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답은 정해져있어, 넌 듣기만 하면 돼
회의실 안은 금방이라도 하늘이 무너질 듯이 침침한 분위기였다. 마치 생존에 얽힌 문제에 봉착한 것처럼.
“ 왔군. ”
한 쪽눈에 다친 흉터가 있는 노인이 말했다. 회의실 안에는 모두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들 뿐이었는데, 노인만 유일하게 한복을 입고 있었다.
“ 무슨 일이죠? ”
내가 성급하게 물었다. 나의 불안증은 불치병이었다. 과거에 의해 불가항력적으로 얻어진 병. 회의실 안은 옅은 안갯속처럼 긴장이 흘렀다.
“ 박재현 군이라고 했나? ”
노인은 갑자기 나의 몸에 코를 대고 킁킁댔다. 그 모습이 어딘가 변태적이기까지 했다.
“ 오오, 얼마만에 이승 냄새인지. 아직도 향이 다 안빠지셨군. ”
노인은 황홀하다는 듯이 웃었다. 뭐가 그리도 좋을까.
“ 기력이 떨어질 때는 역시 갓 죽은 망자의 냄새가 묘약이지. ”
노인은 자신이 왜 남의 몸 냄새를 맡았는지 해명하듯 덧붙였다. 부자연스럽게 웃는 노인은 자신의 행동이 자못 머쓱한 모양이었다.
“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을 텐데요, 의장님. ”
한울이 멀찍이서 말했다. 그는 조금 우울해보였다. 나는 한울이 이곳까지 오면서 해준 말을 복기했다.
눈 한쪽을 다친 노인은 이 회의의 총책임자였다. 나아가 사자계의 살아있는 전설이자 원로이며, 저승 정부와 심판부의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억울하게 죽은 이들을 위해 나선 저승법의 수호자이기도 했다.
“ 아아, 그렇지. 내 정신 좀 보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조만간 자네들 부모님에게 큰일이 일어날 게야. ”
노인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위험성을 머금은 표정으로 말했다.
“ 겁주지 마요. 어차피 해결할 건데. ”
옆에 있던 비단결처럼 부드러운 피부를 가진 여자가 말했다. 책상 명패에는 ‘최서우’라고 쓰여져 있었다. 최서우는 남자라면 누구라도 안구가 튀어나올 미모였다.
“ 만약이 있는 게지. 앞날은 아무도 장담치 못하니까. ”
최서우는 장난꾸러기 아이처럼 웃었다. 심각한 회의장 속에서 유일하게 웃고 있었다. 마치 이를 즐기는 듯이.
“ 제가 장담하는데 이렇게 우르르 몰려있을 필요도 없어요. 어차피... ”
“ 그놈에 어차피, 어차피! 결론은 이미 나왔지만 이야기는 해드려야지! ”
의장이 갑자기 생기를 되찾았는지 버럭 화를 냈다. 결론? 무엇이 그들이 낸 결론이란 말인가. 잠시 우리는 소통이 잘 되지 않았다. 노인은 노기를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 최근 이승에서 이상한 움직임이 감지되서 말이네. 자네들의 부모님이 자주 접촉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모종의 계획을 꾸미고 있다는 걸 알아냈지. 그 계획은 오진호가 추진했을 것으로 추정중이네. 오진호 일당은 일전에도 이런 일을 벌였으니까. 그 일은 복수를 대신하는 것. 살아있는 이들의 손을 더럽혀, 죽은 이들의 복수를 행하는 것. 자네도 그 안에 들어가봤으니 알 테지만, 그들은 결코 자살귀를 위한 조직이 아니네. ”
나는 잠시 동요했다.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인데도 놀라웠다. 나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부단히도 애썼다. 굳은 얼굴을 펴야했다.
“ 지금이야말로 부모님의 희생이 필요한 순간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겠군. ”
나는 무슨 질문을 해야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선수를 친 것은 최서우였다.
“ 영감님, 그렇게 두루뭉술하게 얘기하면 고삐리들이 알아먹어요? ”
바른 말을 해도 듣는 이를 화나게 할 것 같은 최서우가 의장의 심기를 건드렸다. 의장도 이 여자를 다스리는 건 불가능한 것 같다.
“ 그럼 자네가 말해봐! ”
노인이 신경질을 내며 말했다. 최서우는 자신의 검녹색 단발을 만지작거리더니 말했다. 이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그녀는 홀로 동 떨어져 있었다.
“ 우린 당신들에 의해 상처 입은 오진호의 뒤를 밟아 놈들의 아지트를 알아내는 데에 성공했다. 그후 우린 잠입대를 보내서 놈들의 계획 일부를 입수했지. 그중에 하나는 바로 부모를 복수대리인으로 내세우는 계획이야. 아주 파렴치한 짓이지. 근데 그걸 또 동의한 사람이 있더라? ”
“ 이래서 계집아이는 거두는 게 아니랬다! 일을 그르칠 소리만 하니까! ”
노인의 목에 핏발이 섰다. 최서우는 턱을 떨며 분을 삭히는 표정을 짓는다. 어째서 이 둘은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일까.
“ 잠시나마, 영감님을 구원이라 생각했던 자신이 수치스럽네요. ”
“ 나도 그냥 두고 올 걸 그랬다! 뒈지던지 말던지! ”
“ 그러시지 그러셨어요. ”
이대로 괜찮을까. 생사가 오가는 중대한 사안을 다루는 회의에서 이런 타인은 알 수 없는 대화만 늘어놓다니. 여기는 과연 몽중인가.
“ 미안합니다. 이 아이가 조금 삐딱선을 타는 게 문제라서.. ”
그래도 거친 대화만큼 그들의 유대감이 얇팍한 것은 아닌 듯했다. 싸움이 존재한다는 건 어찌보면 친하다는 증거니까. 그보다도 최서우의 말은 곱씹을 수록 가슴을 짓눌렀다.
“ 제 말이 틀린 건 아니잖아요? 이 어리숙해보이는 아이가 자기 엄마를 살인자로 점찍었다고요. 아주 무섭지 않습니까, 영감님? ”
나는 창에 찔린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나는 한시도 편안해선 안돼는 걸까. 항상 불안은 내 속에 만연했다.
“ 그리도 잔악한 사람이라면, 솔직히 돕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는데요. ”
여자의 입은 거칠지만 단 한 마디도 틀리지 않았다. 나는 어찌보면 가장 잔악한 사람이었다.
“ 계집! 또 입을 놀리는구나! ”
이대로는 안됀다. 난장판이었다. 겨우 진정한 한쪽 눈을 다친 의장이 다시 설명을 이었다.
“ 아무튼 아무리 자살의 원인이 된 병균 같은 인간이라지만, 부모를 이용해 복수를 대행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중대한 문제일세. 자네도 순간의 감정으로 이를 가볍게 여기고 동조했을 수도 있어. 하지만 만약 이 일이 알려지면 자네는 즉결심판으로 지옥으로 가게 될 게야. ”
노인은 내 속을 건드렸다. 내 속을 강타한 그의 말은, 내가 증오에 휩싸인 인간임을 일깨워주었다. 나는 소인배였던 것인가.
“ 그건 막아야 하지 않겠나? 나는 그렇게 보네만. ”
이어서 최서우가 말했다.
“ 막을 방법은 뭘까~요? 그게 더 재밌는데, 안 알려줘요? ”
“ 이것 참, 못 말리는군. 다만, 해야할 말이긴 하니까 참겠네. 그래, 우리 사자들은 엄연히 망자라서 이승의 일에는 관여할 수 없다네. 우스운 얘기지만 그녀석들이 복수대리인이 필요했듯이, 우리도 그 계획을 대신 저지해줄 사람이 필요했네. 그 사람이란 건... ”
머릿속이 복잡했다. 열린 창문에 머리를 내밀고 바람을 쐬고 싶었다. 머리를 식히고 정신을 차려야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차려질 수준이 아니었다.
“ 자네의 아버지일세. 지금은 애석하게도 식물인간이 되어있지. ”
노인은 무척이나 씁쓸한 얘기를 전하게 됬다는 듯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오감이 닫히는 기분이었다. 녹색 단발이 비웃듯이 나를 보았다.
“ 모두 사실이야. 현실은 이토록 비정해. 정신나간 여자를 붙잡는 데는 한 이불 덮던 남자가 제 격이지. ”
그들은 먼지를 청소하듯이 자신들끼리 의논한 결과를 내놓았다. 나의 문제는 겨우 먼지에 불과한 걸까. 생사가 걸린 중대사안인데도 당사자는 통보로 족해야 하는가.
“ 당신들.. 한때 인간이었으면서 그런 말이 아무렇지도.. ”
“ 너도 똑같아, 애송이. 너야말로 비정한 인간이지. 엄마를 살인자로 만드는 데 동의했으니까. ”
“ 정말인지 너는! 그만하게! 아직 부탁할 게 남아있어. ”
훌륭한 주거니받거니군. 발언과 발언의 난무가 정신을 어지럽혔지만, 나는 꾹 참았다. 앞으로 얼마나 더 엄청난 얘기가 나올까.
“ 손님 모셔놓고 이게 무슨 추테입니까. ”
보다못한 중년의 남자가 나서서 이들을 말렸다. 중년의 남자는 거대한 키로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그 위압감에 조금 긴장했다.
“ 겁 먹을 거 없소. 나는 부의장이요. 지금부터 내가 설명하도록 하지. 자네에겐 못할 말이지만, 이게 가장 효과적인 방도라는 건 틀림이 없으니까. 자네가, 자네 아버지의 꿈에 나타나서 그에게 전모를 말해주시오. ”
호출하기에 왔더니 이게 무슨 대접인가. 지금 이 기분을 뭐라 표할 방법이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가운데 손가락을 날리고 싶었다.
“ 왜 하필 나에요? ”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 뿐이었다. 중년의 부의장은 정말 모르느냐는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짧은 시간 동안 적막이 흘렀다.
“ 몰라서 묻소. 생판 모르는 남이 하는 말을 퍽이나 믿겠소. 아들이 하는 부탁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겠지만. ”
이곳은 지옥의 초입일까. 청각이 마비될 것 같았다. 나는 숨을 죽이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당황스러운 일의 연속이다. 불가항력적인 업보가 나를 덮쳐왔다.
“ 그건 저희 아버지를 몰라서 하는 말씀이세요. ”
나는 무모한 저항을 계속했다. 중년의 부의장은 나를 가소롭게 쳐다보았다. 구제불능이라는 듯이. 중년의 부의장은 내가 다음 말을 하길 기다렸다.
“ 아버지는 아마 눈 하나 깜짝 하지 않을 거에요. ”
부의장은 뭐라 표할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은 하나의 어려운 한자처럼 해석하기 어려웠다. 그에게 대적한 것은 나의 오판이었을까.
“ 그럴 수도 있겠군. 하지만 우리보단 낫겠지. 자네도 지금 물러설 때가 아닐 텐데. 지옥에 가고 싶은 건가? ”
한 마디로 거절은 불가능하다는 것이군. 나는 부의장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그는 괜히 높은 자리에 있는 게 아닌 듯 여유롭고 능숙하게 상대를 몰아붙였다.
“ 자신이 저지른 일은, 자신이 수습해야지. 이제 자네도 어린애가 아니잖나. ”
한 순간에 어른이라는 타이틀을 획득한 걸까. 귀하디 귀한 줄 알았던 그 타이틀을 이제는 너무 쉽게 얻었다. 그토록 갈망했던 자유로운 어른. 그러나 끝내 되지 못한 어른.
중년의 부의장은 아까부터 나를 어린애 취급했으면서, 이제는 어린애가 아니라 한다. 귀가 멀 것 같았다.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았다.
업무과중으로 좀 전에 자신의 행동까지 잊을 정도로 정신이 나간 걸까. 전혀 말이 안돼는 소리 같지는 않았다.
하루에도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는다. 그들을 모두 관리하기란 쉽지 않을 테니까. 잠시 정신이 오락가락하더라도 이해 못할 일은 아니었다.
“ 무리한 부탁은 그만둬요! ”
잠자코 있던 주희가 중년의 부의장을 향해 소리쳤다. 어떤 용기가 그녀를 움직였을까. 따지고 보면, 저들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저들은 자신의 업무를 수행하고 있을 뿐이다.
“ 상황은 발생했어. 우린 그것을 막을 뿐이네. ”
어떤 말로도 그들에게 반박할 수 없었다. 상념은 시간낭비였다. 선언해야 했다. 무지했던 인간을 탈피해야 했다. 주희는 나를 지켜주려 한다. 그건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 솔직히 당황스럽지만, 다 맞는 말이에요. 제가 그 일에 동의한 것도 사실이죠. 수습도 제가 해야 하고요. 주희야. 고맙지만 내가.. 해야 해. ”
“ 보기보단 사내대장부구먼. ”
의장이 제법이라는 듯 웃으며 말했다. 나에게로 시선이 모였다. 나는 어디로 시선을 향하게 해야 할지 몰랐다.
조신하게 생긴 또다른 여자가 다가왔다. 말꼬리처럼 묶은 갈색머리의 미인. 그녀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 바로 아버님의 꿈으로 영혼을 송신하겠습니다. ”
그녀의 손이 내 눈앞에 펼쳐지고, 보라색 불빛이 내 눈앞을 덮쳤다. 불빛은 나를 압도하고 졸음이 쏟아졌다.
“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
- 작가의말
답.정.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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