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라 불리는 남자
아, 지루하다.
계혁은 구시렁거리며 침대 위에서 데굴데굴 굴렀다.
돈이 없으니 할 수 있는 게 없다.
저번에 빌린 돈은 이미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계혁의 성격대로라면 벌써 다 써버렸겠지만, 이번 달에 내야 할 이자를 생각하면 섣불리 쓰기가 망설여진다.
이제 계혁에게 급전을 해주는 이는 그가 유일하기에 가능하면 심기를 거스르고 싶진 않다.
그래서 이 화창한 날, 방에서 나가지 못하고 이러고 있다.
“으아아아아아아!”
결국, 무료함을 견디지 못한 계혁이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안 되겠다.
누구라도 만나자.
계혁은 핸드폰을 꺼냈다.
저장된 연락처는 많았다.
대부분 연락이 제대로 안 돼서 문제지.
그중 최근에 연락이 되었던 것이 누군지 생각하다가 문득 전 여자친구인 유리가 떠올랐다.
전 여자친구라고는 해도 겨우 한 달 전에 헤어진 사이다.
좋게 헤어진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유리라면 만나줄 터였다.
밥 한 끼 얻어 먹어보실까.
계혁은 거리낌 없이 통화버튼을 눌렀다.
-연결이 되지 않아···.
신호도 가지 않고 곧바로 안내 메시지가 나오는 것을 듣고 계혁은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보나 마나 차단한 것 같다.
망할 년.
그렇게 나 좋다고 덤빌 땐 언제고.
계혁이 대학교 4학년 때 만났던 유리는 소위 말하는 금수저였다.
대기업은 아닌 것 같지만 잘나가는 중견기업 사장의 딸로 꽤 씀씀이가 좋았다.
그런 그녀가 어떻게 계혁과 사귀게 되었냐 하면 그녀 쪽이 먼저 접근했다.
“선배, 선배가 그렇게 족보를 많이 아신다면서요?”
“족보? 그럼. 내가 족보는 좀 잘 알지.”
물론 시험 족보는 아니다.
섯다 족보나 포커 족보에 빠삭할 뿐이다.
그래도 계혁은 모르는 척 그렇게 대답했다.
안 그래도 유리는 계혁이 노리는 여자 중 하나였다.
데리고 다니기에 부끄럽지 않을 외모 수준에, 몸매도 그럭저럭 괜찮다.
뭣보다 돈이 많다.
듣기로 그녀와 사귀었던 전 남자친구는 차 한 대 선물 받았다는 것 같다.
그래서 상대도 유리와 오래 사귀기 위해 발버둥 친 모양이지만 그 모습이 오히려 흥미를 떨궜다고 했다.
그래서 계혁은 다소 싸가지없는 또라이를 연기했다.
아, 정정한다.
연기하진 않았다.
계혁은 원래 싸가지없는 또라이였으니까.
계혁은 족보를 가르쳐준다는 명목하에 유리를 불러냈다.
계혁이 자주 가는 싸구려 선술집에 들어서는 유리는 그야말로 여신이었다.
화사한 화장에 산뜻한 옷차림.
거기에 반짝이는 명품가방.
그녀는 그런 곳은 처음이라 말했다.
“그래? 그럼 앞으로 내가 자주 데리고 다녀줄게.”
처음은 계혁이 샀다.
그리고 계혁 특유의 화술로 유리를 농락했다.
솔직히 말해 얼굴이 따라주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계혁이 싸가지없이 굴어도 여자들은 세상 제일의 유머를 들은 것처럼 깔깔대곤 했으니까.
유리도 썩 다르진 않았다.
“아, 선배 개 웃겨요. 하하하.”
맑은 웃음소리.
솔직하게 아주 조금 마음이 설레긴 했다.
그렇게 털털하고 해맑은 여자는 처음이었다.
그래도 그녀도 그렇게 다르진 않았다.
“어떻게 오빠는 밥 한 번을 안 사?”
만난 지 2년 되던 날, 그녀는 학을 떼며 이야기했다.
그 날, 그녀가 예약해둔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중간까지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그녀는 아니었던가 보다.
“맨날 내가 주는 선물만 받아 챙기고, 왜 나한텐 그 흔한 지갑 하나를 안 사줘?”
“너 지갑 많잖아.”
“뭐? 필요해서 달라는 게 아니잖아! 매번 나한텐 이거 사달라, 저거 사달라 하면서 왜 오빠는 한 번을 안 사주냐고!”
“니가 뭐 필요하다고 말한 적 없잖아.”
“···야, 세상 사람들 다 너 같은 줄 아냐? 말해야만 사주게? 하다못해 내가 평소에 바르던 립밤이라도 하나 사다 줄 수 있는 거 아냐?”
계혁도 알고는 있다.
그녀가 자신에게 지나치게 잘 해주었다는 것을.
기념일마다 명품가방이다, 명품 벨트다, 명품 시계다···.
사다 날리기도 많이 사다 날렸고 챙기기도 많이 챙겼다.
계혁은 기억도 나지 않는 첫 키스 기념일부터, 2주년 기념일까지.
물론 계혁은 단 한 번도 그녀에게 기념이라고 선물 준 적이 없다.
돈 아깝게 뭐하러 그런 짓을 하는가.
그녀가 필요한 게 있다면 그녀가 사겠지.
돈 없는 자신과 다르게 말이다.
“넌 돈 많잖아. 니가 사면 되지.”
생각만 한다는 게 말로 나와버렸다.
유리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실수라고 이야기하기도 전에 눈앞에 불이 번쩍이며 얼굴이 돌아갔다.
빌어먹을 년.
생각하니까 또 열 받는다.
그래도 헤어지고 2주가 지난 지지난 주에 불러냈을 땐 계혁의 전화를 받았었다.
커피 한잔하자는 계혁의 말에 그녀는 의외로 순순히 나왔다.
“뭔데? 다시 시···.”
“나 돈 좀 꿔주라.”
새침한 얼굴로 뭔가 이야기를 꺼내던 그녀의 얼굴이 급격하게 달아올랐다.
이번에도 계혁이 뭐라 하기도 전에 손이 날아왔다.
순간적으로 피하자 그녀가 어이없다는 듯 계혁을 쳐다보고 있었다.
“야이씨, 너 그 손버릇 고쳐라. 다음 남자친구한테 욕먹는다.”
계혁의 말에 유리는 얼굴이 시뻘게졌다.
그야말로 터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그러다 이내 무슨 생각을 한 건지 김이 빠진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 내가 너란 인간한테 뭘 기대하냐. 쓰레기 새끼. 다른 애들 다 너더러 쓰레기라고 하는 거 알면서도 사귄 내가 병신이지.”
그녀는 경멸 섞인 얼굴로 계혁을 내려다보곤 그대로 카페를 나가버렸다.
뒤늦게 계혁이 잡아보려 했지만 남은 것은 딸랑이는 종소리뿐이었다.
망할 년.
그 커피값이 당시에 남아있던 유일한 재산이었는데.
결국, 계혁은 어쩔 수 없이 또 그 남자에게 전화해야만 했다.
-맑음햇살론입니다.
“아, 접니다. 하하하하. 이번에도 돈 좀 빌리고 싶은데요.”
-···이제 돈 안 빌려드린다고 이야기했는데요.
“에이, 제가 사장님 아니면 어디서 돈 빌리겠습니까? 여차하면 또 몸 굴려서라도 드릴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남자는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결국 알았다고 이야기했다.
그 때 빌린 돈이 200만 원.
2주가 지난 지금 남은 돈은 20만 원.
다음 달에 갚아야 할 돈,
이자만 약 60만 원.
계혁은 고민 중이었다.
20만 원이라도 남겨서 준 다음에 남은 이자는 한 번 기다려달라고 할 것인지,
또 한탕을 뛰어야 할 것인지.
아, 누가 그 새끼 좀 안 죽여주나.
그럼 돈 안 갚아도 될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계혁은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었다.
한 30분쯤 지났을까.
계혁은 결심한 듯 작은 한숨과 함께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
“아, 귀찮아.”
아까와는 다른 연락처 폴더를 뒤지며 계혁은 우거지상을 했다.
밥을 사줄 지인을 찾는 건 아니었다.
이번에는 고객이 되어줄 여자를 찾기 위해 바삐 손을 움직였다.
Comment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