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_망망대해 홀로 놓여 있는 아이
사람이 태어나면 하늘에는 별이 하나 태어나고 땅에는 꽃이 하나 피어난다. 그 별과 꽃의 이야기를 듣는 소녀는 어느 날 슬픈 비밀을 알게 된다.
<38화>
망망대해 홀로 놓여 있는 아이
* * * * *
야심가였던 정우의 아버지는 결국 서주병원 원장이 되었다.
정우는 형과 누나가 있다.
둘 다 의사다.
머리가 좋아 모두 명문의대를 나왔다.
서주병원 원장인 서 원장의 자랑스러운 아들딸이었다.
정우는 예외였다.
정우의 형과 누나는 정우와 엄마가 달랐다.
정우의 아버지 서 원장에겐 원래 아내가 있었다.
아들과 딸을 아주 잘 키우는 참한 아내였다.
아들딸을 잘 키우는 참한 아내라고 해서 무조건 남편의 사랑을 받는 것은 아니었다.
정우의 아버지는 야심가였다.
출세를 위해선 무엇이든 희생할 수 있었다.
그것이 조강지처였어도 마찬가지였다.
정우의 아버지는 출세를 위해 돈 많은 집안의 여자와 결혼했어야 했다.
하지만 정우의 아버지는 다른 건 모두 출세와 야심을 위해 판단했지만 정우의 어머니만은 의지대로 하지 못했다.
정우의 어머니는 술집에서 노래하던 처녀였다.
그러다 서 원장을 알게 되었다.
훗날 행동의 결과를 보면 정우의 어머니가 정우 아버지를 만난 것은 우연이 아닌 계획에 의한 것이었을 거란 추측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서 원장은 어쩔 수 없는 사소한 실수로 정우의 엄마와 결혼해야만 했다.
결혼해야만 하는 처지가 되어서 어쩔 수 없었던 일이었다.
정우가 태어났고 정우는 너무 사랑스럽게 생긴 아이였다,
정우는 순했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몰라도 될 일을 너무 일찍 알았다.
형과 누나에게 자신이 얼마나 원망스러운 존재인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정우는 본성이 착한 아이였다.
자신은 어느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은 태어나자마자 다른 사람에게 아픔을 주는 사람이었다.
형과 누나는 정우가 자신의 자리를 뺏을까봐 전전긍긍했다.
정우는 형과 누나가 걱정하는 것이 미안했다.
어서 빨리 도망치고 싶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정우를 데리고 외출했다.
정우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살갑지 않았다.
아들을 데리고 어디를 놀러가거나 할 사람이 아니었다.
정우는 아버지가 자신을 예뻐해서 데리고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았다.
어렵기만 한 아버지였지만 어딘가를 따라서 가는 것은 가슴이 뛰는 일이었다.
정우는 최대한 예의바르고 착한 아이가 되도록 노력했다.
아버지가 데려간 집은 아버지가 주치의로 일하는 집이라고 했다.
거대한 집이었다.
정우는 조심스럽게 아버지 뒤를 따라 갔다.
그곳에는 자기 또래의 사내아이가 하나 있었다.
정우는 키가 큰 편이었다.
그 아이는 정우와 동갑이라고 들었는데 키가 자그마했다.
병약해 보였다.
정우의 아버지가 그 아이와 잘 놀고 있으라고 했다.
그 아이는 도현이라고 했다.
말이 별로 없는 아이였다.
정우도 그리 말이 많은 아이는 아니었다.
그러나 금세 도현과 친해졌다.
도현은 말이 없이 수줍은 아이처럼 보였지만 정우의 마음을 열게 하는 능력이 있었다.
도현은 자신의 방으로 정우를 데리고 갔다.
도현의 방에는 아이들이 가질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있었다.
장난감 숍이 집에 차려져 있나 생각이 들었다,
도현은 정우에게 맘에 드는 장난감을 고르라고 했다.
정우는 자신의 것을 욕심내는 일이 죄스럽다고 생각했었다.
자신은 형과 누나의 것을 빼앗아간 나쁜 아이였기 때문이었다.
형과 누나는 엄마나 아빠가 보이지 않을 때 정우에게 이렇게 말했다.
“정우야, 잘 들어. 넌 정말 나쁜 아이야. 도둑이야. 강도야. 왜냐면 너희 엄마가 우리 엄마를 내쫓고 우리집에 들어왔어. 맞지?”
“으, 으응....”
“그러니 너랑 너희 엄마는 순 날강도야. 너는 우리집에서 네 것을 가지면 안 돼. 왜냐면 넌 강도처럼 들어온 거니까. 알았지? 넌 절대 아무 것도 가지면 안 돼. 네 것은 아무 것도 없어.”
어른들이 있을 때 형과 누나는 배다른 동생도 사랑하는 더없이 착한 아이들이었다.
정우는 너무 어린 아이였다.
이런 상황을 정우가 책임질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정우는 태어나면서부터 원죄를 짊어진 아이였다.
어린 정우는 너무 일찍 자신이 나쁜 아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도현이란 아이는 자기네 집에 있는 장난감들이 맘에 들면 모두 골라서 가지라고 했다.
정우의 집에선 그 무엇도 정우의 것을 가지면 안 된다고 억압했었다.
소심한 정우로서는 너무도 다른 상황에 놀랄 일이었다.
괜찮다고 했다.
도현은 정우가 맘에 들어 하며 소심하게 만져보고 바라보던 것을 기억했다.
정우가 집에 갈 때 도현은 그 많은 장난감을 안겨 주었다.
차에 다 실리지도 않을 양이었다.
정우의 아버지가 사양하며 가져가지 않으려 하자 도현은 정우에게 선물한 것이라고 가져가라고 했다.
“제가 제 친구에게 주는 선물이에요. 장 비서님, 괜찮죠?”
“당연하죠, 도련님.”
“장 비서님, 다음에 이 친구를 또 볼 수 있을까요?”
“좋으세요?”
“네, 자주 보고 싶어요.”
그렇게 해서 정우는 아버지가 도현의 집에 진료를 올 때마다 같이 오게 되었다.
정우 아버지는 회장 아들이 자신의 아들을 좋아해서 다행이었다.
자신의 인생에 피해만 주던 아들이 뭔가 도움이 되는 일이 있었다.
도현은 조금 우울한 아이였다,
어머니가 늘 아파 있으니 웃으면 죄가 되는 거라고 생각했다.
도현의 엄마는 음식을 잘 못 먹었다.
어쩌다 먹어도 잘 토했다.
언제나 음식이 앞에 있으면 얼굴을 먼저 찡그렸다.
아들인 도현에게 뭔가 먹으란 말을 해야 하는데 영애는 몸이 너무 많이 안 좋았다.
도현은 자신이 음식을 좋아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엄마가 힘들어 하는데 아들만 잘 먹는다는 것은 나쁜 일이었다.
엄마가 괴로워하고 있는데 기뻐하는 일을 해도 안 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정우란 아이가 집에 놀러오고는 도현은 조금 달라졌다.
정우는 날렵하게 생긴 건강한 아이였다.
수줍은 아이였지만 아이다움으로 맛있는 음식을 보고선 감탄할 줄 알았다.
“와, 이걸 다 먹어도 돼요?”
“그럼, 다 먹어도 되지.”
“도현 도련님도 정우 도련님이랑 같이 맛있게 드세요. 손님이 있는데 주인이 너무 안 먹어도 예의가 아니에요.”
“정말 맛있겠다. 도현아, 나 먹어도 돼?”
정우는 처음 먹어본 음식이 많았다.
너무 맛있어서 저절로 탄성이 자주 나왔다.
탄성이란 옆에 있는 사람에게도 감탄이 되는 거였다.
“와, 꽃 예쁘다!”
누군가 이렇게 탄성을 지르면 사람들은 그 꽃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똑같이 감탄하게 되었다.
탄성은 그런 효과가 있었다.
도현은 어떤 음식을 앞에 두고 맛있다는 탄성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집에 아이라고는 도현밖에 없었다.
도현은 정우가 온 뒤로 잘 먹기 시작했다.
도현은 자신이 잘 먹어도 엄마에게 미안하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웃어도 괜찮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도현은 조금 밝은 아이가 되었다.
조금 튼튼한 아이가 되었다.
진 회장은 정우가 와서 도현이 건강해지는 것이 좋았다.
진 회장은 닥터 서를 더 많이 의지하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정우는 보지 않아야 할 것을 보고 말았다.
도현이 독감에 걸린 날이었다.
정우가 도현에게 갔을 때 도현은 약을 먹고 잠깐 잠이 들어 있었다.
정우는 도현이 잠들어서 잠시 집을 돌아보고 있었다.
도현의 집은 아이들에게는 커다란 성처럼 넓었다.
정우는 이곳저곳을 돌아봤다.
돌아보는데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우는 반가워서 아버지의 목소리를 찾아 갔다.
어떤 방이었다.
아버지가 장 비서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서 선생님, 내일 사모님을 병원으로 보내는 것은 문제가 없겠죠?”
“걱정 마세요. 사모님은 현재 정신상태가 명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아들을 죽이려고 한 사건이 있어서 문제없습니다.”
“그런데 사모님은 왜 그렇게 갑자기 아들을 죽인다고 발작을 한 거죠?”
“사실 제가 손을 좀 썼습니다.”
“손?”
“원래 지속적으로 안정제 약을 드셔야 하는데 제가 약 처방을 할 때 약을 하나 뺐습니다.”
“아, 그래서 감정통제가 더 안됐군요. 언제쯤 병원에서 차가 오죠?”
“내일 밤 사람들이 모두 잠든 시간에 모셔 갈 겁니다. 다음 날 사람들이 찾으면 밤새 발작이 찾아와서 병원으로 모셨다 하면 될 것 같습니다.”
“내일이 딱 좋아요. 회장님이 내일 해외에 가세요. 박 상무와 함께 알아서 하라고 했어요. 본인이 직접 하긴 그렇다고.”
“그럼 내일 밤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정우는 어른들의 말이라서 무슨 말인지 정확히 알아듣기는 어려웠다.
그런데 도현의 어머니를 무슨 병원인가로 강제로 데려간다는 소리는 알 수 있었다.
사실 도현은 어머니가 발작을 일으켜 아들을 욕실에 빠뜨려 죽이려는 바람에 감기에 걸린 것이었다.
메이드들이 하는 소리를 들었다.
“사모님, 너무 불쌍해. 이젠 가망이 없으신가봐. 도현 도련님을 욕실에 빠뜨리려고 했잖아.”
“사모님 조금 좋아지신 것 같았는데 왜 갑자기 상황이 더 안 좋아진 거야?”
“장 비서 봤어? 장 비서 하는 거 보고 어떻게 정상일 수 있겠어? 나 같아도 없던 히스테리가 생기겠어.”
“맞아. 심약한 사모님은 더 심하겠지. 그래서 더 아프시구나.”
“도현 도련님은 괜찮아?”
“말도 마. 너무 놀랐잖아. 아직 어리신데 엄마가 물에 빠뜨리려고 했으니 얼마나 놀랐겠어. 원래 허약하신데 아픈 것이 당연하지.”
“그래서 주치의가 저렇게 일찍 온 거구나.”
“난 주치의 맘에 안 들어. 장 비서랑 너무 친해. 우리 사모님한테 무슨 꿍꿍이를 벌이는 것도 같고.”
“그렇게 의심하면 도현 도련님 너무 무섭잖아. 우리가 거기까지 나가지는 말자.”
정우는 이 말을 들으려고 해서 들은 것이 아니었다.
도현은 주사를 맞고 잠들어 있었다.
정우 아버지는 장 비서와 이야기를 하러 갔다.
혼자 장난감방에 있던 정우는 옆방에서 일하던 메이드의 소리를 우연히 들었던 것이다.
정우는 순간 도현이 가엾었다.
이 넓은 집에서 도현의 편은 아무도 없었다.
혹시 편이 있다면 아까 이야기를 나누던 메이드 정도였다.
도현은 망망대해에 홀로 놓여있는 아이였다.
정우는 도현의 침대로 가서 도현의 곁을 지켜주고 싶었다.
도현의 어머니는 내일 밤 병원으로 데려간다는 말 같았다.
정우는 이 말을 도현에게 어떻게 알려줘야 할지 고민했다.
하지만 직접 말할 수는 없었다.
정우의 아버지가 벌이고 있는 일이었다.
그래도 정우에겐 아버지였다,
어린 아이가 아버지를 배신하는 일은 어려웠다.
정우의 아버지는 야심이 커서 친구의 어머니를 병원에 강제 입원시킨다고 했다.
정우의 어머니는 본처를 쫓아내고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정우의 형과 누나는 어른이 없을 때마다 정우를 괴롭혔다,
정우의 가족들은 모두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정우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어린 아이였다.
정우는 도현을 위해 무언가를 하고 싶었다.
표시를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도현은 영리한 아이니까 정우가 남긴 표시를 알아차릴 것이었다.
정우는 도현의 침대 머리맡에 카드를 써서 두었다.
정우나 도현 모두 글씨를 쓰고 읽을 수 있었다.
<도현아, 내일밤 잠을 자면 안 돼. 엄마가 위험해>
소멸하고 싶지 않은 자와 소멸이 되고 싶은 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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