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근두근
와, 정말 잘생겼다.
좀체 인물을 따지지 않는 말숙의 입에서 절로 감탄이 흘러나왔다.
정확히 말하면 말숙은 인물을 따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남의 편이 만약 못생겼는데 그리 이상론을 줄줄 읊어댔다면, 당연히 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시대 인물치곤 키도 꽤 늘씬하게 컸고, 몸매도 호리호리했다.
주변 여자들은 너무 얍실하게 생겼다고 싫어했지만, 오히려 말숙은 그런 면이 좋았다.
지금으로 보면 약간 예쁜 남자였달까.
다만, 사는 것이 바쁘기도 했고 남의 편 때문에 얼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런 말숙도 돌아보게 할 만큼 청년은 훤칠했다.
요즘 치곤 그리 큰 키는 아니지만,
비율이 좋아서 그런지 말숙이 앉아있기 때문인지 엄청 커 보였다.
게다가 요즘의 야리야리한 남자들과 달리 듬직한 체구도 꽤 매력적이다.
햇빛에 비쳐 금색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금갈색 머리카락은 이목구비 짙은 얼굴과 잘 어울렸다.
“괜찮으세요?”
청년이 말숙에게 한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말숙이 화들짝 놀라 손을 쳐냈다.
“아, 어, 괜찮아, 괜찮아.”
살짝 떨리는 목소리.
이게 얼마 만에 느껴보는 설렘인지.
말숙은 근 30여 년 만에 처음으로 가슴이 떨리는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다행히 과일은 크게 상하진 않았네요.”
생글 웃는 얼굴.
깊이 있으면서도 다정한 목소리.
매너 있는 청년의 태도에 말숙은 드물게 부끄러워했다.
“아니, 뭐.”
별것도 아닌데, 라고 말하려던 참에 생각해냈다.
그렇다.
갑자기 이 청년이 코너에서 돌아 나오는 바람에 부딪혔었다.
평소라면 쌍욕을 날려댔을 말숙이지만 어쩐지 이 청년에게는 욕이 나오질 않았다.
“거, 조심 좀 해요. 젊은 청년이 조심해야지 나 같은 노인네는 조심해봤자 별 도움도 안 돼.”
결국, 말숙은 드물게도 조용히 일을 마무리 지으려 했다.
본래라면 부딪힌 청년에게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가며 치료비랍시고 몇 푼 뜯어냈을 터였다.
말숙이 자리를 뜨려 일어나자 청년이 옆에서 말숙을 부축했다.
훅, 하고 코를 찌르는 향기가 머리를 아찔하게 했다.
남의 편이 쓰는 스킨과 크게 다른 냄새는 아닌데도,
묘하게 달콤한 향기가 나서 말숙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고, 고마워.”
“별말씀을요. 이렇게 보내드리긴 너무 죄송하니 커피라도 한 잔 대접해도 될까요?”
우연인지 바로 옆에는 작은 카페가 하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커피를 마신 지가 언제더라.
저번에 친정에 갔을 때 얻어먹은 싸구려 커피믹스가 마지막이었던가.
평소라면 공짜 커피를 마다할 말숙이 아니었지만, 어쩐지 망설여졌다.
청년이 잘생겨서 설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청년의 생김새에 조금 익숙해지자 왠지 모를 오한이 등골을 타고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다.
이 장소를 어서 벗어나라고.
“바쁘시면 어쩔 수 없지만, 너무 죄송해서요.”
청년의 눈가가 살짝 휜다.
그 모습이 젊었을 적 남의 편을 조금 떠오르게 한다.
말숙의 가슴을 설렘으로, 분홍색으로 물들였던 그 미소.
말숙은 홀린 듯 고개를 끄덕이고야 말았다.
청년과 커피를 마시며 말숙은 속으로
요즘 젊은이답지 않게 남의 이야기를 잘 듣는 청년이라고 감탄했다.
어쩌다가 이야기가 나온 남의 편 이야기를 하다가,
과거에 힘들었던 달동네에서의 생활에 관해 이야기하다가,
이전 살았던 집이 집주인과 같이 살아서 눈치 보였단 이야기까지 하게 되었다.
그동안 청년은 가벼운 감탄사만 내뱉을 뿐, 한 번도 말숙의 이야기를 끊지 않았다.
한참 주절거리던 말숙이 벌써 1시간이 넘게 떠들었다는 것을 깨닫고서야 이야기는 끝났다.
“미안해, 총각. 내가 너무 떠들었지?”
“아니요. 재미있는데요.”
잘 들어주는 반면,
어딘지 그 반응은 미적지근한 면이 있었다.
마치 요즘 핸드폰에 있다는 시··· 뭐라던가 빅스···? 지니···?
뭐, 하여튼 그런 느낌이다.
입력된 질문에 입력된 대답을 하는 느낌이랄까.
“내가 젊은 사람 시간을 너무 뺏었네.”
“아니에요. 딱히 할 일도 없었는데 오히려 좋았죠.”
남자가 우아한 몸짓으로 커피잔을 입에 가져갔다.
김이 펄펄 나는 커피가 뜨겁지도 않은지 곧잘 마시는 청년을 보고 있자니 윗집 그 여자가 생각났다.
전혀 닮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열불이 끓어올랐다.
“총각, 기왕 들어준 김에 이 이야기도 좀 들어 줘봐. 우리 윗집 이야긴데···.”
말숙의 목소리가 평소만큼 커졌다.
그러자 청년도 흥미가 동하는지 말숙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윗집 ㄴ···, 아니 여자가 말이야.”
말숙은 처음부터 다 이야기했다.
분명 처음에는 층간소음이라 불릴만한 것은 거의 나지 않았다.
어느 날 갑자기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천장이 울리는 느낌이 나서 곧바로 항의 조로 연락을 했었다.
그 후부터 마치 보복이라도 하듯 윗집에서는 끊임없이 소음이 났다.
청년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말숙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요즘에는 이 미친 ㄴ···, 아니 여자가 집에서 춤을 추는지 방 안에서 말을 키우는지 점심때만 되면 따각따각 아주 사람을 미치게 만들어.”
쾅, 하고 말숙이 테이블을 쳤다.
주변에서 모두가 쳐다봤지만, 말숙도 청년도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말숙의 목소리는 어느새 평소 이상으로 커져 있었다.
“아니, 시끄럽다고 한 번 뭐라 했다고 저래도 되는 거야, 총각?”
물론, 욕을 했다는 이야기는 쏙 빼고 말했다.
왠지 모르지만, 이 청년 앞에서는 그런 거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좀 많이 순화시켜 이야기하긴 했지만
사실, 말숙이 욕을 했고 안 했고가 뭐가 중하겠는가.
그 미친년이 하는 짓거리가 중요하지.
“그런 사람은 확 죽어버리면 좋을 텐데요.”
무심코 내뱉은 청년의 말에 말숙은 순간 멈칫했다.
그렇게까진 아니라고 말하려던 순간 어제 복도에서 씩 웃던 그년 얼굴이 생각났다.
“그런 년은 확 뒤져버려야 해.”
순간 튀어나간 거친 말에도 청년은 별 반응이 없었다.
오히려 별이라도 품은 건지 반짝거리는 눈망울에 말숙은 더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 년은 지도 똑같이 당해봐야 해. 옛날에 드럼통 안에 사람 넣어놓고 두들겨 대서 귀머거리 됐단 말이 있던데 그 년도 그런 거 당해봐야 해.”
씩씩거리며 말하는 말숙에게 남자가 미소지었다.
남자가 말숙에게 제안했다.
“제가 그 사람한테 복수해드릴까요?”
은근한 목소리에 정신이 확 들었다.
복수라.
이 사람 좋은 청년이 복수해봤자 얼마나 하겠냐만,
그래도 복수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야 좋지. 총각이 해주려고?”
“···하나만 해주시면요.”
청년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말숙은 청년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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