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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무명귀 님의 서재입니다.

저승이 처음인 나는 죽음을 바란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무명귀
작품등록일 :
2021.05.12 17:20
최근연재일 :
2021.12.08 20:50
연재수 :
86 회
조회수 :
3,567
추천수 :
39
글자수 :
437,315

작성
21.06.05 18:32
조회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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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자
8쪽

[25] 사람이니까 딜레마도 겪는다.

DUMMY

인생은 청소년 필독서의 결말처럼 아름답지 않다. 이것이 내 과거를 정의하는 말이었다. 인생은 때론 비극도 서슴치 않는다.


나는 그녀의 말에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폭로는 위험한 결단이었다. 놈들은 간단히 정리되는 녀석들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녀의 품 안에서 나온 스마트폰은 하나의 폭탄이었다. 모든 것을 끝장낼 폭탄. 놈들이든, 우리든 어느 하나는 파국으로 치닫아야 한다. 나는 삽시에 긴장 속으로 빠져버렸다. 두려움이 솟구쳤다.


“ 그만둬. 소용없다고. ”


주희의 표정은 진심이었다. 굳은 표정이 정말로 누를 기세였다. 너 같은 말괄량이 아가씨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라고 외치고 싶었다. 나의 처지가 그녀의 여린 등을 떠미는 것이 괴로웠다. 내가 아니었다면 이런 일에 휘말릴 이유도 없었을 텐데.


내가 주희의 인생에 나타난 것이 그녀로서는 불행일 것이다. 나를 만나면서 그녀에겐 아무런 득이 없었다. 나는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 게 없고, 위험만 줄 뿐이다. 패거리가 나의 친구라는 이유로 목표물로 삼을 수도 있었다.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 소용없는지 있는지는 해봐야 알지. ”


주희가 고집을 부렸다. 나는 여자들의 고집에는 치가 떨렸다. 엄마가 그랬으니까. 그녀를 보니 고집불통 엄마가 생각났다. 말이 통하지 않는 엄마. 하지만 나는 그녀가 싫은 것은 아니었다. 나는 고성을 지르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녀를 이 일에서 떼어놔야 마땅했다.


그녀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알고 있다. 그러나 세상에는 되는 게 있고, 안돼는 게 있다. 이 경우는 안돼는 것이다. 나는 슬픈 확신을 했다. 나는 숨을 몰아쉬었다. 긴장의 증거였다. 그녀의 손가락이 전송 버튼에 닿는다면 누군가의 세상은 파멸할 것이다. 그게 우리일 수도 있다.


나는 그녀가 전송 버튼을 누르지 않기를 기도했다. 나의 내질러진 숨이 그녀에게 닿을 것 같았다. 우린 가까운 거리였다. 나는 어쩌면 달려들지도 몰랐다. 그녀의 행동을 막아야 했다. 그것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 나도 그게 될 줄 알았어. 누구에게든 말하면 해결해줄 줄 알았어. 그런데 아니었어. 이제 나는 알아. 굳이 해보지 않아도 알아. 난 네가, 이 일에 말려들지 않았으면 좋겠어. ”


나의 진심이 전해져서 그녀의 결정에 영향을 끼치기를 바랐다. 나는 정말 너의 안전을 원한다는 걸 알아주길 바랐다. 나를 버리더라도 좋다. 버림 받은 적은 많으니까. 또한 지금은 그것이 옳다고 믿으니까. 함께 하는 건 행복한 순간만이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두눈엔 울먹임으로 가득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듯했다. 나를 외면할 수 없다는 단호한 거절의사였다. 나는 눈을 감았다.


나에게도 눈물이 전염될 것 같았다. 나는 야속하면서도 고마웠다. 내 말을 듣지 않는 모습에 야속해지면서도, 나를 끝까지 놓지 않는 모습에 고마웠다.


모순되는 감정 속에서 내 가슴은 무너져내렸다. 나는 그녀에게 무엇을 바라나 어서 가라고 외치고 싶었다. 이런 나를 외면하라고. 그러나 그것이 나의 진심인지는 확신할 수 없어 괴로웠다.


이제는 나도 원하는지도 모른다. 아니, 더 솔직히 내 마음을 들여다보자면, 애초부터 진정 원했을지도 모른다. 정말 간절히. 약간은 광기어린 마음으로 바라왔는지도 모른다. 모두 다 피를 보는 전쟁을. 어차피 이 고통이 이어질 거라면, 죽음을 각오하고 붙어보는 것도 나쁜 발상은 아니었다. 어떤 식으로든 끝낼 수만 있다면 괜찮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나의 내면 어딘가에서 잠자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누가 이 소년과 소녀를 가혹한 전쟁터로 몰아넣었는가. 우리는 사랑을 부르짖기도 전에 전쟁을 걱정하고 있다. 이것은 잔인한 처사다. 더구나 그녀는 죄가 없었다. 나에겐 오래간에 숙명 같은 역사가 있었지만, 주희는 폭력의 세상을 모르는 아이였다.


주희의 눈빛은 부서질 듯했다. 어둠을 담기엔 너무나 아름다운 눈. 가련한 눈빛은 나를 죄인으로 만들었다. 이 눈에 어둠을 담게 했으니까.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내 가슴을 익사시키는 눈물. 무력한 인간의 발버둥 같은 눈물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의 눈물.


나는 그녀의 눈에 눈물이 흐르게 한 자신이 경멸스러웠다. 나는 대체 무언가. 근본적인 질문이 튀어나왔다. 그녀는 나에게 죄의식을 가르쳤다. 나는 사는 것이 죄였다. 차라리 내가 눈 먼 장님이 되리라. 그것이 옳다면 그러고 싶었다.


내가 그녀를 눈에 담을 수 없어도 좋다. 나는 예전으로 돌아가 외로워져도 좋다. 그게 원래 나의 자리였으니까. 그녀를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로 돌려놓을 수만 있다면. 폭력도, 패거리도, 나도. 그녀가 나를 모르던 시절로. 난 그걸 원했다.


그녀는 주저앉았다. 계단 위에 앉아 두 무릎을 끌어안았다. 절망에 얼굴을 묻듯, 두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경멸하고 있었다. 영상은 쓸모없었다.


그녀는 버튼을 눌러 나의 가혹한 상황을 폭로하지도, 눈을 감고 뻔뻔하게 굴지도 못했다. 나를 지키고 싶은 마음과 패거리를 봤을 때의 공포심이 충돌하고 있었다. 그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딜레마였다.


나는 벽에 기대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둠은 그녀를 앗아가지 못했다. 아름다움은 연한 빛만으로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연민을 느꼈다. 한없이 작아보이는 그녀에게. 내가 작아지게 한 그녀에게. 나는 교만하기까지 했다.


“ 너는 강해. 어떻게 버텼어? 난 하루도 못 버텨. 난 벌써 두려워. 그래서 나 지금 이기적이잖아. 널 구하지도 못하고, 외면하지도 못하고. 나는 너를 기만하고 있어. ”


그녀가 힘없이 말했다. 절규한다기엔 절제되있고, 푸념한다기엔 격앙되어있다. 그녀는 울분을 삼켰다. 나는 그녀를 그냥 두면 영원히 움직이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보였다.


절망이 온몸을 잠식했다. 그녀의 두눈엔 생기가 없었다. 죽은 시선이 대기를 노려보았다. 두려웠다. 그녀가 망가지는 건 원치 않았다.


나는 그녀 앞에 등을 내어주었다. 무릎을 굽히고 자세를 낮췄다. 내 좁은 등도 그녀를 지탱할 정도는 되리라.


나는 업히라고 말했다. 나는 그녀의 마음을 잘 알았다. 누군가의 등이 필요한 순간을. 한 걸음도 걸을 수 없는 절박한 순간을. 나도 그랬으니까.


“ 여기서 안 업히면 남자도 아니라고 기만하는 거야. ”


나는 일부러 장난치듯이 말했다.


“ 이러면 내가 더 미안해지잖아. ”


얼굴을 든 주희가 말했다.


“ 뭔 소리야. 내가 바란 거야. 네가 말려들지 않아서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어. ”


나는 부러 활짝 웃으며 재촉했다. 그제야 그녀는 마지못해 업혔다. 나는 야구로 다져진 튼튼한 하체로 그녀를 업었다.


나는 큰 어려움없이 계단을 내려왔다. 어둠 속이라 조심스러웠지만 내리막길이라 수월했다.


학교 건물을 나서자 밤공기가 얼굴로 훅 끼쳤다. 나는 운동장을 가로질러 정문으로 나섰다. 하늘은 벌써 어둠이 깔렸다. 그때 내 등 뒤에서 비명이 울렸고, 내 등에서 그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 진짜, 언제 나오나 목이 빠질 뻔했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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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86] 늦어서 미안해. 21.12.08 46 0 13쪽
85 [85] 원귀는 원귀를 알아본다. 21.12.01 21 0 12쪽
84 [84] 너와 결혼까지 생각했어. 21.11.28 21 0 11쪽
83 [83] 도망쳐. 21.11.24 18 0 13쪽
82 [82] 존버는 승리한다. 21.11.20 17 0 11쪽
81 [81] 제발 그만해.. 21.11.17 19 0 13쪽
80 [80] 미안하다, 혼돈이다. 21.11.12 17 0 12쪽
79 [79] 아... 그는 갔습니다.. 21.11.10 19 0 13쪽
78 [78] 용과 같이. 21.11.04 17 0 11쪽
77 [77] 심판 받고 심판하고 21.10.30 18 0 13쪽
76 [76] 메이드 인 오병택을 조심하세요. 21.10.25 19 0 11쪽
75 [75] 눈물이 증거입니다. 21.10.22 18 0 9쪽
74 [74] 이의 있습니다. 21.10.21 17 0 13쪽
73 [73] 불효자는 웁니다. 21.10.18 19 0 11쪽
72 [72] 엄마가 왜 여기서 나와. 21.10.14 21 0 12쪽
71 [71] 암군인가 성군인가. 21.10.11 14 0 11쪽
70 [70] 모두가 있으니까. 21.10.08 15 0 12쪽
69 [69] 나를 돌아봐. <3> 21.10.05 14 0 15쪽
68 [68] 오랜만에 만난 아빠가 어딘가 낯설다. 21.09.29 19 0 12쪽
67 [67] 마지막...인 줄 알았지? 21.09.24 17 0 11쪽
66 [66] 인간이 인간한다. 21.09.19 19 0 10쪽
65 [65] 소원이 이루어졌다. 21.09.14 18 0 13쪽
64 [64] 살생하지 말라. 21.09.09 16 0 16쪽
63 [63] 문을 여시오. 21.09.05 18 0 9쪽
62 [62] 끼리끼리 논다. 21.09.01 19 0 11쪽
61 [61] 의리 빼면 시체다. 21.08.30 18 0 12쪽
60 [60] 널 위해 준비했어 21.08.25 19 0 11쪽
59 [59] 저승이 처음인 나는 복수를 바란다. 21.08.20 19 0 12쪽
58 [58] 승자도 패자도 없다. 21.08.15 33 0 13쪽
57 [57] 내 아내에게서 낯선 향기가 난다. 21.08.08 28 0 12쪽
56 [56] 부자상봉은 따뜻하지 않다. 21.08.06 17 0 9쪽
55 [55] 답은 정해져있어, 넌 듣기만 하면 돼 21.07.31 19 0 12쪽
54 [54] 나를 돌아봐 2 21.07.27 18 0 10쪽
53 [53] 몸 소중한 줄 모르고. 21.07.24 19 0 11쪽
52 [52] 노인과 철의 바다에서 21.07.23 18 0 7쪽
51 [51] 빛과 어둠으로 갈라지다. 21.07.20 20 0 8쪽
50 [50]다시 시작해. 21.07.18 23 0 12쪽
49 [49] 갑자기 분위기 싸움판이 바로 갑분싸다. 21.07.15 17 0 11쪽
48 [48] 같은 상황, 다른 느낌, 변한 건 마음이다. 21.07.13 19 0 11쪽
47 [47] 지옥 아니면 천국이지! 21.07.11 17 0 8쪽
46 [46] 또 속냐. 21.07.09 20 0 11쪽
45 [45] 모르는 게 약이다. 2 21.07.08 20 0 11쪽
44 [44] 죄는 다른 놈들이 지었는데.. 21.07.05 17 0 9쪽
43 [43] 안녕, 또 안녕 21.07.02 21 0 14쪽
42 [42] 아무 일 없었습니다. 21.06.30 17 0 8쪽
41 [41] 우리들의 밤. 21.06.28 21 0 11쪽
40 [40] 그에게서 나를 보았다. 21.06.25 22 0 8쪽
39 [39] 꿈에 갇히다. 21.06.23 24 0 11쪽
38 [38] 부러우면 지는 거다. 21.06.20 24 0 11쪽
37 [37] 할아버지는 말씀하셨지. 21.06.18 21 0 8쪽
36 [36] 널 놓을 수 없다. 21.06.17 24 1 11쪽
35 [35] 속죄하려 죄를 짓는다. 21.06.16 16 0 11쪽
34 [34] 은혜 갚은 까치가 부럽다. 21.06.15 20 1 10쪽
33 [33] 나를 돌아봐. 21.06.14 21 0 12쪽
32 [32] 주사위는 굴려졌다. 21.06.12 22 0 11쪽
31 [31] 죽음을 위해 복무하라. 21.06.11 24 0 12쪽
30 [30] 네가 떠난 자리가 너무 크다. 21.06.10 23 1 11쪽
29 [29] 진실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 21.06.09 21 0 11쪽
28 [28] 모르는 게 약일까. 21.06.08 21 1 12쪽
27 [27] 기억이란 대륙은 너무 넓다. 21.06.07 22 0 12쪽
26 [26] 보온병을 안으면 내 마음도 따뜻해질까 21.06.07 24 1 8쪽
» [25] 사람이니까 딜레마도 겪는다. 21.06.05 21 1 8쪽
24 [24] 우리가 아닌 나여야 한다. 21.06.04 17 0 11쪽
23 [23] 아직 잃을 게 하나 있었다. 21.06.03 34 0 11쪽
22 [22] 자화상은 사진이 아니다. 21.06.02 20 0 12쪽
21 [21] 누군가는 기억하고, 누군가는 잊는다. 21.06.01 28 0 12쪽
20 [20] 반년이지만 소꿉친구라구요! 21.05.31 32 0 9쪽
19 [19] 죽은 자는 말이 많다. 21.05.30 33 0 11쪽
18 [18] 가출인가 외출인가 21.05.30 30 0 14쪽
17 [17] 나의 구원자는 바나나를 사왔다. 21.05.28 36 0 11쪽
16 [16] 나는 그들의 꿈이 아닌, 나의 꿈을 꾸고 싶었다. 21.05.27 34 0 11쪽
15 [15]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 21.05.26 45 1 12쪽
14 [14] 강제로 사십춘기가 올 것 같다. 21.05.25 43 1 11쪽
13 [13] 죄인이 몇 명인가 21.05.24 47 2 10쪽
12 [12] 그도 어쩔 수 없는 어린아이였다. 21.05.23 52 1 8쪽
11 [11] 나를 살린 녀석에게 고맙다는 말을 들었다. 21.05.22 44 1 15쪽
10 [10] 아들의 심정을 알겠다. 21.05.21 51 0 12쪽
9 [9] 잘못을 알았을 때는 항상 늦다. 21.05.20 64 1 12쪽
8 [8] 그 순간, 나는 그에게 운명을 걸었다. 21.05.19 74 1 12쪽
7 [7] 저승의 밤은 가혹하다. 21.05.18 99 1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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