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노인과 철의 바다에서
어제의 기억이 아득한 과거처럼 느껴졌다. 그의 집에 찾아가고 싶었다. 헤어지지 않으면 안돼냐고 묻고 싶었다. 그러면 승조는 뭐라고 할까.
알겠다며 생각을 고쳐먹을 리는 없었다. 승조는 아버지로서의 본분을 자기 방식대로 다하려 하고 있다. 유화는 승조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생각한다.
딱 전처만큼 사랑할까. 그녀와 똑같아서 사랑하는 거라 해도 유화는 싫지 않았다. 승조에게 빛이 되주고 싶었다. 웃음을 되찾아주고 싶었다.
유화는 남에게 베푸는 법이 없었지만, 그에게만큼은 온전히 줄 수 있었다. 창밖에는 기록적인 폭우가 내리고 있었다.
흐린 하늘에도 집안에 여남은 빛은 아직 시간이 낮임을 알렸다. 부모란 무얼까. 자식은 또 무얼까.
유화에게 부모는 아직 어려웠다. 자식은 손길이 가닿는 대로 사랑스러운 존재였다. 유화는 그런 존재를 위해 무얼 할 수 있을까.
살인은 아주 큰 각오가 필요하다. 거대한 용기가 필요하다. 따라서 유화는 신중할 뿐이다.
유화는 승조가 자신을 배제하겠다고 선언했을 때, 자신이 어떤 기분이었는지 생각했다. 범죄를 저지르지 않아도 되서 다행이라고 여겼을까.
가슴에 뚫린 거대한 구멍은 그리 말하고 있지 않았다. 유화의 가슴은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고 울부짖었다. 그녀의 내면은 날뛰고 있었다.
유화는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상기된 볼을 보았다. 만지면 손에 불이 붙을듯 타오르는 얼굴은 그녀에게 행동하라고 채근했다.
유화는 가슴이 시키는 대로 하기로 했다. 옷을 입고 현관으로 내달렸다. 어린애처럼 망설일 수만은 없다. 유화는 형체 없는 목적지가 바로 앞인 것처럼 달렸다.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에 몸을 싣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미친 듯한 폭우도 그녀를 막을 수는 없었다. 우산을 놓고 왔다는 사실도 그녀를 집으로 물러서게 할 수 없었다.
빗소리는 거셌지만 유화가 느끼는 설움보다야 못했다. 살결의 좁은 틈새에서 피가 베어나오듯이, 아픔의 상징처럼 그녀가 아파트를 빠져나왔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세상처럼 아파트 앞은 조용하다. 어제와 다를 바 없는 세상이지만 그녀는 달랐다. 아버지가 되기 위해 모든 걸 저버린 한 남자 때문이었다.
유화가 빗속으로 뛰어들자, 빗물과 뒤섞인 눈물이 삽시간에 턱밑으로 흘렀다. 그의 말대로 모든 건 잊혀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유 모를 눈물은 아마 그럴 수 없을 거라고 말하고 있었다. 서러움을 참을 수 없었다. 피 튀기는 혈투를 한 것처럼 몸에 힘이 없었다.
슬픔에 몸을 가눌 수 없고, 정신은 또렷하지 못하지만 걷지 않을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의지에 붙들려 빗속을 뚫고 나아갔다.
유화는 그날, 운전대를 잡았다. 일반적인 지성을 가진 인간이라면 하지 않을 무모한 주행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순간, 유화는 자신이 아직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왜일까. 마치 몽중인 것처럼 기분이 날아오를 듯 하다. 아무것도 생각않고 운전에만 집중했다. 그런데 어디로 가고 있는지, 그녀는 몰랐다.
한참을 달리던 유화는 차를 세웠다. 한걸음을 떼는 데에 본능의 힘을 빌렸으니, 이제는 이성이 해야할 일을 말해줄 차례였다.
유화는 자신이 가진 지성을 총동원했다. 눈앞에 헛것처럼 날붙이의 서슬 퍼런 몸체가 어른거렸다. 유화는 철물점으로 가기로 결정한다.
살인 지식은 전무한 그녀로서는 칼로 우글거리는 그곳이 바로 살인의 요람이었다. 그러나 날씨 탓인지 철물점의 굳게 닫힌 셔터만이 유화를 맞이했다.
무엇이든 칼을 보고 싶었다. 이유 모를 칼에 대한 호기심이 들끓었다. 유화는 셔터를 두드리며 사람을 불렀다.
“ 아, 누구요! ”
늙은 사내가 소란에 성가신 듯이 찡그린 얼굴로 셔터를 올리고 소리친다. 주름은 그가 살아온 세월을 대변하고 있었다. 겨우 진정된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 잠시 들어가도 될까요? 급한 일이에요. ”
유화는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안으로 들어섰다. 어두운 철물점 안이라 다행이었다. 슬픔에 젖은 채로 살아가는 몰골을 늙은 사내에게 들키지 않아도 되니까.
“ 무얼 찾으슈? 이 폭우에, 물에 빠진 생쥐 꼴을 하구선. ”
노인의 얼굴에선 간만에 휴일을 방해한 여자에 대한 불만이 녹아있었지만, 그밖에 의심어린 표정은 엿보이지 않았다. 가령, 이 여자가 살인을 준비하고 있다던가.
“ 찾는 게 뭐냐구. 급해뵈서 열어줬드만 왜 암말도 없소. ”
답답한 목소리의 노인이 성가신 어투로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가래침으로 가득했다. 유화는 이곳에 존재하지도 않는 걸 사러 온 것처럼 침묵했다.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 칼 있나요. 잘 드는 걸로. ”
유화의 말에 노인은 잠시 멈칫하더니 말했다.
“ 저번에 왔던 손님이랑 누가 보면 부분 줄 알겠수다. 어쩜 그리 똑같이 말하요? ”
노인의 말에 유화는 뱃속이 당기는 듯했다. 가슴에선 통증이 일었다. 뭐 하나 짐작가는 바가 없었다. 철의 내음이 유화를 자극했다.
“ 누가 왔다 갔나요? ”
뿜어져나오는 불안을 애써 억누르며 말했다.
“ 어떤 남자도 칼을 찾다 갔었는데, 그게 눈빛이 예사롭지 않더라고. 그 남자도 손님이랑 똑같은 소릴 했지. 잘 드는 걸로 달라구 말이야. ”
몸에 소름이 돋았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남편일까. 남편은 살아있다. 육체와 정신 뿐만이 아니다. 유화의 삶 속에서 그는 사라지지 않았다.
“ 그 남자가 어떻게 생겼죠? ”
“ 그걸 내가 어떻게 기억하나? ”
유화는 사탕을 갈구하는 어린애처럼 노인을 바라보았다. 노인은 두손 가득 사탕을 안겨주듯이 기억을 더듬어 말했다.
“ 아마, 그 키가 컸고 검은 코트를 입었을 거야. 턱수염이 덮이고 얼굴이 말이 아니었지. 무슨 산송장이 걸어오는 줄 알았다니까. ”
그 말에 유화는 포획된 사냥감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남편이 살아서 이곳에 존재하는 듯했다. 언제일까. 언제 그가 이곳에 왔을까. 그의 손아귀가 칼을 갈망한 이유는 뭘까.
“ 언제였죠, 그때가. ”
“ 뭘 자꾸 코치코치 캐물어. 영장있어? 음.. 아마 두어달 전일 거야. 그날, 트윈스가 엄청 깨졌걸랑. ”
느낌이 좋지 않았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가슴에 불길이 치솟았다. 이건 아니라고 이성이 말했지만, 망설이던 감정은 오히려 걷히고 확신만이 자리했다.
“ 그때, 그 남자한테 무슨 칼을 주셨죠? ”
유화는 일을 치를 생각이었다. 아주 위험하지만 해내야 하는 일. 눈물 지으며 시간을 보낼 수는 없다. 늙은 사내는 안쪽으로 들어가더니 나이프 하나를 가져온다.
“ 그때, 그 남자 손님에게도 이걸 주었지. 결국 사지는 않았지만.. 당신들 부부싸움이 심하다지만 서로 흉기로 싸우진 말라고. 애가 안 볼 거 같지? 다 본다니까? ”
유화는 눈물을 숨기고 그 잭나이프의 값을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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