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냥 준비
이상하다.
아까부터 나무 그늘에 숨어있는 해보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멀리 보이는 한 남자 때문에 해보리는 꼼짝도 못 하고 나무 그늘 뒤에 숨어있는 참이었다.
허름한 의복에 눌러쓴 낡아빠진 모자.
거구의 몸을 잔뜩 움츠리고 뭔가를 보고 있는 듯하다.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분위기로는 막노동 같은 걸 하는 사람 같아 보인다.
이상하다고 하는 것은 그의 행색이 아니었다.
뭐, 일이 잘리기라도 했다면 당연히 그럴 수 있다.
요즘 권고사직 당하고 멍하니 시간을 죽이는 중년 남자들이 한둘인가.
하지만 이상한 건,
벌써 세 시간 째 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후···.”
더운 여름 햇살이 해보리의 머리 위를 뜨끈하게 달군다.
이대로는 머리가, 뇌가 익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렇게 된다면 어쩌면 이 기억도 지워질까.
멍한 머리로 그렇게 생각하던 해보리는 고개를 내저었다.
슬슬 다리도 아프다.
뺨을 스치는 나뭇잎의 감촉이 따갑다.
머리는 곧 터져버릴 것 같다.
그래도 남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세 시간.
해보리가 남자를 발견하고 나서 세 시간이 지났다는 것이지,
남자가 세 시간 동안만 저기 앉아있었다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네 시간을 앉아있었는지도 모른다.
해보리가 처음 그를 발견했을 때도 그는 저 자세 그대로 앉아있었다.
상담센터에 갈 때는 발견하지 못했으니,
길면 네 시간 정도 저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늘이라도 아직 공기가 후덥지근하다.
빼빼 마른 몸매의 해보리지만 온몸을 감싸는 긴 팔, 긴 다리의 의복 때문에 땀이 찬다.
결국, 해보리는 견디지 못하고 슬쩍 나무 그늘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빙 둘러서 가자.
남자가 있는 쪽에서 최대한 먼 길을 생각한다.
이내 갈 길을 정한 듯 해보리는 나무 사이로 숨어들었다.
바삭바삭 소리가 들리긴 하지만 매미 소리에 지워질 것이다.
새파랗게 색이 오른 나뭇잎이 해보리의 가냘픈 몸을 감싸줄 것이다.
그렇게 남자를 지나치던 해보리가 문득, 무슨 생각에선지 남자 쪽을 보았다.
“···.”
쿵.
해보리는 거의 쓰러지듯 넘어지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 얼굴은 새하얀 백지 같다.
조금 전까지 발그레하게 열이 올라있던 그 얼굴은 이미 찾아볼 수도 없을 정도로 창백하다.
해보리의 온몸이 떨린다.
그녀의 눈은, 그녀의 뇌는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놈이다.
그놈이다.
해보리를 이렇게 만든 그놈이다.
해보리는 까무러치듯 정신을 잃었다.
해보리가 눈을 뜬 것은 저녁 무렵이었다.
옆에서 귀찮다는 얼굴을 하며 앉아있던 어머니가 해보리가 눈을 뜬 것을 보고 표정을 바꿨다.
“해보리, 괜찮니?”
“···.”
해보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 그녀를 머쓱하게 쳐다보던 어머니는 어색한 듯 억지로 입을 열었다.
“저녁밥 받아 놨는데 좀 먹지 그러니?”
해보리는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는 그녀를 싸늘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다가 화들짝 놀라며 입을 가렸다.
“어, 음, 그럼 엄마는 갈 테니까 쉬렴. 검사에는 별 이상 없다는데 한 이삼일 쉬다 나오는 게 좋겠다.”
해보리의 입가에 싸늘한 웃음이 번졌다.
그렇겠지.
그래야 당신이 편하니까.
해보리의 얼굴이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듯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머니는 재빨리 가방을 챙겨 나가 버렸다.
해보리에게 남은 건 차갑게 식은 병원 밥과 어머니 명의의 카드 한 장뿐이었다.
해보리는 물끄러미 카드를 바라보다 쓰게 웃었다.
그 날이 기억났기 때문일 것이다.
해보리의 부친은 유명한 변호사다.
해보리가 태어나기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그랬기에 그 서슬 퍼런 기억의 날이 더 아프다.
어머니는 엉망이 되어 돌아온 해보리를 보며 말했다.
“왜 이렇게 더러워···?”
해보리에게 묻은 피나 체액보다도 몸에 묻은 더러움이 먼저 보였던 모양이었다.
그녀는 한참이나 해보리를 못마땅하게 쳐다보며 구시렁댔다.
멍하니 눈을 열고 있던 해보리의 눈에서 주르륵 눈물이 흘렀다.
그제야 그녀는 호들갑을 떨면서 해보리를 살피기 시작했다.
“어머 어머, 딸. 이게 무슨 일이야.”
그녀는 곧바로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잘나신 남편은 언제나 그렇듯 냉정했다.
-근데? 뭐 급해?
“아니, 애가 완전 만신창이가 돼서 돌아왔다니까? 옷에 막 피도 묻었고···, 그, 그···.”
-뭐? 폭행이라도 당한 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
울고 있는 해보리를 내버려 두고 그녀는 남편에게 최대한 침착하고 냉정하게 사태에 관해 설명했다.
그러자 남편, 해보리의 아버지는 말했다.
-병원 데려가. 나 바빠.
그 날 이후로 해보리는 그 남자를 아빠라고 부르지 않았다.
부를 이유도 없었다.
그는 거의 집에 들어오지 않았고, 현재도 거의 집에 오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일이 바빠서만은 아니다.
두 집 살림하느라 바쁘기는 하겠지만.
어머니는 해보리를 어떻게 취급해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처럼 굴었다.
마치 깨져버린 항아리를 다루듯 그녀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래서 던지듯 카드만 주고 도망가곤 했다.
변호사 사무실의 다른 사모님들과의 모임, 동창 모임, 아파트 부녀회,
아직 대학생인 둘째 해소망의 학교 행사.
무슨 행사가 그리 많은지 집에 붙어있지를 않았다.
당연히, 행사가 많기 때문만은 아니다.
젊은 애인의 뒷바라지를 해주느라 바쁘기는 하겠지만.
가장 해보리를 따스하게 품어주어야 할 가정에서 해보리는 버려졌다.
아무도 해보리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더러운 쓰레기 보듯 바라보거나 깨져버린 유리구슬을 바라보듯 바라보았다.
“저걸 어디다 시집 보내나. 평생 데리고 살아야지, 뭐.”
새벽,
목이 말라 일어났던 해보리에게 들린 아버지의 말이었다.
아버지에게는 원래부터 애정이 없었지만, 그래도 가슴이 아팠다.
“몰라, 더럽게. 난 우리 남편이 첫 남자잖아. 저런 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낮,
상담센터에 갔다 오던 해보리에게 들린 어머니의 말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이성적이긴 했지만, 그래도 해보리에게는 좋은 어머니였다.
그렇기에 이때는 아무리 감정에 무뎌져 버린 해보리라 해도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해보리는 생각했다.
부모님은 없는 것처럼 생각하자.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자.
그러자 너무나 외로워졌다.
그것이 해보리가 계속 그 무성의한 상담센터에 다니는 이유였다.
최소한 그들은 해보리의 말을 들어주고, 해보리의 눈을 바라봐 주었으니까.
“···.”
해보리의 머리에 아까 본 남자가 떠올랐다.
얼굴을 보자마자 까무룩 기절을 해버렸지만, 확실했다.
그 남자다.
그 남자가 다시 해보리의 앞에 나타났다.
해보리의 몸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두렵기 때문일까.
아니, 그것은 아닌 듯했다.
그 얼굴에 서린 것은 공포만은 아니었다.
해보리의 눈이 어둡게 빛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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