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를 위해서라면
오늘도 미라는 그와 함께 있었다.
1박 2일의 여행.
이번엔 벚꽃을 보기 위해 경포대로 향했다.
지난 강릉 여행에서 들른 식당에서 식당 주인이,
“여기 봄에 오면 정말 예뻐요. 저는 진해 군항제보다 여기가 더 좋던데요?”
라고 이야기한 것에 이끌려 오게 되었다.
그의 일 관계로 저녁 무렵에 출발하게 되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어두워진 후였다.
그러나 오히려 그게 더 좋았다.
비록 꽉 막힌 길 때문에 차에서 거의 나가지 못하게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은은한 조명 아래 빛나는 하얀색과 분홍색의 꽃망울이 예뻤다.
기어가듯 움직이는 차 안에서 미라는 작은 평온을 느꼈다.
밀리는 차 안에서 짜증 나지 않는 것은 처음이었다.
“예쁘다···.”
한숨처럼 내뱉는 미라의 말에 그가 생글 웃는다.
미라는 처음 만났을 때와 달리 억지로 이야기를 이어가려 하지 않았다.
아니, 이제 오히려 침묵의 시간이 기분 좋게 느껴진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뭔가 통하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차창 밖에서 살랑살랑 흘러들어오는 차가운 공기.
가로등 불빛과 벚꽃 나무에 휘감긴 조명의 불빛.
하늘하늘 떨어져 내리는 새하얀 꽃잎.
그 속에서 침묵의 시간을 보내는 그와 미라.
이보다 완벽한 시간이 있을까.
이 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될 정도였다.
“이대로 영원히 있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차 안에서요?”
“음, 자기랑 함께면 그것도 좋을 것 같아요.”
미라의 대답에 그가 웃었다.
어딘지 낯선 느낌의 웃음소리에 미라가 그를 보았을 땐,
이미 그의 얼굴엔 익숙한 웃음이 새겨져 있었다.
아주 가끔,
그는 낯선 얼굴을 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미라는 가슴이 불안해지곤 했다.
마치 지금 당장 어디론가 가버릴 것 같아서.
“왜 그래요?”
그가 고개를 앞을 향한 채로 미라를 곁눈질했다.
미라의 표정이 대체 어땠길래 저런 표정일까.
“아니에요. 그냥 그런 기분 있잖아요.”
“어떤 기분이요?”
그의 눈동자가 반짝인다.
미라는 저 눈동자를 좋아했다.
언제나 무덤덤한 눈동자가 빛나는 순간.
그때만큼은 어른스럽기 그지없는 그가 아이처럼 보인다.
“음, 지금 이 행복이 모두 깨질 것 같은 기분?”
“왜 그런 생각이 드는데요?”
으음, 하고 미라는 열린 차창의 틀에 팔을 대고 고개를 올렸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미라를 그는 조용히 기다려 주었다.
“너무 행복하면 깨질 때가 두려운 거래요.”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미라는 이런 종류의 감정을 그에게 이해시키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는 잠시 미라를 힐끔 바라보더니 다시 운전에 집중했다.
좀처럼 길은 뚫리지 않았다.
“아, 음악이라도 틀까요?”
문득 그가 무료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미라가 이야기했다.
창밖을 보며 느긋한 기분에 심취해있는 미라와 달리, 그는 계속 앞을 바라보며 운전에 집중해야 했으니 지루할 것 같았다.
만약 미라에게 지금 이 상황에서 운전하라고 했으면 엄청 짜증을 냈을지도 모른다.
“미라 씨가 듣고 싶다면 틀어요.”
소위 말하는 벚꽃 연금을 틀자 차 안에 돌던 침묵 또한 메워졌다.
가사가 어쩜 이리 미라의 마음을 뒤흔드는지.
미라는 슬쩍 옆을 돌아보았다.
밤의 조명에 비친 그의 옆얼굴은 그야말로 사람 같지 않은 아름다움이 있었다.
어딘지 날렵한 콧대를 살짝 덮은 금갈색 머리카락이 조명을 받아 빛난다.
처음 만난 그 날도 멋있었지만,
오늘은 그 이상으로 멋있다.
“자기는 어떤 노래 좋아해요?”
미라가 묻자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요. 노래를 좋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는 것 같아요. 미라 씨는 어떤 노래를 좋아해요?”
참 한결같은 남자다.
영화를 보면서 분석하는 모습도 그렇고.
원래 남자들은 이성적이라고는 하지만 이정도인 남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미라는 마치 레어 카드를 뽑은 기분에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어요?”
그의 얼굴이 살짝 뾰로통해진다.
그는 자신이 모르는 감정으로 인해 미라가 웃고, 울고, 화내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봤자 살짝 토라질 뿐이었지만,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일부러 그런 체한 적도 있었다.
“난 정말 좋은 남자를 만났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미라의 눈이 휘어진다.
뭇 남성들이라면 틀림없이 그 미소에 마음이 설렐 것이다.
그도 다르지 않은지 얼굴에 평소보다 환한 웃음이 걸린 듯한 기분이 든다.
“내가 좋아요?”
당연하죠.
그렇게 이야기하면 너무 값싸 보일까 두려워 미라는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러나 오래 지나지 않아 미라의 입술이 저절로 열렸다.
“당연하죠.”
그의, 남자의 눈동자에 묘한 이채가 서렸다.
그는 마치 생전 처음 보는 무언가를 보는 것 같은 낯선 눈동자로 미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짐승의 눈길 같다.
아니, 짐승이라기보다는 사나운 맹수.
아니, 그것도 부족한 표현이다.
맹수라기보다는···.
“정말로요?”
남자의 목소리가 은근해진다.
여태껏 들어왔던 그 어떤 목소리보다도 달콤한 목소리.
마치 꿀에 달려드는 꿀벌마냥 미라의 고개가 격하게 움직였다.
“진짜로요.”
남자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서렸다.
그 어떤 극상의 진미를 맛보더라도 절대 걸릴 리 없는 미소.
미라 자신조차도 단 한 번도 지어본 적 없는 말 그대로 아름다운 웃음, 미소.
미라의 가슴이 묘하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설렘 때문일까, 아니면 두려움 때문일까.
“그럼 나를 위해서는 어디까지 할 수 있어요?”
남자는 더 이상 앞을 보고 있지 않았다.
어차피 꽉 막힌 도로다.
그 누구도 클랙슨을 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미라의 심장은 누군가가 뒤에서 격하게 빵빵거리는 것처럼 뛰었다.
“어디까지···?”
남자의 눈동자가 낯설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반짝임으로 가득 차 있다.
질문할 때의 그 언제나의 눈빛이 아니다.
“어디까지 해 줄 수 있어요?”
은근한 목소리가 대답을 강요한다.
정말로 얼마까지 나를 위해 희생할 수 있냐고,
남자는 묻고 있었다.
“···자기가 원한다면···.”
미라의 입술이 열렸다.
머리에서는 아무 생각도 자아내지 않는데 입이 제멋대로 움직인다.
“자기 대신 죽으라면 죽을 수도 있을 만큼 좋아요. 아니, 사랑해요.”
남자의 눈동자가 마치 별 같다.
등대 같기도 하다.
어둠 속에서 눈동자만이 밝게 빛나고 있다.
마치 불에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미라는 웃었다.
그리고 남자는 몸을 기울여 미라의 귀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오늘 밤, 나랑 있어 줄래요···?”
남자의 입꼬리가 호를 그리며 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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