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시절
“선배~.”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그가 뒤를 돌았다.
산뜻한 검은 머리카락.
깊은 눈매와 갈색 눈동자.
긴 속눈썹에 색은 연하지만 손이 고운 입술.
시원시원한 이목구비와 신체비율.
그를 부른 여학생들이 꺄, 자지러졌다.
“선배, 어디 강의에요?”
“본관 3층 강의야. 유미, 너는?”
자신의 이름을 기억해준다는 것에 여학생, 아니 유미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동경하는 선배가 자신을 기억해준다는 것은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가!
소설이나 영화 속에서 그 여자들이 왜 그렇게 과장하나 했는데, 하나도 과장이 아니었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 쿵쾅거리는 가슴을 애써 무시하며 유미는 웃었다.
“저는 전공수업이에요. 선배 점심은 언제 드세요?”
그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손목시계를 보았다.
현재 시각 10시 55분.
다음 강의는 1시간짜리 교양.
그다음 강의는 3시에나 있다.
“아마도 12시나 1시쯤 먹지 않을까?”
유미의 눈이 반짝였다.
사실 이미 그의 시간표는 머릿속에 다 입력되어 있다.
그런데도 굳이 물어본 것은 다 속 꿍꿍이가 있기 때문이었다.
“와, 오늘 저랑 점심시간 비슷하시겠네요! 혹시 괜찮으시면 같이 점심 어떠세요?”
아무렇지도 않다는 얼굴로 본론을 꺼냈다.
그러나 유미의 등줄기에서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자신이 없는 것은 아니다.
유미는 객관적으로 자신이 예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인 서울이긴 하지만 애매한 수준의 학교.
그러나 이정도 미모에 이정도 학교면 썩 나쁘지 않다.
그런 자신감이 있었다.
하지만 이 남자 앞에서는 묘하게 작아진다.
초등학교는 다니지 않았다고 한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홈스쿨링? 으로 대체했다고 한다.
중학교 때부터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이 학교라니.
썩 나쁘지 않은 성과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 남자의 대단함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일단 저 용모.
어지간한 연예인도 저 앞에서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유미도 클럽에서 자주 연예인들을 보곤 하지만 이 남자보다 잘난 남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거기에 재력.
듣기로 아버지는 튼실한 중견기업의 CEO.
어머니는 의사 집안의 막내이자 외동딸.
오빠들은 막냇동생의 부탁이라면 뭐든지 들어주는 모양이었다.
좋은 대학에 기부금 입학이라도 하면 됐을 텐데, 왜 이곳을 다니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저 남자랑 혹시 결혼이라도 하게 된다면 인생 탄탄대로라는 것.
하지만 그런 남자인 만큼 아무도 섣불리 대시하지 못했다.
그것을 유미가 첫 스타트를 끊는 것이다.
대답을 기다리는 잠시가 얼마나 긴지, 침을 다섯 번은 삼킨 것 같다.
그동안 그는 물끄러미 유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음, 왜?”
유미의 얼굴이 화르르 달아올랐다.
백의 끈을 쥔 손이 파르르 떨린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말이었다.
자신의 권유에 의문사로 대답하는 것은.
그래도 유미는 참았다.
이 남자는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
유미는 어설프게 웃어 보였다.
“에이, 시간 맞는데 같이 먹으면 좋잖아요! 선배한테서 여러 가지 이야기도 듣고.”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유미의 말을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태도였다.
“내가 왜 너랑 점심을 먹어야 하는데?”
그렇게 묻으며 유미의 눈동자를 바라본다.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눈동자, 는 아니었다.
뭔가 묘하게 께름칙한 눈동자다.
마치 케이지 안에 들어있는 햄스터라도 바라보는 것 같은 눈동자다.
유미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아, 아니, 그, 아니에요. 그냥 시간 맞으니까 한 번 물어본 것뿐이에요.”
주위에서 숨죽이고 지켜보던 여자들의 비웃음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유미는 지금, 남자와 처음으로 눈을 마주쳐보고 알아버린 것이다.
이 남자는 위험하다.
절대로 가까이 가서는 안 될 맹독과도 같다.
유미는 황급히 인사를 하고는 그대로 뒤돌아 달려가 버렸다.
하지만 유미는 몰랐다.
자신이 이미 이 남자의 흥미를 끌어버렸다는 것을.
남자는 유미가 사라진 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묘하게 반짝거리는 눈동자로.
“어서 타십시오, 도련님.”
할아범의 말에 따라 남자는 차에 올라탔다.
그 모습을 주변 학생들이 보며 수군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남자는 그런 것은 전혀 신경 쓰이지도 않는지 담담한 표정이었다.
“할아범.”
“네, 도련님.”
“궁금한 게 있는데.”
할아범이 눈을 크게 떴다.
남자의 궁금증.
그 단어가 과거의 어떤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남자가 중학생 때 집에서 기르던 개가 죽은 것을 시작으로
근처 길고양이나 유기견들이 차례차례로 죽은 사건이 있었다.
처음에는 변질자라도 있는가 싶어 집안 단속을 철저하게 했었다.
뒷골목에서 고양이의 멱을 따고 있는 남자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아, 얘네 뱃속은 어떻게 생겼나 궁금해서.”
그, 당시의 소년은 웃으며 말했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소름 끼치게 불길하던지.
그 이야기를 주인 부부에게 했을 때 그들은 마주 보며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이야기는 절대 비밀로 해주세요.”
주인의 말에 할아범은 그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로 그는 뭔가가 궁금하다고 한 적이 없었다.
다만 가끔 공기총에 맞은 참새가 골목에서 발견되거나 그의 방에서 핏자국이 발견되긴 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할아범은 조용히 뒤처리하곤 했다.
“궁금하시다면···, 어떤 것이···?”
“나한테 점심을 같이 먹자는 여자가 있었는데 말이야···.”
고등학생 때 그가 저지른 일은 듣지 못한 걸까.
남자가 3년간 대학 생활을 하는 동안 아무도 그에게 추파를 던지지 않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가 고등학교 때 저지른 ‘사고’가 소문으로 퍼졌기 때문도 있었다.
아무래도 그 불쌍한 여자는 그 사실을 몰랐던 모양이었다.
“내가 왜 그러냐고 하니까 새빨개지더라고.”
그는 흥미롭다는 얼굴을 하며 턱을 괴었다.
그 모습은 그야말로 한 폭의 화보.
그러나 그 머릿속에서 돌아가는 생각은 그 아름다움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그 애의 내장과 그 애의 얼굴 중 어떤 게 더 빨갈까?”
역시나.
할아범의 등줄기를 따라 서늘한 무언가가 타고 올라온다.
백미러를 통해 그를 바라보는 할아범의 눈을, 백미러를 통해 그가 바라본다.
“도련님, 사람을 죽이면···.”
“알고 있어. 그럼 걸리지만 않으면 되는 거네?”
할아범이 그를 알고 지낸 중, 가장 밝은 미소가 그의 입술에 걸렸다.
그것은 황홀과도 닮은 감정을 담고 있었다.
할아범은 알고 싶지 않은 것을 알게 되고 말았다.
앞으로 그는 그 하얀 손에 수도 없이 많은 피를 묻히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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