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냥 전야
두혁은 오랜만에 기분이 좋았다.
더운 땡볕 아래에서 죽치고 앉아있던 보람이 있었다.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뛰는 그런 여자를 만난 것이다.
평소 노리던 연령대는 아니었지만,
그 연령대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어려 보이는 여자였다.
처음에는 언니 옷을 입고 다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어울리지 않는 성숙한 복장에 눈이 갔다.
그리고 이내 얼굴을 보고 입가 가득 미소가 번졌다.
그 년.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그 년이다.
그 년의 얼굴과 똑 닮았다.
까만색 단정한 치마 아래로 쭉 뻗은 하얀 다리.
몸의 선을 가리지만 정중한 분위기가 흐르는 재킷.
답답한지 첫 단추만 살짝 풀고 리본을 맨 블라우스.
완벽하다.
아쉬운 건 연령대 정도다.
사냥을 할 땐 언제나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신중한 두혁은 즉흥적으로 행동하지 않았다.
약 2주 정도 그녀의 뒤를 쫓아다녔다.
그녀가 직장동료와 함께 간 카페에서 옆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엿듣거나,
그녀의 출근길과 퇴근길을 따라다니며 정보를 수집한 결과
이제 회사에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입사원인 것을 알았다.
평소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두혁은 10여 년을 굶주렸고,
생존에 필요한 것이 갖추어졌더니 굶주림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이 이상 땡볕에서 사냥감을 물색하다간 타죽을지도 모른다.
두혁은 아쉬운 대로 타협하기로 했다.
그녀를 바라보며 두혁은 중얼거렸다.
“큭큭, 예쁜아. 내가 곧 엄청 이뻐해 줄게.”
그러나 두혁은 몰랐다.
뒤에서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마치 자신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자신을 바라보는 여자가 있다는 것을 말이다.
“···.”
해보리는 창백해진 얼굴로 손톱을 물어뜯었다.
이미 너덜너덜해진 손톱에서 살짝 피가 흐르고 있는데도 그녀는 모르는 듯했다.
피로 물든 손톱을 계속 깨무는 바람에 입술이 피로 붉게 물들고 있었다.
남자가 여자를 따라 움직이자 해보리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남자에게서 약 30M 정도 떨어진 채 발소리도, 숨소리도 죽이고 조용히 따라갔다.
다행히 남자는 여자에게 집중하고 있어 해보리를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하긴, 눈치챘다면 벌써 3주일째 미행하고 있는 해보리를 그냥 두었을 리 없다.
이미 해보리를 어떤 방식으로든 떼어내거나 공격해 왔을 터였다.
그런 상황을 생각하기만 해도 해보리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미 말라버렸다고 생각한 눈물이 눈시울을 뜨겁게 달군다.
그 날의 기억이 떠올라 숨도 쉬기 힘들어진다.
손발이 파르르 떨리고 그저 숨고 싶어진다.
세상에 혼자 남은 해보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숨는 것뿐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해보리가 이렇게 남자를 미행하기 시작한 이유는 하나였다.
다시는 해보리와 같은 피해를 보는 사람이 나오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해보리는 퇴원한 날, 곧바로 남자를 발견한 공원으로 향했다.
그 날의 일은 그의 충동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자리에 이제 그가 없는 건지도 모른다.
혹시라도 그가 개과천선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해보리의 생각을 비웃듯, 남자는 그 공원에 앉아있었다.
해보리는 남자를 발견했던 그 날처럼 나무 그늘에 숨었다.
이번엔 나름대로 만반의 준비를 해 왔다.
꽁꽁 얼린 물과 미니 선풍기, 그리고 모자도 준비해 왔다.
해보리는 풀숲 속에 털썩 주저앉아 그를 바라보았다.
매미 소리 때문에 다른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모든 신경을 오로지 남자의 등을 바라보는 것에 쏟을 수 있었다.
주르륵 땀이 흘러내린다.
해보리는 가져온 얼음물을 목에 갖다 대었다.
어느새 얼음물은 살짝 녹아 겉에 물방울이 맺혀있었다.
그 날부터 매일매일 해보리는 그 자리에서 그를 지켜보았다.
새벽 6시 30분이 되면 간단히 요기할 것과 물을 챙겨 그 자리로 갔다.
남자는 7시 30분쯤이면 그 자리에 어슬렁어슬렁 나타났다.
물도 먹을 것도 챙기지 않은 남자가 어떻게 매일을 버티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해보리는 나름의 방법으로 더위와 싸우며 남자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난 그 날.
남자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남자는 한창 출근길을 서두르고 있는 한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막 20살이 넘겼을까 말까 한, 이제 막 여자가 되었다는 느낌의 앳된 티가 남은 얼굴.
아직 높은 굽이 어렵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어설픈 걸음걸이.
단정하게 차려입은 정장.
그리고, 해보리와 꼭 닮은 생김새.
해보리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저 여자가 위험하다고.
남자는 한참을 곰곰이 생각하더니 그 날은 그대로 돌아갔다.
뒤를 쫓을까 고민했지만 잠시 고민하는 사이 남자는 그대로 멀어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다음날도 해보리는 그 자리에 있었다.
이번에는 아무래도 남자가 그녀를 쫓아갈 것이라는 예감이 들어 채비는 따로 하지 않았다.
7시 30분.
그러나 남자는 오지 않았다.
설마 오지 않는 건 아니겠지.
초조해하던 그때 남자는 나타났다.
어슬렁어슬렁.
자리에 앉은 남자는 어제 그녀가 왔던 방향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나.
그는 그녀를 사냥감으로 점찍은 모양이었다.
아주 잠시라도 저 남자가 변했을 거라고 생각한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해보리는 쓰게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부터 2주.
남자는 그녀의 주변을 맴돌았다.
그녀가 들어간 카페에 대범하게 들어가서 이야기를 엿듣기도 하고,
그녀의 출퇴근길을 졸졸 따라다니기도 했다.
차라리 버스나 택시라도 타면 나으련만,
그녀의 회사는 그녀의 주거지 바로 근처인 듯 항상 걸어서 이동했다.
그녀를 구하고 싶으면서도 해보리가 움직이지 않는 이유는 명확했다.
그 날,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지만 모든 게 다 지워져도 지워지지 않는 그 기억의 날.
그때 그 장소는 아무도 없었고, 아무것도 없었다.
사람 하나 죽어도 모를 만큼.
해보리는 지나치게 헐렁한 후드티의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만져지는 차가운 감촉이 해보리의 마음을 진정시켜 준다.
남자는 그녀가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있었다.
낡은 원룸.
한 층, 한 층, 걸어 올라가며 켜지는 계단의 불빛을 확인하며 남자는 웃었다.
이미 그녀가 살고 있는 층도, 집도 알고 있었지만
그는 손가락으로 층수를 헤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또라이 새끼.
그 뒤에서 해보리는 작게 욕을 중얼거렸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집에 불이 켜지는 것까지 확인하고서야 그는 돌아섰다.
그 얼굴에는 그 날 해보리를 탐할 때의 그 미소가 서려 있었다.
이제 D-Day가 멀지 않았다.
해보리는 주머니 속에 든 것을 꽉 움켜쥐었다.
그때였다.
“해보리 씨?”
낯선 목소리에 해보리는 소스라치듯 놀라 몸을 돌렸다.
거기엔,
마치 악마처럼 아름다운 남자가 서 있었다.
“제가 도와드릴까요?”
들려오는 악마의 속삭임에 해보리는 도망치는 것조차 잊고 멍하니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반짝거리는 눈으로 생글생글 웃으며 해보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말 그대로, 악마와도 같은 달콤한 얼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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