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 그림자 영웅(6)
당연히 본 작품에 등장하는 단체나 인물들은 현실과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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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깃발 올려.”
내 옆에 있는 뚱뚱한 1학년 녀석이 준비해둔 깃발을 펄럭였다.
빗발치던 이능력이 사그라지자 시야를 가로막고, 목을 칼칼하게 만들었던 흙먼지가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중국군의 얼굴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은 모두 놀란 눈치였다. 치열하게 저항하던 우리가 갑자기 공격을 중단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나는 중국어를 할 수 있는 후배와 명경이를 데리고 고지를 내려갔다.
중국의 이능력자들이 우리를 위아래로 훑어본다. 그러다 입꼬리를 올렸는데, 비웃으려는 의도가 명확히 드러났다.
몇몇은 일부러 이능력의 기운을 방출하기도 했다. 으슥한 골목길을 장악하고 부랑배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우리는 그들이 터준 길을 따라 걸었다. 리시콴이 보인다.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 때문인지 피부가 따끔거렸다. 그와는 50m 이상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통역을 위해 따라온 후배 놈이 어깨를 덜덜 떨고 있다. 자신이 사지(死地)로 들어왔다고 생각하고 있을 거다. 나를 원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옆에 있는 우리 명경이는? 언제나처럼 위풍당당하다.
나는 후배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는 귓속말을 했다.
“무서워?”
“아... 아니에요. 하나도 안 무... 무서워요.”
“난 무서워. 그것도 아주 많이.”
“네? 형, 지금 무슨 말씀을...”
“솔직히 그렇잖아. 겨우 셋이 적진에 왔는데, 어떻게 안 무서워. 나 지금 떨고 싶은데, 왜 못 하고 있는지 알아? 니가 옆에서 하도 떨어서 그런다.”
“그... 그렇군요. 하지만 명경이 누나는 전혀 겁내지 않는 거 같아요.”
“쟤는 생각이 없어서 그런 거고.”
후배가 미소를 짓는다. 조금이나마 안정이 됐을까?
리시콴의 앞에 섰다. 진짜 농담이 아니라 지휘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도망치고 싶다. 심장이 벌렁벌렁 뛴다는 것이 이런 느낌이구나.
그의 눈꼬리가 묘하게 올라갔다. 우리에게 흥미를 보인다고 해석해도 되는 걸까?
내가 말했다.
“천하제일의 영웅 리시콴이시여, 오늘 소문으로만 들었던, 천지를 뒤흔드는 그 무예를 보게 되어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최대한 비굴하게 행동했다. 더러워도 어쩔 수 없다. 후배에게 이 간신배 같은 느낌을 최대한 살려서 통역하라고 귀띔했었다.
갑자기 한신의 고사가 생각났다.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불량배의 가랑이 사이를 기어갔다는... 물론 나는 한신 같은 대단한 사람이 아니다.
리시콴이 대답했다.
“나는 말이 길어지는 걸 싫어하니 빨리 본론만...”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끌어보겠다는, 내 얕은 수는 단번에 들통 났다. 일부러 말을 천천히 해서 그런 걸까?
어쩔 수 없네. 바로 진행하는 수밖에.
“저 언덕을 걸고 대결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저희가 이기면 리시콴님께서 천하제일의 영웅답게 너른 마음으로 물러나주셨으면 합니다. 당연히 리시콴님께서 승리하시면 저희는 조건 하나 달지 않고 항복을 하겠습니다.”
“조건 없는 항복이란 무조건 내 말에 따르겠다는 건데... 만약 내가 모두 자결하라는 명령을 내린다면?”
“기꺼이 제 목에 스스로 칼을 쑤셔 넣겠습니다.”
“흥!”
코웃음 소리가 들린다. 설마 씨알도 안 먹히는 건가? 등이 써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식은땀이 흐르고 있다.
그가 말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어차피 승리는 코앞인데.”
역시다. 이런 말을 꺼냈다는 것 자체가 내 제안에 관심이 있다는 증거다. 나는 이제 그에게 명분만 만들어주면 된다. 명분은 굳이 논리적이거나 합리적일 필요가 없다.
그럴듯하기만 하면 된다.
“강자와의 정정당당한 승부! 이것이 당신에게 천하제일의 영웅이라는 명예를 안겨다주지 않았습니까?”
“나는 이미 김관우에게 승리했다. 그것도 아주 쉽게. 그런데 이 작은 땅에서 내가 또 증명할 것이 남아 있나?”
나는 명경이의 등을 떠밀며 말했다.
“여기에 김관우 씨와 대등한 이능력자가 있습니다. 이름은 김명경입니다.”
“어이! 입만 나불대는 꼬마. 지금 짜증나려 한다고.”
그가 주먹을 꽉 쥐자 황금빛 이능력이 넘실거렸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아름다웠으나 나는 소름이 돋았다.
리시콴의 한계가 어느 정도인지 도무지 가늠이 안 돼서다. 그리고 지금 한 행동은 명백한 협박이니까.
이제 단 한 마디라도 불필요한 말을 꺼내는 순간, 나는 머리와 몸이 분리되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호흡을 고르며 대답했다.
“분명 명경이는 이능력 수준은 김관우 씨 정도입니다. 하지만 그녀의 무술 수준은 김관우 씨 이상 아니, 천하제일의 영웅이신 당신보다도 위입니다.”
“이 여자 꼬마가? 실력이 제법이라는 건 몸에서 풍기는 기운만으로도 알겠어. 하지만...”
“사실입니다. 아까 전투 때, 명경이에게 흥미를 보이지 않으셨습니까? 그 이유는 명경이가 얼마나 대단하지 이미 파악하셨기 때문 아닙니까?”
“크하하하!”
그가 아주 호탕하게 웃었다. 그러다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남자 꼬마, 똑똑하네. 내 흥미를 자극하는 동시에 내가 대결을 해야 하는 명분까지 만들어주고.”
명분이란 참 중요하다. 명분을 제대로 세워야 자신을 따르는 사람을 납득시킬 수 있다.
명분은 숭고한 것이다. 대의를 품고 있다. 고상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때로는 그저 타인의 대리만족 욕구를 채워주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이 그렇다.
그는 무술을 기반으로 하는 이능력자다. 그러니 중국군은 보고 싶을 것이다. 자신들의 자부심인 리시콴이 무술에서조차 천하제일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모습을...
“어이! 나불나불거리는 거 잘하는 남자 꼬마, 그런데 얘는 여자 맞지? 남자 같이 생겨서... 벗겨봐야 알 거 같은데.”
“성별은 확실히 여성입니다.”
명경이의 얼굴이 싸늘해진다. 물론 리시콴이 한 말을 알아들어서는 아니다. 통역을 하는 후배 놈도 눈치가 있다. 이번 건 나에게 귓속말로 전달했었다. 하지만 리시콴의 야릇한 시선, 명경이가 그걸 모를까?
명경이가 내게 말했다.
“저 놈이 뭐라는 거야?”
“너보고 예쁘대.”
“진짜? 어쩐지 나를 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더라. 역시 내 미모는 대륙에서도 통하는구나.”
양심에 가책을 느꼈지만 어쩔 수 없다. 여기서 명경이가 난동을 부리게 만들 수는 없잖아? 대한민국을 구한 거짓말이라고 해두자.
이제 다음 승부수를 던질 차례다.
“대결에 한 가지 청이 더 있사옵니다.”
“뭐지? 짧게 말해라. 귀찮으니까.”
“아무리 명경이의 무술 실력이 뛰어나다 해도 이능력의 격차 때문에 영웅님과는 종합적인 면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건 내가 알아서 조정을 할 거다.”
“그렇게 되면 이미 승부가 아니지요.”
그나 눈살을 찌푸렸다.
“어쩌자는 거지?”
“명경이와 비슷한 수준의 무술 실력을 갖춘 이능력자가 한 명 더 있습니다.”
“뭐? 그럴 리가...”
“그 둘과 동시에 대결한다면 영웅께서도 전력을 다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 둘이 힘을 합치면 당신을 이길 수도 있습니다.”
그가 이번에는 허리를 뒤로 젖혀가며 웃었다.
“정말 날 즐겁게 해주는구나. 하지만 아까 보아하니 번개 쓰는 녀석 말고 그 정도 수준의 이능력자는 없었는데. 그리고 그 번개 놈은 무술을 기반으로 한 이능력자가 아니잖아. 도대체 무슨 꿍꿍이지?”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무얼 말이냐.”
“그 두 번째 이능력자가 지금 영웅님의 눈앞에 있다는 사실을요.”
그가 처음으로 놀란 눈치를 보였다.
“남자 꼬마... 지금 너 자신을 말한 거냐?”
***
명경이가 팔꿈치로 날 툭툭 친다.
“마치 자기 혼자 싸울 것처럼 말하더니...”
“난 자살에는 취미가 없거든.”
“아까 그 말은 좋았어. 우리 둘이 힘을 합치면 리시콴을 이길 수 있다는 말. 역시 우리 콤비야 말로 천하무적이지.”
“못 이겨.”
“엉?”
“절대로 정면대결 할 생각하지 마.”
“그럴 거면 왜 2:1로 싸우자고 했어.”
“시간을 벌어야 하니까. 창진이가 구원군을 이끌고 올 때까지. 우리 목적은 그게 다야.”
“이건 진짜 무인의 자존심이...”
“그딴 건 버려.”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그녀에게 화를 낸 건 아마 이능력 학교 1학년 때 이후 처음인 거 같다. 미안한 마음이 들어 목소리를 최대한 부드럽게 내려 노력했다.
“처음에는 우리 둘이 함께하며 그래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했어. 그런데 그 생각 자체가 오만이더라고. 리시콴의 앞에 선 순간 깨달았어.”
그녀가 말이 없다. 그녀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절대로, 나는 절대라는 말을 싫어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는 절대라고 표현하고 싶다. 우리는 절대로 리시콴을 이길 수 없다.
“우리의 목표는 리시콴을 이기는 게 아니야. 그저 살아남는 거야.”
그녀를 꽉 안았다. 그녀의 심장이 세차게 뛴다. 우리 사이에는 두꺼운 방어구가 있다. 그러니 나는 그녀의 심장 고동을 느낄 수 없다. 분명 착각이다.
하지만 난 느꼈다.
“명경아 난 죽고 싶지 않아. 니가 죽는 것을 바라지도 않고.”
“나도야.”
“최대한 많은 사람을 살리고 싶어.”
“그래.”
“그러니까 내 말에 따라줄 거지?”
“학교 다닐 때 말 했었지? 나는 너의 주먹이라고.”
다시 한 번 그녀를 꽉 안았다.
“가자!”
리시콴과 대결을 벌이기로 한 장소는 언덕의 중턱에 있는 평평한 곳이다. 대결 장소까지 내려온 우리 편은 당연히 나와 명경이 그리고 통역을 담당하는 후배 셋뿐이다. 나머지는 고지 위에서 경계 태세를 갖추고 있다.
리시콴은 고지 위에 있는 이들에게 공격 받을 위험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여기에서 대결하는 것을 흔쾌히 허락했다.
자신감 그래, 하늘을 찌르는 자신감이 있으니까. 그리고 그들에게 이 대결 아니, 이 전투는 그저 게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목숨이 걸린 문제인데.
명경이와 함께 리시콴의 앞에 섰다. 그는 명경이보다 나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호기심 때문일 것이다.
“시작하지.”
그가 말하자 나와 명경이가 자세를 잡았다. 그의 몸에서 황금색 기운이 흐르기 시작했고, 대결은 바로 이루어졌다.
그가 엄청난 속도로 나에게 다가왔다. 빠르다. 정말 빠르다. 저 큰 덩치에 나와 속도가 비슷하다니. 믿기지가 않는다.
몸을 옆으로 틀며 그의 주먹을 피했다.
- 찌지직!
분명 가볍게 뻗은 주먹일 텐데, 살짝 스치기만 했는데, 방어구와 허리의 살점이 찢겨 나갔다.
고통이 일자 죽음의 공포가 찾아왔다. 대결은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인데. 그렇다고 그냥 주저앉을 수는 없다.
그의 턱을 향해 발을 찼다. 명경이 역시 나의 공격에 맞춰 붕권을 뻗었다.
- 콰광!
강력한 기운끼리 충돌하는 소리가 퍼져나갔다. 리시콴은 명경이의 붕권을 왼손으로, 내 발차기는 오른팔로 막았다.
그는 분명 피할 여력이 있었다. 위력을 알아보기 위해 일부러 공격을 받아낸 거다.
그가 이죽거린다.
“무술 실력은 일단 둘 다 합격점은 되는군. 하지만 남자 꼬마는 너무 비리비리한 거 아냐? 그래도 여자 꼬마는 제법 얼얼하네.”
그의 몸에서 황금물결이 요동치자 나와 명경이가 동시에 뒤로 밀려났다. 나는 엄청난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5m는 넘게 뒷걸음질을 쳤다.
명경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야? 이건 그냥 몸에 기공만 돌린 거잖아. 그런데 내가 못 버텼다고?”
“피해!”
내가 다급하게 외쳤다. 리시콴은 별다른 예비 동작도 없이 그녀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이런!”
명경이가 뒤로 멀찌감치 뛰었다. 평소처럼 반격을 위해 아슬아슬한 간격으로 피하지 않았다. 그럴 여유가 없는 것이리라.
“여자 꼬마 반응 좋네. 어디 이것도 한 번 받아보라고.”
사방의 기운이 모두 그의 오른 주먹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는 착각이 일었다. 무지막지한 기운이 형상화를 이룬다. 황금색 용이 그의 주먹을 휘감는다.
“황금용권!”
“명경지수!”
분홍색의 타원형 구체가 황금용을 되돌리려 한다. 리시콴이 웃었다. 반면 명경이의 얼굴은 점점 일그러지고 있다. 내가 리시콴의 빈틈을 노리기 위해 달렸으나 그가 한 발 빨랐다.
- 퍼벙!
명경이가 저 멀리 나가떨어졌다. 황금용은 방향을 바꿔 하늘을 향해 날아갔다. 명경지수가 위력을 발휘한 것.
나는 더 이상 다가가지 않고 동작을 멈췄다.
- 짝! 짝! 짝!
리시콴은 아주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박수를 쳤다.
“이거 좋군. 아주 좋아. 내가 겪어 본 기술 중에 세 손가락 안에 꼽을 만해. 꼬마 아가씨 아니, 여전사께서는 믿는 구석이 있으셨군.”
명경이는 허망한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뭐야? 내 명경지수를 정면으로 눌렀으면서 타격이 하나도 없다고?”
당황할 만하다. 인간을 상대로 명경지수가 이렇게 처참하게 파훼된 적은 처음이다.
그가 나를 쳐다본다.
“자! 이제 남자 꼬마도 뭔가 보여줘야지? 특별한 게 없으면 죽게 될 거야. 1분도 안 걸리겠지?”
나는 침을 삼키려 했으나 제대로 넘어가지 않았다.
여기서 최소 10분은 버텨야 하는데... 과연 할 수 있을까?
강한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김관우 아저씨가 고작 3분을 못 버텼지?
추천과 댓글은 작가에 대한 사랑입니다! 죄... 죄송합니다.
- 작가의말
안녕하세요. 정말 정말 간만에 글을 올립니다 ㅠㅠ
옆의 N 동네에서 이능력자 안 올린다고 강력한 항의가 와서... 원래는 저번주부터 주 3회로 연재하기로 약속했었습니다.
그런데... 아시는 분은 아시다시피 제 다른 글이 갑자기 덜컥 유료 계약을 맺게 돼서...
이번주 부터 주 2회로 연재를 하기로 변경했는데요.
과연 주 2회 약속을 지킬 수 있을지마저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다음 주는 확실히 안 될 것 같습니다. 그래도 최소 한 편이라도 올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제 글을 기다려주신 분들께 정말 죄송하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유료 연재 계약을 맺었기 때문에 이능력자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는 못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천천히라도 꾸준히 쓸 수 있도록 신경 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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