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협박과 환대
자리모로국 읍차 국융이 해구의 군막 안으로 들어와 해구에게 예를 표했다. 해구도 일어나 예를 표했지만 정중한 기색이라고는 없었다. 게다가 의자에 다시 앉고는 한껏 기대고 하인 부리듯 손가락을 까닥거리면서 내밀어 앉기를 권했다.
“앉으시지요, 읍차님.”
국융은 잠시 이런 무례한 자가 있나 하고 말하는 듯 해구를 쏘아보고 마주 앉았다.
“좌평 각하께서 저를 만나자고 하셨다고요? 자리모로국의 방침은 신지-읍차 회합에서 결정된 그대로요! 백제국을 도와야지요... 달솔 진남 장군께서 말씀을 드렸을 텐데요.”
해구가 만면에 웃음을 띤 채 말했다.
“흠... 그런가요? 본심이 아니었던 것으로 아는데 말입니다...”
국융이 헛기침을 하며 눈을 흘겼다.
“으흠! 흠! 그거야... 전세가 워낙 불리했으니 우리나라의 살 길을 찾으려 했던 것뿐이오. 하지만 저와 자리모로국은 소국 회합의 최종 결정을 절대 어겨본 일이 없소! 전폭적으로 백제국에 협력할 것이외다!”
해구는 여전히 웃음을 띠고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고는 국융의 잔에 차를 따랐다.
“이 차가 아주 귀한 찹니다... 송나라에서 아주 비싸게 들여왔지요. 천천히 음미해보세요.”
국융이 찻잔에 손을 가져가자 해구가 말했다.
“회합에서 길이 남을 명연설을 하셨다고요? 소국 우두머리 절반이 고구려 편에 설까 고민할 정도로... 달솔 진남 장군이 감화를 받아 ‘무릎을 꿇고’ 읍차님께 사죄를 드렸다지요... 백제국의 신료들 같으면 그런 발언을 한 자는 당장 반역죄로 추포하여 본인은 물론이고 가족까지 목이 달아났을 텐데 말입니다! 하하하...”
국융은 찻잔을 든 손을 덜덜 떨었다. 해구가 재촉했다.
“들고만 계시지 말고 드시지요. 차가 식습니다. 이런, 조금 흘리기까지 하셨군요, 쯧쯧...”
국융이 마지못해 여전히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입에 갔다 대려고 할 때였다.
“소국 회합이 고구려 편에 서자고 최종 결정을 내렸으면 읍차님께선 당연히 따랐을 테지요! 앞장을 섰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럼 제 칼은 당연히 읍차님의 목부터 목표로 삼았겠지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국융은 찻잔을 놓고 의자에서 내려앉으면서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좌평 각하! 다시는 절대로 그런 마음을 먹지 않겠습니다!”
해구는 일어나서 국융에게 다가와 일으켜주려는 몸짓을 하면서 작게 말했다.
“그러게, 저에게 당해보시지도 않고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까, 하하하...”
꿇어앉아 있는 국융을 놓아두고 해구는 뒷짐을 지고는 군막 안을 거닐면서 말을 이었다.
“그건 그렇다고 칩시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이틀 전에, 진왕실의 귀중품을 수송하던 백제국 별동대가 괴한들의 습격을 받아 그 귀중한 물건을 빼앗겼습니다. 괴한들이 누구였는지는 아직 모르죠. 그런데 습격을 받은 곳이 자리모로국에서 한 20리도 떨어지지 않은 산속이었소!”
국융은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해구에게 손사래를 치며 빌 듯 말했다.
“아니오! 우리는 아닙니다! 아니에요--”
해구는 잠시 심각한 표정으로 국융을 노려보더니 누그러뜨리고 말했다.
“압니다. 자리모로국에서 한 짓이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앞으로 어떻게 하시냐에 따라서 아무리 부정하셔도 이 사건은 백제국에 반역할 의도를 가진 소국 자리모로국과 그 우두머리의 소행으로 죄를 묻게 될 수도 있습니다!”
“어이쿠.. 좌평 각하! 하명하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물자, 백성 필요하신 대로 모두 바치겠사오니 제발 누명을 씌우지는 말아주십시오... 흑흑...”
국융은 조금 전 해성이 빌던 모습 그대로 해구에게 싹싹 빌었다. 해구는 웃으며 국융에게 다시 다가가 일으켰다.
“자자, 일어나시지요. 소국의 1인자되신 체통을 지키셔야지요.”
국융은 눈물을 흘리며 우물쭈물 일어났다. 그의 팔을 받쳐 일으키는 해구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웃음이 가득했다. 그는 일어난 국융의 정수리 쪽, 기다란 봉이 달린 관모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관모를 누가 내렸는지, 무슨 의미인지 항상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이제 저 강 건너편 웅진성으로 같이 가시지요! 상좌평 문주 장군과 사로국의 구원군이 거의 당도했다고 합니다. 하하하...”
오후, 웅진성의 남문 앞 평지에는 해구와 진남을 필두로 백제국 신료와 장수들, 신지-읍차 회합에 참석했던 소국 우두머리들, 병사들이 도열해 사로국의 구원군 입성을 기다렸다. 웅진성과 주변 마을의 백성들도 몰려 나와 맞이할 준비를 했다.
이윽고 사로국 군대에 앞서 그들을 인도한 목만치의 축자군 병력이 동쪽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백성들은 가야 연맹의 군사들과 닮은 듯 좀 더 가벼운 차림과 무장을 한 축자군에 호기심어린 눈빛을 보내고 있었지만, 그 뒤로 훨씬 많은 사로국 병사들의 행렬을 보자 더 특이한 무장과 옷차림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분명히 같은 종류의 칼과 창, 활을 들고 있었는데 그 빛이나 재질, 모양이 백제군의 무기와 확연히 달랐다. 또 고구려군과 비슷한 투구를 쓰고 비늘갑옷을 입고 있었는데 투구의 모양, 비늘의 얽힘과 재질이 달랐다. 그들을 이끄는 문주왕자가 백제국 갑옷을 입고 있었지만 눈길을 받지 못할 정도였다.
서쪽 바다 건너 중원과 교류가 많은 해안 소국들의 대표들은 비슷한 모습의 서역인들을 더러 본 적이 있기 때문에 덜 놀라는 반면 대부분의 소국 우두머리들도 사로국 병사들로부터 눈길을 떼지 못했다. 130년 전 그리고 230년 전 등 두 번에 걸친 사로국 상층부의 격변이 만들어낸 차이점들이 아직 남아 있었다. 특히 문주가 대동한 사로국의 좌장군 아찬(阿飡) 버르치(伐智)는 50세 정도 나이로 파란 눈에 노란 수염과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어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해구가 말을 몰고 백제군의 앞으로 나와 사로군과 축자군의 선두로 나온 문주와 버르치에게 목례했다. 해구는 물론 답례하는 문주와 버르치도 표정이 어두웠다. 도성을 함락당하고 피난한 자와 구원에 늦은 자의 만남이었다.
“상(上)좌평 왕자 전하,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버르치 장군은 처음 뵙습니다. 사로국의 좌(左)장군이시라 들었습니다. 백제국 병관좌평 해구입니다.”
40대 정도 되어 보이는 선하고 믿음직한 인상의 문주가 살짝 웃음을 띠며 답했다.
“상좌평이라... 오랜만에 듣습니다. 백제 땅도 오랜만이고요. 사로국의 사위로 거의 10년은 거기서 살았으니까요. 병관좌평께서 한성의 백성들을 이끌고 내려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정말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버르치도 해구에게 말을 건넸다. 그의 입에서 삼한 말이 술술 나오자 많은 이들의 눈이 다시 휘둥그레졌다.
“사로국 좌장군 아찬 버르치입니다. 모루칸(麻立干)과 사로국을 대신하여 백제국 대왕 폐하의 붕어와 한성 함락에 대해 깊은 애도를 표합니다!”
해구가 말했다.
“감사합니다! 우선 성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진왕위(辰王位)가 공위 상태인 지금, 비상 조정회의 겸 신지-읍차 회합을 열 예정입니다. 사로국의 병사들은 여기서 동쪽으로 50리를 가면 백강 양안(兩岸)에 주둔하기 아주 좋은 평지가 있으니 군영을 펼치게 하시지요. 1만의 대병이 머무는 데에 부족함이 없을 겁니다.”
문주와 버르치가 답했다.
“예, 감사합니다. 그렇게 하지요.”
“단, 1백의 사로국 군사가 남아 성과 궁을 호위할 것입니다.”
해구는 버르치의 제안에 흔쾌히 응했다.
“그러시지요. 원래 목만치 장군의 축자군이 호위하려 했는데 대신하셔도 좋을 듯합니다. 백제국 병사 1백으로 돕도록 하겠소.”
비상 조정회의 및 소국 회합에 참여할 이들이 성 안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편 축자군이 웅진성 호위에서 빠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목만치는 불만을 토로하며 항의하려 했다.
“잘 되었다 싶은 게지요. 병관좌평이 우리 대신 사로군을 성 안으로... 자기편이라 생각하는 것이오. 저들에게 한 마디라도 해놓아야 이런 일이 더 이상 없을 거요!”
벽비리국 신지 부여루가 만류했다.
“자기편이라 생각한다기보다... 자기편으로 만드는 과정이겠지요. 우리의 약점은 좌현왕 전하께서 너무 멀리 있고, 힘도 너무 넓게 분산돼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저들은 한성의 백성들을 대두성 부근에, 1만의 군사를 백강 주변에 집중시켜놓았소. 백성들을 구했다는 명분과 군사력이라는 실력이 앞서 있는 게지요. 일단 우리는 지켜보면서 힘을 모아야 합니다. 자, 비상 회합에 들어가도록 하지요.”
“그러지요... 흠, 이렇게 되면 병관좌평은 틀림없이 상좌평을 대왕위에 올리려 할 것인데...”
목만치는 웅진성의 남문을 통과하면서 생각에 잠겼다.
‘진왕의 인은 잘 전해지고 있겠지. 당장 전하께서 대왕위를 되찾는 게 힘들어진 지금, 외려 우리 쪽에서 반드시 그걸 쥐고 있어야 할 이유가 더 커졌다!’
한편 버르치는 성으로 들어와 진왕궁 내에 들어올 때까지 자신의 외모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대단히 불편해 했다. 이런 기색을 알아챈 해구가 조금 웃으며 물었다.
“거 참, 다들 장군께서 사로국 사람이 맞는지 궁금해 하는 눈치입니다그려, 허허...”
“허허... 설마 좌평께서도 의심하십니까? 소장은 금성(金城)에서 태어난 틀림없는 사로국 사람이오.. 서역 말도 아는 게 없소. 그저 제 선조 중에 서역에서 온 이들이 많았던 게지요.. 그래도 누구나 이걸 물어보니 참 힘듭니다...”
참석자들이 진왕궁 내의 큰 초가 회의장에 모두 모이자 조정회의 겸 소국 회합이 시작되었다. 주요 안건인 새 진왕 옹립은 압도적 다수가 상좌평 문주 왕자를 추대하여 일사천리로 의결이 진행되었다. 자리모로국 읍차 국융은 이전 회합에서와 달리 문주를 추대할 이유에 대해 열변을 토했고, 해구는 이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비미국 신지 연신도 전과 달리 중립적 입장이 아니라 문주의 편을 열심히 들었다. 해구의 웅진 도착과 함께 그에게 전해진 선물과 귀중품들이 효과를 본 듯했다. 목만치와 부여루는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좌현왕 부여곤의 진왕 추대를 주장해보았으나 역부족이었다.
회합의 종료와 함께 개로왕 추도제와 문주의 진왕 즉위식 준비가 시작되었다. 연신은 개로왕 추도제의 제사장으로 신소도국 천군 달온을 추천했다. 전령이 천군 달온이 머물러 있는 대두성 부근으로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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