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인간이 인간한다.
동물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다. 그것만큼 부질없고 허울 좋은 말이 없다.
삶이 끝나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정말, 아무 소용이 없다. 한울은 누군가의 끝을 바라보고 있다. 뒤늦게 놈들의 거처를 알아낸 사자회가 출동했을 땐 모든 게 끝나있었다.
곧 합동 장례식이 열릴 것이다. 모든 건 신속하고 급격하게 돌아갔다. 전장에 던져진 군사처럼, 이곳 영령들의 목숨은 파리와 같다. 그들의 마지막을 생각해주는 자 따윈 없다.
잠시 들락거린 견학생처럼 떠나간 영령들에 대한 예우 따윈 없다. 이미 이곳에서 죽음은 일상이니까. 한번 죽어본 이들에게 두번째 죽음은 의미도 없었다.
이 또한 지나가면, 아무도 박재현이란 자살귀가 저승에 왔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 입장에서도 이해는 갔다. 모든 망령들을 기억하기엔 인간의 두뇌는 하잘것없으니까.
과연 삶의 가치란 무엇일까. 생각할 수록 어려운 질문이다. 돈? 명예? 무엇이 그 사람이 살아온 발자취의 가치를 증명할까. 그런 게 있기는 할까.
재현은 어디로 갔을까. 행방은 아무도 알 수 없다. 죽은 뒤에 세상을 이승의 사람들은 알지 못하듯이, 소멸한 뒤에 어떻게 되는지 저승의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그토록 원하던 무의 세상, 태초의 자신이 있던 자연으로 갔을까. 설마 무정한, 아니, 이쯤이면 잔인무도한 운명이라는 괴물이 그들을 다시 한 번 살려내 세 번째 죽음을 쟁취하라고 요구할까. 그러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도 어렵게 연 죽음의 문이니 기쁜 마음으로 발을 들였기를. 마침내 모든 기억의 속박에서 벗어나 영면하기를.
거대한 파도가 지나간 것처럼 그의 죽음은 한울의 가슴에 구멍을 냈지만, 그의 곁엔 주희가 있었다. 현장의 협탁에 있던 작은 쪽지에 주희에 대한 당부가 적혀있었다.
한울은 알고 있다. 그녀의 꿈은 자신이 짊어지고 있다는 걸.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의뢰인이 바뀌었을 뿐이다.
“ 재현이는 어디로 갔을까? ”
이제 오늘이 지나면 주희의 심판날이다. 재현이 기다려온 날인데, 정작 그는 존재하지도 않는다.
심판날.. 거기에 누군가는 꿈을 걸었고, 누군가는 자유를 걸 것이다. 심판은 주희만이 받는 것이 아니다. 한울 자신도 받는 것이었다.
“ 글쎄. 삶이란 건... 정말 어려운 거야. ”
뭐가 그리 급해서 이 세상을 벗어나려 오진호의 도움까지 받았을까. 그 안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까.
조금만 더 기다릴 수는 없었을까. 한울은 자신의 무능함을 자책했다. 꼭 그래야만 했던 것일까. 참을 수 없는 죄책감이 밀려왔다.
한울은 호텔 주변을 거닐며 재현의 냄새를 쫓았다. 아직도 곳곳에서 그가 살아있었을 때의 냄새가 풍기는 듯했다.
그는 먹잇감의 냄새를 맡으려 킁킁대는 짐승처럼 기억을 찾아다녔다. 한울은 자신이 재현을 그리워함을 느꼈다.
한때, 재현은 한울의 목적이었다. 서로 좋은 거라고 포장했지만, 사실은 한울만이 이익을 얻는 제안이었다. 재현 입장에서는 바로 죽는 것이 나았을 테니까.
한울에게 그는, 처음에는 그저 그녀의 꿈으로 가기 위한 목적이었다. 괴물들의 폭력에서 구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기 위한 목적.
한울은 자신의 장기말에 불과했던 그가 자신의 마음에 깊이 침투하는 것이 두려웠다. 한울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그래서, 그 말을 그녀에게 쏟아내려면 재현이 필요했다.
한울은 하고 싶은 말이 아무것도 없어질 때까지 떠들고 싶었다. 그녀에게 변명하고 하소연하고 사죄하고 싶었다.
말이 끝났을 땐, 자신도 소멸을 택할 작정이었다. 그게 비겁한 행위라 할지라도.
순간의 선택으로 죄인으로 살아야 했던 과거는 안고 가기엔, 조금은 두려운 것이었다. 외면도 죄가 되는 세상이다.
한울은 추억이 될 수 없는 기억들을 날려보내고 싶었다. 그런 의미에서 용기를 낸 재현이 부러웠다. 자신은 겁에 질려있으니까.
더는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았다. 이 이상 기억과 정보를 늘리는 건 곧 소각할 불쏘시개를 늘리는 것 뿐이다.
한울은 저 너머로 사라지고 싶었다. 재현의 곁으로 가고 싶다. 죽고 싶다는 건 그리 유별난 감정이 아니다. 누구나 그런 순간이 있고, 버티지 못한다고 그것이 죄일까.
인간은 태어나지 않을 권리가 없었으므로. 누군가가 강제로 삶이란 지옥에 떠밀듯이 알지도 못하는 여자의 뱃속에서 열 달을 키워지고 마침내 세상에 태어난다.
살고 싶어서 사는 것이 아닌, 살고 있기에 사는 인간들에겐 아무런 선택권이 없다. 그런데도 죽는 것이 불가능한 이 저승은, 그런 사람들에게마저 매정하게 권리를 빼앗는다.
시작도 끝도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인간은 참 보잘것없는 생명체다. 운명이라는 신의 게임판에서 지지고 볶으며 즐거움을 주는 말일 뿐.
내일이 기다려진다. 모든 것의 종지부를 찍는 날이다. 독감처럼 달라붙어있는 죄책감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까. 사실 끝을 확신할 수는 없다.
염라대왕의 입에 천국행 판결이 올려져야 했다. 그 변덕쟁이 영감에게 자비를 요구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만 된다면, 혐오스런 이 세상도 끝이다. 이래나 저래나 해봐야 할 싸움이었다. 사실 주희의 피해상황은 너무나 명확해서 이길 자신은 있었다.
이긴 다음, 한울은 주희를 약속대로 보내주고 자결할 셈이었다.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다면, 이곳에 계속 남는다면 언젠간 만날 부모님이었다.
그는 재현과 다르게 그들을 사랑했다. 갑자기 그들이 보고 싶어졌다. 사실 줄곧 그랬지만, 아득바득 잊어보려 애썼었다. 하지만 때는 늦었다. 이제 돌이킬 수 없다
한울의 결심은 확고해져 있었다. 너무나 긴 시간을 버텨왔다. 속 깊은 곳까지 그의 결심이 뿌리를 박아넣었다. 절대로 변치 말라고, 이번에야말로 끝을 지으라고.
한울은 재현의 의지를 흡수했다. 그가 바랐던 주희의 소멸을 이루어줄 것이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주희를 그의 곁으로 보내줘야 했다. 주희는 오래 걸리게 할 수는 없었다.
그곳에서도 이곳과 동일한 관계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는 게 도리였다. 그곳에서는 사랑하는 사람과 있기를.
그러나 아직도 어째서, 이 귀한 생명들이 죽음을 택해야 하는 건지는 도무지 모르겠다. 타인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도 아니고, 자신이 자신을 죽이겠다는 결심을 할 정도가 되다니.
왜 아무도 막지 못하는 것일까. 왜 아무도 안아주지 못하는 것일까. 왜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것일까. 모르겠다. 그게 인간이니까, 라는 덧없는 대답만 되풀이하게 된다.
저기 저 높은 자리에서 수많은 영령들을 상대하는 놈들은 아마 모를 것이다. 한울은 사자회 본부와 염라궁을 바라본다.
힘이 없어서 버티고 버티다가 떨어져나간 사람들의 심정을 그들은 짐작도 못하겠지. 이승이나 저승이나 주요 요직에 앉는 사람은 거기서 거기다.
사람들은 누구나 날개가 돋아나길 바란다. 자신이 펼칠 날개가 얼마나 아름다울지 상상해보곤 하며 그 희망을 양분 삼아 살아간다.
시간이 지나면 날아오르리라 믿고 참고 또 참지만 그것이 다 허사였음을 알게 됬을 때의 절망을 누가 알까. 아무도 모를 것이다.
한울은 차가운 밤바람을 느꼈다. 너무나 차가워서 살이 에일 것 같았다. 그것이 자신의 기분 탓에 느껴지는 착각인지는 알 수 없었다.
새삼 인생무상이 제일 좋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이 최고다.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것. 지금부터가 끝을 향한 스퍼트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정말 끝의 조짐이 보인다.
뒤늦게 올 부모님에게 편지라도 남길까, 싶었다. 그것이 최소한의 예일 테니까. 틀려먹은 아들이 끝까지 앞서가서 미안하다고.
“ 인간은 참 피곤하게 살아, 그치? ”
주희가 말했다. 어떤 이유로 그런 말을 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 어쩔 수 없는 거야, 그게 인간이니까. ”
알 것 같았다. 무얼 알겠다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이제야 확신이 들었다. 세상을 보는 눈이 트였을 때, 한울은 그 안에서 벌어지는 폭력과 파괴를 배웠다.
처음에는 모호하고, 애써 부정하고 싶어서 빛을 쫓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인간의 기본은 어둠이고, 빛은 어마어마한 노력으로 채워가는 것이다.
두 자리 숫자를 겨우 넘긴 나이부터 그들은 크고 작은 어둠을 배우고 성장하고 생존한다.
누군가는 현실에 굴복하고, 누군가는 현실을 부정하고, 누군가는 현실에 부역하고, 누군가는 현실을 즐긴다.
존재하기 위해서 바닥이 되고 발판이 되고 기어오른다. 그들은 저마다의 위치에서 그저 ‘존재’하기 위해 발버둥친다.
그 짐승과 엇비슷한 광경이, 아니, 그보다도 참혹한 광경이,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세계라는 걸 한울은 확신하게 되었다.
명찰엔 이름을 적고, 그 이름엔 빨간줄을 긋는 아이들. 그 빨간줄마저 무마하는 선택 받은 아이들. 세상은 미처 긋지 못한 빨간줄로 가득했다.
작고 약한 아이들은 그들이 나빠지기 위해 필요한 일종의 단역이었다. 인간이란 악마의 탄생신화에 필요한.
인간은 혁신적이고 현명하고 우아한 생명체라고 누가 그랬던가.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교만이 아닐까. 누구보다 지적이고 싶지만, 그만큼 더욱 야만적인 것이 인간인데.
실은 짐승만도 못한 구제불능에 욕심덩어리일 뿐인데. 인간은 본능에 더해 이성마저 더럽혀질 수 있어 더욱 무서운 괴물이다.
사람이 사람을 물건처럼 사고 팔 수도 있다. 계약으로, 권력으로, 지위로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고 소유한다.
한울은 뒤섞여버린 감정을 뒤로 하고 호텔로 들어간다. 더 많은 생각은 내일의 일을 그르치게 할 뿐이니까. 한울은 내일만 생각하기로 한다.
이제 곧 잊어버릴 자신의 모든 걸 되뇌이며.
- 작가의말
끝날 조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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