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의 기억
온통 어둡다.
분명히 빛이 비치고 있는데,
밖은 낮인 것 같은데도 온통 어둡다.
아, 내 위의 남자가 빛을 가리고 있기 때문인가.
남자를 보고 싶지 않아 눈을 옆으로 돌렸다.
어두침침한 작은 창고.
잡동사니가 마구잡이로 쌓여 있는 그곳에는 빛이라고 없다.
빛이 들어오지 않는 이유는 남자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 창고가 창문은 거의 없고 두꺼운 콘크리트 벽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었다.
오직 작은 창 하나를 통해 겨우 빛이 새어들 듯 들어오고 있다.
그 빛을 멍하니 바라본다.
저 빛 속으로 이제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눈물이 흐른다.
뺨을 맞을 때 귀가 잘못되기라도 한 것일까.
소리가 너무나 멀게 느껴진다.
웅웅 울리는 귓속에서 그 소리가 아주 작게 들린다.
“헉, 헉···.”
거친 숨소리가 흐릿하게 들린다.
차라리 제대로 들리지 않아 다행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음습한 냄새.
코를 찌르는 듯한 냄새가 역겹다.
곰팡내와 술 냄새,
그리고 살 냄새가 뒤섞여 토할 것 같다.
후두둑, 후두둑.
실내인데도 비가 떨어진다.
떨어진 물방울은 마치 벌레처럼 살갗을 타고 흐른다.
징그럽다.
미지근한 살갗의 감촉이,
까끌거리는 털의 촉감이 다리 사이를 아프게 한다.
하지만 정말로 아픈 것은···.
문득 생각난 것처럼 몸을 뒤틀었지만, 몸이 꼼짝도 하지 않는다.
“좋지? 응? 너도 좋지?”
흔들리는 몸.
불쾌한 감각.
그녀가 지워버리고 싶은 그 날의 기억.
“···.”
잊어버리고 싶은 기억은 왜 이토록이나 선명할까.
바람의 감촉마저도 토가 나올 정도로 불쾌하다.
그저 불어 지나갈 뿐인데도 마치 온몸을 훑어지는 것 같아 기분 나쁘다.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해보리는 그 날의 기억을 떨칠 수가 없었다.
상담을 받고 돌아오는 길.
해보리는 한 달에 네 번, 매주 마다 심리상담을 받고 있다.
하지만 효과는 잘 모르겠다.
여성 심리치료사의 의례적인 질문에 해보리가 대답하면, 치료사가 종이에 뭔가를 끄적거린다.
별 시답잖은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시간이 되면 나온다.
그래도 그렇게나마 자신의 이야기를 뱉고 나면 조금 진정되는 기분이 들어 치료를 끊지도 못하고 있다.
해보리는 돌아오는 길에 있는 공원에서 멍하니 있는 것을 좋아했다.
일주일에 딱 한 번 있는 외출시간.
이렇게나마 빛 속에서 있고 싶었다.
하지만 그 평온한 시간은 오래 가지 않았다.
먼발치에서 한 남자가 걸어오는 것이 보이자 해보리의 몸이 눈에 띄게 긴장한다.
물론 해보리와 아는 사이는 아니다.
생전 처음 보는 남자지만 해보리에게는 알고 모르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모르는 남자라는 것이 더 해보리를 긴장하게 만든다.
숨을 죽인다.
마치 이 자리에 없는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발치만 바라본다.
어서 지나가라, 어서 지나가라.
좀처럼 지나가지 않는 남자 때문에 해보리는 입술을 갉듯이 깨물었다.
몸을 웅크리고 손에 힘이 들어간다.
해보리는 떨리는 두 손을 힘겹게 맞잡고 기도하듯 중얼거렸다.
해보리의 말을 듣기라도 한 것일까.
왼쪽 시야에 남자의 발이 들어왔다가, 뚜벅뚜벅 걸어 오른쪽으로 사라진다.
잠시 후 남자의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가 되어서야 해보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새 새어 나온 건지 이마와 등이 식은땀으로 젖어있었다.
그 감촉이 기분 나빠 해보리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장 집에 가야 한다.
그 생각만이 해보리의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처음 상담을 왔을 때는 바보같이 사람이 많은 대로로 다녔었다.
하지만 벌써 오랫동안 상담을 다니는 해보리는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길을 잘 알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오기 전에 빨리 떠나야 한다.
해보리는 그대로 공원 샛길로 향했다.
해보리의 집과 상담센터는 거리로 따지면 약 1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래서 상담센터 바로 옆에 있는 이 공원을 지나면 거의 10분도 채 걷지 않아 집이 나온다.
예전에는 으슥한 길이 싫기도 하고 둘러가면 시간이 더 오래 걸리기 때문에 이 길을 걸은 적이 거의 없었다.
산책길과 달라서 공원을 들락거리는 이들이 다니면서 생긴 길이라 가로등도 제대로 없었다.
길도 제대로 포장해놓은 길이 아니라 흙길이라 울퉁불퉁해서 꽤 발이 아프다.
그래도 해보리에게는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고 집에 갈 수 있는 절호의 귀갓길이었다.
한참 동안 공원길을 걷다 보면 갑자기 빛이 확 내리쬔다.
그 느낌을 해보리는 좋아했다.
자신이 어둠에서 빛으로 탈출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하지만 현실의 해보리는 여전히 어둠 속에서 홀로 떨고 있다.
해보리는 공원길 초입에 있는 나무 뒤에 숨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평일 오후 3시.
언제나 그랬듯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해보리는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어?”
해보리의 몸이 움찔 떨렸다.
조심스럽게 소리 난 쪽을 돌아보자 눈에 익은 얼굴이 있었다.
“너, 혹시···.”
졸업 직전, 그 일을 겪기 전까지 친하게 지냈던 아이들 중 하나였다.
해보리는 살짝 고개를 돌려 옆머리로 얼굴을 가리려 애쓰며 입을 열었다.
“사, 사람 잘못 보셨어요···.”
누구라고 이야기하지도 않았는데 사람을 잘못 봤다니.
어이없는 해보리의 말에도 상대는 화내지 않았다.
오히려 아차, 싶은 얼굴로 난감한 듯 해보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저기···.”
그녀가 해보리에게 한 걸음 다가서자, 해보리는 한 걸음 물러섰다.
조금 전까지 해보리를 숨겨주던 나무 뒤로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씩 다가가고 있었다.
그런 해보리의 모습에 그녀는 더는 다가오지 않았다.
다만 안타까운 듯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좀 그렇구나···. 미안해. 널 너무 오랜만에 봐서 반가운 마음에···. 잘 지내지?”
억지로 웃는 얼굴이 우스꽝스럽다.
해보리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사람 잘못 보셨다니까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
해보리는 알까.
해보리의 목소리가 나는 당신을 알고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는 걸.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내 포기한 듯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씁쓸한 미소를 입에 머금고 입을 열었다.
“잘 지내. 힘내고.”
그녀가 발걸음을 돌렸다.
고개를 숙인 해보리의 눈에 자신의 옷차림이 들어온다.
몇 년 전에 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티셔츠에 색바랜 청바지.
그것들이 마치 어제 산 것처럼 꼭 맞는 자신.
그녀의 등장이,
해보리의 의복이
어두컴컴한 공원 샛길이
모든 것이 다시 해보리를 그 날로 데려간다.
벗어날 수가 없다.
해보리의 눈가에서 한 방울 눈물이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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