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_핵인싸의 갑작스런 잠적
사람이 태어나면 하늘에는 별이 하나 태어나고 땅에는 꽃이 하나 피어난다. 그 별과 꽃의 이야기를 듣는 소녀는 어느 날 슬픈 비밀을 알게 된다.
<31화>
핵인싸의 갑작스런 잠적-
* * * * *
벼리는 재인의 품에서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일어났을 때 재인은 이미 없었다.
출장 때문에 일찍 나갔다고 민 실장이 전했다.
재인은 떠났고 오후엔 연이가 온다고 했다.
연이와 함께 그린섬의 정원을 살펴보기로 했다.
그린섬의 정원에 어떤 비밀이 있는 거라면 밝혀야 했다.
하지만 재인은 그린섬의 정원은 벼리 혼자만 들어갈 수 있다고 말했다.
벼리는 재인의 말을 어기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재인은 믿음이 없으면 사랑도 없다고 했다.
재인이 말한 믿음이란 무언가를 알아보려고 애쓰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의심하지 말란 말일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이런 일들을 그냥 무조건적으로 믿을 수 있단 말인가.
벼리는 연이와 함께 정원에 가는 것은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연이가 정원에 가는 일은 마음에 걸렸다.
어쩐지 재인과 자신만이 알고 있는 정원의 신성성이 무너져 버리는 느낌이었다.
대신 자신이 꼼꼼하게 정원의 일에 대해 알아본다면 그것은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다.
벼리는 자신도 모르게 그린섬의 정원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처음엔 그린섬을 의심으로 접근했다.
그런데 점점 재인과 연관이 있을 거라 생각하니 의심 위에 사랑이 더해졌다.
애증의 관계란 이런 것인지 모를 일이다.
벼리는 그린섬 정원으로 향했다.
그린섬 정원의 담장은 고택의 정원처럼 담 전체를 담쟁이가 덮고 있었다.
도심에선 보기 드문 담장이었다.
여름에는 초록빛이 사람들에게 휴식을 주었다.
그 담장의 안쪽에는 다시 쥐똥나무가 작은 담장을 이루고 있었다.
바깥에서 보면 담쟁이가 뒤덮인 높은 담장이었지만 안에서 보면 쥐똥나무 낮은 담장이었다.
안쪽에서 담장을 보면 단절된 느낌보다는 아늑한 느낌을 줬다.
낮은 담장을 높은 담장이 둘러싸고 있는 구조는 숲의 느낌이기도 했다.
마침 4월이라 쥐똥나무의 하얀 꽃이 만개해 향기가 가득했다.
담쟁이는 연둣빛에서 초록빛으로 세력을 키우며 무성해지고 있었다.
“안녕, 담쟁이 넝쿨아.”
“안녕, 쥐똥나무 아가씨.”
담쟁이와 쥐똥나무는 벼리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가지를 벌려 문을 열어주었다.
재인이 알려준 홍채 인식 문이 있었지만 오늘은 나무들 사이로 들어가기로 했다.
사람들에겐 보이지 않는 문이었다.
벼리가 다가가면 나무들이 문을 열었다.
나무들의 몸은 경화되어 딱딱한 가지를 가지고 있었다.
경화된 나무들은 딱딱해서 구부러지지 않고 부러져야 했다.
그러나 어떻게 된 일인지 벼리가 다가가면 딱딱한 나뭇가지들이 부드러운 넝쿨처럼 변해서 몸을 열었다.
재인이 들어가는 방식과는 다른 형태였다.
재인은 벼리가 나무들과 이렇게 소통하는 줄은 상상도 못할 것이다.
정원은 그믐달 모양의 연못이 있고 맨 위쪽에 구골나무가 있었다.
그 옆에는 이번에 새로 심은 때죽나무가 있었다.
그 옆으로 라일락이 있었다.
연못은 안쪽에 동그란 모양의 연못이 하나 더 있었다.
연못 속에 있는 연못이었다.
깊은 밤이 되면 달이 그 동그라미 안의 연못에 잠겼다.
우연히 빌딩에서 본 연못의 모습에서 발견한 것이었다.
뭔지 신비롭게 생각은 했었다.
하지만 그것이 아주 섬세하게 의도된 디자인임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달 모양의 연못은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신비로운 영적인 힘이 모인 느낌이었다.
벼리는 무심코 연못을 들여다봤다.
신비로운 연못의 푸른 기운이 보인다 싶었다.
벼리는 푸른 기운이 신기해 자세히 들여다봤다.
빛깔만 보이던 푸른 기운이 조용히 소용돌이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소용돌이는 조금씩 점점 빠르게 움직였다.
벼리는 소용돌이의 최면에 걸린 듯 움직이지 못하고 빠져들고 있었다.
푸른빛의 소용돌이는 점점 커지더니 푸른 안개처럼 퍼졌다.
푸른 안개는 급기야 연못에서 스물스물 나오더니 벼리를 점점 감싸고 있었다.
푸른 안개가 벼리의 온몸을 빙빙 둘러서 감싸서 묶는 것 같았다.
그리고 순간 무언가가 벼리를 훅, 연못으로 끌어당겼다.
벼리는 자신도 모르게 연못 속으로 몸을 숙이고 있었다.
“벼리야!”
외마디 비명 소리가 퍼졌다.
벼리를 부르는 소리는 하나의 소리가 아니었다.
랜디와 구골나무, 쥐똥나무, 담쟁이가 동시에 벼리를 불렀다.
그냥 부르는 것이 아니었다.
천둥소리처럼 지축을 흔드는 소리였다.
“벼리야!”
벼리는 번뜩 정신이 들었다.
휘청하던 벼리는 겨우 몸의 균형을 잡았다.
랜디가 그린섬 정원의 연못에 대해 말한 적이 있었다.
“정원에 연못이 있을 거야. 그 연못은 너무 깊이 들여다보지 마. 그곳의 힘은 벼리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냐. 연못 안을 들여다보지 마. 안 돼. 절대 안 돼.”
벼리의 온몸으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정원의 연못은 뭔가 위험한 것이 있었다.
그 옆으로 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벼리는 자신이 연못으로 끌려갈 뻔했던 순간이 아찔했다.
그 순간을 떠올리며 어쩌면 나무들은 이 연못에 잡힌 포로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다른 곳에 있는 꽃과 나무들은 벼리에게 매우 수다스러웠다.
무슨 말이든지 했으며 경쾌했고 발랄했다.
나이가 많은 나무들조차 위엄을 부리지 않았다.
경쾌하고 발랄한 천진난만함이 있었다.
이러한 순수함은 언제나 매번 푸른빛을 새롭게 피워내는 힘일지 모른다.
벼리는 정원을 둘러보았다.
정원을 꼼꼼하게 살폈다.
특별한 것은 발견되지 않았다.
아주 잘 다듬어진 잔디, 깨끗한 연못, 사람들의 흔적이 없는 정원. 고요한 정원. 그 무엇도 의심으로 보이지 않는 정원이었다.
이런 정원에 무슨 비밀이 있을지 생각하기 힘들었다.
벼리는 구골나무 가까이 갔다.
구골나무는 말이 없었다.
벼리는 꽃과 나무와 이야기를 했다.
그것의 언어는 어떤 형태인지 설명하기 힘들었다.
그냥 툭, 마음속으로 던져지는 느낌이었다.
인간의 언어가 아닌 말들은 전달되는 매개체가 정확하지 않았다.
벼리에게만 있는 어떤 특별한 인지능력이었다.
때죽나무는 아직 꽃이 필 때가 아니었다.
곧 꽃이 필 것이다.
꽃이 피는 5월이 오면 벼리는 때죽나무에게 물어볼 것이다.
어떤 연유로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안녕. 너는 어디서 왔어? 혹시 정민 언니를 알아? 정민 언니가 널 좋아했어. 알지?”
때죽나무는 말없이 몸을 우수수 떨었다.
“라일락아, 안녕? 너도 좋아하는 사람이 있겠지?”
라일락도 몸을 우수수 떨면서 반응했다.
그린섬의 나무들은 말을 아꼈다.
다른 곳에 있는 나무들은 모두 벼리에게 말을 잘 했다.
그린섬 정원의 나무들은 예외였다.
이곳의 나무들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랜디도 다른 곳은 드나들 수 있어도 이곳은 들어올 수 없다고 했었다.
벼리는 구골나무와 때죽나무, 라일락 사이를 몇 번이나 걸었다.
그리고 그 나무들을 쓰다듬었다.
“너희들은 어디에서 왔니? 이곳의 겨울은 추울 거야. 괜찮을까? 잘 견딜 수 있어?”
나무들은 벼리의 이야기를 알아듣는지 바람이 없는데도 우수수, 몸을 흔들었다.
나무가 자유의지로 의사표현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도 알게 된다면 어떨까 생각이 들었다.
벼리는 다시 나무들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정원의 연못 주위를 여러 번 돌았다.
아주 가까이는 아니고 조금 떨어져서 돌았다.
어떤 이상한 점은 없는지, 어떤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지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하지만 어떤 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이상한 것은 있었다.
그린섬 정원에서 느껴지는 이상한 기류였다.
그것은 고요함이었다.
도심에서는 좀처럼 만날 수 없는 고요였다.
아무리 담이 높게 둘러쳐 있어도 이곳은 도시였다.
도시라는 곳이 갖고 있는 소음은 잘 숨겨지지 않았다.
어디나 차의 소리, 사람의 소리가 들렸다.
도시사람들에게 이런 소리는 일상적이었다.
소음으로 인식되는 것이 아니었다.
도시사람에게 고요함은 다르게 인식되는 낯선 감각이었다.
사람들은 깊은 숲속에 들어섰을 때 그곳의 고요함에 숙연해지는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된다.
세상의 고요함이 주는 평온함과 침묵의 소리 없음은 어떤 음악보다 아름다운 멜로디라는 느낌을 얻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숲에서 경험하는 고요에 경이로움을 느낀다.
그린섬엔 그런 깊은 숲속의 고요가 있었다.
벼리는 도심의 한가운데에서 이런 고요를 경험하는 것이 신기했다.
그 무엇도 그린섬 정원의 담을 넘을 수 없었다.
이것은 어떤 현상일까?
벼리는 고요의 정체가 궁금했다.
이 정원에서는 모든 소리를 흡수해 버리고 있었다.
소리의 블랙홀이었다.
어쩌면 바람도 없는 공간 같았다.
소리의 블랙홀.
어쩌면 모든 것들이 이곳에서는 사라지는 것은 아닌지 생각되었다.
벼리가 느낄 수 없는 것은 소리뿐만이 아니었다.
벼리의 불안도 어쩌면 사라졌다고 해야 할 것이다.
소리를 느낄 수 없다는 생각과 함께 평온이 찾아들었다.
오히려 아무 것도 없는 공간에서 불안해야 할 텐데 그것들도 사라졌다.
이 공간에서는 모든 경계가 사라지는 것 같았다.
벼리는 순간 자신이 우주의 어느 한 공간으로 떠밀려져 점이 될 것만 같은 느낌에 사로잡혔다.
이때 다시 벼리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벼리야.”
벼리는 먼 우주 공간에서 훅, 다시 떠밀려져 나오는 느낌으로 주변의 것들 속에 자신이 놓인 것을 발견했다.
자신도 모르게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주변엔 누구도 없었다.
벼리는 두리번거렸다.
자신이 사라질 뻔하였다는 사실에 두려움이 일었다.
자신을 부른 것은 어쩌면 구골나무였을까 생각이 들었다.
벼리는 구골나무를 쓰다듬으며 그 자리를 서둘러 빠져 나왔다.
그린섬의 정원은 여전히 고요했다.
정원을 벗어나자 다시 엄청난 도시의 소음이 벼리를 깨웠다.
벼리는 소음이 오히려 반가웠다.
소음이 없는 세상은 이 세상이 아닌 느낌이었다.
그린섬의 정원은 어쩌면 다른 세상으로 통하는 또 다른 차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꽃달 쪽으로 걸어가는데 연이가 걸어왔다.
“벼리.”
연이는 화사한 분홍 원피스를 입었다.
연이의 하얀 피부는 밝은 색의 옷과 잘 어울렸다.
“언니는 정말 연분홍이 어울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벼리는 저절로 노래를 흥얼거렸다.
연이를 보자 안도감에 저절로 마음이 편했다.
연이는 환하게 웃었다.
기분이 좋아 보였다.
“좋은 일 있어?”
“아니, 별로인데, 별로여서 기분 좋으려고 옷을 사 입었어. 어때? 예뻐? 여자에게 좋은 일이란? 이렇게 새 옷을 사 입은 날?”
연이는 드레시한 원피스가 펼쳐지도록 한 바퀴 돌았다.
“예뻐, 언니. 너무 잘 어울린다.”
“호호, 이 미모가 어디 가겠니?”
“하하”
벼리도 연이의 농담에 함께 웃었다.
기분이 좋아졌다.
연이는 벼리에게 다가가서 조용히 작게 말했다.
“같이 정원에 가볼까?”
벼리는 살짝 당황해서 서둘러 답했다.
“어, 언니, 내가 가봤는데 별 거 없었어.”
“왜? 어떤 소리가 들리는지 같이 알아보기로 했잖아.”
“아냐. 다음에 다시 알아보도록 해. 오늘 갔는데 아무 것도 없었어.”
“혼자 가서 어떻게 아니? 같이 가보자.”
“다음에, 다음에 가봐. 언니.”
벼리가 곤란해 하자 연이도 더는 재촉하지 않았다.
연이는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둘은 꽃달에 갔다.
꽃달에 가서 핸드폰을 검색하던 연이는 갑자기 어떤 한 마디를 툭, 던졌다.
“이거 봐. 엄청 유명한 핵인싸거든.
“누군데?”
“라일라, 라고 유명한 패션뷰티 인싸야. 라일라가 하는 것들마다 인기가 있어서 화장품업계에서 라일라의 트랜드를 가져가고 싶어할 만큼이야. 대단한 인싸 중의 인싸야.”
“그렇게 감각 있는 인싸가 있어? 그런데 이름이 라일라야? 예쁘다.”
“뭐 남자친구가 자기를 첫사랑이라고 라일라라고 부른대. 라일락과 비슷하잖아. 어감이. 라일락의 꽃말이 첫사랑이라나?”
“라일락?”
“응, 라일락. 근데 라일라는 라일락 싫대. 자기는 자유연애주의자라고.”
“안타깝네. 순수 첫사랑을 추구하는 남자와 자유연애를 꿈꾸는 여자는 어울리지 않잖아.”
“그런 모르겠고. 하여튼 매력 있어. 완전 핵인싸야. 나, 이번에 라일라를 취재하려고 했거든.”
“오, 좋은 아이템이야. 취재 잘 하면 나도 소개시켜줘. 이런 인싸는 인스타 친구 맺고 싶다.”
“근데, 이상해. 이 친구가 연락이 안돼.”
“인스타로 연락하면 되지 않아?”
“개인 신상의 일로 잠시 활동을 접겠다고 올렸지 뭐야.”
“취재하려는 지금? 하필 지금?”
“맞아. 하필 지금. 그래서 그 친구 대학에 연락했어. 요즘 학교 다니는 때라서 조교에게 물어보면 편하거든. 근데 조교가 말하길 며칠째 소식이 없다는 거야.”
“왜? 무슨 일 있대?”
“몰라, 무슨 일인지. 왜 갑자기 잠적이냐고. 아, 답답해.”
“봐, 나도 한 번 들어가 보자. 톡으로 보내줘.”
연이가 라일라의 인스타 계정을 보내줬다.
벼리는 라일라의 인스트 계정을 열었다.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랑데부에서 만났던 영진의 여자친구였다.
소멸하고 싶지 않은 자와 소멸이 되고 싶은 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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