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여섯 장님과 코끼리 (04)
“내 제자가 되어라.”
그 말의 파급력은 컸다. 장내에 있는 모든 카메라가 집중됨과 동시에 쏠리는 참가자들의 시선까지, 48명 중 첫 스카우트니 당연하다.
흐르는 적막을 깨는 날카로운 목소리.
“삼촌 제정신이야?!”
‘삼촌?’
주원의 세컨드 쪽에서 책상을 강하게 내리치며 벌떡 일어난 인형이 눈에 들어왔다. 날카로운 눈매에 매서운 안광이 깃든 앨리스가 소리쳤다.
“우리 아빠랑 약속했잖아!!!”
“앨리스, 난 네 삼촌이 아니다. 그 입 닥치도록.”
앨리스의 삼촌이라는 외침에 참가자들과 제작진 쪽이 크게 술렁였다. 표정을 구긴 라클란이 제작진 쪽을 바라보며 목을 긋는 제스처를 취했다.
“이 부분은 편집해주세요. 아무 관계 없습니다.”
“라, 라클란씨···.”
“정말이다. 크리스. 저런 그레이시의 실패작과 엮일 이유가 있겠나?”
“실패작? 일단 알겠습니다···. 다만 말씀은 조심해주세요. 그녀도 엄연한 참가자 중 한 명이니까요.”
크리스의 충고에 인상을 찌푸린 라클란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주원도 놀란 표정을 가다듬으며 눈을 감았다.
‘앨리스와 라클란 사이에 뭐가 있는 건 확실하다···. 그전에 무슨 의도일까.’
앨리스가 이상하게 엮여있다는 점은 둘째치고 후마이타 그레이시가 주짓수 명문 체육관이라 한들 이렇게 일찍 소속이 묶이는 건 좋지 않다.
주원은 앨리스와 라클란, 그리고 카메라까지 차례로 바라보며 침묵을 이어갔다.
“크레이그, 왜 고민하는 걸까요?”
“음···.”
멀리서 직접 이 순간을 담겠다는 듯 카메라를 들고 있는 PD 크레이그 옆에서 안나가 중얼거렸다. 어울리지 않게 진중한 표정을 짓는 크레이그가 침음성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저울을 재는 거야. 주원 입장에서는 당황할 만도 하지. 주짓수로 보여준 장면은 몇 번 없는데 대뜸 재능이 있다잖아.”
“하지만 무조건 수락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것도 후마이타의 라클란인데···. 꿰뚫어 본 뭔가가 있겠죠!”
“나도 모르겠어. 앨리스 때문인가? 아니야, 주원이 그런데 휘둘릴 사람은 아니야. 무슨 그림을 그리는지 확신이 안 서.”
한편 케이지 안. 주원의 머릿속도 복잡했다. 한쪽에서는 이빨을 씹으며 눈을 부라리고 있고, 반대쪽은 무덤덤하게 바라만 보고 있다.
“뭘 고민하지? 저 여자가 신경 쓰이는 거라면 걱정하지 마라. 그녀는 그레이시가 아니다. 그레이시인 척 하고 싶어 하는 것뿐이지.”
“······”
그 말에 더더욱 표정이 썩어 들어가는 앨리스에게서 시선을 돌린 주원이 라클란을 똑바로 바라봤다.
“조건. 조건이 있을 거 아닙니까?”
라클란의 재촉에도 주원에게는 주눅 든 모습이 없었다. 조용해진 장내에서 표정을 다듬은 주원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라클란이 끄덕였다.
“여기 있는 에단 터너와 3라운드 3분 스파링으로 그만한 자격이 있음을 증명하면 된다.”
‘스파링? 잠시만 이거...’
심사위원석으로 시선을 돌리자 싱글벙글한 얼굴의 에단이 글러브를 끼고 있다.
“주원 다시 한번 말하지만, 악감정 같은 건 없다?”
“그 전에, 선택권은 언제든지 저에게 있는 겁니까?”
“라클란 선생..?”
<나야. 그래, 하이안 그레이시 바꿔봐>
주원의 물음에 에단이 라클란을 바라봤다. 어차피 정해진 결과라는 듯 라클란은 그레이시 일가와 통화를 하며 손을 들어 상관없다는 제스처를 보냈다.
“음, 그런 거 같네. 잠깐, 너 설마 거절할 생각이야? 1대1 코칭이 얼마나 큰 기연인 줄은 알지...? 지금 할 스파링도 그냥 참가자들 납득 시키려는 의도라고.”
“뭐, 그렇겠죠.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해주세요.”
무대는 빠르게 정리됐고 주원과 경기를 했던 딜런이 창백해진 표정으로 우물쭈물 다가왔다.
“그···. 죄송했습니다. 라클란 선생님이 점 찍어두신 분인지 몰라보고···.”
“······ 그런 거 아닙니다. 고생했어요.”
딜런의 180도 달라진 조심스러운 태도에 주원이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그 말을 끝으로 후다닥 내려가는 딜런의 뒷모습은 초라해 보이기만 하다.
“준비됐어?!”
“운이 좋네요.”
“그러게, 벌써 스카우트라니 저 선생이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에단의 말과 다르게 주원은 스파링 자체에 의미를 두고 있었다. UFC 미들급 전 챔피언과의 스파링 경험의 가치는 주원에게 높았기에.
[에단 터너(Ethan Turner)]
[레슬링 성취도: 83%]
[삼보 성취도: 81%]
[무에타이 성취도: 80%]
[주짓수 성취도: 79%]
[최주원과 예상 경기 결과: 14%의 확률로 최주원의 KO 승리]
‘이게 챔피언 수준인가.’
처음 에단을 봤을 때 비치는 숫자에 얼마나 놀랐던가. 모처럼만 같은 강자와의 스파링은 실력 향상의 지름길.
애초에 평균 종목 성취도가 80%인 에단과의 스파링 경험은 어떤 방식으로든 반드시 도움이 된다. 빠르게 판단을 마친 주원이 어깨를 돌려 풀었다.
“적당히 봐주시면서 하실 거죠? 체급 차이도 있는데.”
“음, 그건 그래야겠지. 적당히 힘 조절하면서 할게. 넌 딜런이랑 경기도 했으니까.”
전력 노출 따위가 문제가 아니었다. 언제 올지 모르는 기회일 터, 지금까지 쌓아온 탑이 얼마나 견고할지 확인할 절호의 기회가 눈앞이다.
어쩌면 정체되어있는 유도 70%의 벽을 깰지도 모른다.
주원이 빙긋 웃으며 심판을 향해 준비됐음을 알리자 크리스와 다니엘이 마이크를 잡았다.
-준비되셨으면 시작할게요.
-기대하겠습니다 주원.
“3분 3라운드, 라운드 별 브레이크 타임 1분입니다-
파이트!!!”
가볍게 주먹을 맞댄 주원은 빠르게 떨어졌다. 앞, 뒤 발은 직각이 되도록, 무릎은 적당히 굽힌다.
탐색전의 10초는 1초처럼 빠르게 흘러갔다. 에단은 오른손잡이, 오소독스 스탠스다. 반면 주원은 사우스포, 서로 앞 손이 같은 궤적을 그리는, 동시에 부딪히는 형태.
-쐐액!
선공은 주원이 가져갔다. 2미터 남짓한 거리에서 순식간에 스텝을 밟았고, 미끄러지듯 에단의 눈앞에 나타난 주원.
마르세 두 번. 잽, 스트레이트.
하지만 에단은 베테랑답게 주원의 원 투를 고개 숙여 피했다. 동시에 팔을 크게 휘둘러 오른손을 던진다.
주원도 침착하게 다시 롱백.
카운터가 들어오는 순간 멀찍이 거리를 벌리는 주원을 보고 주먹을 회수한다. 에단이 입을 오물거렸다.
“진짜 빠르네.”
80%라는 성취도는 말 그대로 성취도일 뿐이다. 속도를 중심으로 운영하는 전술과는 별개의 영역. 에단이 까다롭다는 듯 고개를 털었다.
다시 한번 블링크, 눈 깜짝할 새 거리를 좁힌 주원의 앞 손 잽에 에단의 턱이 흔들린다.
‘큭!’
-붕!
또다시 허공을 가른 카운터, 분명 케이지 중앙을 먹고 압박하는 이는 에단 본인일 텐데 주원을 잡을 수가 없다.
직접 맛보는 그의 거리 조절은 기묘했다. 감각적으로 치고 빠지는 느낌이 아닌 단순 스텝이 너무나 빨라서 손이 닿지도 않는다.
-파박
순간이동에 가까운 스텝을 밟아 다가오는 주원. 앞 손 잽과 뒷손이 차례로 날아온다.
‘이번엔 따라간다.’
피하지 않고 가드를 들어서 막아낸 에단. 곧바로 반격할 심산으로 멀어지는 주원을 쫓아 앞으로 발을 뻗는 순간
-붕!
-뒤돌려차기? 갑자기 킥이 나왔어요. 다니엘!
-태권도 군요. 생각해보니 주원의 팀원 중 한 명이 유진 아닙니까!
[태권도 : 뒤돌려차기 : 44%]
“깜짝이야! 자꾸 안 쓰던 거 보여줄래?”
순간적으로 명치 부근으로 파고드는 주원의 왼발에 에단은 허겁지겁 브레이크를 밟아 피해냈다. 덕분에 꼴사납게 옆으로 넘어진 에단이 빠르게 일어나며 투덜거렸다.
아무 말 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스텝을 밟는 주원. 에단이 눈을 고쳐 뜨며 가드를 들어 올린다.
‘태권도까지... 무시할 수준은 아니다. 그렇다면...’
-척!
이번에는 에단이 먼저 다리를 놀렸다. 접근하기 무섭게 역시나 견제성 원 투를 던지고 멀리 빠져버린다. 눈두덩이에 스트레이트를 얻어맞았지만 예단의 눈이 빛났다.
“와, 주원이 저 정도였어?”
“나도 훈련 좀 열심히 해야 할까 봐···.”
“에단 씨가 봐주는 거잖아. 저 정도 가지고 뭘.”
“봐주는 게 아니에요. 시력이 안 좋으신 건가요?”
한편 관중석에서도 경악에 찬 참가자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비아냥거리는 참가자의 말에 또박또박 대꾸하는 외침이 울려 퍼졌다.
“뭐? 너 뭐라고 그랬-”
“레이첼, 제대로 설명 부탁한다. 에단이 봐주는 게 아니란 말인가?”
그녀의 대꾸에 발끈한 참가자는 옆자리에서 중얼거리는 미하일을 보고 하얗게 질려 입을 다물었다.
“지금 주원 씨 경기 운영이 좋아요. 정확히 아는 거예요. 본인 발이 에단보다 빠르다고 확신하는 거죠. 저렇게 과감하게 움직이는 거 보면 오만이 아니라 자신감 일 텐데 대단하네요.”
“음...”
“앗, 이제는 모션 페이크까지. 에단 씨 머릿속이 복잡하겠어요. 피하고 접근하자니 백스텝이 너무 빠르고, 그냥 막으면서 붙으면 킥이 날아오죠.”
“그래도 에단은 챔피언이었다. 생각이 있을 거 아닌가.”
주원이라는 참가자는 날이 갈수록 성장하는 것 같았다. 미하일이 주먹을 움켜쥐며 미간을 좁히자 레이첼이 웃으며 대답했다.
“에단이 마음먹고 덤비면 물론 구석으로 몰든 잡든 하겠죠.”
“체급 차이가 있으니까.”
“맞아요. 그걸 가지고 봐준다고 하진 않겠죠? 그리고 그것도 쉽지 않아 보여요. 지금 주원 씨 경기 운영은 그 이상으로 정교하다고요. 이건 마치...”
마치 수백 가지 경기를 보고 하나하나 분석한 전문가의 느낌. 고개를 저은 레이첼이 말끝을 흐렸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 가정이 사실일 리는 없다.
주원은 아직 어리고 MMA 입문 시기도 늦다고 들었기에. 레이첼의 눈동자에 주원의 스텝이 가득 찼다.
-땡!!!
“앉아 주원아. 태권도라니, 아끼던 카드 아니야? 아니 그게 뭐가 중요하니. 그것보다 태권도 좋지 않냐? 흐흐.”
의자에 몸을 기댄 주원은 너무 집중한 나머지 따끔거리는 눈동자에 생수를 쏟았다. 이 순간만큼은 유진의 호들갑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분명해. 속도만큼은 80의 성취도까지 따라갈 수 있어.’
펜싱 스텝을 익히기 전이었다면 30초도 못 버티고 얻어맞았을 것이다. 에단의 까다롭다는 기색 또한 거짓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주원의 속도감에 당황했다는 것이다.
‘1라운드는 속도로 비비긴 했는데······. 2라운드가 문제네...’
-땡!!!
2라운드를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다가오는 에단은 분위기부터 달랐다.
-파박
케이지 중앙에서 뚜벅뚜벅 거리를 좁히는 에단을 본 주원은 펜싱의 롱백을 밟았다.
‘뭐야, 안 멈춘다고?’
백스텝을 치다가 마르세를 밟아 잽과 스트레이트를 날렸지만 한 치의 타협도 하지 않겠다는 듯 헤드 무빙과 함께 달라붙는 에단. 주원은 크게 호흡하고 뒷 다리를 들었다.
-부웅
허공을 가르는 주원의 뒤차기. 어느새 케이지의 벽에 등이 닿은 주원을 본 에단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었다. 표정을 구긴 주원은 직각으로 틀었던 뒷발을 수직으로 밟았다.
‘들켰네.’
1차원의 선. 전 후진에 성능을 몰아주는 펜싱 스텝 특성상 2차원의 x축으로 움직이려면 직각인 뒷발로는 무리다.
구석에서 빠져나오고자 사이드 스텝을 밟자 현저히 느려진 주원이다. 그 순간 돌아나가는 주원의 시야에서 에단이 사라졌다.
‘이런.’
어느새 프러포즈하듯 주원의 양다리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에단의 모습.
-텅!
쭉 늘어난 뒷다리를 박차고 추진력을 얻은 에단의 몸통이 주원의 눈에 미사일처럼 날아온다.
백스텝을 밟을 겨를도 없이 주원의 오금이 에단의 손아귀에 움켜 잡혔다.
-쾅!!!
-환상적인 태클이네요. 하나도 녹슬지 않았는데요?
-그렇군요. 주원이 사이드 스텝을 밟을 때 자세가 잠깐 무너졌습니다. 그렇다는 말은...
[레슬링 더블렉 태클 : 89%]
미친 점수에 놀랄 여유도 없었다. 순식간에 바닥에 깔린 주원은 다리를 벌려 에단의 허리를 껴안았다.
동시에 팔을 뻗어 에단의 뒷덜미를 끌어안아 나무를 껴안는 매미처럼 달라붙었다.
-에단 씨! 거기까지만 부탁해요!!
케이지 너머로 들려오는 케이지 목소리에 후속을 준비하던 에단이 멈췄다.
“조금 놀랐어. 진심이야.”
바닥에서 일어난 에단이 기분 좋게 웃고는 주원의 머리칼을 헝클어놓았다.
“유도가 베이스라 그런지 주짓수 적인 대처도 제법인데? 일단 달라붙어서 체중을 빠는 게 정석 중의 정석이야. 라클란 선생 말이 맞았나?”
그 말을 끝으로 에단은 케이지 밖으로 나갔다. 주원의 눈에 흐릿하게 떠오르는 에단의 태클. 반응할 수도 없는 것이 대처하니 까다롭기 그지없는 완벽한 기교였다.
머릿속에서 재생되는 조금 전 스파링. 뭔가 잡힐 듯 말 듯 하다.
-잘 봤습니다. 좋은 스파링이었어요.
심사위원석에서 박수를 보낸 다니엘이 마이크를 들었다.
-이 정도면 모두가 납득할 수 있겠군요.
-그럼 주원 씨는 후마이타로-
“저는 라클란 씨의 제자가 될 마음이 없습니다.
크리스의 말을 끊고 들려오는 주원의 대답에 모두가 침묵했다.
“저는 아직 어디 소속될 생각이 없습니다.”
-뭐?!
“무, 뭐?!”
세컨드 석에 앉아있던 앨리스의 놀란 목소리, 동시에 눈에 불을 켜고 노려보는 라클란에게서 시선을 돌린 주원이 주눅 든 기색 없이 가슴을 폈다.
“그 대신 에단 씨와 비공개적으로 스파링할 기회를 주십시오.”
-그건 어렵진 않은데······.
라클란이 붙잡은 책상이 덜덜 떨리는 모습을 본 크리스가 말끝을 흐린다.
-으하하! 주원 너도 재밌었나 보다?
반면 에단은 장내가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웃으며 말했다. 곧이어 제작진이 심사위원석으로 다가와 에단의 귓가에 대고 소곤거렸다.
-일단, 주원. 네 조건은 긍정적으로 생각해볼게.
“아니요, 확답을 받아야 합니다.”
-으잉?
에단이 황당한 표정으로 괴상한 소리를 내자 주원은 관중석을 향해 턱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전력 노출이 많았습니다. 태권도도 스텝도 이렇게 많이 보여줄 생각은 없었습니다. 앞으로의 미션을 생각하면 저에게도 보완할 기회를 주셔야죠.”
앞뒤가 딱 맞는 타당한 명분, FFC 체육관에 적막이 흘렀다. 주원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어지고 입가를 비틀어 올리며 말했다.
“분명히 경기 전에 저에게 선택권을 주신다고 했잖아요? 라클란 씨도 동의 하셨습니다. 이건 아직 유효겠죠?”
-그, 그럼 에단 씨와 몇 번 정도 스파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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