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_치자꽃 설화와 의문의 실종
사람이 태어나면 하늘에는 별이 하나 태어나고 땅에는 꽃이 하나 피어난다. 그 별과 꽃의 이야기를 듣는 소녀는 어느 날 슬픈 비밀을 알게 된다.
<62화>
치자꽃 설화와 의문의 실종
* * * * *
“윤지 씨? 일본에 갔다고 하지 않았어?”
“일본에 가지 않았대요. 어디에 갔을까요?”
“내가 윤지 씨를 어떻게 알겠어. 민 실장이나 김 교수님한테 물어봐야지. 김 교수 전화번호 알려줄까?”
“아니요, 괜찮아요. 곧 연락 오겠죠, 뭐.”
“오후에 뭐해?”
“뭐 특별히 없어요.”
“괜찮으면 나올래? 맛있는 거 사줄게. 같이 먹자.”
“아니에요. 그냥 뭘 하는지 궁금해서 전화했었어요. 어젯밤 술을 많이 마신 것 같았는데 컨디션은 어떤지 물어보려고도 했고.”
“하하, 내 걱정한 거였어? 난 괜찮아. 벼리 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같이 저녁 먹고 데이트하자.”
“정말 데이트요? 좋아요. 어디로 갈까요?
벼리는 처음에 재인이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다.
그런데 데이트를 하자고 했다.
뜻밖의 말에 벼리는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데이트하자. 예쁘게 입고 나와. 지금 성 부장이 데리러 갈 거야.”
벼리는 재인의 다정한 데이트 신청이 오히려 불안했다.
하지만 대답이 먼저 튀어나왔다.
데이트 약속을 잡고 말았다.
달려가는 마음은 잡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연애하는 감정은 주머니 속의 송곳과 같다고 했다.
결코 숨길 수 없는 마음이었다.
데이트 신청이라면 일단 달려가고 볼 일이었다.
벼리는 옷을 몇 번이나 갈아입으면서 데이트에 대한 기대로 설렜다
불안한 주변 상황을 두고도 데이트에 몰입하다니 자신이 조금 한심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부른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먼저 달려갈 일이었다.
마음은 이미 재인의 곁으로 달려가 있었다.
벼리가 그린섬 아래로 내려가자 성 부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성 부장이 벼리에게 차 문을 열어줬다.
벼리는 지난번 성 부장이 자신을 해치려고 했던 것을 기억해 냈다.
성 부장이 차문을 열어주자 멈칫 망설여졌다.
‘괜찮을까?’
“타시지요. 대표님 기다리십니다.”
재인이 성 부장을 보낸다고 했다.
괜찮을 것이었다.
벼리는 둘의 데이트에 성 부장이 끼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성 부장은 벼리를 놀이공원에서 내려줬다.
벼리가 도착했을 때 재인은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재인은 어디서 오는 길이었을까?’
캐주얼 차림이었다.
출근할 때 벼리가 보지는 못했지만 아마 정장차림이었을 것이다.
성 부장이 차를 타고 돌아갔다.
재인은 기다렸다는 듯이 벼리의 손을 잡았다.
벼리는 깜짝 놀랐다.
재인은 오래된 연인처럼 손을 잡더니 다시 손을 어깨 위로 올려서 벼리를 살짝 껴안았다.
벼리는 얼결에 재인의 품에 안겼다.
보통의 인인들처럼 재인은 한쪽 팔로 벼리를 가볍게 안고 걸었다.
벼리는 예기치 않은 스킨십에 가슴이 정신없이 뛰었다.
재인의 손길도. 재인이 감싼 포근함도 좋았다.
불안했던 모든 것들이 사라져 버리는 것 같았다.
어젯밤 정원에서 아카시나아무와 치자나무 때문에 울었던 것들은 벌써 사라지고 새벽에 만났던 재인과의 뜨거웠던 시간이 훅, 더 뜨겁게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사랑하는 이의 곁에서 걷는 일은 사랑 이외의 것은 어떤 것도 결코 존재할 수 없었다.
벼리는 온전히 재인에 대한 생각으로 떨리고 있었다.
재인은 벼리의 손을 잡고 놀이공원 입구에 잠시 멈춰 섰다,
그리고 우두커니 잠시 바라봤다.
“어렸을 때 엄마랑 놀이공원에 와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한 번도 와보지 못했어. 나, 놀이공원은 오늘이 처음이야.”
놀이공원을 바라보는 재인은 뭔가 숙연해 보이기까지 했다.
겨우 놀이공원일 뿐인데 저렇게나 숙연해지다니 벼리는 재인이 안쓰러웠다.
재인은 엄마 생각이 많이 날 것 같았다.
벼리는 재인을 뒤에서 살짝 껴안아줬다.
그리고 아주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오늘 처음이니까 여기 있는 놀이기구 다 타 봐요. 어때요?”
“그럴 수 있어? 그건 아이들이나 하는 일이지.”
“처음이라면서요, 처음인데 다 타봐야죠. 재인 씨가 여기 놀이기구 다 탄다고 하면 엄마도 좋아하실 것 같아요. 자, 어서 가요. 저기, 저거부터 타야 해요.”
벼리는 재인의 손을 잡고 놀이기구 타는 곳으로 뛰어갔다.
재인은 벼리의 손에 이끌러 같이 뛰어갔다.
뛰는 일은 사람의 심장박동을 빠르게 했다.
빠른 심장박동은 사람을 명랑하게 했다.
조금은 우울했던 재인도 벼리의 손을 잡고 뛰면서 밝은 동심이 되었다.
“하하하”
재인에게 웃음이 절로 찾아들었다.
둘은 이런저런 놀이기구를 아이처럼 신나게 탔다.
아이들처럼 머리에 귀여운 형광 머리띠를 꽂기도 하고 아이스크림도 사먹었다.
귀여운 인형을 사들고 셀카도 찍었다.
아이라면 아니 연인이라면 할 수 있는 아주 많은 일들을 했다.
어른이 되어서도 연인들이 왜 놀이공원에 가는지 알 것 같았다.
놀이기구를 타면서 뛰고 웃고 스릴감에 빠지다 보면 저절로 경계는 없어지고 즐거움이 쌓이고 사랑은 더욱 친밀해지는 것이었다.
“하하하”
평소에는 들을 수 없었던 재인의 웃음소리를 많이 들을 수 있는 날이었다.
벼리는 문득 이렇게 행복한 것이 진실일까 두려웠지만 꿈이 깰까봐 더 즐겁게 몰입했다.
둘은 장미원에서도 시간을 함께 보냈다.
장미원은 수많은 장미들이 심어져 있었다.
둘은 에버랜드가 직접 개발한 분홍빛의 떼떼드벨르는 물론, 독일의 아이스버그, 프랑스의 피스, 미국의 퀸엘리자베스 등 세계 장미의 명예의 전당에 입상한 유명 품종의 장미를 함께 바라봤다.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이국적인 아름다운 장미를 한껏 즐겼다.
장미의 향과 아름다움이 둘을 사로잡았다.
그중에 블루문이란 장미를 보게 되었다.
재인은 블루문 앞에 서자 한참 움직이지 않았다.
블루문이란 장미는 이름처럼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푸른빛이 오묘하게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았다.
재인은 블루문 장미 앞에 서서 아주 많은 이야기를 했다.
사실 꽃과 관련한 이야기는 벼리가 재인에게 할 이야기였다.
그런데 놀이공원 장미원에서는 재인이 벼리에게 꽃 이야기를 해줬다.
벼리는 자신이 사랑하는 꽃에 대해 재인이 이야기하자 행복했다.
재인이 꽃 이야기를 하자 어쩐지 믿을 수 있는 사람일 거란 생각이 벼리의 마음을 조금은 안심시켜 주었다.
“블루문 (blue moon)은 양력 날짜로 한 달에 보름달이 두 번 뜨는 현상이야. 한 달에 달이 두 번 뜰 때 두 번째로 뜨는 달을 블루문이라고 해.”
“블루문이 그런 뜻이 있었어요? 푸른 달이란 그런 뜻 아니에요? 동화책에서 나오는 푸른 달, 붉은 달, 뭐 이런 말인 줄 알았어요.”
“블루문은 달의 색깔과는 무관해.”
“처음 알았어요. 신기해요. 푸른 달. 직접 보게 된다면 신기하고 멋질 것 같아요.”
“영어로 파란 장미, 즉 블루로즈(Blue Rose)는 ‘있을 수 없는 일’을 뜻하는 관용어야.”
“있을 수 없는 일? 불가능한 일을 말하는 거네요.”
“맞아. 불가능한 일을 뜻해. 장미엔 파란 색을 만들 수 있는 색소가 없으니까. 그래서 파란 장미 개발은 1,000여 년간 수많은 육종가들이 도전했던 과제였어.”
“그런데 이 장미는 블루문 장미인데요?”
“맞아. 블루문이란 장미가 나옴으로써 이젠 블루로즈도 있을 수 있는 일로 바뀌었겠지?”
“정말요? 그렇게 바뀐 거예요?”
“하하, 아냐. 여전히 블루로즈는 있을 수 없는 일을 뜻해. 여기 블루문을 봐. 완전 파란장미는 아니잖아. 파란 빛을 띤 장미. 보랏빛에 좀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지. 그래도 이름은 블루문이야.”
“저는 파란 장미로 보이는데요.”
“우리 벼리는 뭐든지 긍정적이니까. 블루문이 파란장미로 보이는구나. 블루문은 온도만 맞다면 사계절 내내 화려한 꽃을 피운다고 해. 병에도 강하고 향기도 진하니까 매력적인 꽃이라 할 수 있지.”
“정말 신비한 색깔을 가졌어요.”
“결국 우리들에게 있었던, 여러 가지 있을 수 없는 일이 이젠 있을 수 있는 일이 되겠지? 그런 의미에서 난 블루문이란 장미가 매우 특별한 것 같아.”
벼리는 재인의 블루문 장미에 대한 이야기를 깊이 있게 들었다.
어떤 의미가 있는 이야기일 것이었다.
둘의 데이트는 그 무엇도 끼어들지 못했다
방해하지 못했다.
그 시간은 행복한 밤으로 이어졌다.
함께 돌아온 둘은 아침과는 다르게 부드럽게 서로를 껴안았다.
아침에는 느껴보지 못한 새로운 부드러움과 사랑이 벼리에게 찾아 들었다.
재인도 벼리를 한 순간 한 순간 소중하게, 간절하게 스쳐갔다.
내일이 다시 오지 않을 것 같은 밤이었다.
벼리는 재인과의 이런 밤이 올 때마다 언제나 마지막일 것처럼 간절하기만 했다.
벼리의 이런 간절함이 재인을 더욱 애타게 사랑하도록 했을 것이다.
뜨거운 시간이 지나고 재인은 오래도록 벼리를 쓰다듬었다.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손으로 귓불을 스치고 턱선을 스치고 목선을 스치고 어깨를 쓰다듬었다.
눈썹을 스치고 콧등을 스치고 입술을 스쳤다.
다시 재인의 손은 벼리의 어깨를 쓰다듬었고 등을 토닥였다.
그리고 재인은 부드럽게 벼리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벼리는 재인의 손길이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오롯이 온몸의 감각을 깨워서 하나하나 천천히 느끼고자 솜털 하나하나를 촉수처럼 세우고 재인이 스칠 때마다 흔들렸다.
아침이 되어 벼리가 일어났을 때 재인은 역시 곁에 없었다.
벼리는 밤을 함께 보내고 재인이 없는 아침을 맞을 때마다 간밤의 일이 현실이 아니었던 것만 같았다.
정말 환상은 아니었는지 재인이 베고 누웠던 베개를 몇 번이나 껴안아 봐야 했다.
벼리는 아침에 재인의 팔베개 안에서 잠을 깼으면 하고 바랐다.
언젠가 그런 편안하고 행복한 아침이 찾아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벼리는 일찍 연이에게 전화했다.
윤지의 소식이 궁금했다.
“민수 오빠가 알아봤는데, 윤지는 사유의 장례식 이후에 출국기록이 없대.”
“그럼 정말 실종된 거야?”
“오빠가 윤지의 실종신고를 정식으로 접수했어.”
연지는 민수에게서 전해들은 김 교수와 윤지에 대해 이야기를 해줬다.
김 교수는 윤지의 출국사실을 알긴 했으나 출장지에 있을 거로 생각했다며 몰랐다고 했다.
김 교수는 아내가 사망한 가운데 복잡한 일에 연루될 기운이 없다면서 미안하지만 자신에게 부담을 주지 말라고 했다.
사람들은 김 교수가 사유의 사망으로 슬픈 상황인 것은 알지만 과민하게 부담주지 말라고 한 부분에 대해선 의아해 했다.
김 교수도 사유만큼이나 윤지를 아꼈기 때문이었다.
이 상황에서 윤지의 실종에 대해 관심 없다는 말투는 다른 사람의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의심받을 일을 하지 않는 것이 당연한데 그의 슬픔이 아직 너무 큰 것 같다고 사람들은 이해했다.
김 교수의 슬픔은 모두에게 알려진 사실이었다.
김 교수의 사유 사고에 대한 슬픔은 사람들을 걱정하게 했다.
김 교수는 학기가 끝나지 않았는데도 2주 남은 강의를 마무리하지 않고 종강을 한 상황이었다.
기말고사도 리포트로 대체했다.
김 교수의 깐깐한 성격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김 교수를 이해했다.
김 교수는 외부 활동을 일절 하지 않았다.
그의 외출을 목격한 이는 거의 없었다.
그린섬으로의 외출이 김 교수의 유일한 외출이었다.
김 교수는 요즘 사유와 관련한 치자꽃 설화 작품에 몰입하고 있었다.
그림은 점점 환상성을 띠었고 김 교수는 작품 속에서 사유를 만나는 듯했다.
김 교수의 이러한 행보는 사유의 사고로 인한 충격의 반향이었다.
결국 김 교수의 유난스런 슬픔으로 윤지 실종사고는 김 교수와 연결시키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민수는 윤지 실종사건이 단순한 실종이 아닌 것 같다고 사건의 공개 진행을 특수반의 강 경위에게 주장했다.
단순한 실종 사건을 괜히 일을 키운다고 뭐라고 하던 강 경위는 민수가 워낙 강경하게 주장하자 그럼 알아서 조용히 처리하라고 지시했다.
민수는 문화일보 기자로 있는 연이에게 신문사에 사건을 좀 흘리라고 했다.
연이는 촉이 좋은 박 기자에게 실종사건을 흘렸다.
“박 기자. 이거 있잖아. 엄청 이상해. 아마 중요한 기사거리가 될 거야. 특종, 특종감이라니까. 특종각. 어때? 한 번 달려봐야지.”
연이는 윤지의 실종사건에 그동안 밝혀지지 않았던 정민, 라일라, 준희의 실종사건도 함께 흘렸다.
박 기자는 연이의 말에 촉을 느꼈는지 당장 기사를 올렸다.
박 기자에게 사건을 흘린 것은 점심 즈음이었다.
갑자기 기사는 사람들에게 엉청난 이슈로 떠올랐다.
기사는 급물쌀을 타고 포털 사이트 1위로 떠올랐다.
사람들에게 충분히 궁금증을 증폭시키는 기사였다.
기사 제목은 ‘치자꽃 설화와 의문의 실종’이었다.
소멸하고 싶지 않은 자와 소멸이 되고 싶은 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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