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진가쟁주 설화(2)
뭔가 있나 싶어서 허리를 숙이고 밑을 바라봤다. 깜깜한 침대 밑에서 붉은 눈동자가 반짝하더니 보라색 쥐 한마리가 빠르게 빠져나왔다. 징그러운 모습에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아파트에 쥐가 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아서 멍하니 쳐다봤다.
놈은 방 곳곳을 빠르게 돌아다니다가 내 얼굴을 향해 뛰어들었다. 손으로 쳐내려는 순간 손가락 끝을 물려버렸다. 손을 흔들어도 안 떨어지길래 반대 손으로 세게 털어냈다. 쥐는 떨어졌지만 손톱과 함께 손가락 끝이 조금 뜯겨 나갔다. 물린 손가락에서 피가 조금씩 나온다.
화가 난 나는 책상 위에 놓인 두꺼운 수학책을 들고 뭔가를 질겅질겅 씹어 먹는 놈을 향해 던졌다. 정확하게 날아가던 책은 쥐의 바로 앞에서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바닥에 떨어졌다. 놈은 붉은 눈으로 나를 무섭게 쳐다봤다. 다시 한 번 소름이 돋았다.
뭔가 잘못된 거라고 생각한 나는 문밖으로 도망치려고 했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발뿐만이 아니라 온 몸이 덜덜 떨리면서 꼼짝도 하지 않는다. 목도 잠겨서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다.
쥐의 몸에서 보라색 거품들이 뽀글뽀글 소리를 내며 계속 생겨났다. 계속 불어난 거품덩어리는 어느새 내 키만큼 커졌다. 거품들은 조금씩 작은 크기로 쪼개져가면서 사람 형상을 만들어갔다. 그것들은 점점 세분화 되다가 눈으로 구별할 수 없을 만큼 작게 쪼개지고 나서야 분열이 멈췄다.
사람 형상 밑에서 검은 연기가 한 번에 확 피어올랐다. 연기가 서서히 사라지면서 검은 갑옷을 입은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남자가 검게 가려진 얼굴을 쓰윽 닦아내니 매일 거울 속에서 보던 내 얼굴이 나왔다. 놀라서 소리를 질렀지만 바람만 새어나오고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퉤, 아우 더럽게 맛없네.”
남자는 손가락으로 혓바닥을 쓸어내리면서 말했다. 사극에서나 나올법한 갑옷을 입은 그는 내가 던졌던 책을 집어 들고 내 머리를 퉁퉁 쳤다.
“야. 실수로 살점 조금 뜯어먹었다고 이 두꺼운 책을 던져? 내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네가 가만히 안 있어서 그랬던 건데 나한테 그러면 안 되지. 어? 야 입이 달렸으면 말을 해봐.”
그는 팔짱을 끼고 나를 무섭게 쏘아보다가 멋쩍게 웃었다.
“아, 맞다. 지금 말 못 하구나.”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몸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묻고 싶은 게 잔뜩 있었지만 머릿속이 꼬여서 뭐부터 물어봐야할지 생각이 안 났다. 바로 도망치는 것도 생각해봤지만 이 놈 앞에서는 무리일 것 같다. 고민하면서 멀뚱멀뚱 쳐다만 보자 그는 짜증내며 말했다.
“야. 이제 말할 수 있잖아. 빨리 떠들어봐.”
“저기 그, 그러니까 누구세요?”
“자서다.”
“네?”
“두 번 말하게 하지마라 꼬마야.”
“아, 죄송합니다.”
“아까 책 왜 던졌어?”
“평범한 쥐인 줄 알았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래.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라.”
“네. 그런데 왜 저랑 똑같은 얼굴을 하고 계세요?”
“그야 당연히 네 손톱을 먹었으니까 그러지.”
“왜 드신 거예요?”
“네가 아까 말했잖아. 몸이 두 개였으면 좋겠다고”
“그건 그냥 혼잣말이었는데”
“야 지금 네 말대로 해준 건데 불평하는 거냐?”
“아, 아닙니다.”
“잘 들어. 지금 내가 네 소원을 이뤄줬잖아. 그치?”
“네.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럼 너도 대가로 뭔가를 해야 되겠지?”
“제가 뭘 해야 하나요?”
“간단해. 그냥 혼을 조금 나눠주면 돼. 너는 이 몸을 네가 원하는 대로 쓰면 되고 대신에 나는 내 배를 채운다. 어때 좋은 거래잖아?”
“그렇지만 어떻게 혼을.......”
“걱정할 거 없어. 영혼에 상처가 안 남도록 아주 조금씩 갉아먹을 거고 한 번 먹고 나면 다시 원래 상태로 회복하기 전에는 손대지 않을 예정이다. 그러니까 네가 손해 보는 건 전혀 없어. 너는 네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있어. 그냥 나랑 만난 걸 감사히 여기면 되는 거야.”
“그런데 몸이 두 개여도 부모님이 집에 계시는 이상 제가 하고 싶은 대로 못하는데요.”
“이걸 주마.”
그는 내게 보라색 구슬을 건넸다. 손에 닿은 구슬은 그대로 녹아서 사라져버렸다.
“머릿속으로 네가 원하는 공간을 정하고 그 경계를 선으로 상상해봐라.”
내방 전체를 정하고 선이 있다고 생각해보았다. 그러자 내 방 전체에 분위기가 달라졌다. 냄새도 달라지고 색감도 조금씩 어두워졌다.
“이곳은 네가 만든 별개의 공간이고 다른 사람은 경계를 넘어갈 수 없어. 누군가 이 방에 들어와도 그건 여기와는 별개의 공간이니 너는 네가 만든 공간 안에서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겠지.”
“신기하네요.”
“네 머리 안의 정보는 전부 얻었으니 나는 네가 원하는 대로 너를 연기하겠다. 너는 네가 하고 싶은 걸 해라. 참고로 내가 너로 있을 때의 경험은 네가 잘 때 머릿속으로 흘러들어 갈 거다.”
“네. 감사합니다.”
그가 손가락을 튕기니 그의 복장의 내가 입고 있는 것으로 변했다. 완벽하게 내 모습을 한 그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가끔씩 세상에는 악마나 요괴 같은 존재가 있지 않을까하고 생각했었는데 실제로 확인하고 나니 기분이 묘하다. 만약 만나더라도 침착하게 잘 대처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는데 저렇게 압도적일 줄은 몰랐다.
정체도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내 모습을 하고 돌아다닌 다는 게 조금 꺼림칙했지만 그래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 돼서 기분이 좋다.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작업을 시작했다. 들킬 걱정이 없다보니 집중이 훨씬 잘됐다. 선도 깔끔하게 그려지고 캐릭터 구도도 잘 잡힌다.
작업은 새벽 늦게까지 계속됐다. 시간이 많다보니 한 컷 한 컷 공들여서 작업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이전 화에 비교해서 퀄리티가 상당히 올라갔다. 더 하고 싶었지만 서서히 눈이 감겨온다. 나머지 부분은 내일로 미뤄두고 침대에 누웠다.
항상 뭔가에 쫓기는 듯한 기분이 들고 불안했다. 아침에 깨어나는 게 무서워 잠도 잘 들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게 하나도 없다. 마음이 편해서 잠이 잘 온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머리가 상쾌한 적은 몇 년 만에 처음이다. 다만 밖에서 돌아다니고 있는 가짜의 경험이 머리로 들어올 때 기분이 묘하다. 그가 겪은 경험들이 꿈에서 겪은 일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그가 얻은 정보들은 꿈에서 겪은 일처럼 두루뭉술하게 남는 게 아니라 머릿속에 제대로 박혀있다. 수업 때 뭘 배웠는지 누구와 무슨 얘기를 했는지 전부 내 머릿속에 있다. 마치 만화 속 주인공이 분신술을 쓰는 것 같다.
보라색 쥐가 나타난 이후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웹툰에 투자했다. 동영상 강의를 통해 인체비례와 명암표현에 대해 더 공부하고 지도 어플의 로드뷰 기능으로 배경에 쓸 자료를 모았다. 내 만화는 점점 섬세해졌고 그에 따라서 인기도 늘었다. 이대로만 간다면 나는 평생 행복한 기분으로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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