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우리들의 밤.
창 밖에는 비가 내리고 유화는 뜬눈으로 밤을 새고 있다. 외로운 등불이 집 안의 유일한 빛이었다.
불이 꺼진 집은 공허했다. 마치 아무도 살지 않는 것처럼. 조용한 실내에는 빗소리만이 추적추적 흘렀다.
그 비는 밖에 내리는 것인지, 안에 내리는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그녀의 마음 속엔 이미 비가 내리고 있으므로.
그녀는 소파 위에서 두 무릎을 끌어안고 꺼져버린 텔레비전 속 자신을 응시했다. 그녀들은 서로를 공허하게 응시하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눈을 감았다 떴다.
그녀의 눈은 텅비어 있었다. 무엇이 검고 흰지는 중요치 않았다. 초인종이 울린다. 그녀의 마음 속을 헤집는 소리였다.
그것도 다급하게 여러 번. 어쩌면 기다려왔는지 모를 제 3의 소리. 끝없는 공상에서 구원해줄.
정지된 시간 속에서 유일하게 움직이는 것처럼 생동감 있는 소리가 유화의 멈춘 마음에 잔물결을 일으켰다. 그녀는 살아있음을 체감했다.
유화는 몸을 일으켜 현관으로 걸어갔다. 무엇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면서도 서두르지도 주저하지도 않았다.
문을 열자, 눈앞에 비에 젖은 승조가 슬픈 눈을 하며 서있었다. 모든 것을 놓고 온 감정의 넝마주이의 눈.
머리에 쓴 모자에서 물이 떨어졌다. 비에 흠뻑 젖은 긴 머리가 어깨를 덮었다.
“ 미안해요, 이 시간에. ”
승조의 거친 목소리가 떨렸다. 목은 잠겼고, 슬픔이 목젖을 채웠다. 젖은 속눈썹에서 빗물이 떨어졌다. 눈덩이가 파르르 떨려 물방울들은 앞다퉈 맺히고 떨어졌다.
“ 무슨 일.. ”
유화가 물을 세도 없이 승조의 몸이 그녀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승조는 그녀의 어깻죽지에 얼굴을 기대었다.
그는 연신 미안하다고 말했다. 설 수조차 없어보이는 이 비련한 남자를 유화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유화는 말없이 그를 부축해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달고 온 물기들이 거실에 떨어졌다. 힘없이 끌려오는 그는 마치 영혼없는 껍데기 같았다. 그의 몸에선 열감이 선연했다.
유화는 그를 소파에 앉히고 차를 내어주었다. 컵 안에서 따뜻한 황토색 계피차가 외등불을 머금고 일렁거렸다. 잔잔한 작은 온천 같은 계피차는 승조가 준 보온병의 답례였다.
승조는 젖은 손으로 찻잔을 들었다. 그 손이 덜덜 떨려 보는 이마저 불안케 했다. 그는 반쯤 들어올리던 계피차를 도로 내려놓고는 공허한 눈을 들어 유화를 바라보았다. 차로는 자신의 마음을 달랠 수 없다는 듯.
그는 할 말을 찾듯이 입을 달싹였다. 그는 이제서야 자신이 왜 여길 왔는지 생각하는 듯했다. 이내 고개를 떨군 승조는 두 손으로 얼굴을 쓸고 말했다.
“ 이런 제 행동이 무례하다는 거 알아요. ”
승조가 가래 끓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몸으로 빗속을 뚫고 왔단 말인가. 목이 쉬고 코는 막히고 숨은 거칠다. 그는 지독한 감기에 걸린 것이다. 불행이란 감기.
“ 괜찮아요, 난. 신경쓰지 말아요. ”
유화는 그를 기다렸다. 유화의 마음 속 허기는 승조로 채울 수 있었다. 그녀는 이제는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를 원했고, 어쩌면 그가 말한 허무맹랑한 말조차 믿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혈서와 전화.
그와 함께라면 속죄의 대가도 치를 수 있으리라. 유화의 마음은 서서히 변하고 있었다.
“ 아니에요. 이래서는 안돼는 거에요. 당신에겐 너무 미안해요. ”
“ 그럴 거 없다니까요. 무슨 일인지 얘기해봐요. 아니, 하기 싫으면 안해도 되요. ”
유화가 다가가 그의 등을 쓸며 말했다. 마치 아이를 달래듯이. 부드러운 등이 놀랍도록 앙상해졌다.
승조가 고개를 들었다. 이제 할 얘기가 떠오른 듯이. 망연한 두눈이 유화에게로 붙박였다. 결심했기에 절망한 눈.
“ 아니요. 해야해요. 제가 얼마나 못났는지 고백해야해요. 전 방금 제 딸을 죽게 했으니까요. ”
“ 그게 무슨 말이에요. ”
“ 말그대로에요. 우리 딸이 살고 싶지 않대요. ”
그의 말은 유화의 가슴마저 내려앉게 했다. 그 말의 의미를 완전히 헤아릴 수 없었다. 턱을 덮은 수염은 그가 얼마나 피폐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가늠케 했다.
언제부터 깎을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일까. 그에게 일상생활은 무의미했다. 딸이 없는 일상은 악몽의 연장일 뿐이었으니까.
이제서야 그의 진정한 모습이 공개된 듯했다. 망가지고 피폐한 폐인. 덤덤하게 이겨내고 있는 건 사실 철저히 숨긴 모습이었던 것이다. 볼품없는 그의 모습은 오히려 유화의 마음을 끌었다.
“ 무리도 아니에요. 내가, 내가 그아일 붙잡아두고 있었던 거에요. 내가 그아이를.. ”
승조의 검은 턱이 떨렸다. 힘을 주어도 턱은 사정없이 떨렸다. 분통이 턱을 뒤흔들었다. 그의 뺨은 몰라보게 홀쭉해졌다.
유화는 뺨을 어루만졌다. 거칠어진 피부는 사막 같았다. 창백한 얼굴에서 눈물이 흘렀다. 아픔의 눈물인지, 슬픔의 눈물인지. 아니, 그 경계는 과연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의 퍼석한 입이 공포에 질렸다. 그의 얼굴은 사막이었고, 오아시스를 바라고 있었다. 타들어간 심장에 물을 부어줄.
“ 진정해요. 당신 탓 아니에요. 천천히 설명해봐요. ”
“ 딸이 꿈에 나타났어요. 꿈이었는데, 실제처럼 선명했어요. 딸이 눈앞에 서있었고, 그아이의 냄새가 났고 다가가서 안을 수 있었어요. 아이의 뺨을 만질 수 있었죠. 아이가 말하더군요. 왜 나를 보내주지 않냐고. 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요. ”
유월의 밤바람이 창문 틈으로 밀려들어왔다. 유화는 승조의 슬픈 뒷면을 마주했다. 오래되어 바랜, 동전 같은 얼굴.
“ 생각해보면 저는 아이에게 돈 밖에 준게 없어요. 그거면 제 할 도리는 한 거라고 착각했죠.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요. 전 끝까지 못난 아버지로 남을 거에요. ”
그는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듯했다. 아버지로서의 자신을. 스스로를 자책하게 되는 심정을 유화는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도 그러므로. 칠흑 같은 어둠을 헤메이는 자신이 생각났다.
“ 그렇지 않아요. 당신은... 당신은... ”
유화는 그의 젖은 복장을 어루만지며 할 말을 찾았다. 유화는 타인의 마음을 섬세히 어루만지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거라곤 귀를 열어 들어주는 것 뿐이었다. 보이지 않는 선을 허물고 있는 그대로 마주하는 것이다.
“ 좋은 아빠였을 거에요. 전 느꼈어요. 당신이 딸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런 당신이 왜 못난 아빠겠어요. ”
유화는 슬픔을 쥐고 사는 기분을 안다. 던져버려야 편해짐을 알지만, 쥔 손을 펼 수 없다.
“ 인생 헛 살았어요. 이럴 거면 이혼도 하지 않고, 좀 더 잘해주고 함께 시간을 보내줄 걸 그랬어요. 사랑만 하면 그 마음이 전해지는 줄 안 거에요, 바보 같이. ”
“ 요즘들어 아이가 더 보고 싶어요. 당신처럼 나도 그런 착각을 했었어요. 당신은 모를 거에요. 나 때문에 아이가 죽었다는 것이 얼마나 비수가 되는지. 그래요, 당신은 달라요. 당신은 딸의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죠. 나는 언제나 아이를 몰아세웠거든요. 그게 사랑의 방식인 줄 알았어요. ”
유화는 아들을 생각했다. 아들은 이제 그녀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교복을 입은 학생으로 남을 것이다.
이십 대가 되어 대학을 가고 군에 입대하고 취업을 하고 삼십 대가 되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사십 대가 되어 지금의 그녀처럼 늙어가는 모습은 영영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녀는 늙지만 아들은 항상 그대로일 것이다.
“ 나도 별 수 없는 인간이에요. 당신한테 이것저것 조언하고 위로했지만, 정작 저도 당신에게 위로 받아야 하는 입장이에요. 당신과 같이 자식을 지키지 못한 건 다르지 않죠. 우습죠? ”
유화와 승조는 서로를 비추었다.
“ 아니요. 당신이 우습다면, 그건 제가 우스운 거에요. 그래요, 당신 말대로 우린 서로 너무 닮았어요. ”
“ 그 말, 나쁘지 않네요. 우리가 닮았다는 거. ”
“ 나는 당신이 있어 버틸 수 있었어요. ”
유화는 자신도 몰랐던 마음을 말했나. 목소리에서는 조금의 떨림이 느껴졌다. 귀가 빨개지고 몸에서 연기가 났다.
어느 누구도 이런 기분에 대해 알려주지 않았다. 남편을 향한 마음조차 이렇지는 않았다.
“ 나도요. ”
언어의 힘이란 그런 걸까. 짧은 문장 하나에도 유화의 심장엔 봄이 내려앉았다. 슬픔 가운데에서도 틔우는 싹처럼.
싹을 틔울 수 없을 것 같은 땅에서도 싹이 트고 꽃을 피울 수 있을까. 유화는 믿을 수 없었다.
“ 사랑해요. ”
유화는 자신의 가슴 속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그 말을 했다. 차승조라는 남자가 불현듯 그녀 품 안으로 파고든 그날부터, 유화는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사랑을 느꼈다.
매우 오랜만에 느껴보는 설렘이었다.
“ 나도요. 사랑해요. 이래도 되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래요. ”
그가 가슴이 막힌 듯 힘겹게 말했다. 사랑마저 억눌러야 하는 남자의 목소리였다. 고통은 사랑의 교두보가 되어 둘을 연결지었다.
이제 그들은 성역 없이 사랑할 것이다. 이 밤은 그들을 감쌌고, 그들을 공감의 천막으로 가려 오로지 둘만 있게 했다.
“ 나도 잘 모르겠어요. 마음 가는 대로 해도 되는지. 이젠 잊고 살고 싶은데, 그게 잘 안돼요. 자꾸만 들추게 되고, 상처를 긁게 되요. 그리고 이젠 감출 수 없다는 걸 알게 됬어요. 당신 때문에. 당신의 손을 잡고 버티고 싶어졌어요. 기억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지 않아졌어요. ”
“ 나도 당신과 함께 하고 싶었어요. 처음엔, 기자로서 호기심과, 내 딸을 두고 가버린 아이에 대한 분노도 어느 정도 있었어요. 하지만 이젠 아니에요. 당신이어야 내가 살아요. ”
승조의 진심에 유화는 간지러운 마음이 들었다. 소녀처럼 웃는 그녀를 향해 승조는 입을 맞췄다.
백 마디 말보다 뜨거운 입술이 모든 것을 대변했다. 그는 입을 떼어내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 미안...해요. 감기 옮겠다. 내가 그래요. 하고 싶은 건 못 참아요. 그래서 기자한다고 집에도 안 들어오고, 결국 부인 꼭지 돌게 했잖아요. ”
귀가 펄펄 끓듯이 타오른 유화는 말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유화는 서둘러 탁자를 잡고 일어서려고 했지만, 승조가 그녀의 품을 끌어당겨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 잠시만.. 나 횡설수설하는 게 독한 감기에 걸렸나봐요. 아주 잠시.. 이렇게 있으면 나을 거 같아요. 아주 잠시만.. ”
“ 난 여기 있어요. 그러니까... ”
유화는 입을 다물었다. 고른 숨소리. 이어지는 침묵. 유화는 그를 소파에 눕히고 담요를 덮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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