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 후일담 ~
1. 성현의 변화
학교가 발칵 뒤집혔다.
그제 밤에 학생이 넷이나 살해되었기 때문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아무도 그들을 찾지 않았다.
또 술이라도 마시고 뻗어버린 거겠지.
아무도 말로 하지는 않았지만,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이성현도 어제 등교하지 않았지만, 아무도 그를 찾지 않았다.
또 강성현 패거리에게 얽혀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겠지.
아무도 말로 하지는 않았지만,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평화로운 어제가 지나고 오늘이 왔다.
이성현은 생각외로 멀쩡한 얼굴로 등교했다.
알 수 없는 묘한 분위기를 풍기긴 했지만
최소한 다친 곳은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모두가 이변을 감지했다.
학교 행사 때 외엔 단 한번도 학교를 찾은 적 없던 이성현의 모친이
담임 선생님과의 면담을 요청했기 때문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학생들과 교사들은 이성현의 모친이 온 이유가
강성현 패거리에 의한 학교 폭력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의 생각은 반 정도 맞았다.
그녀가 학교에 온 이유는 강성현 패거리와의 일 때문이 맞았다.
그러나 왕따에 대해 눈치채 이를 항의하기 위해 방문한 것은 아니었다.
1교시가 끝난 후의 쉬는 시간.
수업이 끝나기 무섭게 담임이 교실을 찾았다.
조회시간 때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담임이 갑자기 교실을 찾은 것에 다들 긴장했다.
틀림없이 강성현 패거리가 이성현을 괴롭힌 일에 대해 뭔가 아는 것이 없냐며
물어볼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입에서 나온 것은 예상외의 질문이었다.
“···너희 중에 요즘 강성현, 하민호, 정태우, 유세명 네 명한테 뭐 들은 것 있는 사람 없니?”
담임의 목소리가 무겁다.
안 그래도 유약해 보이는 담임이 오늘은 창백하기까지 했다.
담임의 묘한 모습과 예상외의 질문에 아이들은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서로 눈치만 보았다.
누가 먼저 시작했을까.
아이들의 시선이 이성현에게 쏠리기 시작했다.
하나둘 모이는 시선이 묻고 있었다.
너라면 무언가를 알고 있지 않냐고.
이성현은 담담한 얼굴로 담임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들의 시선이 느껴지지 않기라도 하는 걸까.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혹시 누가 걔들을 따라다녔다는 이야기를 들었거나 이상한 사람을 주변에서 본 사람은 선생님한테 말해주세요.”
말을 마치자마자 담임은 축 늘어진 얼굴로 교실을 나갔다.
남은 아이들은 서로 눈치만 보며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아이들의 시선이 반장에게 가서 멎었다.
그 시선이 무언으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네가 이성현에게 무슨 일인지 물어봐, 라고.
반장은 싫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지만, 시선들은 끈질겼다.
결국, 반장은 작게 한숨을 쉬고 일어나 이성현에게 쭈뼛쭈뼛 다가섰다.
“아, 그, 이성현.”
“왜.”
차가운 목소리에 반장이 움찔 몸을 움츠렸다.
항상 소심한 듯 헤헤거리던 이성현이었다.
이렇게 차가운 목소리를 내는 걸 보면···.
반장은 확신했다.
이성현은 무언가를 알고 있다.
호기심과 두려움 사이에서 갈등했지만,
언제나 그렇듯 두려움은 호기심을 이기지 못했다.
“너 강성현 어떻게 됐는지 알지?”
“···그걸 왜 나한테 묻는데?”
싸늘한 미소.
마치 사람이 바뀐 것 같다.
반장은 이성현의 눈 속에서 무언가 이질적인 것을 보았다.
그것은 또래 아이들의 눈에서 단 한번도 본 적 없는 그 무언가였다.
하지만 이미 말은 뱉어졌다.
그리고 반장의 기억은 자꾸 예전의 이성현을 떠올렸다.
설마 별일이야 생기겠어.
반장은 마음을 다졌다.
“너는···, 그, 걔들이랑 자주 얽혔었잖아. 너희 어머니도 오늘 오셨고.”
“···풋.”
이성현의 입에서 웃음이 터졌다.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은데 입은 웃음을 내뱉는다.
마치 스피커가 내장된 인형처럼 이성현은 폭소를 내뱉었다.
“니가 지금 나한테 강성현에 대해서 물어 보는거야? 니가? 너네가?”
웃음소리가 갑자기 뚝 그쳤다.
하지만 그 입가에는 조소가 서려 있다.
반장은 자신도 모르게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내가 엉망이 돼서 앉아있을 때는 아무도 아는 척도 안 하더니, 강성현이 안 오니까 바로 나한테 물어보네? 너네가 양심이라는 게 있으면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냐?”
차갑게 쏘는 이성현의 말은 반 아이들 모두의 가슴을 찔렀다.
몇몇 다혈질인 아이들이 벌떡 일어나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성현과 눈이 마주치자 고양이와 마주친 쥐처럼 얼어버렸다.
이성현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 난 강성현이 어떻게 됐는지 알아. 어제 경찰에서 날 찾아왔었거든. 걔네 죽었다더라.”
웅성.
웅성웅성.
웅성웅성웅성.
마치 파문이 퍼져나가는 것처럼 아이들의 목소리가 퍼져나간다.
그들의 얼굴에는 경악과 공포가 가득했다.
그리고 그 틈새에 흥미가 섞여 있다.
어차피 남의 일이라는 건가.
이성현은 피식, 조소를 흘렸다.
이 이야기는 순식간에 학교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갔다.
학교는 발칵 뒤집혔다.
수업시간에조차 아이들은 옆의 짝꿍과 소곤소곤 이야기했다.
교사들조차도 제대로 수업에 집중하지 못했다.
아이 넷이 변사했다.
사실 이성현이 넷 다 죽였다더라.
아니다, 어떤 정신이상자가 죽였다더라.
소문은 점점 눈덩이처럼 불어났지만, 그 안에 진실은 없었다.
어쩌면 진실의 조각이 숨어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완전한 진실은 없었다.
이성현은 이 소란이 꽤 오래 갈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영원하진 않을 것이다.
이성현의 입가에 누군가와 닮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만들어낸 것 같은 달콤한 미소가.
2. 말숙의 하루
말숙은 한동안 집에서 나오질 못했다.
어디선가 그 악마 같은 남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것 같은 불안감과 공포 때문이었다.
채광이 마음에 들었던 창은 모조리 두터운 암막 커튼으로 막아버렸다.
남편은 어둠의 집이냐며 종종 커튼을 열려 했지만,
그때마다 말숙이 사나운 얼굴로 닫으라고 하면 얌전히 닫곤 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도 별일이 없자 말숙의 머릿속에는 점점 다른 감정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 남자가 날 죽이러 오려고 했으면 진작 왔을 텐데, 이미 흥미가 사라졌나?
아니면 공범이라고 생각해서 당연히 신고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 남자를 신고할 마음 따위는 요만큼도 없다.
사실 이대로 그 남자도 그 사건도 모두 잊어버리고 싶을 정도다.
모두 없던 일로 돌릴 수만 있다면 영혼을 팔아야 한 대도 고개를 끄덕일지도 모른다.
이대로 언제까지나 갇혀 살 수는 없다.
남편 놈이 벌어오는 돈이야 빤하다.
집 유지비를 내기에도 벅차다.
말숙은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어떻게든 이 집에서 버틸 생각이었다.
사람까지 죽게 만든 마당에 이 집에서 어떻게 떠나겠는가.
이 집에서 잘 사는 게 최소한의 공양이리라.
오늘은 아침부터 외출 준비를 했다.
전에 일하던 식당에 다시 가서 사정해볼 참이었다.
안 된다면 새로운 일자리를 구해야 한다.
어찌 되었든 나가야만 한다.
오랜만에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말숙은 파르르 떨리는 몸으로 현관문 앞에 섰다.
문손잡이까지 잡았지만, 손이 움직이질 않는다.
무뎌졌다고 생각했던 공포가 다시 스멀스멀 말숙을 타고 올라온다.
이 문을 열었는데 그 남자가 서 있으면 어떡하지?
갑자기 문 저편에서 숨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문 너머에서 찌르는 듯한 시선이 느껴진다.
말숙은 조심스럽게 도어뷰어의 버튼을 눌렀다.
딸깍, 하는 버튼 누르는 소리가 거슬린다.
혹시 남자가 밖에 있다면 분명···.
말숙은 침을 꿀꺽 삼켰다.
화면 너머에 보이는 복도는 평화로워 보였다.
환한 햇살이 가득 차 따스해 보이기까지 했다.
말숙은 속으로 되뇌었다.
이 집을 놓칠 순 없다.
그 남자는 이제 나한테 관심이 없다.
이 집을 지켜야만 한다.
그 남자는 날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이 집은 내 모든 것이다.
그 남자는 날 잊었을 것이다.
한참을 그렇게 중얼거리던 말숙이 문손잡이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소리 없이 내려가는 문손잡이.
소리 없이 철렁이는 말숙의 마음.
완전히 문손잡이를 내린 후 말숙은 다시 한번 심호흡을 했다.
그 눈에는 사라졌던 독기가 아주 조금 돌아와 있었다.
“에라이, 끽해야 죽기밖에 더하겠어?”
말숙은 문을 열었다.
말숙의 불안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말숙이 일을 시작하고도 계절이 한 번 더 지났는데도 일상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가끔 아파트 이웃이라는 여편네들이 수군거리는 것이 거슬리긴 했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그 남자는 정말로 말숙에게 흥미를 잃었는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이제 됐다.
그냥 다 잊어버리자.
말숙이 직접 죽인 것도 아니고 그 남자가 죽인 것 아닌가.
언제까지나 질질 끌고 있어봤자 죽도 밥도 되지 않는다.
윗집이 이사한 것도 말숙이 이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 중 하나였다.
며칠 전 윗집이 묘하게 시끄럽다 했더니 이사를 간 모양이었다.
부인이 어떻게 죽었는지 이웃들이 다 아는 곳에서 더 지내기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이제 윗집에 그 여자의 남편조차도 없다는 생각을 하자 마음이 편해졌다.
죄책감이 사라진다.
“후후후···.”
살맛 난다.
요즘만 같으면 진짜 살맛 난다.
남편은 얌전히 말숙의 말대로 행동하고,
자식놈들은 다 커서 독립했고,
꿈에 그리던 고급 아파트에 살고 있다.
다소 걸리는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이만하면 내 인생은 성공한 거지, 뭐.”
흐흐흐, 웃음을 흘리는 말숙의 귀에 우당탕 소리가 들렸다.
환청인가 싶어 천장을 노려보는데 또 들린다.
우당탕 쿠당탕.
다다다다닥 하는 달리는 소리.
뭔가를 쿵쿵 놓는 소리.
사각사각하는 뭔가를 긁는 소리.
설마.
말숙은 그대로 현관문을 열고 뛰쳐나가 위층으로 내달렸다.
703호.
며칠 전 비었던 그 집에 누군가 들어오는 것인지 부산스러웠다.
그런데, 그 속에, 보여선 안 될 것이 보였다.
“와, 엄마! 우리 이제 여기서 사는 거야?”
“엄마, 엄마, 장난감부터 꺼내 줘!”
“엄마~! 화장실이 엄청 커~!”
우아한 분위기의 젊은 여자 옆을 뛰어다니는 세 아이.
거기에 자상한 분위기의 젊은 남자가 안고 있는 아기 하나.
“···말도 안 돼···.”
말숙은 망연자실해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젊은 여자가 시선을 느꼈는지, 뒤를 돌아보다 말숙과 눈이 마주쳤다.
“아, 안녕하세요? 오늘 이사 왔어요.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말숙의 마음이 절망으로 치닫는다.
앞으로의 이어질 긴 싸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젊은 여자는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3. 쓰레기의 최후
남자는 예상외로 신고하라는 말 한마디 없이 계혁을 집까지 태워 주었다.
다만, 계혁이 내리기 직전에
“다신 저랑 마주치지 않는 게 좋으실 거예요. 아, 하긴···.”
남자는 계혁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엷게 웃었다.
왠지 모르지만, 그 시선에 불쾌감이 끓어오른다.
“이봐요. 그쪽이나 다신 저 찾아오지 마요. 우리 오늘 아무 일도 없었던 겁니다.”
뭐, 여차할 땐 신고하면 된다.
실제로 손을 댄 건 계혁이 아니라 남자다.
끽해야 살인교사.
실제 살인죄보다 더 크진 않을 터였다.
남자는 피식 웃었다.
계혁이 왠지 모를 짜증에 문을 세게 쾅, 하고 던지듯 닫자 남자는 곧바로 출발해버렸다.
니미.
누구는 저 나이에 차도 있고 옷도 좋은 거 입는데.
질투에 불타는 얼굴로 차 뒤꽁무니를 바라보던 계혁이 침을 퉤 뱉었다.
뭐, 됐다.
다시는 볼 사이도 아니고.
그리고 이제 계혁에게는 그녀가 있으니까.
이정도쯤이면 애 좀 닳았겠지?
여자를 만났던 그 날로부터 벌써 두 달.
계혁의 번호는 알려주지 않았으니 그 여자가 먼저 연락할 방법은 없다.
그러니 계혁의 연락만을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그동안 계혁은 사채업자의 사무실을 몇 번 찾아갔었다.
그 사건이 있었던 다음 날에는 경찰이 바글바글했었다.
그러나 하루, 이틀, 사흘···.
일주일이 지나자 경찰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마 별다른 단서를 찾지 못한 듯했다.
경찰에게서 전화가 왔을 때는 역시나 쫄았었다.
경찰은 계혁에게 얼마를 빌린 건지, 언제 갚았는지 따위를 꼬치꼬치 캐물었다.
눈치가 빤한 계혁은 몇 마디 나누던 중 자신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이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른다.
유도신문이 아니라 정말로 계혁이 얼마를 빌렸는지, 돈은 갚았는지 모르고 있다.
계혁이 이게 유도신문인지 진짠지 알아내 보려고
“100만 원 정도입니다.”
라고 대답했을 때 몇 번 되묻기는 했지만 그대로 수긍하고 넘어갔다.
분명 계혁이 빌린 돈이 장부 같은 데에 기록되어 있을 텐데···.
장부를 찾지 못한 건지도 모르고, 장부에 기재하는 것을 잊었던 건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건 계혁에게는 좋은 일이다.
그 이후부터는 계혁도 마음을 놓았다.
예상대로 경찰에게서는 더 연락이 오지 않았다.
그러자 이제 여자 생각도 나고, 돈 생각도 나기 시작했다.
“전화 한번 해 볼까~.”
즐겨찾기로 등록해둔 그 여자의 전화번호를 찾아 눌렀다.
처음엔 뭐라고 해야 할까.
그런 생각을 하며 통화버튼을 눌렀다.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이오니···.
“···?”
없는 번호?
이게 무슨 소리야.
계혁의 인상이 찡그려졌다.
다시 한번 걸어보지만 같은 안내 멘트가 흘러나온다.
“이런 씨발!”
혹시 번호를 잘못 입력했나 싶어 그때 여자가 번호를 적어줬던 종이를 찾으려 했다.
하지만 그게 벌써 두 달 전이다.
아무리 청소를 싫어하는 계혁이지만 그때의 종이가 아직 남아있을 리가 없다.
“씨발, 씨발!”
핸드폰을 집어 던지려다 움찔, 멈췄다.
대신 뒤지던 쓰레기통을 집어던졌다.
쓰레기통은 호쾌한 소리를 내며 벽에 부딪혔다가 떨어졌다.
“아, 씨발.”
계혁은 왜 그 날 번호를 바로 입력해서 전화를 걸어보지 않았을까 후회했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그래도 빚이 없는 상태에서 시작하는 게 어딘가.
계혁은 입맛이 썼지만, 그래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노력했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문을 부술 기세로 두드리기 시작한 것은.
“야, 이 씨발 새끼야! 문 열어라~.”
비웃는 목소리.
목소리의 여유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거친 노크.
계혁은 이대로라면 경찰이 오는 소란이 일어날까 봐 겁이 났다.
설령 단서를 찾지 못했더라도 아직 경찰과는 마주치고 싶지 않다.
계혁은 체인을 걸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와, 이 씨발 새끼가 수 쓰네?”
문이 살짝 열리자마자 문이 세게 잡아당겨 진다.
체인을 걸길 잘했다.
계혁은 안도하며 한 발짝 문에서 물러섰다.
“누, 누구···세요.”
“내가 누구냐고? 니가 돈 빌린 놈 쩐주다, 새끼야.”
쩐주?
얼핏 들은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사채업자들이 자신의 사업비용이 모자랄 때 돈을 빌리는 상대, 였던가.
문틈 사이로 살짝 문밖의 남자를 훔쳐보았다.
거기에는 거구의 인상 사나운 남자가 계혁을 쏘아보고 있었다.
“씹새끼야, 문 열어라? 때려 부수기 전에?”
남자의 팔근육이 위협적으로 불룩거린다.
그 팔에는 등에서 뻗어 나온 것으로 보이는 문신의 일부가 뱀처럼 휘감겨 있었다.
“돈을 빌렸으면 갚아야지?”
“저, 저, 저는 돈 다 갚았어요.”
“어디서 헛소리야, 씨발 새끼야. 재민이 새끼 장부 내가 가지고 있는데.”
계혁의 얼굴에 아차, 하는 표정이 서렸다.
어쩐지.
경찰도 못 찾을 정도로 장부를 꼼꼼하게 숨겼을 리 없다.
그들은 갑작스럽게 남자에게 납치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이 남자가 그 사채업자들의 이변을 눈치채고 먼저 장부를 빼돌린 것이었다.
“가, 갚을게요.”
“그래? 그럼 당장 천만 원 가져와.”
“네? 천만 원이라뇨!”
말도 안 되는 금액에 계혁이 펄쩍 뛰었다.
그러나 남자는 여유 있는 비웃음을 띤 채 말을 이었다.
“멍청한 새끼야. 니가 돈 빌린 지 벌써 2달이 지났는데 원금 한 번 안 갚았지?”
“아니, 그건···.”
“됐고, 빨리 내놔라.”
“처, 천만 원을 갑자기 어디서 가져와요.”
계혁이 바들바들 떨면서 항의하자 남자가 위협적으로 문을 세게 열었다.
“씹새끼야. 내가 이거 못 부숴서 가만히 있는 줄 아냐? 부숴줘?”
“아, 아니···.”
“됐고, 이번 주 토요일에 다시 온다. 그때까지 돈 준비 안 해놓으면 니 뱃속에 든 거 다 꺼낼 테니까 그런 줄 알아라.”
남자가 돌아서자 계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미친놈.
누가 미쳤다고 그때까지 여기 있겠냐.
그때 마치 그 속마음을 들은 것처럼 남자가 다시 현관으로 다가왔다.
“토낄 생각하지 마라? 니가 현관 나서는 순간부터 너한텐 다섯 명이 따라붙을 거야. 알겠냐?”
설마, 라고 생각하는 계혁을 두고 남자는 유유히 사라졌다.
바들바들 떨면서 문의 체인을 풀고 조심스럽게 복도로 나갔다.
아래쪽을 내려다보자 조금 전의 남자가 다른 남자 셋과 이야기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 씨발.”
망했다.
계혁은 다리의 힘이 풀린 듯 그대로 주르륵 흘러내려 복도에 주저앉았다.
계혁의 앞날을 알기라도 하듯 하늘이 검게 물든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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