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눈물이 증거입니다.
승조는 반전을 일으킬 카드였다. 검사의 잘난 얼굴에 회심의 일격을 가해줄. 그는 가만히만 둬도 알아서 딸의 용의를 벗겨줄 테니까. 그것이 아버지니까.
심판장의 위압감만 견뎌낸다면 모든 게 잘 풀릴 것이다. 기대하는 바가 있다면 그의 기자 경력이었다.
세계 각지의 분쟁지역을 돌았다는 것이 그의 강인한 정신력의 증거가 되어주길 기대했다.
“ 괜찮죠? ”
한울은 자신이 더 떨리면서 승조에게 물었다.
“ 한울 군, 한울 군은 괜찮나요. ”
그는 눈웃음을 지으며 도리어 물어왔다.
“ 이정도야 껌이죠. ”
한울이 엄지를 들어올리며 괜한 허세를 부렸다.
“ 그럼 저도 괜찮아요. 딸을 위해서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게 기뻐요. ”
그는 진심으로 말했다. 청사진은 짜여졌다. 모든 것이 순조로이 진행되기만 하면 된다. 한울은 개정 전 가슴 속으로 주문을 외듯이 기합을 넣었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정말 마지막이다. 이제부터가 진짜 실력발휘를 할 때다. 진짜 승부는 이제 막 시작했다.
실수는 용납치 않았다. 실수해서는 안됀다. 마음을 가다듬었다. 가슴에 내려앉은 몹쓸 조급증을 몰아냈다.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며 분위기를 느꼈다. 버릇처럼 느껴지는 중압감에서 벗어나야 한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심판일 뿐이다.
하지만 심판장에 입장하면 그 순간부터 공기가 다르다. 의뢰인의 운명이 사자에게 걸리는 순간이다. 그는 주희를 바라본다. 언제나 뒤에서 한울을 믿고 있는 그녀.
듬직한 사자가 되어주어야 한다. 재현이 그녀를 부탁했으니까. 시작하자는 염라대왕의 외침에 심판이 재개되었다. 다시 한 번 숨을 뱉었다.
“ 어디 보자, 어디까지 했지? ”
염라대왕이 건망증이라도 걸린 듯 시종관에게 물었다. 그러다가 떠오른 듯,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 그러면 심판을 재개하도록 하지. 피고 측 증인은 준비되있나? ”
정말 잊어어버렸다기 보다는 분위기를 환기시키려고 흐름을 끊은 것으로 보였다.
“ 네, 준비되있습니다. 들어오시죠. ”
한울이 객석을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 이제 끝이다. 천국행의 마지막 퍼즐이 맞춰졌다. 그가 입을 열면 주희의 무고가 입증된다.
섣부른 예단일 수도 있지만 그랬다. 승조가 방청석에서 일어나 증인석 쪽으로 걸어나온다. 객석과 심판장을 나누는 문을 열고 증인석 앞에 섰다.
“ 증인, 이름과 직업을 말씀하세요. ”
승조가 증인석에 앉기 무섭게 검사가 무서운 기세로 물었다. 분위기로 몰아붙이겠다는 전략일까. 그는 평소보다도 인상을 쓰며 기선제압을 시도했다.
“ 차승조. 기잡니다. ”
그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한울의 심장이 덩달아 조마조마했다. 고양이 앞에 생선을 두고 가슴을 졸이듯이.
“ 피고인과 어떤 사이죠? ”
“ 부녀지간입니다. ”
검사는 씨익 웃으며 뒤돌아 염라대왕을 향해 걸어갔다. 그는 두 사람이 부녀라는 증거인 DNA 검사표를 펄럭이며 말했다. 고작 그것만으로 벌써 신이 나있다.
“ 존경하는 염라대왕님, 부녀랍니다! 모름지기 부모는 자식을 감싸는 족속입니다. 증인의 증언이 과연 신빙성이 있을까요? 들을 필요도 없이 피고에게 유리한 증언을 내뱉을 것입니다! 자, 염라대왕님, 시간낭비는 그만두고 판결을... ”
“ 판결은 내가 한다... ”
염라대왕은 짐짓 검사의 언행이 귀찮다는 듯 말했다. 그는 판결에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은 두고보지 않았다.
검사는 분한 듯 두 주먹을 꽉 쥐고 돌아서 다시 증인석으로 걸어갔다. 아직 총알이 모자랐다.
“ 우리가 뭘 물을지는 대충 아시죠? ”
“ 네. ”
“ 따님이 무슨 짓을 했는지도 아시겠고요. ”
“ 존경하는 염라대왕님, 검사 측은 지금 증인을 압박하고 있습니다! ”
한울이 벌떡 일어나서 제지를 촉구했다. 이가 갈리는 수법이다.
“ 검사, 자중해라. ”
염라대왕의 말에 검사는 이를 꽉 깨물고 입을 다문다. 웬 일로 염라대왕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준다. 불행중 다행이란 말이 이럴 때 쓰는 말인가.
“ 그럼 묻겠습니다. 피고가 증인의 꿈에서 자신을 죽여달라고 부탁한 바가 있습니까. ”
검사가 냉철하게 안경을 고쳐쓰며 물었다.
“ 네. ”
승조가 흔들림없이 답했다.
“ 보십쇼! 이제 모든 게 명백해졌습니다! ”
다시 한 번 검사가 섣불리 판을 깨려 시도했다.
“ 아직입니다! ”
한울이 다시 일어섰다. 이대로 끝낼 수는 없다. 뭐라도 해야 한다.
“ 증인! 그때 기분이 어땠죠? ”
한울이 묻자, 그는 답변을 주저했다.
“ 아이의 힘듦을 돌보지 못했구나. 나만 생각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
“ 죄책감이 드셨군요. 힘드셨겠습니다. ”
검사가 끼어들었다. 무슨 꿍꿍이속일까.
“ 네, 아이는 죽고 싶어 하는데.. 저는 살 수도 있다고 말하며 아이를 영원 속에 가둬놨습니다. 전 아버지로서 실격이에요. ”
검사는 승조가 말을 할 수록 기쁜 기색이었다.
“ 하지만 살 수도 있었겠죠. ”
검사가 말했다.
“ 예? ”
승조가 놀라며 물었다.
“ 살 수도 있었을 거라고요. ”
“ 그게 무슨 소리에요? ”
승조가 소리쳤다. 상황이 꼬여간다.
“ 기적이란 건 존재해요. 누군가 조정할 수는 없지만, 확률상 천재지변처럼 갑자기 일어날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 실낱 같은 희망을 믿다가 정말로 살아난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들은 끈기 있게 살아남았기 때문에 보상을 받은 거에요. 하지만 포기하면 끝이죠. 기적이 닿을 세도 없이. ”
“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에요. ”
“ 피고가 증인에게 안락사를 부탁한 건 옳지 못한 선택이었어요. 자신은 물론이고 아버지에게 씻을 수 없는 후유증을 안겼으니까요. 지금도 이렇게 죄책감에 빠져있잖아요. 당신은 그저 기적을 바랐을 뿐인데, 옳지 못한 건 존귀한 삶을 내팽개치고 도망쳐버린 딸인데. 왜 당신이 고개를 숙여야 하죠? ”
“ 존경하는 염라대왕님, 검사는 지금... ”
“ 계속해라. 표현은 과격하나 이것이 이번 심판의 본질인 것 같구나. ”
한울은 완전히 말려들었다. 승조가 죄책감을 느끼는 한, 그 원인은 딸일 것이고 그것은 곧 피고의 죄다. 그 빌어먹을 연결고리가 통하는 곳이 저승이다.
“ 결국 실행한 건 접니다, 검사님. ”
승조가 다시 침착하게 말했다. 두 손을 탁자에 모으고 꼭 쥐었다. 마치 누군가의 손을 잡고 힘을 받으려는 듯이.
“ 누가 뭐라 하든, 저는 저입니다. 누가 하라고 해서, 그게 설령 딸이라 해도 제가 더 나은 방향이 아닌 곳으로 가진 않습니다. 저는 딸의 죽음을 인정하면서 비로소 해방됬습니다. 잔인하게 들리겠지만 그래요. 슬프지만 그게 최선입니다. ”
“ 그 말이 추후에 있을 증인의 심판에선 불리하게 작용될 겁니다. 딸을 살리고 지옥으로 떨어지시겠다는 각오입니까. ”
“ 사실인 걸요. 죄책감은 있죠. 하지만 그건 저의 것이지, 그 어떤 외부적 요인도 없습니다. 딸에게 책임을 묻지 말아주세요. 딸은 고통에 몸부림친 죄 밖에 없습니다. ”
“ 견디고 견뎌서 기적을 기다렸다면 최상의 시나리오가 있었을 겁니다. ”
“ 그런 일은 없습니다. 기적이 왜 기적이겠어요. 당신은 비 오는 날 벼락이 두려워서 못 나가나요? 기적적으로 벼락에 맞을 수도 있는데요. ”
승조가 여유를 되찾고 반격하듯 말했다.
“ 결국 피고가 최선을 다해 운명과 맞서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
“ 이제 그만하시죠. 당신, 단 한 번이라도 기적의 손길을 받은 적 있습니까? 정말로 필요할 때, 신이 있다고 믿고 싶을 때 단 한 번이라도 기적이 온 적 있습니까? ”
승조의 일갈에 검사는 할 말을 잃었다.
“ 거기까지. 승부는 난 것 같구나. 저승의 심판 제도도 변할 때가 되었다. 언제까지 이승의 법을 받아적는 데에 그칠 것인가. 저승의 존재 의의는 대체 무엇인가. 오늘 나는 다시 한 번 생각을 굳히게 되는 하루였다. 그럼 판결하겠다. ”
염라대왕이 법봉을 들고 내리치려 하자 검사가 달려들어 그를 막아세웠다.
“ 안됍니다! 저승의 근본이... 무너진다고요! 당신은 염라의 후손이 아닙니까!!! 그들이 쌓아온 것들을 부정하고 범죄귀들을 옹호할 작정입니까!! ”
“ 이 버릇 없는 것! 썩 떨어지거라! ”
염라대왕이 그를 떼어내려 손을 뻗자 세찬 불길이 그를 뒤덮었다. 그러더니 그는 튕겨져나가 심판장 가운데에서 울부짖었다.
“ 체통을, 체통을 지키세요.. 대왕님... ”
심판장 가운데에서 탄내를 풍기며 널브러진 그가 말했다. 그러던지 말던지 염라대왕은 법봉을 쥐고 들어올린다. 순간, 그러리라고는 생각치도 못할 일이 생긴다.
“ 절대 그렇게는 안돼지! ”
예상치 못한 인물의 등장이었다.
“ 이 심판은 여기서 끝낼 수 없다!! ”
염라대왕의 시종관 중 하나가 시종관 복장을 벗어던지고 소리쳤다. 그는 단숨에 염라대왕에게 총구를 겨누었다. 오병택이었다.
- 작가의말
착한 눈물 인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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