재인도 벼리와의 이런 미래를 어쩌면 기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루가 너무도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벼리를 밀어내려고 했던 일들은 언제나 어려웠었다.
하지만 벼리를 가까이 하는 일들은 이토록 자연스러웠다.
재인은 이런 자연스러움이 두려웠다.
자신에게 없는 사랑의 느낌이 어떻게 갑자기 이렇게 꽃을 피운 건지 오히려 두려웠다.
자신은 사랑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다.
사랑을 하는데 자격을 따진다면 자신은 절대 자격을 가질 수 없는 부류였다.
재인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어느 누군가를 사랑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다.
벼리와의 계약결혼도 자신의 그런 면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었다.
그런데 그런 재인이 벼리와 이런 따뜻한 사랑의 시간을 가진 것이었다.
재인은 이런 따뜻한 사랑의 순간을 결코 놓치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그랬다.
오늘밤은 그냥 타오르기로 했다.
자신의 삶도 한 번쯤은 사랑에 충실한 시간을 허락해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다.
사랑에 대한 허용이 있어도 된다면 그날이 오늘이었으면 했다.
오늘 세상이 끝난다 해도 좋았다.
그렇다.
종말이 온다 해도 좋았다.
아니다.
오늘의 사랑은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재인은 모든 것을 태워 벼리를 사랑하고 싶었다.
오늘만은 사랑이 재인의 것이었으면 했다.
재인은 이런 순간이 다시 오기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왜 그런지는 몰랐지만 본능적으로 알았다.
재인의 사랑은 허용된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재인은 그런 자신을 인정했었다.
받아들이고 살았었다.
하지만 사랑을 느끼는 순간이 오고야 말았다.
재인은 갑자기 슬펐다.
운명처럼 받아들였던 일들이 슬펐다.
재인은 벼리를 껴안고 벼리를 느끼면서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벼리는 재인의 눈물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다만 어딘가에서 촉촉함이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눈을 뜨지 못했다.
눈을 뜨면 행복이 깨질 것 같았다.
둘의 시간은 그래서 더 뜨겁게 흘러갔다.
결코 불이 꺼지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일어났을 때 재인은 보이지 않았다.
벼리는 재인의 침대에서 혼자 눈을 떴다.
벼리는 지난밤의 시간이 꿈만 같았다.
벼리는 재인을 찾았다.
재인은 보이지 않았다.
박 여사가 들어왔다.
“잘 잤어요? 대표님은 아침에 급한 일이 있다고 먼저 나갔어요. 벼리 씨 일어나면 아침을 챙겨달라고 했어요. 먼저 나가서 미안하다고 말씀하셨어요.”
“일찍 나갔군요. 말도 없이.”
벼리는 자신에게 인사도 없이 나간 재인이 서운했다.
재인은 언제나 일이 많은 사람이었다.
어쩌면 본가에서 불렀을지도 모른다.
본가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재인을 불러대곤 했다.
재인은 정기적인 가족모임이 아니면 벼리를 데리고 가지 않았다.
본가 사람들은 재인을 하대하듯이 벼리에게도 함부로 대했다.
벼리가 그런 일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재인은 그런 일들을 참기 힘들어 했다.
계약결혼이었지만 자신의 여자였다.
그래서 본가에서 부를 때 재인은 혼자 가곤 했다.
벼리는 재인이 본가에 갔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 본가에서 일찍 불렀겠지.’
벼리가 맑은 얼굴로 기지개를 켰다.
민 실장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한 마디 했다.
“밤새 행복한 꿈이라도 꾸셨어요?”
“행복한 꿈요? 네, 맞아요. 행복한 꿈. 행복한 꿈을 꾸었나 봐요. 그런데 진짜 꿈이었을까요?”
“설마요, 그렇게 행복한 얼굴을 하는 신부에게 간밤에 일어난 일이 꿈이겠어요? 꿈길처럼 행복한 밤이었다는 말이겠죠.”
“맞아요. 행복이란 꿈처럼 지나가나 봐요.”
“그럼 오늘 아침의 멋진 식사를 해보실까요? 준비해 두었습니다. 준비되면 식사하세요. 대표님이 특별히 잘 챙겨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벼리는 재인의 친절에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내 남자다. 재인은 사랑하는 내 남자다.”
행복이 넘치면 가슴이 풍선처럼 부풀어 하늘을 날 것 같다는 표현이 이런 건가 보다 생각했다.
벼리는 이미 푸른 하늘을 날고 있었다.
벼리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욕실로 들어갔다.
욕실에서 몸을 씻을 때는 재인의 손길이 스쳤던 자리가 저절로 떠올랐다.
얼굴이 붉어졌다.
다시 콧노래가 나왔다.
저절로 흘러넘치는 것들이었다.
여유 있는 식사를 하고 꽃달에 갔다.
벼리가 꽃달에 들어서자 모든 꽃들이 일제히 벼리를 불렀다.
“벼리야, 벼리야, 벼리야..”
꽃들은 흥분된 목소리로 벼리를 불렀다.
다른 날과 다른 목소리였다.
“무슨 일이야? 사랑의 향기를 어디서 찾은 거야?”
“그건 무슨 말이에요? 사랑의 향기라뇨, 우리 꽃님들의 향기가 오늘은 더욱 아름다운데요. 무슨 일 있어요? 오늘 유난히 향기가 좋아요.”
“우리를 속이려고? 우리 꽃들은 모든 아름다운 향기와 바람에 가장 먼저 반응하는 존재들이야.”
“그럼 우리들은 먼저 반응하는 존재야.”
“특히 사랑의 향기는 우리들 전문이지.”
“사랑하는 사람들에겐 특별한 호르몬이 있어. 그 호르몬은 특별한 향기를 만들어내.”
“우리 꽃들을 더욱 아름답게 해주는 특별한 호르몬이야.”
“그런 호르몬이 있어요?”
“오늘은 유난히 벼리 주변으로 사랑의 호르몬이 이 공간 전체를 적시고 있어. 아, 아름다운 이 에너지. 멋져.”
“그렇게 말씀하시면 부끄러워요. 쉿! 비밀이에요. 내 사랑을 들키고 싶지 않아요.”
“호호, 사랑이 숨겨지는 것이니?”
“주머니 속의 송곳과 사랑은 절대 숨길 수 없어.”
“벼리의 사랑은 더욱 향기로워서 결코 숨길 수 없어.”
벼리는 자신이 사랑에 빠진 것을 다른 존재들이 아는 것이 싫지 않았다.
하지만 조심스러웠다.
뭔지 모르지만 재인은 숨기고 있는 것들이 많았다.
“벼리가 사랑을 하는데 왜 우리들이 이렇게 더 향기로워질까?”
“그만 하세요. 부끄러워요.”
“사랑처럼 자랑스러운 것이 있을까?”
“그런데 랜디에게 말하면 안 돼요.”
“랜디? 랜디는 멀리 있어도 이미 알 걸. 랜디는 벼리의 일이라면 미리 모두 알아. 사랑의 일은 더 빨리 알아차리지.”
벼리는 꽃들에게 자신의 사랑이 축하를 받자 기분이 좋았다.
자신은 재인과 계약결혼을 한 사이다.
계약이 끝나면 결혼은 없던 것이 된다.
어젯밤의 그 뜨거웠던 밤은 어떻게 될 것인지 두려웠다.
하지만 벼리는 애써 두려움을 지웠다.
당분간 사랑에 집중하는 것이 최선일 것 같았다.
꽃들의 축하의 말을 했었다.
“사랑처럼 자랑스러운 것이 있을까?”
벼리에게 다가온 첫사랑이었다.
첫 키스였다.
첫 남자였다.
벼리는 결코 재인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재인은 어쩌면 냉정하게 돌아설 수 있는 남자일 수 있었다.
이런 일들은 벼리를 두려움에 휩싸이게 했지만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고개를 흔들었다.
“안 돼. 절대 안 돼. 지키고 말거야.”
벼리는 꽃들 사이를 걸으며 혼자 중얼거렸다.
꽃들은 여전히 벼리의 아름다운 사랑의 호르몬인 페로몬의 느낌을 찬양하고 있었다.
벼리는 싫지도 부끄럽지도 않았다.
“사랑처럼 자랑스러운 것이 있을까?”
꽃들의 말을 기억하기로 했다.
소멸하고 싶지 않은 자와 소멸이 되고 싶은 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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