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_향기의 세계를 잃어버린 아이
사람이 태어나면 하늘에는 별이 하나 태어나고 땅에는 꽃이 하나 피어난다. 그 별과 꽃의 이야기를 듣는 소녀는 어느 날 슬픈 비밀을 알게 된다.
<12화>
향기의 세계를 잃어버린 아이
* * * * *
재인은 자신만의 것을 가져본 것이 없었다.
오롯이 처음 갖게 된 것이 정원이었다.
재인의 어머니는 구골나무꽃을 좋아하셨다.
구골나무꽃은 다른 꽃들과 다르게 추운 겨울 즈음에 피는 꽃이었다..
구골나무꽃은 하얀 눈 속에서도 향기가 봄처럼 진했다.
겨울꽃의 향기로 향수를 만든다면 사람들은 잃었던, 포기했던 희망을 다시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구골나무 종류인 은목서의 꽃으로 샤넬 No.5 향수를 만드는지 모를 일이었다.
구골나무 한 그루만 있어도 황량한 겨울의 초입을 봄처럼 향기롭게 채울 수 있었다.
재인의 엄마는 추운 계절에도 향기로울 수 있는 꽃처럼 살라고 하셨다.
사는 것이 힘들어도 향기로운 구골나무가 되라고 하셨다.
어린 재인은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추운 겨울이 오기 전, 두려운 계절의 앞에서 꽃을 피우는 구골나무는 재인 가족에게 커다란 위안이었다.
재인의 엄마가 돌아가시던 날도 구골나무의 향기는 쓸쓸하고 추운 방안을 봄으로 가득 채웠었다.
재인의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구골나무 꽃은 오래도록 지지 않았었다.
대략 2주 정도의 개화기를 갖는 나무였다.
재인의 엄마가 돌아가시고 주검이 화장터로 가기 전까지 꽃의 향기는 지지 않았었다.
아무래도 재인의 엄마는 자신의 향기를 품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재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김 회장이 와서 엄마의 주검을 데려가자 갑자기 꽃이 지고 향기도 갑자기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재인에게 엄마의 상실과 꽃, 향기가 함께 기억되었다.
그토록 아름답던 향기의 추억은 상실과 같은 것이었다.
향기가 떠나면 엄마가 사라질 것 같다는 절실함과 불안감이 있었다.
이 때문이었는지 향기가 사라지자 재인 주변에 있던 모든 향기가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재인은 꽃이 싫었다.
향기도 싫었다.
꽃을 보면 엄마가 생각났다
향기가 생각났다.
엄마는 이미 없었다.
향기 역시 재인에게서 사라져버렸다.
재인은 향기의 세계를 잃고 말았다.
재인은 향기 없는 비누를 썼고 향기 없는 스킨을 썼다.
자신의 세상은 향기가 없는데 세상에 향기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다.
주변의 향기를 정리하는 것이 습관이었다.
재인의 세계는 향기가 없었다.
향기가 있어도 재인이 향기를 느낄 수 없었으므로 향기 없는 세상이었다.
그럼에도 그린섬 빌딩 1층에 꽃집을 둔 것은 영진의 제안이었다.
언젠가부터 향기의 세계를 잃어버린 재인의 치유를 위한 것이었다.
재인은 향기를 잃어버린 후 향기와 가까운 것은 피하고 또 피했다.
그 시간이 길어지자 이젠 향기들이 재인을 피하는 것 같았다.
"재인, 이상해. 네 주변엔 향기가 소멸된 것 같아. 누구나 살아있는 존재는 향기가 있어. 너는 이상하게 뭔가 빠져있어. 향기가 없어."
"내가 여자야? 무슨 향기."
"향기라고 말했지만 냄새가 없다는 이야기였어. 넌 이상하게 냄새가 없어."
"내가 워낙 씻는 걸 좋아하잖아."
영진에게서 냄새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후 재인은 향기 나는 것들을 가까이 하기로 했다.
재인은 언제나 향기 가운데 있었다.
주변에 향기를 많이 배치했기 때문이었다.
재인은 자신의 정원에 향기를 들이지 못했지만, 꽃집에 향기를 들이지 못했지만 향기는 이미 어디에나 있었다.
재인이 향기의 세계에서 배제되었을 뿐이었다.
재인은 향기의 세계를 잃어버렸다.
영진은 재인이 꽃과 향기에 트라우마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재인에게서 도망친 향기가 머물도록 처방을 내렸다.
"향기 속에서 지내면 좋을 거야. 여러 가지로."
재인은 영진의 처방대로 꽃집을 오픈했다.
민 실장이 운영을 맡았다.
성 부장이 소개한 플로리스트였다.
민 실장은 뭔지 신비한 구석이 있었다.
마른 몸이었지만 메마른 느낌은 아니었다.
하늘하늘한 가벼움이 있었다.
촉촉한 꽃잎이 하늘거리는 느낌이었다.
꽃집을 오픈하고 재인은 민 실장을 만날 일은 없었지만 수요일은 언제나 들러야 했다.
의사 영진의 처방이었다.
* * * * *
벼리는 학교가 끝나면 꽃달에서 알바를 시작했다.
꽃달에서 알바하기 전부터 꽃들과 교감이 있었던 벼리는 꽃집의 적응이 빨랐다.
꽃집의 자연 팀장은 발랄한 성격이었다.
자연 팀장이 꽃들 사이를 지나면 꽃들이 좋아하는 것이 느껴졌다.
맑고 밝은 성품은 꽃들 역시도 알아보았다.
물론 아름다운 꽃들의 섬세함이라면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었을 것이다.
민 실장은 어딘가 자주 출장을 갔다.
민 실장이 없을 때는 자연 팀장이 민 실장을 대신했다.
자연 팀장은 밝고 경쾌함으로 카페를 생기 있게 했다.
민 실장은 신비로움과 조용함, 은근함으로 카페를 분위기 있게 했다.
둘은 사뭇 달랐지만 서로 다른 아름다움이 있었다.
랜디는 꽃달에 자주 출몰했다.
랜디는 꽃달에 있으면서도 없는 것 같았다.
분명 들르는 것인데 안 들르는 것처럼 같았다.
없는 듯 고개를 돌려보면 꼭 또 옆에 있었다.
랜디는 출몰했다 갑자기 또 사라졌다.
그럼에도 랜디는 벼리가 있는 시간에는 조금 더 오래 머물곤 했다.
랜디는 벼리에게 신비한 체험을 많이 안겨줬다.
벼리는 그러한 일들이 매우 즐거웠다.
랜디가 벼리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면 순간 주변이 온통 초록으로 변했다.
꽃집은 초록나무들이 가득한 곳이었지만 랜디가 보여주는 초록은 깊은 숲의 영험한 기운이 있었다.
초록머리 랜디는 세상을 푸르게 하는 힘이 있었다.
벼리가 힘없이 꽃달에 들어서기라도 하면 랜디는 꼭 벼리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줬다.
“벼리야, 괜찮지?”
랜디가 괜찮냐고 물어보면 모든 것이 좋아졌다.
마음이 편안한 것은 물론이고 심장박동도 편안함 모드로 변경이 됐다.
단추를 누르면 고속, 평속, 저속이라는 속도조절 단추가 있는 것처럼 벼리의 심장 박동 단추를 누른 느낌이었다,
“벼리의 심장아, 편안해라.”
이런 주문을 외운 것 같았다.
벼리의 심장은 더없이 편안하고 느긋했다.
평온한 초록숲에 있는 것만 같았다.
랜디와 있을 때마다 깊은 숲에 순간이동을 다녀온 것 같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나무가 되는 것도 같았다.
그런데 또 다른 순간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재인과 도현이 꽃달에 들어서면, 랜디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랜디는 꽃달의 모르는 통로로 사라지는 것 같았다.
벼리도 어디론가 숨고 싶을 때 랜디처럼 사라질 수 있는 통로를 알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랜디는 신비로운 능력이 있었다.
랜디는 비밀정원에 대해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혹은 비밀정원에 대해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블루문 가든의 비밀은 깊이 숨겨져 있었다.
아직은 알 수 없는 비밀이었다.
*****
벼리는 비밀정원에 들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 모르게 접근하기엔 장애가 너무 많았다.
가장 큰 장애는 사람들이었다.
그 사람들은 재인과 도현이었다.
둘은 너무 자주, 꽃달에 왔다.
벼리가 비밀정원에 대해 마음을 쓰고 있을 때 재인과 도현은 벼리에게 깊숙이 다가왔다.
재인의 강의가 있는 날은 재인이 벼리를 태우고 꽃달에 왔다.
다른 날은 도현이 벼리를 태우고 꽃달에 왔다.
갑자기 벼리가 둘의 차를 타는 일은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벼리, 재인 대표님, 멋지지? 내 이상형이야. 요즘 매일 조각처럼 멋진 대표님을 볼 수 있다니, 이건 행운이야.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하늘 사람 같아. 지상에 어떻게 저렇게 멋진 남자가 있어? 놀랍다. 이건 시선 강탈 수준을 넘어.”
자연 팀장은 벼리의 귀에 작게 말했다.
자연 팀장의 말대로 재인은 멋진 외모와 멋진 몸매, 멋진 매너를 갖췄다.
시선 강탈이란 말이 너무도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도현 씨는 너무 귀족적이야. 중세 왕국의 백마 탄 왕자가 환생한 거라면 아마도 도현 씨일 거야. 도현 씨는 편하게 말하는데 언제나 품격이 있어. 범접할 수 없는 우월함이야. 재벌2세라 그렇겠지?”
도현은 타고날 때부터 남들과 다른 탁월한 위치가 있었을 것이다.
국내 10대 거대 기업의 승계 서열 1위라면 그럴 만했다.
재인과 도현, 두 사람은 같은 듯 달랐다.
다른 듯 같았다.
어느 날, 재인과 도현은 일이 있다며 꽃달에 오지 않았다.
벼리는 비밀정원에 들어갔다.
“벼리야.”
청아한 목소리가 들였다.
구골나무였다.
구골나무가 벼리에게 말을 걸었다.
구골나무가 벼리 이름을 부르자 정원은 갑자기 온통 꽃의 향기로 뒤덮였다.
구골나무꽃이 피는 계절은 겨울 초입이었다.
아직 꽃을 피울 단계가 아니었다.
“벼리야...”
벼리를 부르는 소리와 함께 향기가 흩뿌려졌다.
“벼리야...”
소리와 향기가 함께 흩뿌려지면서 슬픔이 퍼졌다.
슬픔이 뚝뚝 떨어지는 소리였다.
구골나무였다.
“안녕, 구골나무 님, 구골나무 님 소리는 정말 향기가 좋아요.”
벼리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의 향기가 좋다고 말했다.
소리와 향기는 다른 감각이었다.
“벼리야, 향기를 잃어버린 아이가 있어. 그 아이에게 향기를 찾아 줘. 그 아이가 향기를 잃어버려서 난 꽃을 피우지 못해. 나의 꽃은 향기로 피는 꽃이거든.”
구골나무는 향기를 잃어버린 아이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소멸하고 싶지 않은 자와 소멸이 되고 싶은 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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