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아무 일 없었습니다.
승조는 큰 하품과 함께 잠에서 깬다. 창밖은 벌써 아침으로 만연해있다. 승조는 큰돈을 잃은 꿈을 꾼 것처럼 찜찜한 기분으로 소파에서 일어난다. 소파에서 가죽소리가 났다.
몸의 좌우가 모두 뻐근했다. 누군가 양쪽에서 잡아당기는 느낌이었다. 승조의 몸은 월급봉투만큼이나 얇팍해졌다. 요즘 부쩍 살이 빠졌다.
“ 일어났어요? ”
현관문이 열리고 슈퍼에 갔다온 듯 비닐봉지를 든 유화가 그에게 인사했다. 아침의 빛을 머금고 화사하게 빛나는 얼굴은 그가 품은 사랑이 봄바람이 불러온 착각이 아님을 알려주었다.
승조는 낯선 나라에 불시착한 외국인처럼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그녀를 쳐다봤다. 이곳이 낯선 나라라면 그녀는 그 나라의 여왕이 아닐까.
승조의 눈은 공부하다 지쳐 잠든 학생처럼 초퀘했다. 그는 자신의 그런 눈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 제가 신세를 졌군요. ”
승조는 떨어지지 않는 마른 입술을 움직였다. 너무나 퍼석해서 혀로 입술을 축여야 했다.
“ 왜 그런 말을 해요. 난 괜찮은데. ”
유화가 온화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모든 부당한 것들을 제 자리로 돌려놓을 것 같은 미소.
승조는 어제의 기억을 더듬었다. 슬픔으로 시작해 설렘으로 끝난 하루가 떠올랐다. 그녀의 입술이 생각났다. 승조를 저항할 수 없는 사랑으로 밀어넣은 입술.
말하지 않아도 그 한 순간의 입맞춤으로 그들은 사랑을 확인했다. 부정할 수 없는 사랑. 승조는 이래도 될지 망설여졌다. 그럴 수록 딸이 어른거렸다.
“ 고마워요. 이해해줘서. ”
승조는 더 많은 말을 하고 싶었지만 이것이 최선이었다. 어디까지 이어갈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그는 힘을 쓸 수 없었다. 무력했다. 온몸이 노곤노곤했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이런 모습으로 그녀 앞에 나타난 것이 미안했다.
거대한 덩어리가 몸을 누르는 듯했다. 승조는 찌그러질 것 같았다. 이럴 때는 누워서 쉬는 게 제일이지만 남의 집에서 그럴 수는 없었다. 민폐는 어제로 족했다.
“ 난 이제 가봐야겠어요. ”
승조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일어났다. 중력이 평소의 두 배는 되는 것 같았다.
“ 아침 먹고 가요. 최고로 맛있게 차려드릴게요. ”
유화의 입에서 나온 말이 승조를 휘감았다. 그녀의 말은 촉수저럼 승조를 묶었다. 뛰어난 언변 없이도 그녀는 승조의 걸음을 멈추게 하고 뒤돌아보게 하고 다가오게 했다.
말 한 마디로 그의 마음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사람은 지금껏 두 사람 뿐이었다. 딸과 전 부인 해지. 이제 그는 유화에게 이끌리고 있었다.
그녀는 승조에게 희망을 가르쳐주었다. 아니, 그녀가 승조의 희망이었다. 함께하는 시간들은 그에겐 축복이었다. 승조가 버틸 수 있는 시간들에는 늘 유화가 있었다.
그가 이런 마음을 품은 것은 대학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대학 시절, 주희의 엄마를 만난 뒤로 느낄 수 없었던 감정이다.
그는 앞으로 나아가고 싶었다. 이 마음을 공고히 하고 싶었다. 자신들을 가로막는 계단을 넘어서.
“ 뭐해요, 앉지 않고. ”
여기서 끝맺음지을 수는 없다. 나쁘지 않은 관계는 더 이상 싫었다. 곧이어 식탁에는 큼직한 그릇에 담긴 된장찌개와 밥이 차려졌다. 사먹는 일이 많아 식당 이곳저곳을 전전하는 승조로서는 오랜만에 먹어보는 집밥이었다.
“ 맛있겠네요. ”
승조는 수저를 들고 국물을 떠먹었다. 어느 곳에서 먹은 된장찌개보다 맛있었다. 입에 들어온 된장찌개는 추억을 불러일으켰다.
이래선 안돼는데 해지의 것과 비슷했다. 승조는 밀려오는 추억으로부터 눈을 돌려야 했다.
“ 제가 제안했던 거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
승조가 화제를 돌리듯이 말했다. 갑자기 부엌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그녀는 애매모호한 ‘제안’이란 단어만으로 그의 의도를 알아냈다. 한 번쯤은 나와야 할 피할 수 없는 질문.
“ 우리가 할 수 있을까요. 뛰어난 청부업자를 고용하는 건... ”
승조는 조심스러워 하는 그녀를 이해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이미 굳어진 상태였다.
“ 그럼 의미가 없어요. 우리가 해야 해요. ”
승조는 자신들이 이런 얘기를 해야만 한다는 것이 자못 씁쓸했다. 알아가기에도 모자란 시간인데.
어떤 것이라도 나누고 싶은 여자와 지금 나눌 수 있는 것이 이런 것이라는 게 한탄스럽다.
“ 내가 있잖아요. 걱정 마요 ”
세상에 사랑만 가지고는 안돼는 일이 많지만 그는 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알 수 없는 믿음이 승조의 등을 떠밀었다.
“ 계획은 있어요? ”
“ 얼마전에 종이가 날아왔어요. 간단한 계획서였죠. 내가 그 아이를 유인할 거에요. 우린 한 장소에서 만나 일을 저지를 거에요. ”
그는 유화에게 범행과정을 소상히 일렀다. 이제야 첫걸음이었다. 그는 자신들이 힘을 합쳐야 한다고 믿었다.
송현규라는 아이는 그들의 인생을 깨뜨린 원흉이면서, 그들의 인생을 유지시키는 선물 같은 목적이었다.
“ 그 아이를 죽인 뒤에 우린 어떻게 되는 걸까요. ”
그녀가 말했다.
“ 하늘이 가르쳐주겠죠. 우릴 여기까지 이끌었듯이. ”
승조는 운명이 자신들을 어디로 밀고 갈지 궁금했다. 이 세상은 종잡을 수 없으니까.
승조는 밥그릇을 다 비우고 그녀에게 고맙다 말했다. 그는 여태 먹었던 수많은 식사 중에 제일 맛있었음을 느낀다.
“ 다 먹었어요? ”
그녀가 상냥하게 말했다. 더는 이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아보였다. 언제가 됬든 다시 할 날이 올 것이다.
유화는 그릇을 치우고 싱크대에 올려놨다. 승조가 일어나 고무장갑을 빼앗고 자신이 설거지를 하겠다며 나선다.
“ 좀 쉬어요. 어제 저 때문에 고생하셨을 텐데. ”
“ 아니에요, 저는 괜찮아요. ”
“ 말 들어요. 밥도 얻어먹었는데 보답도 못하면 불편해서 어째요? ”
승조의 고집에 그녀는 마지못해 물러나 부엌 의자에 앉았다. 그녀의 시선이 느껴졌다. 설거지를 하던 그는 문득 뒤를 돌아다보았다. 유화의 눈은 사랑스럽게 빛났다.
순간 해지의 잔상이 겹쳐보여 그는 휘청거렸다. 안됀다. 그러면 안됀다. 해지는 죽었으므로 기억해서는 안됀다. 유화가 걱정스레 바라본다.
“ 괜찮아요? ”
승조는 싱크대를 붙잡고 서서 개수대를 바라보았다. 다시 손을 뻗어 그릇을 잡고 마무리를 했다.
“ 다 했어요. 잠시 현기증이 났나봐요. ”
승조가 고무장갑을 벗고 손을 닦으며 말했다. 커피를 마시는 유화의 얼굴에 불안이 피어오르는 걸 달래고 싶었다.
“ 어제부터 몸상태가 안좋은 거 아니에요? ”
그녀가 걱정했다. 어제.. 확실히 어제는 온몸도 뜨끈했고 오한도 치밀었었다. 하지만 오늘은 나쁘진 않았다. 여전히 해지가 보이는 것만 빼면.
“ 조금 피곤한가봐요. 요즘 통 못 자다가 어제 푹 자니까 좀 낫던 걸요. ”
승조가 맞은편 의자를 빼서 앉았다.
“ 그래도 집에 가면 더 쉬어요. ”
“ 그럴게요. 저, 근데 그보다 할 말이... 있어요. ”
승조가 말했다. 그의 얼굴에는 자못 진지함이 묻어나있었다. 유화는 뭐든 말하라는 눈으로 승조를 바라보았다.
“ 딸의 마지막을 함께 지켜봐줄래요? ”
- 작가의말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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