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 변화의 시작(2)
당연히 본 작품에 등장하는 단체나 인물들은 현실과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지금 이지후로서는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했다. 싸늘한 비수가 심장을 꿰뚫고 지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얼굴은 열기로 인해 붉어졌다.
다른 사람도 아닌 김명경이 그의 계획을 어그러트리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어지간히 충격이었나 보다.
“정말로 장난 칠 때 아니라니까?”
“정말로 장난 아니라고.”
그녀의 단호한 눈빛과 말투. 사실 이지후는 이미 그녀가 진지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기에 물어본 것.
“단지 1:1 대결이 하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잖아.”
“흠... 우리 똑똑한 이지후 씨, 정말로 모르시네.”
“비아냥거리지 마.”
“어휴... 의외로 사람 맘을 모를 때가 많다니까.”
이지후는 그녀가 말을 이어가길 기다렸다.
“다른 애들은 너의 인생철학이라고나 할까나? 철학은 너무 거창하네. 그래, 인생스타일 정도로 하자. 그걸 좋아해서 너와 함께 하지만 난 달라. 난 그럼 사람이 아니거든.”
“......”
“물론 나도 나쁜 짓이나 일삼고 다니는 놈들이 잘 나가는 건 싫어. 하지만 딱히 너처럼 정의 찾아가며, 신념이 어쩌구 하다가 핍박 받으면서 사는 걸 좋아하지는 않는다고. 사실 어려운 일이나 복잡한 일을 싫어하는 사람이라서... 그럼에도 네 장단에 맞춰주고, 널 따라다니는 이유는!”
상당히 임팩트 있게 말을 끊었다. 그 순간 박재성이 말했다.
“그것이 바로 애정!”
“뭐... 뭔 소리야!”
“하기사 인생에 가장 중요한 게 그거지.”
“중요한 순간에 끼어들지 마.”
펑, 소리가 나더니 그녀의 주먹이 박재성의 복부에 꽂혔다. 그가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 모습을 본 김연흠은 볼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닦아냈다.
‘저 말 내가 하려고 했는데... 죽을 뻔했잖아.’
잠깐의 해프닝이 지나가자 그녀는 목을 가다듬고는 말했다.
“그냥 즐거워서야.”
“점점 더 알 수 없는 말을 하네.”
“아까 선생님께서 자기는 항상 성윤이가 옳은 일을 할 거라고 믿는다고 했었지? 나도 그래. 나는 널 항상 믿고 있어.”
“그런데 지금은 왜...”
“그렇다고 항상 널 따르는 거랑은 다른 문제라는 거지. 왜냐면 지금은 즐겁지가 않거든.”
“무슨 차이지?”
갑자기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왜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아? 너는 항상 모든 일을, 내가 잘 이해하지 못해도 설명해줬었잖아.”
이지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커다란 나무의 가장 높은 나뭇가지에 달려 있던 나뭇잎이 땅에 안착할 때까지 입을 열지 못 했다.
김명경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맺혔다.
“이제 이해했나 보네.”
“그게... 나름의 사정이...”
“그래. 누구나 사정은 있지. 나는 참 아쉽게도 솔직히 머리가 그리 좋지 않아. 하지만 그래도 내가 너랑 같이 다닌 게 몇 년인데, 지금 하려는 일이 뭔지를 모르겠어?”
“알고 있었구나.”
“확보하려는 그 장치 말이야. 석두 오빠가 명령을 내렸다지만 단지 그것 때문에 니가 나선 건 아닐 거야. 개인적인 복수랑 연관이 있지 않아?”
그는 생각을 정리했다. 지금 자신이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어떻게 하면 그녀를 설득해서 데려갈 수 있을까? 숨길 것은 잘 숨기면서.
하지만 그녀의 흔들림 없는 눈을 보는 순간 그녀의 뜻을 바꿀 수 없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지금 해야하는 행동은 설득이 아니라 그저 솔직하게 사과하는 것이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미안해. 정말로... 내가...”
하지만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흐렸다. 자존심이 상해서나 화가 나서는 아니었다. 그녀가 대신 말해준다.
“내가 과연 복수 때문에 이래도 되나 흔들리고 있었구나.”
정답이었다. 그는 자신의 행동이 복수에 과도하게 치우쳐져 균형을 잃지 않고 있나 걱정했었다. 그래서 박재성 외에는 제대로 설명을 해주지 않았었던 것.
“하지만 그 복수 말이야... 결국은 다른 일과도 연관이 돼 있잖아. 그 일은 결국 네가 좋아하는 인간다운 삶을 위한 거겠지? 그러니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전진하라고!”
그녀의 결론은 이렇게 항상 단순명쾌하다.
“고마워. 설명은 나중에 모두 해줄게.”
“그래. 그러면 됐어. 다 용서했어. 하지만 일단 설명을 안 해줬던 건 사실이니, 이건 벌이야. 나 저 녀석하고 1:1 대결하고 따라 갈게.”
“하지만 아무리 자색창검의 상태가 심각하더라도 치프틴급인데, 혼자 괜찮겠어?”
“날 믿어. 내가 널 믿듯이.”
그녀는 주먹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내 앞을 가로막는 건 모조리 주먹으로 때려 부수고 나갈 뿐!”
입가의 미소가 번진다.
“난 파괴의 여제니까!”
결국 이지후는 웃고 말았다. 갑자기 그녀를 와락 안았다.
“으엑?”
“다치지 말고 와.”
“적당히만 다칠게.”
“그건 평소에 내가 하는 말이잖아.”
“나도 한 번 따라 해보고 싶었나보지.”
“믿고 갈게. 빨리 따라와.”
“이거 따뜻해서 좋다.”
***
EOA의 사장 배호영은 구효린이 보냈었던 쪽지에 대해 다시 떠올렸다.
[강철 군주의 공략에 성공한 직후, 제가 지정한 장소에서 만났으면 합니다. 향후 일정에 관해 논의하고 싶습니다. 장소는 그 때 알려드리겠습니다. 지워지지 않는 흔적의 화살이 과연 제 갈 길을 가고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숨겨진 의도가 있을 것은 당연한 일. 하지만 그것을 알아내기에는 내용이 너무 짧았다.
그녀가 만나자고 한 장소로 이동했다. 당연히 혼자였다.
신중하고 조심성이 가득한 성격이다. 그런 배호영이 이런 의심스런 제안에 응한 것은 그녀의 평소 행실과 ‘성녀’라는 칭호가 주는 성스럽고 고귀한 이미지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넘치는 자신감. 현역으로 전투에 나서지는 않은지 꽤 됐지만 그래도 레벨 7의 이능력자다.
1차 인천 공략 때는 최강의 이능력자 중 한 명이었다. 다만 그 전투의 후유증으로 이능력이 더 이상 강해지지는 않았다.
비전환상 이능력을 사용하는 그는 자신을 닮은 환영체를 만들 수 있으며, 빛의 반사를 통한 눈속임에 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생존이라는 측면만 따지면 신대한민국 최고 수준.
감히 누가 나를 해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최근 복음자와 성녀의 사이가 위태롭다는 정보를 입수했었다.
‘유일신교에서 개신기독교파랑 성녀파의 대립이 심해진 게 아니라 어쩌면 복음자와 성녀의 파워게임이 시작된 게 아닐까?’
일리가 있는 추측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성녀가 단독으로 그를 만나자고 할 리는 없으니까.
‘그렇다면 과연 뭘 주고, 뭘 받아내야 할까? 이거 생각보다 더 큰 거래가 될 지도 모르겠어.’
희뿌연 대기를 헤치고 나가는데, 갑자기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누군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으나 사람이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배호영은 재빠르게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했다.
‘이곳은 성녀와의 약속장소. 성녀가 날 함정에 빠트릴 리는 없을 텐데. 그렇다면 구영진! 이 능구렁이 같은...’
문득 든 생각. 함정치고는 너무 어설프다. 그가 누군가를 살해한 것처럼 꾸미려면 목격자가 있어야 하며, 그가 했다는 증거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는 함부로 시체 같은 것에 손 댈 사람이 아니다.
‘설마 저기 쓰러져 있는 사람은...’
순간 몸에 소름이 돋았다. 바로 이능력을 발동시켜 자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도록 만들었다. 일단 뒤도 안 돌아보고 빠져나가는 것이 정답이라 생각했다. 살짝 떨어진 곳에서 이곳을 관찰하면 되지 않나 싶었다.
그 순간 공간이 일그러지더니 쓰러져 있는 사람 옆에 누군가 나타났다.
“씨발!”
배호영의 입에서 평소에는 담지도 않는 욕설이 튀어나왔다. 순간이동으로 나타난 사람은 바로 구효수였다. 그가 울부짖었다.
“큰아버지!”
조금 전의 직감이 맞았다. 쓰러져 있는 사람은 구영진이었다. 그리고 구효수의 행동을 미루어보아 이미 사망한 것이 틀림없었다.
“도대체 누가 그랬어!”
구효수의 음성에서 살의가 끓어올랐다. 배호영은 그 살의가 자신의 폐부를 찌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탓에 평소의 냉정하고 침착한 태도가 사라졌다. 자신의 손이 떨리는 모습이 보였다.
‘하필...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 녀석은 따돌리기 쉽지 않다고.’
구효수는 그와 같은 비전계열 이능력을 사용하기에 비전계열 이능력을 쉽게 깨트린다. 그리고 레벨은 8이며, 기동력에서 그를 훨씬 상회한다.
구효수가 양손을 좌우로 뻗더니 감지 이능력을 발동했다.
“거기 있구나! 감히 내 눈을 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의 손에 에너지가 잔뜩 응축됐다.
- 지이잉!
푸른 레이저가 배호영이 숨이 있는 곳으로 질주했다.
- 펑!
무언가 맞은 듯 연기가 피어올랐다. 구효수의 눈이 가늘어졌다. 연기가 너무 과도하게 났기 때문.
“환영체?”
구효수는 바로 다른 곳으로 레이저를 발동했다. 반대편에서도 레이저 공격이 이루어진 탓에 상쇄가 됐다.
“잔재주로 몸을 감춰?”
그는 비전 해제 이능력을 사용했다. 그러자 배호영의 모습이 드러났다.
“도대체 왜! 당신이 왜 우리 큰아버지를 죽인 거야!”
배호영은 일단 대화로 풀어나가고 싶었다. 자신은 무고하니까.
하지만 구효수의 상태를 보아하니 대화 따위는 의미가 없는 것 같았다. 그의 눈은 뒤집어져 있었다. 이성은 이미 날아갔을 것이다.
푸른 레이저가 배호영을 향해 여러 방향에서 날아왔다. 그는 오른쪽으로 피하는 동시에 레이저 하나를 자신의 레이저로 처리했다.
그 후, 능숙한 솜씨로 환영체 다섯 개를 만들어냈다. 모두 배호영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생김새와 움직임이 정교했다.
다시 한 번 빛의 교란을 이용해 자신을 주변과 동화시켰다.
구효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고작 그걸로 뭘 하겠다고!”
- 쾅! 콰과광!
다섯 환영체가 있는 곳의 하늘과 땅에서 레이저가 솟구치며, 쏟아졌다. 그 틈을 타 배호영이 도망치는 모습이 보였다. 구효수는 놓치지 않고 등에다 레이저를 뿜었다.
“어?”
도망가던 것은 환영체였다. 순간 옆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바로 옆까지 배호영이 다가왔기 때문. 어느새 이능력을 잔뜩 머금은 손을 뻗고 있었다.
구효수는 뒤로 빠지며 양손으로 레이저를 쐈다. 좌우로 휘는 레이저가 구영진의 몸통을 맞췄다.
구효수의 눈이 커졌다. 분명 살이 찢기고, 뼈가 부러지며, 피가 튀기는 장면을 볼 줄 알았는데!
허망하게 연기만이 피어올랐다. 이것 역시 환영체.
원래 환영체들이 있던 곳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잘게 으깨진 두부처럼 변한 땅만이 남아 있었다. 배호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애초에 배호영은 움직이지 않았었다. 하늘과 땅에서 날뛰는 레이저 공격을 몸으로 받아냈었다.
그 후, 도망가는 환영체와 공격하는 환영체로 구효수의 시선을 돌린 후, 도망친 것.
땅으로 떨어진 핏자국들을 이능력으로 안 보이게 만드는 것 역시 잊지 않았다. 구효수는 이내 핏자국들을 찾아냈으나 이번에는 핏자국들이 사방팔방으로 이어져 있어 배호영을 놓치고 말았다.
“죽여버리겠어!”
분노가 가득 찬 포효가 주변을 울렸다.
먼 곳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다. 항상 구효린과 함께 하는 김청호였다. 그는 바로 그녀에게 연락했다.
“하라는 대로 모두 했어.”
- 수고했어. 빨리 돌아와.
“알았어.”
김청호는 깊게 숨을 내쉬었다.
‘과연 나는 잘 하고 있는 것일까? 이래도 되는 걸까?’
구영진의 시체를 붙잡고 울고 있는 구효수를 쳐다보다 몸을 돌렸다.
‘그래... 효린이가 하는 행동은 모두 옳아. 그녀는 나의 신앙 그 자체. 나는 그저 믿고 따를 뿐.’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모르겠어.’
추천과 댓글은 작가에 대한 사랑입니다! 죄... 죄송합니다.
- 작가의말
다음 편은 며칠 걸릴 지도 모르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쓸 게요. 이미 아무도 안 믿으시려나?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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