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_결혼할 사람 따로 있어
사람이 태어나면 하늘에는 별이 하나 태어나고 땅에는 꽃이 하나 피어난다. 그 별과 꽃의 이야기를 듣는 소녀는 어느 날 슬픈 비밀을 알게 된다.
<15화>
결혼할 사람 따로 있어
* * * * *
재인은 다시 한 번 집안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확인했다.
자신은 집안을 위한 하나의 부속품에 지나지 않았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하신 말씀이 있었다.
“재인아, 넌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놓치지 말고 꼭 결혼해라.”
“응,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꼭 결혼할게. 그리고 엄마랑 같이 살아야지.”
“그래야지. 내 아들. 넌 꼭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야 해. 사랑이 없는 결혼은 안 돼.
“엄마, 난 사랑하는 여자를 만날 거야. 그리고 꼭 엄마랑 같이 살아야지.”
“엄마가 그렇게 좋아?”
재인은 엄마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엄마, 엄마에게 꽃냄새가 나요.”
“재인아, 꽃냄새 나는 여자가 있을 거야. 그런 여자라면 믿어도 돼. 네게 꽃냄새로 오는 여자는 네 운명이야. 꽃냄새 나는 여자가 네 사랑이야. 그런 여자가 있다면 놓치면 안 된다.”
“엄마에게 꽃냄새가 나요.”
재인의 말을 들은 엄마는 환하게 웃으셨었다.
꼭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라는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
꽃냄새 나는 여자를 만나고 싶었다.
그런데 자신은 향기를 맡을 수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찾는 일은 가능하지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억지로 하는 정략결혼은 싫었다.
소박하게나마 정략결혼은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상견례 날이었다.
상견례는 결혼을 약속하는 당사자와 양가 부모님, 형제들이 서로 예를 갖추어 만나는 자리다.
결혼을 한다면 공식적인 행사였다.
재인은 결혼에 대한 환상은 크게 가지지 않았었다.
대유그룹 집안에서의 위치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결혼의 당사자가 알아야 할 최소한의 것에서까지 배제된 결혼은 생각하지 못했다.
최소한의 것이란 상견례의 당사자가 본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 정도였다.
재인은 혼란스럽고 멍한 상태로 도현에게 이끌려 상견례 연회장으로 향했다.
어떠한 것도 생각할 수 없는 너무도 놀라운 상황이었다.
재인에게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는 상태가 오히려 다행일 수 있었다.
재인은 평소 양복을 잘 입었다.
재인의 복장은 상견례의 차림으로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재인이 도현에게 이끌려 연회장에 들어섰다.
피아노와 바이올린, 비올라, 콘트라베이스가 꽃날이란 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꽃날은 더 없이 화사하고 아름다운 곡이었다.
벚꽃의 달달한 꿈을 닮은 곡이었다.
꽃날이란 음률이 오선지 위에서 나풀거리고 꽃잎이 날릴 것 같은 곡이었다.
사람들에게 꽃날이 있다면 사랑하는 순간일 것이다.
만약 사랑하는 이와의 상견례 자리라면 바로 그 날이 꽃날일 것이다.
연회장을 가득 채운 꽃날이란 곡에 사람들이 웃고 있었다.
재인의 아버지 김 회장이 웃고 있었다.
고 여사와 그 일행이 웃고 있었다.
주영이 옆으로 간 도현은 더없이 다정한 오빠로 서 있었다.
재인은 거부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을 예전에 상실해버렸다.
무엇이든 거부해본 적이 거의 없었다.
이러한 재인을 두고 도현은 이렇게 말했었다.
"재인은 태어날 때부터 전의가 없는 건가? 재인이 전의가 없으니까 나도 재인에게는 한없이 착해져. 이상해. 재인의 치명적 매력이야. 순수한 전의 없음."
도현은 재인에게 태어날 때부터 전의가 없다고 했었다.
맞는 말일 수 있었다.
재인은 전의와 거부에 대한 기억이 아예 없었다.
이것을 해라, 저것을 하지 마라, 이런 종류의 말에 순종하는 것이 익숙했다.
순종해야만 살 길이었다.
순종하지 않으면 세상에서 내쳐질 것이라는 불안이 재인에게서 거절에 대한 능력을 제거해 버렸다.
도현과 주영은 재인과 달랐다.
아예 다른 세상의 사람이었다.
그들은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은 종족이었다.
무엇이든 하고 싶은 일들은 어떤 식으로든 했으며 할 수 있었다.
재인은 도현과 주영의 그러한 능력을 동경했다.
도현과 주영은 다른 누군가에게 뭔가를 요구하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뭔가를 요구하지 않아도 늘 갖춰져 있었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생각만 하면, 아니 생각하기도 전에 이미 옆에 있었다.
결핍과 필요에 대한 개념이 아예 없는 구조였다.
거부에 대한 개념도 아예 없는 구조였다.
도현은 항상 재인에게 뭔가를 줬다.
재인에게 요구하지 않았다.
재인이 필요한 것을 조용히 티내지 않고 챙겨 주었다.
재인이 필요한 것이 사랑이면 보듬어 주었다.
재인이 필요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무조건적으로 챙겨 주었다.
도현은 재인이 거부할 만한 그 무엇을 만들지 않았다.
재인이 하고싶은 모든 일을 도현은 지원했다.
재인은 도현과 있을 때는 처음으로 하고싶은 대로 해도 되는 존재가 되었다.
재인은 도현의 사람이 되었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재인은 파리에서 지낼 때 아주 다양한 모임에 참여했다.
그 모임은 언제나 도현과 함께였다.
도현은 재인에게 도움이 될 만한 모든 모임에 참여했다.
재인이 하는 일은 무엇이든 응원했다.
재인이 하고 싶은 일이라면 어떻게든 성취되도록 도왔다.
"저거, 정상 아냐. 도현은 너무 티나게 재인을 좋아하는 거 아냐?"
"재인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따라다니는 걸 봐서는 뭔가 수상해."
"난 도현이 사랑 반절만 받아봐도 원이 없겠다. 도현아, 난 안 돼? 나도 사랑해줘, 잉."
친구들이 도현을 뭐라고 할 만큼 재인을 향한 도현의 사랑은 끝이 없었다.
재인은 도현이 자신을 믿는다는 것만으로도 존재감을 가질 수 있었다.
도현이 있음으로써 자신의 목소리가 생긴 것이었다.
그렇게 재인은 파리에서 아주 많은 사람들과 교류하였고 아주 많은 인정을 받았다.
재인의 뛰어난 능력과 타고난 온화한 성품이 그러한 인정을 이끌었겠지만 그들만의 리그에 재인이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도현의 역할이 있었다.
거대기업 우주의 후계자 도현은 무엇을 얻으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이미 가진 사람이었다.
도현은 재인에게 한없이 좋은 친구였다.
친구를 넘어서 훨씬 특별한 존재였고 지원자였다.
재인이 대유그룹에서 얻지 못한 모든 결핍을 도현이 채워 주었다.
도현은 잿빛 재인의 인생에서 행운이었다.
재인은 도현과 함께 있을 때면 잿빛 인생에서 양지 인생일 수 있었다.
도현과 주영은 재인이 동경하는 양지 인생이었다.
파리에서 지낼 때 주영은 재인을 무척 따랐다.
주영은 양지 중에서도 가장 밝은 곳에서 살았다.
재인과 사뭇 다른 세상의 존재였다.
재인은 지금 양지의 인생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자신이 가장 동경하는 양지의 주영과 결혼만 한다면 더 이상 대유에서 홀대 받을 이유가 없었다.
“재인아, 어서 와. 왜 늦었어.”
“그러게 오늘 성 부장이 하필 해외 출장이 있어서 불편했겠다. 기사 보낼 걸 그랬어.”
“재인아, 신붓감 예쁘다. 언제 우주그룹 딸이랑 사귄 거야? 능력 좋다. 언제나 조용해도 모든 걸 손에 넣는다니까.”
고 여사 일행은 축하한다고 말을 건넸지만 비아냥거림이 숨겨지지 않았다.
그들이 오랫동안 재인에게 함부로 대했던 시간은 숨길 수 없었다.
재인은 우주그룹과의 상견례로 인해 변한 고 여사 일행의 반응에 슬픔이 몰려왔다.
자신이 이 결혼을 하게 된다면 어쨌든 자신은 고 여사 일행을 굴복시킬 수 있었다.
“재인아,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야 한다. 꽃냄새 나는 여자가 네 사랑이야.”
엄마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자신의 운에 아니라고 생각했다.
결혼은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세상 모든 일에 거부권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어떤 무엇도 선택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행복한 연회장이었다.
너무도 밝은 양지의 세상이었다.
우주그룹 사위가 된다면 이 모든 것이 자신의 후광이 되어줄 것이었다.
그러나 재인은 갑자기 이 모든 것이 슬펐다.
‘내가 아닌 세상이 내 인생일까?’
처음으로 이상한 의문이 들었다.
화가 나거나 슬픈 일이라는 표현과는 다른 의문이 들었다.
자신의 가슴에서 처음으로 뭔가 꿈틀거렸다.
재인은 더 이상 상견례 자리에 있을 수 없었다.
재인이 머뭇거리며 자리에 앉지 않자, 도현이 곁으로 왔다.
도현은 재인의 손을 잡고 자리로 이끌었다.
“재인, 어서 자리에 앉아. 어른들께 인사해야지.”
“도현아, 이건...”
재인은 도현의 손을 살짝 뺐다.
재인이 손을 빼고 몸을 돌리려 하자 도현이 재인에게 조용히 말했다.
“재인, 그룹 차원의 일이야. 너희 아버지를 생각해야지. 상견례 끝나고 다시 상황을 보자.”
“나, 결혼할 사람 따로 있어.”
소멸하고 싶지 않은 자와 소멸이 되고 싶은 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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