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할아버지는 말씀하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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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게 사기거나 장난이었으면 좋겠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내 심경의 변화는 하루에도 몇 번씩 일어났다.
변덕스러울 정도로. 하루가 가면, 나는 많은 생각을 했다. 내 머릿속은 생각들로 가득하다.
간밤은 그녀로 인해 미칠 것 같았다. 여기저기서 날아드는 그녀의 영혼에 나는 맥을 못추고 곤두박질쳤다.
웃음기없는 주희가 나에게 살려달라고 외치거나, 방법을 알아내라고 종용했다. 나는 궁지로 내몰리는 기분을 겪었다.
나는 무슨 말로 이 기분을 표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겪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을 것이다. 눈을 뜨나 감으나 그녀가 보였고, 그녀의 소리가 들렸다. 모든 곳이 그녀로 가득했다.
재현아, 부르는 소리. 나를 돌게 하는 소리. 나는 망연자실하며 그 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말했다. 너도 공범자라고. 잔인한 선언이 나를 괴롭혔다.
아름답게 흩날리던 머리는 촉수가 되어 나의 목을 조르고, 사랑스럽던 시선은 나를 얼어붙게 했다. 한 순간에 그녀는 비너스에서 메두사가 되었다.
나는 끝없이 침전했다. 나는 내 안에 잠겼다. 나는 마음 속을 헤엄쳐 해협을 건너 그녀의 마음 속이란 바다로 가는 수문을 찾고 싶었다.
나는 열심히 헤엄쳤지만, 그녀의 문을 찾을 길이 없었다. 언제나 찾아오는 쪽은 그녀였다. 나는 가만히 그녀의 집행을 기다려야 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늘 그랬듯이.
주희는 식탐꾼처럼 내 마음을 갉아먹었다. 내 심장은 그녀의 좋은 양식이었다. 그럴 수록 나는 그녀에게서 멀어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비겁자에게 어울리는 충동이었다.
염치 없게도 내 발은 후진하고 있었다. 벌벌 떠는 것은 일상이었다. 나는 스스로 맞서기보다 도망치기 바쁘다. 그날 그랬듯이.
나는 발전도 없이 또다시 똑같은 짓을 반복한다. 맞서기엔 내가 맞닥뜨린 현실이 너무나 버거웠다.
벽에 깔려 죽기보다 도망쳐 사는 것이 나았다. 나라고 죽는 게 좋을 리가 없다. 나도 살고 싶었다.
나는 그녀와 소통하고 싶었으나, 소통은 쌍방이 동등할 때 원활한 것이다. 우린 동등할 수 없었다.
나는 그녀를 꿈속에서 만날 때마다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매번 그녀는 달라졌다.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이 달랐다. 나를 죽이려다가도 슬피 울고, 그러다가도 분노했다. 가끔은 나를 가엾어 하기도 했다.
어서 눈을 떠야 했다. 언제까지고 눈을 감고 있을 수는 없었다. 뜨나 감으나 똑같다 해도. 눈을 뜨면 무언가 달라질 여지가 있다.
나는 상체를 일으켜고 침대 밑으로 두 다리를 내려 앉았다. 온몸이 뻐근하고 노곤했다. 창밖은 흐릿했다.
시계를 보고도 어리둥절할 정도로 어두운 아침이었다. 먹구름이 끼어 하늘이 울상 짓는 것 같았다.
나는 문득 서서 방 한 구석에 놓인 전신거울 앞에 섰다. 지금 내 꼴이 궁금했다. 걸려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벽에 아슬아슬하게 기대어 있는 거울에는 어느 안색 나쁜 소년이 서있었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망가진 걸까.
밤잠을 설친 듯 눈은 퀭하고 피부는 거칠고 입술은 핏기가 없었다. 영락없는 병자의 용모였다.
어린 소년의 입을 떠나지 않아야 할 미소는 온데간데 없고, 잔인한 침묵만이 닫힌 문처럼 남아있을 뿐이었다.
나는 거울 속 소년을 뒤로 한 채 방을 나섰다. 어디로 가야하는지는 몰랐다. 긴 복도가 양옆으로 이어졌다. 다시봐도 길고 아득한 복도였다.
멀리서 구둣발 소리가 들렸다. 멀어지는 걸로 보아 다가오는 소리는 아니었다. 나는 왼쪽 복도로 걸었다.
어차피 낯선 길이라면 왔던 길로 돌아가는 게 안전했다. 홀로 이곳을 거니는 것은 처음이었다.
신기하게도 불안하지는 않았다. 마치 어딘가로 견학을 온 기분이었다. 멀리 문 하나가 개방되어 있었다.
나는 열린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봤다. 개발실이었는데 누군가가 열심히 땜질을 하고 있었다. 그는 나의 호기심을 채워주지 못했다. 도무지 뭘 만드는지 모르겠다.
“ 젊은 친구가 일을 참 잘하죠? ”
어느새 내 뒤에 있던 오진호가 말했다. 그가 가리킨 젊은 친구는 저 용접공이 틀림없었다.
뒷모습 뿐이라 연령대까진 추론할 수 없었지만, 호리호리한 체격과 젊은 친구라는 말로 볼 때에 어린 축에 속할 것이 자명했다.
“ 네, 그러네요. 근데 누구에요? ”
“ 손태하. 우리 협회의 맥가이버죠. 어쩌면 더 대단할 수도 있고요. ”
그는 설명한 뒤, 이곳에 당신이 왜 있느냐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나는 마치 도망치다 들킨 것처럼 움찔했다.
내가 여기 있는 이유가 마치 불순한 의도인 것처럼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반감이 들었다. 하지만 어쩌면 나의 확대해석인지도 모른다.
“ 그거 대단하네요. 여기서도 무얼 만드나보죠? ”
“ 당신 뿐만 아니라 모두를 위한 것을 만들죠. 가령 무기라든가, 마스터키라든가, 방어구 같은 거요. ”
슬슬 만화 같은 얘기가 나왔다.
“ 그런 걸 뭐하러 만들어요? ”
“ 싸워야 하니까요. ”
“ 누구랑요? ”
내가 꼬치꼬치 캐묻자 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불편함을 드러냈다.
“ 누구겠습니까? 우리를 가로막는 모든 것들이요. ”
“ 가령 사자들을 말하는 건가요? ”
“ 그래요, 더 정확하게 말하면 저승 자체가 우리의 적이죠. ”
오진호는 적대적인 태도로 일관하며 말했다.
“ 왜 싸우는 거죠? 그냥 우린 이렇게 죽으면 되잖아요. 아지트도 숨겨져 있고, 소멸의 강도 있고 계획도 있잖아요. 근데 왜 무기를 만드는 거죠? ”
“ 무기가 있어야 우리의 존재가 유지되요. 순진한 당신은 그저 싸움이라면 질색이겠지만, 어른들의 세상은 거의 힘의 논리에요. 누가 세고 약하냐에 따라 발언권이 달라지죠. 저들은 인정하기 싫지만, 국가가 공인하는 자들이에요. 그들의 정보력으론 언젠간 우리에게 도달할 거에요. 우린 그들에게 잡혀서도 당해서도 안돼요. 무력을 써서라도 우린 조직을 지킬 겁니다. 그래야 당신 같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어줄 수 있어요. ”
남자의 말에는 꾸미는 기색은 없었다.
“ 문 밖에서 뭐 그리 떠들어요? ”
손태하가 문을 마저 열고 신경질적인 태도로 물었다. 예상대로 용접 마스크를 벗은 손태하의 얼굴은 젊음 그 자체였다. 부리부리한 눈은 다소 옛날 청춘 만화 주인공 같았다.
“ 아, 미안. 작업에 방해됬나? ”
오진호가 손태하에게 사과하자 그의 사납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는 장갑을 벗고 툴툴거리듯이 말했다.
“ 건 아닌데요. 사람 좀 더 뽑아요. 이래서야 큰일할 수 있겠어요? 어떻게 공학도가 저 밖에 없죠. ”
“ 이 바닥에 사람이 많다는 게 무슨 뜻인 줄 아나? ”
오진호의 날선 반응이 놈의 건방진 불만을 잠재웠다. 그러나 그는 물러서지 않고 한 마디를 덧붙인다.
“ 알다마다요. 사는 게 그만큼 뭣 같다는 거겠죠. 우리들이 떠나온 뒤에도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는 증거고. ”
손태하는 말을 끝맺고 이쪽으로 눈을 돌렸다. 키가 커서 내려다보는 수준이었다.
“ 어때요? 세상은 좀 나아졌는가요, 꼬마 손님. ”
그는 마치 자신은 한참 어른이라도 되는양 말했다.
“ 나아졌으면 제가 여기 있겠습니까. ”
“ 그건 그러네요. ”
손태하는 웃음 짓고는 다시 문고리를 잡았다. 이제 대화는 끝이라는 듯이.
“ 수고하게. ”
닫히는 문을 잡은 오진호가 말했다. 손태하는 대꾸없이 문을 닫아버렸다.
“ 까칠하네요. ”
내가 뒷담화를 하듯 말했다. 무언가 적대감이 느껴졌다. 누구를 향한 분노일까.
“ 원래 저런 놈이에요. 그보다 여기서 뭘 하셨습니까? ”
그가 자연스럽게 말을 꺼냈다. 일상적인 어조이면서도 날카로움이 묻어나왔다.
“ 하긴 뭘요. ”
“ 할 말 있으시죠? ”
나는 정곡을 찔린 것처럼 망설였다. 그러나 이제 물러날 곳은 없었다.
“ 부탁이.. 있어요. ”
“ 뭐죠? ”
“ 제 친구를 데려와주세요. ”
- 작가의말
저 아재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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