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라인 강제연결게임 ~ 일렉트릭 시그널 ~
처음 상자가 놓여있던 그 날 이후로 해준은 가능한 다른 사람과 함께 행동하려 노력했다.
촬영장소에 갈 때는 옆집 재민이 출근하는 시간에 맞춰 먼저 나갔으며,
집으로 올 때는 스텝들이 다 정리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중간까지라도 함께 왔다.
그사이에도 계속 끈적한 시선이 이어지긴 했다.
사실, 모르겠다.
그녀가 정말로 해준을 지켜보고 있어서 시선이 느껴지는 건지,
아니면 해준의 과민반응인지.
어쨌거나 한 달이라는 시간이 별 탈 없이 지나갔다.
면도칼 상자 사건 이후로는 상자를 놓아두는 일도 없었다.
조용한 시간이 계속되자 해준의 불안감도 점점 옅어져 갔다.
그래서, 방심했다.
“후···.”
매번 스텝들이 정리를 시작할 때까지 기다리자니 심야가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촬영이 마무리되는 날이라 새벽부터 신경을 곤두세웠더니 너무 피곤하다.
해준은 설마 별일 있겠냐는 안이한 마음으로 스텝들에게 인사를 했다.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언제나 정리를 도와주던 해준이 먼저 돌아간다는 말에 그들은 다소 의아해했다.
평소에는 괜찮다고 해도 정리를 도와주고 함께 돌아갔었는데.
“오늘 뒤풀이 있는데 안 갈 거야?”
“네, 너무 피곤하네요.”
“하긴···. 요즘 계속 우리랑 같이 들어갔으니 피곤할 만하지.”
카메라 스텝은 정리하던 기재를 내려놓고 해준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해준은 가만히 그 손을 내려보다가 마주 잡았다.
“수고했어요, 해준 씨. 다음에 또 만날 거에요.”
의미심장한 말투에 해준의 가슴이 뛰었다.
언젠가 다시 해준을 써주겠다는 이야기.
해준은 넙죽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꽤 어둑어둑해진 귀갓길.
다른 스텝들과 함께 귀가할 때는 몰랐지만 어스름 속 나무는 꽤 스산했다.
팔을 휘감는 차가운 공기에 해준은 발길을 재촉했다.
촬영장은 시 외곽에 있는 해준의 집보다도 더 외곽지인 어느 산 아래 공터였다.
차가 없는 해준은 버스정류장까지 매일 30분을 꼬박 걸어야만 했다.
가로등도 거의 없고 나무가 꽤 무성해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하지만 영화에 출연할 수 있는데 그게 무슨 대수겠는가.
그런 생각으로 매일 즐겁게 걸었던 길이었다.
그러나 그 여자를 만나게 돼버린 지금은 조금 달라졌다.
해준은 처음으로 이 길이 무섭다고 느껴졌다.
한 15분쯤 걸었을까.
거의 달리듯 걷는 해준의 발 덕분에 환한 빛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해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마지막 박차를 가하기 위해 달리려고 다리에 힘을 주었다.
그 순간, 해준의 앞에 그 여자가 나타났다.
“···잘 지냈어요?”
생글생글 웃는 얼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 여자는 웃었다.
그래서 더 소름이 돋는다.
그 머리카락은 어느 날 보았던 그 길이가 아니었다.
거의 어깨에 닿을 듯 말 듯 짧은 머리카락만이 묘하게 생생하다.
그가 받은 선물이 절대 꿈이 아니었음을 알려주는 것처럼.
해준은 주머니에 넣어둔 칼을 떠올리며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 남자가 너무 방해해서 어쩔 수 없었어요. 직장까지 찾아오면 안 되는 건데.”
여자는 정말로 미안하다는 듯 웃으며 해준을 만지려 했다.
해준의 얼굴이 벌레 보는 듯한 것으로 바뀌었다.
“손대지 마.”
질겁을 하며 말을 내던지는 해준을 보며 여자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 해준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전혀 모른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나한테 가까이 오지 마.”
해준의 턱이 달달 떨렸다.
생전 처음 마주친 이해되지 않는 생물이 머리를 마비시킨다.
오로지 머리에는 저것은 위험하다는 생각만이 가득 찬다.
해준은 그대로 뒤돌아 도망치려 했다.
그것이 잘못된 선택인지도 모른 채.
“으, 으, 윽, 으, 윽.”
시간으로 따지자면 5초나 될까.
그 짧은 시간 동안 해준은 온몸을 관통하는 격통을 맛보아야만 했다.
목에서 흘러들어온 전류는 어디랄 것 없이 온몸을 휘젓고 돌아다녔다.
마치 발작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몸이 벌벌 떨리면서 저절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해준은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자기? 자기?”
라희는 해준의 몸을 흔들어 보았다.
해준은 창백한 얼굴을 한 채로 잠들 듯 쓰러져 있었다.
그 모습조차도 라희의 눈에는 마치 성스러운 무언가처럼 비쳤다.
“이거 몸에는 문제없는 거죠?”
라희가 뒤에 있는 남자에게 물었다.
남자는 생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이전에 이미 여러 번 실험해 봤으니까 문제없어요, 라는 말은 삼켰다.
남자의 경험상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라희는 다소 못마땅한 표정이긴 했지만 이내 해준의 얼굴을 보고는 생글 웃었다.
“우리 자기 정말 잘생겼다.”
라희의 손가락이 해준의 콧방울에 살짝 닿았다.
처음으로 닿은 살갗은 몹시도 따스하고 부드러워서 라희는 깜짝 놀라 손을 당겼다.
하지만 이내 마치 아기가 어머니의 온기를 갈망하듯 해준의 얼굴을 탐했다.
그저 손끝으로 얼굴을 쓰다듬는 것뿐인데도 묘한 끈적임이 느껴진다.
그 욕망으로 가득 찬 얼굴을 남자는 흥미롭다는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어떤 기분인가요?”
“좋아요···.”
자그마치 13년.
13년을 바라만 보았다.
그런 라희에게 있어 지금 이때가 얼마나 가슴 벅찬 순간인지···.
남자는 그런 라희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좋다면 어떻게 좋다는 거예요?”
행복한 시간을 방해하는 목소리에 라희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라희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답했다.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좋아요! 난 이 사람을 위해서라면 분명 목숨도 던질 수 있을 거예요. 정말 기쁘게!”
남자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났다.
혹자가 본다면 어쩌면 해준보다도 남자에게 더 매력을 느낄지도 모른다.
해준이 아직 덜 성숙한 듯한, 앳된 티가 남아있는 매력을 가졌다면
남자는 성숙한 남자의 광포한 분위기를 머금고 있었다.
마치 물어뜯길 것 같은.
그리고 그 본성을 마시멜로로 휘감은 듯한 분위기 또한 함께 머금고 있었다.
그러나 라희는 남자에게 일말의 관심도 주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는 오로지 해준만이 비치고 있었다.
“이제 그만 가죠. 곧 깨어날지도 몰라요.”
남자와 처음 제안했던 그 날부터 일 분 일 초를 애달파하며 기다렸던 순간이 왔다.
라희는 고개를 끄덕이고 해준의 얼굴에서 손을 떼었다.
“이번에야말로 틀림없이 나한테 사랑 고백을 하게 될 거야, 자기.”
어느새 모습을 드러낸 붉은 달이 을씨년스럽게 빛나고 있었다.
Comment '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