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 인연의 굴레(2)
당연히 본 작품에 등장하는 단체나 인물들은 현실과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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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효린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6월의 햇살은 화사했다. 찬란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 역할은 그녀의 존재감을 돋보이게 만들기 위한 조명 정도에 그친 것 같다는 착각이 일었다.
“오랜만이야, 이지후. 너는 정말 예전 모습 그대로네. 변하는 게 없는 거 같아.”
이지후의 표정은 좋은 날씨와는 사뭇 다르게 변했다.
“구효린... 정말 오랜만이긴 하네. 그런데 우리가 반갑게 인사할 사이는 아닌 거 같아. 안 그래?”
“아직도 그럴 필요는 없잖아. 그 때 그 일은 내가 한 게 아니...”
“네가 직접 하지만 않았을 뿐이지. 하지만 네 아버지의 행동, 알면서도 묵인했잖아. 그러니 결국 성예를 사지로 몰아넣은 건 너라고.”
“그건...”
“그리고 나는 사랑에 눈 먼 동현이 때문에 인천으로 들어갔다가 죽을 뻔했지. 자색 창검의 학살자 놈 때문에... 이런 과거가 있는데, 상식적으로 내가 너를 웃으면서 볼 수 있겠어?”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눈가는 촉촉해졌다. 하지만 이지후는 그녀의 상황을 봐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울지 마. 넌 울 자격도 없어. 네가 했던 행동은 결국 살인이랑 다를 바가 없어. 그것도 우리와 소중한 시간을 함께 했던 동기를...”
“그 때 일을 네가 다 알고 있는 건 아니잖아.”
“굳이 다 알 필요 있어?”
그녀가 눈물을 흘리자 그는 바로 뒤 돌아섰다. 하지만 몇 걸음 걷지 않고 후회를 하고 말았다.
‘으... 순간 화가 나서 앞뒤 생각 안하고 말했네. 효린이가 도대체 여기 왜 왔지? 만약 아이 때문이라면...’
입술을 꽉 깨물었다.
‘효린이의 감지 능력을 피할 수 없어. 언젠가는 유일신교의 눈을 피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빨리는 안 되는데.’
이지후는 아이의 테스트를 관람한 사람들에게 아이의 이능력이 환상생물형이라는 것을 소문내지 말아달라고 부탁했었다.
‘청호라도 이용해야 하나...’
구효린의 옆에 서 있던 남자, 김청호 역시 이지후와 이능력 학교 동기 사이였다. 이지후는 김청호와는 나쁘지 않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김청호가 그녀를 따라다니는 이유를 잘 알고 있기에, 어느 정도 그의 심정을 이해하고 있었다.
이지후가 머리를 긁적이며 김청호에게 말을 건네려는 순간.
“이지후, 간만에 보는데 밀린 이야기 좀 해야 하지 않겠어?”
그가 먼저 이지후를 찾았다.
***
둘은 까페의 창가 자리에 앉았다. 김청호가 바로 말을 꺼냈다.
“너 효린이한테 적당히 해라... 나름의 사정이 있었던 거 대충은 알잖아.”
비난하려는 의도로 이지후에게 이런 건 아니었다. 그저 구효린이 안쓰러워서 한 말이었다. 이지후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싸인 감정이 있으니, 알았다는 대답이 순순히 나오지 않았다.
이지후가 말했다.
“여기는 웬일이야?”
“복음자님의 명령 때문에 왔어. 안동에서 아이 한 명이 이능력 테스트를 보기 위해 올라왔다고 해서. 아이의 이능력이 정확하게 뭔지 알아내라고 하시더군.”
궁금한 사실들을 모두 캐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걸 왜 효린이까지 동원해서 알아보려고 하는 거야?”
“아! 사실 요즘 복음자님하고 효린이 사이가 아주 냉랭해. 그래서 효린이가 외부의 일을 처리한다는 명분으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중이야. 사실 기분전환에 가깝지만. 며칠 전에는 경찰청 가서 동진이 보고, 수원에서 혜영이도 만나고 그랬어.”
김청호는 유일신교 소속이지만 복음자, 구영진을 위해서 일하지 않았다. 더 정확히 표현하면 유일신교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 유일신교의 신도였다. 구효린의 최측근인 그는 오로지 그녀에게만 헌신했다.
“이상한 냄새가 나는데. 기분전환이든, 명분이든 간에 아이의 이능력을 확인하라는 업무를 내린 것은 사실이잖아.”
“음...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복음자님께서 환상생물형 이능력을 가진 어린 아이를 찾는 일에 집착하시는 거 같다는데...”
“왜 찾는지는 모르고?”
“그거까지는 잘... 그런데 왜 이렇게 관심을 가져? 뭔가 있는 거 같다.
이지후는 유리잔을 흔들었다. 그러자 얼음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부탁 하나만 하자.”
이지후는 그에게 아이에 대한 이능력을 그저 동물형 이능력이라고 말해달라고 했다. 자신이 그 아이를 입양했다는 이야기도 꺼냈다.
그러자 김청호가 놀란 얼굴을 했다.
“그럴 줄은 또 몰랐네. 그럼 이제 명경이랑 결혼하는 건가?”
“다 그 소리군... 모두가 다 똑같아. 나는 그런 획일적인 사고를 하는 사회를 지양하지.”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나는 결국에는 너희 둘이 결혼하는 것에 돈 걸었다고.”
“흥! 너나 효린이 좀 그만 따라다니는 건 어때? 보답 받지 못 할 일이라는 거 학교 다닐 때부터 잘 알고 있었잖아.”
김청호의 입매가 부드러워졌다.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이었다.
“나는 아가페적인 사랑을 지향해서 말이지.”
“그거야 말로 이상한 소리지. 남녀관계에 욕망 없는 사랑, 에로스 없는 사랑... 난 안 믿어. 이 이야기도 수십 번은 한 거 같네.”
그가 미소를 잃지 않고 말했다.
“하여간 너 그렇게 아쉬운 주제에 효린이한테 막 나간 거야? 효린이가 너 도와줄 거 같아?”
“응. 확실히.”
“이렇게 대놓고 단정하니 당황스럽네. 왜 이리 자신만만해?”
“요즘 효린이가 아버지랑 사이가 안 좋아서 동기들 만나고 다닌다고 했지? 그리고 오늘은 나를 찾아왔고. 그 의미가 뭐겠어?”
“그리워하고 있는 거겠지? 그 시절을, 그 때의 그 관계를.”
“동시에 기대감을 가지고 있어서지.”
김청호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커피를 한 입 마시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이지후가 한 말의 의미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구효린은 그와의 관계를, 더 나아가서는 강동현과의 관계를 개선시키길 원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의 명령을 어기면서라도 자신의 부탁을 들어줄 것이라는 것이 이지후가 한 말의 요지였다.
“하지만 너는 효린이를 잘 대해줄 생각이 없지.”
“대답 안 해도 되지?”
“아까 효린이는 네가 변한 게 없다고 했는데... 꼭 그렇지도 않네. 효린이를 이용해먹기만 하겠다는 거잖아. 너무 매정해...”
“지켜야 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때로는 악당이 될 때도 있어야지.”
대화를 마친 이지후는 아이스크림을 사서 아이에게로 갔다. 아이가 아이크림을 덥썩 물자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맛있어?”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아이는 점점 감정표현이 풍부해지고 있었다. 아직 말은 못 했지만 소리는 내기 시작했다. 점점 더 상태가 나아질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지후는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다. 기억이 다 돌아오면 아이가 자신의 부모님이 붙여준 이름을 떠올릴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것을 존중해주고 싶었다.
그늘 아래에 있는 나무 의자로 갔다. 아이를 앉힌 후 말했다.
“너 이제 학교도 가야 되는데... 아직은 무릴 테고. 대신 공부를 해야 돼.”
“아우아우.”
이지후가 웃었다.
“공부하기 싫구나. 하긴 나도 그랬지.”
품에서 책을 꺼냈다.
“꼬마 니콜라라고 내가 어렸을 때 많이많이 좋아했던 책인데... 구해왔어. 너 읽어주려고. 너도 나처럼 이 책, 좋아했으면 좋겠다.”
아이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그의 입꼬리도 덩달아 올라갔다.
‘뭐지? 어떻게 세상에 이렇게 귀여운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는 거지? 결코 내가 입양한 아이라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니야. 이건 객관적이면서도 절대적인 진리야!’
벌써부터 팔불출 끼를 보이는 이지후였다.
***
유일신교의 본교로 돌아간 구효린은 바로 아버지를 찾아갔다. 구영진은 본인의 사무실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녀는 세종시에서 확인한 아이의 이능력이 환상생물형이 아니라는 보고를 했다.
그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그녀는 타인의 이능력을 정확하게 감지할 수 있었다. 틀릴 리가 없었다. 그녀가 알아차릴 수 없는 이능력은 외부로 발현되지 않는 특수한 종류의 능력뿐이었다. 아니면 한정된 조건에서만 드러나는 것이라든지.
구효린이 물었다.
“환상생물형의 이능력을 가진 아이를 왜 이렇게 찾으시는 거죠? 조금 이상하잖아요.”
“너는 알 필요 없다.”
“저를 이민호 그 사람하고 결혼시키려는 이유도 알 필요 없고... 대체 제가 알아도 되는 건 뭔가요? 왜 저에게는 모두 다 비밀이에요? 저는 아버지 딸 아니에요?”
평소의, 신도들 앞에서의 구영진은 화를 잘 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다소 엄하고 깐깐하기는 하지만 신도들을 따뜻함으로 보살피고, 주변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그런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만은 달랐다. 그녀는 그런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항상 참았다. 혼자 몸으로 자신을 키운 아버지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이해했고,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는 성녀라고 불리지만 그녀 역시 인간이었다. 감정이 있고, 상처를 받는...
구효린은 여태까지 쌓인 것들을 폭발시켰다. 계속해서 불만을 쏟아 부었다.
그러자 평소보다 잔뜩 화가 난 구영진은 실수로 속내를 드러내고 말았다.
“죽은 네 엄마를 살려내기 위해서야! 너 때문에 죽은...”
구효린은 충격 때문에 현기증이 일었다. 하지만 두 눈을 똑바로 뜨며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봤다.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도 아버지니까. 자신을 사랑하고 있을 것이라는...
원수를 쳐다보듯 노려보는 구영진의 눈동자가 그녀의 믿음을 박살냈다.
그녀의 입에서 차가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설마... 그러면요... 예전에 제 동기, 성예를 죽이려고 하면서까지 저랑 동현이를 연결시키려고 했던 이유도...”
“그래. 왜? 잘 못된 거라도 있어? 네 엄마를 살리겠다는 건데.”
눈을 가늘게 떴다.
“제 엄마인가요? 아버지의 부인인가요?”
“그게 무슨 말 버릇이야! 그리고 강동현을 너와 붙여주려는 것은 네 바람을 들어주기 위해서였잖아.”
“정말이었나요? 저는 사람을 죽이는 것을 바라지 않았어요.”
“어쩔 수 없는 희생일 뿐이다. 그리고 너도 당시에는 내 생각에 동의했으니까 내 명령을 도운 거잖아. 너도 똑같아... 나랑 똑같다고.”
“감정이 눈이 멀어 그런 행동을 했었네요. 하긴 아버지 딸이니까요.”
구영진이 들을 수 없도록 말했다.
“차라리 아니었다면...”
그녀는 바로 문을 나섰다. 문 앞에는 김청호와 사촌동생, 구효수가 대기하고 있었다.
참았던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청호야, 나 방으로 데려다 줄래? 혼자 걷지를 못 하겠어.”
그녀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구효수에게도 말했다.
“오랜만에 우리 귀여운 효수랑 둘이 식사라도 하려고 했는데... 오늘은 정말 안 되겠네. 미안해.”
“누나... 나는 괜찮은데...”
그는 멀어져가는 그녀와 김청호를 지켜봤다. 어렸을 때, 부모님을 잃은 그에게 구효린은 사촌누나인 동시에 엄마였다. 그리고 그 이상의 존재였다.
방으로 돌아간 그녀는 오열했다.
“아버지는 그 때부터 날 사랑하지 않으셨던 거야... 그 때부터... 단 한 번도... 나는 사랑 받은 적이 없었던 거야!”
김청호는 그녀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침대에서 울고 있는 그녀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위로의 말을 꺼내거나 하지는 않았다.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는 그녀를 달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녀가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자 등에서 푸른 날개가 생성됐다. 성스러운 기운이 방을 가득 메웠다. 천장에서 치유의 힘이 담긴 빗방울들이 쏟아졌다.
차갑지 않았다. 따뜻했다.
반대로 그녀의 몸에는 찢어진 상처가 생겼다. 상처에서는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침대보가 붉게 물들었다.
김청호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따뜻하지 않았다. 차가웠다.
그녀의 대표 이능력, 치유의 비는 그 어떤 이능력자의 치유 이능력보다 효과가 강력했고, 발동 범위가 넓었다.
하지만 대가가 필요했다. 치유의 비를 내리는 동안 그녀의 몸에는 끔찍한 고통이 새겨졌다. 어깨가, 가슴이, 팔다리가... 얼굴마저 찢겨졌다.
그녀가 대중들에게 성녀로 추앙받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이유였다.
김청호는 깜짝 놀라 치유 이능력자를 부르려 했다. 그러자 그녀가 말렸다.
“아무도 들어오게 하지 마.”
“하지만 상처가...”
그가 그녀를 꼭 감싸 안으며 말했다.
“감정이라도 제어 해. 이능력이 폭주하잖아... 네 몸이 못 견딘다고.”
그녀가 고개를 들자 날개가 한 없이 아름답게 펴졌다.
“만약 아버지와 똑같은 사람이 되면...”
김청호는 심장이 멈추는 듯했다. 그녀의 성스러운 푸른 날개가 순간 붉은 선혈의 날개로 보였으니까. 눈을 비비고 다시 보자 날개는 다행스럽게도 원래의 그 신성한 푸른색이었다.
하지만 불안했다. 바티칸에서 나온 예언의 서의 마지막 구절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네 명의 성녀가 모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면 한 명의 성녀가 다른 존재로 변하니...]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절대로 그럴 리 없어. 그게 효린이일 리 없어.’
추천과 댓글은 작가에 대한 사랑입니다! 죄... 죄송합니다.
- 작가의말
늦었습니다. 죄송해요 ㅠㅠ
요즘 계속 늦네요.
사랑 받는 아이와 사랑 받지 못 하는 구효린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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