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_제물에 손상은 안 돼
사람이 태어나면 하늘에는 별이 하나 태어나고 땅에는 꽃이 하나 피어난다. 그 별과 꽃의 이야기를 듣는 소녀는 어느 날 슬픈 비밀을 알게 된다.
<76화>
제물에 손상은 안 돼
* * * * *
벼리는 어느 순간 목이 갑갑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흘렀을 것이었다.
컥컥, 헛기침을 하고 싶었다.
일어나고 싶었다.
사방이 어두웠다.
그런데 헛기침도 할 수 없고 일어날 수도 없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보이지 않는 곳이 아니라 눈을 뜨지 못하는 것이었다.
무엇 때문인지 움직일 수 없었다.
말을 하려고 했으나 말이 나오질 않았다.
무언지 온몸이 마비된 것 같았다.
‘성대까지 마비된 것인가?’
의식은 명징하게 깨어났는데 몸은 깨어나질 않았다.
‘나는 어디에 있는 거지?’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어제 분명 재인과 제부도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지금 온몸은 마비가 되어 있다.
‘약물에 중독된 것인가?’
생각만 명징했다.
벼리는 자신의 온 생각을 모아 이런 상황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소리가 들렸다.
재인의 소리, 도현의 소리 그리고 낯익은 소리들이었다.
“재인, 준비는 잘 했겠지?”
“네, 준비는 다 되었습니다.”
“오늘밤이야. 드디어 내 어머니가 영생을 얻으실 거야.”
“네, 오늘밤은 그믐제 중에서도 가장 달의 힘이 강한 달이니까 영생을 얻으실 수 있으실 겁니다.”
“당연하지. 내가 이 건물을 왜 지었겠어? 모두 다 내 덕분에 사랑하는 사람을 지킨 줄이나 알아.”
“회장님 덕분이죠. 제 아내 사유도 이렇게 살아서 제 곁에 있게 된 것은 모두 회장님 덕분입니다.”
“재인의 어머니도 살아서 우리 곁에 있는 이유가 누구 덕분이겠습니까? 모두 회장님 덕분입니다.”
“오늘을 위해서 이 건물을 설계하고 재인에게 준 것이잖아.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저희들은 모두 회장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
“모두 회장님의 힘이지요. 회장님이 오랫동안 준비하신 덕분이지요.”
“우리 어머니의 나무는 블루문이야. 신기하게 벼리 씨가 가장 좋아하는 꽃도 블루문이었어. 나무는 어떻게 됐어?”
“블루문 로즈를 오늘 식재했습니다. 부활의식을 위한 생화는 따로 준비했습니다. 생화 준비를 위해 6개월 전부터 꽃의 개화를 조절하고 준비했습니다.”
“당연히 그랬어야지. 수고했어. 그런데 나무 하나를 더 심었다고?”
“자스민을 하나 더 심었습니다.”
“뭐 하러 심어? 연인가? 그냥 냉동고에 보관하는 것이 아니었어?”
“아닙니다. 사모님의 부활을 위한 날, 부정 탈까봐서 연이도 부활을 준비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재인이 답했다.
“맞아. 부정 타면 안 되지. 하지만 연이를 찾으러 오면 어떻게 하려고?”
“그것에 대한 대비는 미리 해두었습니다. 벼리와 연이가 둘이 진작부터 비밀여행을 준비했다고 했습니다.”
“믿겠어? 의심 많은 경찰이 남편이야.”
도현이 짜증스러운 말투로 화를 냈다.
“그래서 오늘 밤 9시쯤 교통사고가 있을 예정입니다.”
“제물에 손상이 있으면 어떻게 하려고? 제물에 손상은 안 돼.”
도현은 말도 안 된다는 듯 말했다.
“아닙니다. 손상은 없이 심정지만 오도록 준비했습니다.”
“다행이군. 조심해서 준비하도록 해. 벼리는 심정지가 오면 어떻게 부활의식을 한다는 거야?”
“아, 그냥 의료기록만 심정지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음. 시신을 대체할 준비도 다 했겠지?”
“물론입니다.”
“드디어 소망이 이루어지는군.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준비했는지.”
“감축 드리옵니다. 이렇게 제물도 준비가 다 되었으니.”
“재인이 수고가 많았지. 어제 벼리가 컨디션이 안 좋다고 해서 걱정했어. 하마터면 우리 의식을 망칠 뻔했잖아. 벼리의 의식이 좋을 때 성공적인 의식이 이뤄지니까.”
“맞습니다. 그래서 재인이 벼리의 긴장을 풀어주느라 바다까지 다녀왔으니 재인의 공이 큽니다. 어제는 재인이 방해를 하나 잠시 의심이 있었는데, 이렇게 잘 풀려서 다행입니다.”
“제가 배신할 리가 있겠습니까? 저를 거둬준 분이 누구인데.”
“재인의 어머니도 사유 사모님도 영생을 얻었으니 이젠 회장님 어머님께서 부활하시는 날입니다.”
“나는 어머니가 정신병원에서 희생되는 바람에 쉽지 않았지. 이렇게 다시 부활의식을 하고 어머니의 한을 풀어드릴 수 있게 되어 다행이야. 제물이 가까이에 있을 줄 몰랐어.”
“모두 회장님이 꿈꾸신 세상이 이루어지게 된다는 당연한 결과지요.”
“그럼 늦은 밤에 모이도록 하고, 제물에 손상이 안 가도록 준비에 만전을 가하도록 해. 제물에 손상은 안 돼.”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성 부장이 서둘러 답했다.
“내가 모를 줄 알았어? 지난번에 성 부장이 내 제물에 무슨 짓을 했었는지 내가 모를 것 같아?”
성 부장은 바로 엎드렸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다만 그때는 회장님께 누가 될 것 같아 손을 쓴다는 것이.”
도현은 성 부장을 걷어찼다.
“그때 일 생각하면 아찔해. 23년을 준비한 일이라고. 성 부장, 너 때문에 하마터면 일을 그르칠 뻔 했어.”
“절대, 절대. 앞으로는....”
“내가 용서한 걸 천운으로 알아. 김 교수와 성 부장이 오랫동안 준비해 준 노고를 내가 생각해 준 거니까.”
벼리는 귀에 들리는 소리들을 믿을 수 없었다.
꿈에서의 일보다 더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벼리는 움직이고 싶었으나 움직일 수 없었다.
‘난 죽은 것일까?’
‘죽은 상태에서 정신만 산 것인가?’
벼리는 정신을 집중하려고 애썼다.
주위의 사람들이 모두 물러간 것 같았다.
벼리는 정신을 집중해 도움을 요청했다.
그린섬 정원의 담장을 이루는 쥐똥나무를 먼저 떠올렸다.
도와달라고 외쳤다.
“도와줘.”
다시 그린섬 꽃달의 꽃들을 불렀다.
“도와줘.”
벼리는 계속 도와달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어딘가에서 꽃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전해줄 것 같았다.
랜디를 불렀다.
“랜디, 랜디...”
“도와줘.”
벼리는 꼼짝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정신은 명료해서 모든 소리가 멀리서도 달려와 들리는 것 같았다.
어떤 감각세포의 힘이 약화될 경우, 다른 감각세포가 예민하게 살아난다고 하더니 벼리의 감각세포가 그러했다.
벼리는 있는 힘을 다해 누군가를 불렀다.
도와 달라고.
모든 감각이 움직이지 않는 벼리는 사실 통증도 무엇도 육체적인 것은 느낄 수 없었지만 청각과 후각은 살아있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대화가 들리는 것이었다.
벼리는 이런 감각이 실제로는 청각과 후각이 아닌 온몸이 받아들이는 촉각으로 들리는 것인지 모를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벼리에게만 있는 어떤 특별한 감각인지 모르겠다.
위급했다. 이제 자신은 무언지 모르겠지만 그린섬 회합의 결과 죽음을 당할 것이었다.
아직까지 들은 이야기의 결론은 이러했다.
도현은 아주 오래 전부터 어머니의 부활을 준비했다.
그것은 어머니와 닮은 자신을 통해 이룰 일이라는 것이다.
‘이미 죽어버린 사람을 살리는 일이 가능할까?’
‘어쩌면 가능할까?’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자신은 잠시 후에 죽음으로 도현의 어머니를 살리는 제물로 사라질 것이었다.
“도와 줘. 도와 줘. 누구든 나를 도와 줘.”
그때 희미하게 어디선가 소리가 들렸다.
“벼리야.”
어디선가 들렸다.
아주 작은 소리였다.
벼리는 그 소리가 달아날까봐 온 힘을 다해 다시 불렀다.
“도와 줘.”
그린섬 회합에선 생화가 사용되지 않았다.
살아 있는 것들은 어떻든 서로 작용을 했다.
그래서 살아있는 것들은 이들의 회합에 끼어들지 못했지만 부활의 밤은 예외였다.
살아있는 것들의 작용이 필요한 밤이었다.
부활의 밤은 다시 살아날 사람을 대신하는 꽃이 있었다.
도현의 어머니 영애를 위한 부활의 꽃으로 보랏빛 블루문 장미가 사용되었다.
“벼리야.”
다시 희미한 소리와 함께 희미한 향기가 느껴졌다.
그것은 블루문 장미의 소리였다.
블루문.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장미였다.
블루문 장미가 그린섬 부활의식에 있는 것은 도현의 어머니 영애가 가장 사랑하던 꽃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은 그때서야 도현을 처음 만났던 날이 생각났다.
아주 어린 시절의 이야기였다.
이제 겨우 말을 시작했던 다섯 살 때였다.
잊고 있었던 사연이었다.
하지만 이제 알 것 같았다.
왜 도현이 자신을 어머니의 대신이라고 생각했으며 왜 블루문이 영애의 꽃이 되었는지.
소멸하고 싶지 않은 자와 소멸이 되고 싶은 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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