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그에게서 나를 보았다.
귓속을 파고드는 남자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나를 자극하는 흐느낌. 사내의 슬픔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소리.
운명에게 일격을 당한 남자의 서러운 눈물. 잔혹한 서리 속을 활보하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보는 이마저 눈물 쏙 빠지게 하는 장면이 스크린 속에서 번쩍였다. 나는 눈을 감고 싶었다.
“ 나한테 왜 이래요.. ”
나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주저앉았다. 주희 아버지의 삶이 나를 주저앉혔다. 나를 압박하는 진실이 못 견딜 정도로 아팠다. 내가 상처입힐 사람의 모습이었다.
귓속이 물에 잠긴 듯 모든 소리를 희석시켰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소리를 차단하고 싶었다. 무엇도 귀에 닿지 않기를 바랐다. 나는 고막에 방어진을 쳤다.
스크린 속 남자, 주희 아버지의 눈물이 내게 호통을 치는 듯했다. 거기서 뭐하고 있냐고. 일어나라고. 결정을 내리라고.
“ 몰라서 묻는 겁니까. ”
오진호의 냉정한 말씨에 나의 혼백은 길을 잃은 듯 요동쳤다. 떨리는 손을 둘 곳이 없었다.
“ 당신은 항상 그랬죠. 당신만이 모든 걸 알고 있고, 내게는 일부분만 알려줘요. 그걸 즐기는 것처럼요. 혼자 알고 있는 게 그리도 즐겁나요. ”
“ 항상? 그럼 당신은 왜 항상 떨기만 하고 헤쳐나가지는 않는 거죠. 누군가의 도움없이는 아무것도 되지 못해서 결국 죽어버린 거잖아요. 우리 솔직해져봐요. ”
“ 그딴 소리는 집어쳐요. 당신이 뭘 안다고 함부로 지껄이는 거죠? 아, 아시겠죠. 종이쪼가리에 끄적인 제 모든 신상이 있으니까요. 모니터로 본 것도 있을 거고요. 그럼 알 거 아녜요. 제가 왜... ”
“ 죽음 죽음 노래를 해서 이렇게 당신 앞에 나타난 거에요. 그런데 뭐가 불만입니까. ”
그의 말에 나는 귀가 먼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오진호의 말이 일침처럼 날아왔다. 나는 더 이상 듣지 않고 말하지 않고 보지 않고 싶었다.
이 이상의 대화는 아플 뿐이었다. 문제는 내게 있다는 걸 인정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마음을 진정시키려 시골로 떠나듯이 어디론가로 가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이 꿈속은 가도가도 어둠 뿐이었다. 나는 고립감을 느꼈다.
“ 어째서 다들 나를 이해해주지 않는 거죠. ”
“ 이해를 바랄 수 있는 세상이 아녜요. 세상은 오케스트라에요. 정해진 비율로 정해진 악기를 연주해야 하죠. 오케스트라에서 가야금을 연주하고 싶다고 이해를 바랄 수는 없어요. 세상이 당신을 이해하는 게 아녜요. 당신이 세상을 이해하는 거죠. ”
오진호의 눈이 내게 사내답게 굴라고 강조했다. 사내다운 게 무언가. 남자는, 인간은 나약해선 안돼는 건가. 아니, 우리는 본질적으로 약하다. 솔직하지 못할 뿐이다.
나는 일그러진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내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구겨진 인상으로 눈물이 솟구쳤다. 왜 흐르는지 모를 눈물이.
짜증이 치밀고 분통이 터졌다. 누구를 향한 분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말문이 막혀 무어라 지껄일 수는 없었다. 속에서 뜨거운 것이 펄펄 끓었다.
“ 당신 눈으로 보세요. 해방을 바라는 한 아버지의 모습을. ”
나는 그에게 한 대 걷어차인 기분이었다. 정신이 얼얼하고 감각이 없다. 입이 바싹 말랐다. 침을 삼키려 하지만 입안이 공허하다.
눈앞에 남자는 흑빛이 된 얼굴로 딸을 바라본다. 불행한 남자. 모든 걸 잃은 남자. 내가 그녀를 지키지 못해서, 저 남자까지 망가뜨렸다.
다 헤진 옷, 길러서 어깨까지 내려오고 있는 머리칼, 면도는 이미 포기한 듯한 턱수염은 그가 얼마나 피폐한 삶을 살고 있는지 보여주었다.
이제 내 손으로 끝내야 했다. 손이 벌벌 떨렸다. 사형수의 목을 치려는 집행관의 손처럼.
“ 어때요, 직접 보니. ”
나는 화면에서 눈을 떼고 싶었으나, 역설적으로 눈을 뗄 수 없었다. 나는 괴로울 수록 더 처절하게 스크린 속 장면을 눈에 담았다.
남자의 절망이 나와 닮아보였다. 나도 그와 같은 표정을 짓고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그가 아닌 나를 관찰하는 것이었다.
공교롭게도 우린 같은 대상을 사랑하고 슬퍼했다. 나는 독서를 하듯 그의 삶을 음미했다. 그의 삶은 내게 영감을 주었다.
“ 정말.. 해방을 원하실까요? ”
내가 굳게 닫은 입을 열고 말했다. 독백처럼 속삭이는 듯한 어조였다. 영혼이 말하듯 목소리는 대기에 휘날렸다.
머릿속이 혼잡했다. 뒤죽박죽 뒤섞인 생각들이 내 올바른 사고를 방해했다. 나를 지탱하는 끈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결정하지 않으면 끊어버리겠다는 협박처럼 들렸다.
주희 아버지의 숨죽은 머리칼이 보였다. 그 머리칼이 촉수처럼 나를 휘감을 것 같았다. 그의 눈빛이 나를 향하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내게 무얼 원하는 걸까.
“ 당장은 부정할 테죠. 하지만 결국 그것이 좋은 거라는 걸 인정하고 말 거에요. 희망이라는 감옥에서 출소하는 거죠. ”
전부 거짓말이었으면 좋겠다. 알면 알 수록 이 세계는 잔인하다. 어느 쪽으로가든 상처는 불가피하다는 ‘해방’이라는 단어에 은닉된 진실이 뼈아프다. 모두가 완벽히 좋을 수는 없다.
코끝이 시렸다. 어릴 적부터 나는 결정하고 싶었다. 내 인생을 내가 스스로 움직이고 싶었다.
내 꿈, 내 계획, 내 마음을 갖고 싶었다. 그러나 내게 주어진 결정권은 그런 달콤한 것들이 아니었다.
입술을 깨물고 눈물을 참는다. 무너져선 안돼었다. 나는 주희 아버지를 투시했고, 그의 마음을 목도했다. 내 마음이 전해질 리는 없겠지만, 나는 그를 어루만지고 싶었다.
“ 그거 참 간단한 말이군요. 출소라. 그럼 이것도 알아둬요. 이 일이 끝나면 주희 아버지에겐 전자발찌가 채워질 거에요. 딸의 생명을 끝낸 아버지라는 전자발찌가요. ”
나는 오진호라는 남자에게 분노가 치밀었다. 이 자에겐 감정이란 게 있을까? 모든 걸 간단히 말하는 남자.
그는 모든 게 간단해서 좋겠다. 혼백마저 찰 것 같은 냉혈한. 그가 내뿜는 냉기에 질식할 것만 같았다.
냉혈한보다 더 완벽한 별칭이 있을까. 오진호는 완벽한 냉혈한이다. 단박에 그에 대한 인식에 금이 갔다. 원래도 좋지는 않았지만, 이것은 패륜의 영역이었다.
그러나 그의 말에도 일부분 일리가 있다. 아니, 문제는 태도일 뿐 전적으로 맞는 말일지도 몰랐다.
확실히 해방론은 내게도 설득력이 있었다. 괴로운 과정을 지나면 일상을 되찾을지도 모를 일이다.
“ 잠시 뿐이에요. 저런 삶은 고문입니다. 언제 끝날지 기약도 없죠. 차라리 전자발찌가 나아요. ”
오진호는 내 마음을 헤아려주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자비란 없다. 모든 결정을 내게 미루고, 책임을 지우고 한 발짝 뒤에서 상황을 즐기는 건 오진호다.
내가 어떤 결정을 하든, 그에겐 문젯거리도 아닐 것이다. 얼굴이 거무죽죽한 그녀는 살아있지만 산송장이었다.
숨 쉬고 있는 그녀를 보니 나까지도 그녀가 일어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아버지 또한 그런 희망에 발목 잡혀있는 걸까.
“ 그래요,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어차피 이 싸움은 죽음을 요해요. 도박수를 걸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네요. ”
나는 눈앞이 하얘졌다. 옷메무새조차 신경 쓰지 못하는 남자를 벼랑끝까지 몰아가야 하는 자신이 너무 싫었다.
“ 아마 따실 거에요. ”
오진호가 농담하듯 말했다. 그가 손을 펼쳐 내 머리 중심에 올려놓았다. 그의 시선이 나를 꿰뚫듯이 쏟아졌다.
그의 손끝에서 빛이 일고 온몸이 나른해졌다. 말라붙은 입술이 벌어지고 눈꺼풀이 내려닫혔다.
“ 꿈에서 깰 시간이에요. ”
- 작가의말
아, 이런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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