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죄는 다른 놈들이 지었는데..
좋게 생각하려 애써도 눈물이 차오른다. 딸의 죽음이 목전으로 다가왔는데 어떻게 웃을 수 있을까.
승조의 안에서는 장작이 타듯 뜨거운 무언가가 잿빛으로 타들어갔다. 차라리 사랑마저 타들어갔으면.
몇 가지 절차 끝에 다가온 시간이다. 의사는 냉정한 눈으로 승조를 바라보았다. 딸의 생명연장장치를 제거하는 시간.
딸을 고통 속에서 끄집어내주는 순간. 이제 이것만 제거하면 딸은 죽는다. 지금이라도 말릴 수만 있다면.
눈을 감고 영혼의 성불을 앞둔 딸. 승조는 그것을 막을 수 없었다. 병실 안은 거대한 의식을 준비하는 것처럼 경건한 분위기가 만연했다. 병원이라는 현실적인 곳에서 신성한 분위기가 풍겼다.
호흡기가 작동을 멈추고 LED 심박수 모니터에서 삐- 소리가 울렸다. 귓전을 때리는 사형선고.
그 소리가 총알처럼 지나가 승조의 가슴에 상흔을 자아냈다. 괜찮으리라 다짐했는에 그럴 리가 없었다.
그곳은 순식간에 어둠으로 물들었다. 순백의 병실은 되려 암흑 같았다. 거친 토양에 뿌리내린 고결한 야생화 하나가 지는 순간이었다. 세상은 꽃이 살기엔 너무나 거칠고 척박했다.
저무는 태양은 소녀가 가는 길을 비추었다. 하늘길도 열어주기를. 주희가 아빠없이도 하늘로 가는 길을 잃지 않게.
붉은 노을은 주희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었다. 날이면 날마다 노을을 바라보던 딸. 마지막을 장식하기엔 더없이 좋은 시간이었다. 하늘나라는 항상 노을져있었으면 좋겠다.
곧 병실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사랑하는 딸은 이제 없다. 승조의 길잃은 사랑도. 급격한 슬픔이 승조를 치고 갔다. 승조는 어지러웠다.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승조는 공황상태에 빠진 듯 그 자리에서 망연히 영안실로 떠나간 방향을 바라보았다. 딸의 여남은 채취를 느끼고 싶었다.
두통이 밀려왔다. 머리가 터질 듯했다. 쫓아가서 차가운 손이라도 한 번 더 만져보고 싶은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만지면 또 만지고 싶을 테니 차라리 다행일지도 몰랐다.
웃으며 보내주겠다던 다짐을 보기좋게 저버리고 울고 말았다. 아빠가 울면 주희는 항상 그를 놀리곤 했는데. 주희가 봤다면 놀렸을 것이 자명했다.
어떤 것으로도 달랠 길이 없는 슬픔이 밀려왔다. 슬픈 것이 당연한데도 당황스러웠다. 수없는 다짐이 수포로 돌아갔다.
머리가 무겁고 천둥이 치는 것처럼 울린다. 그 자신까지 병이라도 난 걸까. 승조는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이 수치스러웠다. 왜 딸이 아닌 자신이 생을 마저 살아갈까.
딸이 사라지리라는 공포는 그녀가 없음으로 차츰 가라앉고, 그 자리에는 슬픔과 그리움과 절망과 아픔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두려움은 그 일이 있기 직전에 최대치로 치솟고, 막상 일이 일어나면 거품이 꺼지듯이 사라지지만 슬픔은 때때로 파멸을 요한다.
병실을 나서 한참을 걸었다. 하늘이 공허했다. 운전을 할 수가 없었다. 목적지가 없었다. 유화도 덩달아 그러했다.
그들은 모두 충격이란 바다에서 헤엄치고 있었다. 저만치서 따라오는 유화의 기분 또한 그와 다르지 않았다. 무고한 아이의 죽음은 어른들에게 죄의식을 안겨주니까.
“ 미안해요, 이런 걸 보여줘서. 당신에겐 큰 상처가 될지도 모를 텐데. ”
앞서가던 승조가 문득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의 눈엔 슬픔과 죄책감과 그리움이 묻어나있었다. 절망을 해소할 길이 없는 얼굴.
한사코 슬퍼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것이 무색하게. 딸을 웃으면서 보내주겠다는 건 말도 안돼는 고집이었을까.
“ 저는 아들의 끝을 함께하지 못했어요. 주희를 통해서 저는 재현이를 보낼 수 있었어요. 그것만으로 저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
거센 바람이 유화의 머리칼을 흩날리게 했다. 유화를 넘어뜨리려는 것처럼. 승조는 자신의 가슴 속에 알싸하게 퍼지는 슬픔의 독을 느낀다.
악의적인 독은 승조의 혈액을 타고 몸 곳곳을 순환한다. 그러나 그런 대로 버틸만 하다. 아니, 버텨야 했다. 이제 혼자가 아니니까. 승조에게 그런 마음이 들게 하는 사람이 생겼으니까.
“ 오늘 당신 아들 산소에 가지 않을래요? ”
승조는 그녀의 아들이 궁금했다. 얼굴도 모르지만 정이 갔다. 딸이 좋아했던 아이라서일까. 생각해보면 신기했다.
그런 아이가 존재할 줄은 몰랐다. 한번도 해준 적 없었다. 유치원에서도 여자아이랑만 놀던 그녀가.
여덟 살 때부터 친했던 동네 남자애가 있었다니. 그것도 딸이 좋아하는 아이라니.
존재하지 않을 거라 생각한 건 아빠들의 오만이었을까. 숨김없이 말해주리란 것도. 어렸을 때의 일이니 말하지 않았으리라 위안을 가져본다.
그래도 신기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언제나 품 안의 자식이고, 나중에 크면 아빠랑 결혼할 거라고 말할 줄 알았는데. 그건 착각이었고 믿는 사람이 순진한 것이다.
“ 네? ”
승조는 자신이 뭐라고 그런 말을 할까, 싶었다. 무슨 자격으로. 별 수 없는 것일까. 하룻밤만으로는 그런 관계까지는 무리일까. 아들까지 언급하는 건 선을 넘는 것일까.
하지만 그녀가 딸을 보러와준 마음에 보답을 하고 싶다.
“ 우리딸이 좋아했던 아이가 누군지 보고 싶어요. ”
유화가 멈춰선 승조의 곁으로 왔다. 그녀의 맑은 눈동자가 노을에 비쳐 아름답게 빛났다. 자신의 설움마저 아름다움으로 치환시키듯이.
“ 좋아요. 당신이 그리 말해주니 기뻐요. ”
유화는 승조의 팔안을 살며시 붙잡았다. 그들은 너무나 가까웠다. 이래도 될까. 승조는 행복이 불편했다. 딸의 사망진단서에 쓰여진 잉크가 채 마르기 전에.
“ 내가 당신과 같이 있어도 될지 모르겠어요. ”
승조가 불안하게 걸으며 말했다. 차가 주차된 곳은 멀게만 느껴졌다.
“ 사실 저도 그래요. 평생 지옥 속에서 살아야 하는데, 당신이 아니라고 하니까 혼란스러워요. 아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요. ”
“ 우리 둘 다 아직 멀었어요. 죄를 지었으니 죽을 때까지 속죄해야 해요. 우린 행복하면 안돼요. ”
승조의 말끝이 어두워졌다.
“ 그래서요? ”
유화는 당황한 듯이 팔을 빼고 뒤로 물러났다. 승조 역시 놀란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이내 그의 표정이 풀리고 입가에는 쓴웃음이 흘렀다.
“ 그게 곧 우리의 헤어짐을 말하는 건 아니에요. 염려말아요. 나는 당신이 아니면 살 수 없어요. 나와 당신은 같으니까. ”
그게 무슨 말인지, 유화는 이해할 수 없었다.
“ 우리가 좀 더 나은 부모였다면, 지금보다 더 나은 사이였을까요. ”
“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점 때문에 우리가 서로를 알아본 거에요. ”
그들은 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침묵은 침묵을 낳고, 차 안에서도 그 침묵은 이어졌다. 그들은 어디론가로 향했고, 그곳은 고귀한 영혼들의 안식처였다.
차에서 내린 그들은 풀밭을 지나 여려 묘지들 틈에서 박재현이라는 이름을 가진 묘 앞에 섰다.
“ 아들, 엄마야. ”
투박한 엄마의 인사가 무덤을 향했다. 소년의 어깨처럼 왜소한 무덤은 힘이 없어보였다. 무덤 앞에는 아이의 사진과 꽃다발이 놓여있었다.
“ 안녕, 재현아. 아저씨 처음 보지? 주희 아빠야. ”
승조는 풀밭에 덥석 양반다리로 앉아 무덤을 문질렀다. 마치 소년의 머리칼을 쓰다듬듯이. 승조는 어른으로서 말해주고 싶었다. 네겐 잘못이 없다고. 어른들이 몰라줘서 미안하다고.
“ 엄마가 미안해. ”
유화는 이곳에 올 때면 항상 했던 대로 사과했다. 아들이 무덤 안에서 튀어나와 지겨워서 못 듣겠다고 할 때까지 할 태세였다. 승조가 그녀의 손을 잡고 말을 잇는다.
“ 주희한테 네 얘기 많이 들었어. 주희가 너 많이 좋아하더라. 여덟 살 때 만나고 오랜만에 만났다면서 기뻐했어. 혹시 네가 우리 주희 때문에 죄책감을 느낀다면 그럴 필요없어. 주희는 너를 미워할 아이가 아니야. 네 잘못이 아니잖니. 잘못한 건... ”
승조는 끝내 뒷말을 하지 못했다. 송현규, 그 외에 아이들. 진짜 악마는 그들이다. 승조는 이가 갈렸다. 풀을 만지던 손이 오그러들었다. 흙이가 만져진다. 잘 다져진 흙이 허물어진다.
“ 그 아이들이야, 네가 아니라! ”
지금 이 순간, 그는 모든 아이들의 아버지로서 분노했다.
- 작가의말
옳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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