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실력 좋은 복서와 한판 (01)
증축 한지 안 되어 세련되어 보이는 체육관, 체육관의 가운데에는 팔각형의 케이지가 보인다. 그 바로 앞에는 긴 책상을 앞에 두고 남자 두 명이 앉아 있었다. 커다란 방송용 카메라 화면 속에 그 둘이 담긴다.
“와~ 형님들 시청자 6만명 뭐야?! 대회 우승 상금은 100만원 이구요! 상금은 저 통영폭격기, 항준 그리고 명구 세 명이 준비했습니다잉.”
사투리를 쓰는 걸걸한 목소리의 남자가 카메라를 바라보며 말했다. 곧바로 카메라맨에게 손짓하며 옆을 바라보며 말한다.
“토너먼트 형식으로 진행되고, 해설은 전 종합 격투기 프로 강동현씨 모셨습니다! 인사 주시죠 선생님!”
이에 짧은 스포츠 머리에 순해 보이는 인상의 남자가 대답한다.
“안녕하십니까, MMA 전 프로 강동현입니다. 통영 폭격기 형님이랑 좋은 해설 해보겠습니다.”
이영호와 전 프로라고 밝힌 강동현이 카메라를 보며 차례로 인사하자, 아시아TV의 시청자들의 반응은 과연 뜨거웠다.
[와 무슨 강동현이 나오냐]
[저 형 언제 은퇴했음?]
[통영폭격기 출세했네, 동현갓 옆에도 앉아보고]
[아 이영호 대가리 치워!!!]
폭풍처럼 올라가는 채팅 창을 본 이영호는 만족스럽게 웃고는 카메라맨을 향해 손 짓을 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자! 각설하고 32강 첫 경기 바로 보시죠. 지금 화면에 들어오는 저 분은 본업이 보디빌더 랍니다. 한 180cm는 넘어 보이고, 팔다리도 상당히 길어 보이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동현 선생님?”
“흠··· 사실 격투기라는 게 근육으로 하는 건 아니긴 한데, 근력의 측면에선 확실히 유리해 보이긴 합니다. 그래도 반대쪽 선수도 체급이 낮은 건 아니라···.”
둘이 해설을 이어나가는 중, 보디빌더라 소개된 남자에 비교하면 부피가 작지만 탄탄해 보이는 몸을 가진 남자가 반대쪽에서 어깨와 목을 풀면서 케이지 앞으로 섰다.
“자, 방금 들어온 친구는 최주원이란 친구입니다. 저 친구가 이제 저한테 정타 한 방을 먹인 친구거든요. 복싱이 베이스인 것 같은데 장난 아닙니다잉. 어떻게 보십니까 선생님?”
“복싱이라···. 몸무게가 10키로는 차이 나보이네요. 저 보디빌더분이 어떤 무술이든 하나라도 제대로 배웠다면 주원 군이 힘들어 보이네요.”
이영호에게 정타를 먹였다는 말을 들은 강동현이 살짝 놀라며 흥미로운 눈빛으로 주원을 바라보며 대꾸했다. 이영호도 과연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잇는다.
“그럼 시청자분들, 경기로 확인하시죠! 자 두분 자리에 서시고···.”
““파이트!!!””
<황철수>
[종합적 분석 결과]
[태권도 성취도: 15%]
[독자-최주원과의 경기 예상 승률: 80%로 최주원의 TKO(선수가 경기를 지속할 수 없다고 판단되는 경우) 혹은 서브미션 승리]
최주원은 스텝을 케이지 중앙을 중심으로 반원을 그리며, 상대를 바라봤다.
나름 익숙해진 눈앞의 푸른 글씨들. 상대는 유치원생부터 태권도 도장을 다니는 한국인답게 15점의 태권도 성취도를 가지고 있다.
몸무게와 근육량이 스펙이 되는 MMA 룰에서 못해도 10kg 정도 무거워 보이는 상대. 하지만···.
‘보디빌더라 그런지 체지방량이 적다. 그렇다면...’
주원은 여유롭게 미소 지으며 황철수가 중구난방으로 날려대는 주먹을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한 달 동안 훈련해왔던 체력을 뽐내듯 스텝을 밟아댔다.
-붕... 붕붕! 홰액!
-쒹..! 퍽!!
기습적인 잽을 얻어 맞은 황철수는 머리에 열이 올라 미칠 것만 같았다. 미꾸라지처럼 자신이 던지는 주먹은 전부 얄밉게 피하는 데다가 가끔 날아오는 잽 때문에 무작정 달려들기가 힘들었다.
-땡땡땡!!!
종이 울리자 자리로 돌아가면서 씩씩 연신 숨을 헐떡이는 황철수, 반면 지친 기색을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주원을 보면서 강동현이 입을 열었다.
“최주원 군이 경기를 상당히 영리하게 운영하네요. 아웃 복싱의 정석이에요.”
“선생님, 하지만 이대로는 주원 동생이 결정타를 먹이기는 힘들어 보이는데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주원 군의 맷집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으나, 체급 차이 때문에 정타를 한두 대만 허용해도 황철수 씨에게도 기회는 있어요. 경기 끝까지 봐야겠습니다.”
-땡!!!
숨을 고른 황철수는 작전을 바꿨는지 어딘가 신중해 보이는 모습으로 양손을 자기 턱 가까이 붙이고는 무작정 주먹을 날려대는 대신에···.
-저벅저벅
앞발과 뒷 발을 차례대로 전진시키고, 고개를 성큼성큼 앞뒤로 움직이면서 최주원을 몰아갔다. 마구잡이로 주먹을 휘두르는 대신 정타 한 대를 제대로 먹이겠다는 의도로 보였다.
‘오··· 코너에 몰겠다는 건가?’
주원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황철수가 고개를 앞으로 움직일 박자에 맞춰 반 박자 빠르게 뒷 발을 굴러 비틀었다.
-탁!
그 반탄력을 엔진 삼아 자연스럽게 번개처럼 꽂히는 스트레이트에 화답하듯
-빡!!!
경쾌하게 퍼지는 수박 깨지는 소리. 강한 충격에 황철수의 입에서 마우스피스가 빠지면서 휘청거렸다. 이에 주원은 잠깐 멈칫 스텝을 멈춘다.
[아웃복싱 스트레이트 숙련도 : 48%]
‘뭐야, 평소 스파링 때 보다 높다. 왜지? 완벽한 타이밍이어서?’
“주원 군이 놀라운 매너를 보여 주네요. 경기를 끝내버릴 찬스였는데 말이죠.”
“그러게 말임다~, 전에도 느꼈지만, 주원 동생은 너무 정직하다니까?”
[와, 저걸 참네...]
[오우쉣? 보소]
[철수형···. 다시 징이나 치러가자···]
[아직 모른다. 철수 형이 한 대라도 맞추면 이길지도]
경기가 재개하고 시청자들이 감탄하던 그때, 카메라에 담긴 최주원의 신형이 푹 꺼졌다. 순간 황철수의 시야에서 사라진 그는 앞으로 뻗은 왼발의 반탄력으로-
-쐐애액!
왼 주먹을 쓸어 올리듯이 감아쳐올린다.
-퍽!!!
“커허억!!...! 쿠훅... 훅··· 훅... 캑캑!”
황철수는 피격 부위를 감싸주며 앞으로 고꾸라져 고통스러운지 끅끅거렸다.
“리···! 리버 블로우 제대로 들어갑니다! 생각도 못 했네요!”
“저건 못 일어납니다잉! 주원 동생이 상대가 보디빌더라는 점을 역으로 활용했네요!!!”
강동현이 조금 감탄한 듯 큰 목소리로 마이크를 잡았다. 이영호도 흥분한 목소리로 맞장구쳤다. 그러자 강동현이 살짝 나무라듯 말한다.
“그렇게 설명하면 어떻게 알아요 영호 씨. 시청자분들 방금은 리버 샷(Liver shot)이란 펀치인데, 말 그대로 상대를 주먹으로 오른쪽 복부에 있는 상대 간을 후려치는 기술입니다.”
“프로 선수들은 참아낼 수 있겠지만, 철수 형님은 체지방량이 너무 낮아서 간이 흔들리는 충격을 그대로 받은 겁니다! 다시 한번 보시죠!”
[와··· 황철수를 한 번에 보내네]
[저 정도면 프로 아님? 아까 봐준 것도 그렇고]
[황철수 징 ON]
[최주원! 최주원! 최주원!]
주원은 담담한 기색으로 글러브를 빼고 황철수와 악수를 나누고 가볍게 안았다. 신이 난 듯 카메라맨의 등을 밀며 들어온 이영호와 강동현은 마이크를 건네며 입을 열었다.
“기분이 어때 동생? 너 완전 우승 후보인데?”
“뭐... 경험 없는 분 한 판 이겼을 뿐인데요. 그래도 기분은 좋네요.”
“이야 겸손하기도 하셔라. 좋다, 다음 경기도 자신 있다는 거지? 그럼 시청자분들께 소감 한마디!”
소감이라. 살짝 고민한 최주원은 이내 고개를 들고 말한다.
“···하하, 그럼···. 사실 제 장기는 복싱이 아닙니다.”
“오오! 허세 같아도 멋있었습니다.”
[에이... 그건 좀]
[자세가 전형적인 복서 아님?]
[그래도 이기고 말하니까 멋있다]
믿지 못하는 듯한 시청자들의 반응을 본 주원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한마디 했다.
“뭐, 파이터는 언제나 케이지 안에서 증명하는 거죠.”
***
다음날 학교에 도착해 강의실에 들린 최주원은 눈을 동그랗게 뜰 수밖에 없었다. 마치 그를 기다렸다는 것처럼 수많은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머리를 한차례 긁적거린 주원은 멍청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제가 뭐 잘못했나요?”
“후배님 저희 어제 후배님 방송 봤어요!”
“주원아 넌 체대로 빠져야 하는 거 아니냐?”
“주원이 어제 멋있더라. 그런 근육몬을 상대로 한 방에 퍽!.”
선배 동기 할 것 없이 뜨거운 반응이 터져 나오자, 오히려 주원은 당혹스러웠다. 예상보다 이영호의 방송이 인기가 있었나 보다. 주원이 조금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부모님도 유튜브 같은 걸로 보는 건 아니겠지?”
정규 대회도 아닌 사설 대회 32강에서 한 번 이겼다 해서 부모님에게 격투기 선수가 되겠다고 말할 수도 없었고, 순순히 허락할 만큼 호락호락한 부모님이 아니기에 아직은 숨겨야 할 때였다.
“하긴, 너희 엄마가 알면 너 그날로 죽음이긴 하겠네···.”
김기홍이 안쓰러운 얼굴로 주원의 등을 툭툭 치며 말하자 쓴웃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래? 엄마가 그렇게 무서워? 고작 개인 방송에서 하는 작은 대회이잖아. 재미 삼아 나갈 수도 있는 거지.”
주원의 표정을 본 정하연은 의문스러운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버지가 체육관 관장인 그녀는 당연히 주원을 이해 못 하리라.
“별거 아니야. 밥이나 먹으러 가자. 나 영양 보충할 시간이네.”
주원은 씁쓸한 기색을 숨기고 말을 돌렸다. 구내식당 한구석을 자리 잡은 주원 일행. 유쾌한 척 말한 주원이었지만 입에 넣은 숟가락을 잘근잘근 씹어댄다. 정하연도 반찬을 깨작거리다 젓가락을 내려놓고는 입을 열었다.
“주원이 너 좀 멋있는 것 같아.”
“푸흐흡! 콜록콜록”
“내가? 갑자기 왜?”
맞은 편에서 분무기처럼 음식물을 분사한 김기홍은 뜨악한 표정으로 정하연을 바라봤다. 주원 역시 기홍이 얼굴에 튀긴 침을 닦으면서, 무슨 말을 하냐는 듯 의문을 표했다.
그런 둘을 보며 피식 웃은 정하연은 말을 이어나갔다.
“넌 꿈이 확실하잖아. 매일 아침 운동하고, 저녁에는 곧장 체육관으로 가고. 영문학과 온 것도 외국에 있는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서고···.”
정하연의 진지한 목소리에 최주원도 수저를 내려놓고 그녀를 바라본다. 시선이 닿은 그녀가 살짝 웃으며 계속해서 말한다.
“그런데 난 아니거든···. 운동도 좋아하지만 꿈은 아니었고, 음악도 뭐 질려버리고. 그냥 공부라도 열심히 하자는 마음에 여기까지 온 거거든.”
천장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는 하연을 보며 주원도 생각에 잠겼다.
최주원 또한 회귀 전에는 현실에 타협하여 격투기 선수라는 꿈을 포기했었기에 섣불리 입을 뗄 수 없었다. 그런 그가 어떻게 그녀의 고민을 가볍게 여길 수 있을까.
“그냥 받아드리면 안 돼?”
“응?”
“...?”
멍청한 표정을 짓던 둘을 상념에서 깨운 것은 김기홍의 말이었다. 그는 이해를 못 했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렇잖아, 세상에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돈도 벌고 즐겁게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 어디서 봤는데 대부분 사람은 죽을 때까지 진정으로 뭘 하고 싶었는지 모른데. 그런 건 노력도 노력이지만 그냥 운인 것 같아. 그리고-”
“뒷받침 없이는 굴러온 운도 못 잡을 테고.”
주원은 이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맞는 말이야. 언젠가 늙어 죽을 때, 사실 내가 평생 걸어온 길이 재미없는 길이었다고 느낄지 누가 알겠어. 애써 재미있는 길, 나한테 맞는 길이라고 스스로를 속여왔을지도 모르겠고.”
최주원 또한 그랬다. 격투기 전문 유튜버라는 직업을 가졌고, 자신이 격투기 선수가 되지는 못했지만 가장 그들에게 가까워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 길은 주원에게 후회와 질투의 감정을 가져다줄 뿐이었다.
“그러게, 이제야 밥이 좀 들어가는데?”
정하연도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의 말에 피식 웃음을 흘린 김기홍은 대꾸했다.
***
-팡...! 팡! 팡!!
늦은 저녁, 텅 빈 체육관에는 오늘따라 더 크게 샌드백 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샌드백 너머에는 정찬승 관장이 서 있었고, 말없이 펀치들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평소보다 컨디션이 좋아 보이네?”
-팡! 팡팡!!
“고민 중 하나를 푼 것 같아서요”
“그럼 다른 고민이 남았다는 건데···. 말해보려무나.”
이에 멈칫, 최주원은 샌드백에 날리려 하던 주먹을 거두고 정찬승을 바라보며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종합 격투기 룰로 실력이 좋은 복서를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정찬승>
[종합적 분석 결과]
무에타이 성취도: 69%
레슬링 성취도 : 69%
독자-최주원과의 경기 예상 승률: 68%로 최주원의 TKO 패배
‘내가 관장님한테 질꺼라고···?’
납득하기 힘들었던 주원이 속으로 중얼거리자 이어서 푸른 글씨가 떠오른다.
-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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