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보온병을 안으면 내 마음도 따뜻해질까
“ 이거라도 드세요. 계피차인데 몸을 따뜻하게 해줘요. ”
승조는 집사처럼 공손하게 차를 내어주었다. 그의 친절함은 몸에 벤듯 자연스러워, 결코 연기가 아니었다. 유화는 두 손으로 찻잔을 받아들었다. 찻잔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퍼어났다.
승조가 묵는 여관은 유화의 거처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승조는 이곳에서 그녀를 찾아다녔다고 한다. 혈서 귀퉁이에는 발신인이 어떻게 알았는지 유화의 행선지가 적혀있었다.
그러나 정확히 어디에서 볼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어 시간이 걸렸고, 오늘에서야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야말로 서울에서 김 서방 찾기였다고 그는 웃었다. 그들은 혈서와 발신인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귀신을 보고도 두려움에 언급을 피하는 것처럼.
승조가 묵는 여관은 2층짜리의 볼품없는 건물이었다. 싼값에 잘만한 구식 건물. 벽난로는 조개탄을 태우는 옛것이었고, 가구들도 시대착오적이었다. 건물 통째로 개화기로 돌아간 것처럼.
두 사람 모두 젖어있었고, 창밖에는 비가 세차게 내렸다. 비는 순식간에 해변을 덮쳤다. 소나기일 거라 생각했지만, 하늘은 점점 더 인상을 썼다.
창을 때리는 소리가 사납게 들렸고, 하늘이 번쩍이고는 그르릉거리는 맹수의 울음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날씨는 위협적이었지만, 그들에겐 한낱 변덕꾸러기일 뿐이었다.
“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죠. ”
그녀로선 알 수 없었다. 이 남자가 이토록 자신을 주시하는 이유를. 같은 사건의 피해자라는 동질감 때문인가. 아니면 자신의 딸만 살아있다는 미안함 때문인가. 그렇다기에도 지나칠 정도가 아닌가. 하지만 더욱 불가사의한 것은 그녀 자신의 마음이었다.
유화의 두 손엔 찻잔이 놓여있다. 여전히 온도는 식지 않았다. 젖은 두손은 금세 따스해졌다. 허나 아직 그녀의 마음은 차가운 빗속을 거닐고 있었다. 무엇을 찾으려 그리 거니는지도 모른체.
“ 그냥 둘 수 없었어요. 과거의 나를 보는 듯했으니까. ”
승조가 맞은편에 앉으면서 말했다. 그의 앞에도 계피차가 놓여있다. 다시 한 번 천둥이 울리고 그를 집어삼킬 듯 번개가 쳤다. 과거의 그도 빗속을 거닐었을까. 유화는 남편을 생각했다. 남편도 빗속을 거닐었을까.
유화는 빗속을 거니는 사람의 몰골을 안다. 이 여관의 침침한 불빛 아래 2층으로 가는 층계참에 세워진 낡고 기묘한 거울이 손님들의 몰골을 보여주었으니까. 유화는 물에 빠진 익사체와 같았다. 힘없고 불결하기까지 한 망령. 움푹 들어간 뺨과 죽은 사람 같은 눈동자, 젖어서 미역처럼 흐물거리는 머리카락은 그녀를 서있는 시신처럼 보이게 했다.
“ 당신은 어땠는데요. ”
유화가 물었다. 당신도 나와 같았냐는 물음이었다. 그러길 바란다는 이기심이 녹아있는 질문.
“ 달리는 말처럼 세상을 뛰어다녔죠. 그러지 않으면 살 수 없었어요. 비가 오던 날에도 뛰었죠. 그러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서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싶을 때 쓰러졌어요. 그리고 알았죠. 죽는 것도 베짱이 있어야 하는구나. 죽겠다 싶으니까 몸이 알아서 살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병원에서 주희를 보는데, 주희는 살려고 그 고된 수술도 받았는데, 난 뭐한 거지? 싶더라고요. 아빠란 게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미친 놈처럼 뛰어다녔으니. ”
그는 심연으로 추락하는 마음을 애써 누르며 말을 이었다. 건드리면 그대로 밑으로 푹 꺼질 것처럼 위태로윘다. 희망이란 나뭇가지에 메달린 듯이. 웃을 수록 더 슬퍼보이는 얼굴은 애처롭기까지 했다. 차라리 마음 놓고 울었으면 했다. 웃는 모습은 바라보는 사람을 고통스럽게 했다.
천둥이 한 번 더 울렸다. 마치 하늘의 절규처럼 들렸다. 누군가 하늘에서 고성을 지르는 걸까. 비는 눈물이고 천둥은 흐느낌이며 번개는 감전된 마음일까. 눈물이 마른 자리에 무엇이 와야하는지 유화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아직 슬퍼하는 것 외엔 생각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 저는 죽을 생각도 못했어요. 죽어 마땅한 건 저인데도요. 아들의 유서에는 제 이름이 맨 먼저 있더군요. 아들을 죽게 만든 아이들보다도요. 아들의 상처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몰아세우기만 했죠. 나중에는 외면까지 했고요. 그런데도 저는 죽지 않았어요. 그저 남편 탓으로 몰고, 남편까지.. ”
그녀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어떤 말을 해야할까. 뒤범벅된 감정이 유화의 말문을 막았다. 남편까지 잡아먹었다는 말로 스스로를 선고할 자신이 없었다.
말투는 점점 고양되어가고, 음성은 빗소리와 뒤섞였다. 발음은 부정확하고 표정은 일그러졌다. 유화의 죄는 살아있고 살고 싶다는 것이었다. 살아있어선 안돼고 살고 싶어선 안돼는 사람인데도.
“ 죽음으로는 무엇도 갚을 수 없어요. 죽어야 하는 인간은 없죠. 당신처럼 참회할 줄 아는 인간은 더더욱이요. ”
칼에 베여본 사람이 칼에 베인 사람의 마음을 안다. 승조는 유화의 고해성사와 같은 절규를 이해했다. 그녀의 모든 삶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녀의 죄의식과 참회의 고백은 이해할 수 있었다.
아이에 대한 긴 세월에 걸친 죄는 부모를 살아있는 감옥에 구속시킨다. 그것은 초법적인 구속이다. 대기 속이 창살이 되어 어딜 가든 그곳이 감옥이다. 육신이 아닌 마음을 가두는 것이다. 재판은 필요없었다.
“ 이미 끝난 마당에 무슨 참회요. 참회는 그저 나를 위해서일 뿐이에요. 나 하나 살자고 하는 것 뿐이라고요. ”
창백해진 유화는 이제 겁에 질린 것 같았다. 자신의 뻔뻔함과 자신을 감방에 몰아넣은 운명이란 재판관을 두려워하는 눈빛이 바스러질 듯 흔들렸다. 그녀는 잠시 진정의 시간이 필요했다.
차를 마시고 몇 번의 천둥소리를 보냈다. 시간은 느리게 흐르고 창밖에선 비가 쉼없이 내렸다. 시간은 아홉 시로 다다랐다. 저녁도 밤도 아닌 시각.
지루한 시간이 흘러가고 그녀의 몸이 조개탄을 넣는 구식 벽난로에 녹아갔다. 승조는 그녀의 마음도 이제는 녹았으면 했다. 이제 아프지 않기를.
“ 저녁 드시고 가세요. ”
그가 일어나려는 유화를 붙잡아세우고 말했다. 그녀가 걷는 것조차 힘들어보였다. 유화는 소녀처럼 수줍게 웃었다. 지금까지 보인 모습으로 족했다.
어디까지 바닥을 보인 것일까. 민낯을 함부로 보여준 기분이었다. 이제는 부끄러운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오늘로 마지막이기를. 그녀는 손사레를 치고 현관을 나섰다. 그는 차마 막을 수 없었다. 그녀의 등은 너무도 차가웠다. 의도적으로 그리 보이려 애쓰는 듯했다.
“ 나오지 마세요. 신세졌습니다. ”
유화가 차갑게 말했다. 이별을 선언하는 것처럼. 나서려는 그녀를 바라보던 승조는 서둘러 방 안으로 들어가서 보온병을 들고 왔다. 여전히 따뜻한 계피차가 든 보온병.
그의 표정이 자못 절박해보여서 유화는 도저히 돌아설 수 없었다. 가지 말라는 것 같기도 하고, 돌아와달라는 것 같기도 했다.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만.
“ 이거, 들고 가세요. 다음 번엔 비 맞지 마세요. 맞더라도 이거 마시세요. 그럼 적어도 손이랑 속은 따뜻할 거에요. 당신 마음까지 따뜻해질 수는 없겠지만요. ”
그는 따뜻한 보온병을 유화의 손에 쥐여주었다. 유화의 작은 두 손에 퉁퉁한 보온병이 담겼다. 유화는 계피차가 든 보온병을 품 속에 넣었다. 가슴 한 켠이 따뜻해져왔다. 정말 마음까지 따뜻해질 수는 없는 걸까. 따뜻함은 왜 내면까지 스밀 수 없는 걸까.
그녀는 말없이, 그러나 무례하진 않은 속도로 뒤를 돌아서 계단을 내려왔다. 층계참에서 자신을 비추는 거울을 만났을 때, 그녀는 울고 있었다. 조금은 따뜻해진 표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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