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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名夢 님의 서재입니다.

백가제해(百家濟海): 1. 형제의 전쟁

웹소설 > 일반연재 > 대체역사, 드라마

완결

無名夢
작품등록일 :
2017.12.01 22:32
최근연재일 :
2019.04.10 00:13
연재수 :
62 회
조회수 :
17,473
추천수 :
114
글자수 :
339,531

작성
19.04.03 0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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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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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자
22쪽

61. 전환(轉換)의 해 (2)

DUMMY

모대가 구해국(狗奚國)에 닻을 내린 지 닷새 후, 웅진성 조정에서 보낸 사절단이 육로로 도착했다. 신지 부여예의 자택 별채에 머무르던 모대는 친히 나와 사절단을 맞았다. 사마, 부여예, 찬수류를 비롯해 물론 구해국에 모인 신미 소국 신지들과 가족들이 뒤에 도열했다.


“백제국 달솔 백가, 모대 왕자 전하를 뵈옵니다!”


사절단의 수장 백가가 고개를 크게 숙여 예를 표했다.


“그대가 백가 장군이로군요! 과인이 어렴풋이 기억하는 옛 우호장 백궁의 아드님이 이렇게 직접 오시다니... 게다가 부왕 전하의 시신을 역적들의 손에서 구해내고, 전하의 국서를 전달하는 임무에도 성공하셨으니 왜왕실과 진왕실의 은인이 아닙니까!”


“황공하옵니다! 저는 그저 대왕 폐하와 진남 좌평 각하의 명을 받고 온 사절일 뿐이오니 과찬은 거둬주시옵소서.”


“하하, 알겠소. 일단 같이 들어가셔서 조정의 입장을 과인에게 전해주시오.”


한 식경 후, 별채의 다실에서 모대와 백가가 독대했다. 모대가 많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과인이 우려하는 것은 한 가지요. 만일 과인이 웅진성에 갔을 경우에, 2년 전 해씨들이 부왕 전하께 했던 짓을 진씨들이 반복하는 것이지요. 아무리 조심한다 해도 일이 한 번 벌어지면 되돌릴 수 없소이다. 그럴 위험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과인은 신미에 머무르며 축자군 5백과 함께 군사를 더 모을 것이오! 만반의 대비를 해야지요.”


백가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온 것입니다. 조정과 진씨 가문의 진의(眞意)가 조금이라도 의심된다면 소신부터 웅진성으로 돌아가지 않고 전하와 함께 하겠사옵니다! 좌평 각하께서는 진씨들이 예전 해씨들의 역모를 방관했던 일을 크게 참회한다 하시며 이 서신을 드리라 하셨습니다. 또한, 폐하께서도 전하께 약속할 일이 있다 하시면서 조서를 내리셨습니다.”


백가는 비단 두루마리 두 통을 올리게 하여 모대에게 건넸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모대는 두 번째 서신을 탁자에 놓으며 입을 열었다.


“진 좌평은 부왕 전하와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진씨 가문 전체가 역모의 죄를 받아 갚겠다는 각서를 보냈고, 대왕 폐하의 조서는 과인을 진왕위(辰王位)를 이을 자로 인정한다는 내용이오. 단 조건을 내걸으셨는데...”


“조건이 있단 말씀이옵니까?”


모대는 불편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사마... 융(隆) 왕자가 왕위를 이을 의사가 없는 게 분명하다면 그리하시겠다는 말씀이오.”


백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답했다.


“흠... 융 왕자님을 부르겠습니다.”


반 식경 후 사마가 다실에 들었다. 모대가 앉기를 권하며 말했다.


“융 왕자. 앉으세요. 왕자는 엄연히 과인보다 서열이 앞서는 진왕실 후계자이니 이 자리에서는 윗분으로 대하겠소.”


“예, 전하.”


사마가 앉자 모대가 뜸을 들이다 말을 이었다.


“분명히 해둘 사항이 있소. 금상폐하는 병환이 깊어 올해를 넘기실 수조차 있는지 모르겠다고 들었소. 만약 왕자께서는 망극한 일이 생길 경우에 진왕위를 이을 생각이 있으시오?”


사마는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저는 감히 진왕위에 오를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진왕의 인을 전하께 보낸 일은 부여루 장군 뿐만 아니라 저의 의사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고개를 숙였다 들며 모대의 시선을 맞대고 보았다.


“또 저는 앞으로도 이곳 신미의 소국에서 떠나지 않고 거하며 웅진성에 눈길을 주지 않을 것입니다! 제 눈으로 가늠할 수는 없으나 짐작하자면, 전하께서는 하늘의 뜻을 받고 계심이 틀림없고 대왕위에 오르신다면 온 백제와 삼한의 백성을 보살피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시는 성군이 되실 것이옵니다!”


모대는 다시 고개를 숙인 사마를 한참 바라보다 백가에게 눈길을 주며 말했다.


“알겠소. 이제 왕자의 마음을 분명히 알게 되었소. 달솔께서는 이제 조정에 과인과 융 왕자의 뜻을 그대로 전하시면 될 것이오!”


“예, 왕자 전하!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전달하겠사옵니다!”


“자, 이제 사절단과의 용무가 끝났으니 과인과 그대들 모두 편안히 머무를 수 있소이다. 사흘 후에 과인이 벽비리국으로 올라갈 것인데, 백 달솔과 행로가 겹칠듯하니 심심치는 않겠구려. 사마, 내가 떠나기 전에 그 동안 못한 얘기라도 하며 회포를 풀자꾸나!”


“예, 전하!”


백가와 사마는 표정이 한결 밝아진 모대에게 예를 표하고 다실에서 나왔다.


“왕자님,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대왕위에 오르지 않겠다고 아예 선포를 하시다니요.”


백가의 물음에 사마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대왕이라... 얼마나 번거로운 자리입니까? 아주 홀가분하기만 한걸요. 후후... 그런 자리를 마다하면 인생 걱정 없이 편안히 지낼 기회가 펼쳐지는데, 굳이 번뇌 속으로 찾아들어갈 이유가 있을까요?”


백가는 가벼운 걸음으로 자신의 방 쪽으로 가는 사마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런 사마를 멀리서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여인이 있었다. 부여예의 둘째 딸 부여세, 세원(世媛)이었다.


‘내가 찾던 그런 용모야! 어쩜 저리 여리여리한데도 키도 크고 잘생겼을까. 호호...’


다음날, 구해국의 포구 근처 저자거리에는 축자군을 따라온 왜국 상인들이 좌판을 깔고 시장(市場)을 열었다.


“우와, 예쁜 것들이 많네... 언니, 이거 좋지 않아?”


부여영, 즉 영원(影媛)과 같이 산책을 나온 세원이 좌판에 쌓인 장신구들을 보고 흥미롭게 보며 집어보기도 했다. 영원은 대답 없이 미소만 지으며 다른 좌판으로 눈길을 보내더니, 장식매듭 하나를 만지작거렸다.


“오, 이것도 예쁘네... 수호장님께 드리려고? 이건 사내들 허리띠에 붙이는 매듭인데...”


“얼마인지요?”


영원이 상인에게 가격을 물었다.


“5전입니다요.”


그가 작은 덩이쇠 하나를 꺼내 상인에게 건네줄 참이었다.


“낭자께서 사시는데, 값은 내가 내겠소. 이것도 되오?”


갑자기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평소와는 달리 수줍은 표정을 한 부여고가 좌판 앞에 끼어들어 엽전 하나를 내밀었다.


“예? 물론입죠. 송나라 동전도 받습니다!”


상인이 환한 얼굴로 답했다. 영원은 부여고와 장식매듭을 번갈아 보더니 뭐냐는 듯 씁쓸한 표정으로 매듭을 들고 걸음을 재촉했다.


“언니--...”


세원이 부여고를 쏘아보더니 영원을 따라갔다. 얼마 걷지 않았는데 누군가가 영원의 소매 끝을 살짝 잡았다 놓았다 하며 따라붙었다.


“뭐예요!”


영원과 세원이 화를 내며 뒤돌아보았다. 부여고가 여전히 수줍은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게... 저... 낭자께... 장신구를 하나 드리려고 하는데... 제 마음...”


세원이 더 화가 난 표정으로 쏘아붙였다.


“아, 깜짝 놀랐네... 뭐하는 거예요! 고 공자, 뭘 준다고요? 설마... 우리 언니 좋아해요?”


“,,,,”


“언니에게 정혼자가 있다는 거 잘 알 거 아녜요? 모대 왕자님이 떠나신 뒤에 혼례 날짜까지 잡혔다고욧! 계속 언니에게 얼씬거리면 공자 부친께 알릴 거예요!”


세원은 영원에게서 왜국 장식매듭을 낚아채 부여고에게 건넸다.


“이거, 공자가 샀으니 공자가 가져요! 뭘 준다느니 해도 받을 이유가 없고요, 언니도 이의 없지?”


영원이 여전히 분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 때 찬수류가 오십 보 쯤 앞에서 영원과 세원을 부르며 손을 흔들었다.


“낭자--!”


표정이 환해진 두 여인은 부여고를 홀로 남겨두고 빠른 걸음으로 찬수류에게 다가갔다. 부여고는 한 동안 이글거리는 눈으로 장식매듭을 부여잡은 손을 살짝 떨더니 멀어져 가는 세 사람을 다시 따라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부여고의 눈에 세 사람이 신미의 남쪽과 탐라국에만 있는 검은 돌로 쌓은 담장 사이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신지 부여예의 자택이었다. 부여고는 걸음을 멈추고 담장과 문을 날카롭게 응시했다.


‘언젠가는... 저 담장을 무너뜨리고 반드시 부여영을 내 여자로 만들 것이다... 찬수류 따위에게 져서는 안 되지... 내 지금은 부족하다만 힘을 기를 것이야!’


이틀 후, 모대, 백가, 부여루 가족의 긴 행렬이 구해국의 북쪽 길로 이어졌다. 사마는 모대에게 약속한 대로 구해국에 살겠다며 남았다. 부여고도 벽비리국을 대표하여 찬수류와 영원의 혼례에 하객으로 참석한다는 명분으로 남았다. 닷새 후 혼례가 치러졌다. 사마는 기쁜 표정으로 혼례를 지켜보았지만, 부여고의 표정은 전의(戰意)를 다지는 듯 보일 정도로 비장했다. 혼례 후 찬수류와 영원의 신방(新房) 쪽을 노려보고 북쪽으로 떠날 때에도 그 표정은 여전했다.


삼한 강산의 푸르름은 시간이 지나며 짙어져 녹색이 되더니 점차 누렇게, 갈색으로 변해갔다. 음력 9월 초 어느 날, 반파국(伴跛國, 대가야)의 한기궁(旱岐宮) 앞은 마치 서쪽 바다 건너 건강성에서 국혼(國婚)이 치러지는 것처럼 화려하게 꾸며졌다. 오색의 천과 꽃으로 꾸민 수레를 중심으로 긴 행렬이 한기궁을 향했다. 한기 하지(荷知)가 행렬을 맞았다. 수레가 멈추자, 한껏 멋을 낸 옷차림의 여인이 천천히 땅에 발을 내디뎠다. 하지는 여인을 보고 한 동안 입을 열지 못하더니 감탄하며 말했다.


“드디어 뵙는 구려! 듣던 대로 대무녀님의 미모는 뭐라 말이 안 나올 정도입니다! 크하하하...”


“무녀 춘일(春日), 한기 공을 뵈옵니다!”


춘일이 예를 표하자 하지는 신료들과 수레 행렬 앞에서 외쳤다.


“조만간 나는 왕위에 오를 것이고, 안라국(安羅國)에서 오신 춘일 대무녀님은 왕비(王妃)가 되실 분이니 그대들은 대무녀님을 모심에 흠이 없도록 하시오!”


“예, 한기 공!”


춘일이 한기궁의 침실에 여장을 풀고 났을 때였다. 예부터 그를 보좌했고 궁인(宮人)이 될 무녀가 아뢰었다.


“대무녀님, 중랑장(中郞將) 조랑(助郞) 어른께서 뵙고자 하십니다.”


“훗, 들라 해라.”


조랑이 들어와 춘일 앞에 섰다. 두 해 전처럼 그는 춘일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공손한 표정이 되었다.


“무녀님... 아니... 왕비 전하를... 뵈옵니다...”


“호호호... 아직 왕비에는 오르지 않았으니 무녀님이라 하시면 될 것을요.”


“아... 예... 두 해만에 뵙습니다, 무녀님...”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는 뭐 그런 말씀을 하시려는 게지요.”


“아.... 하하... 그렇습니다... 다만, 그저 궁금한 것이 있어서...”


“기생반(紀生磐), 넙바위가 왜 같이 오지 않았느냐, 이 말씀이죠?”


“그... 맞습니다. 그 놈을 두 해 동안 빌리신다고 했는데, 이러시면.... 약속이... 틀리지 않습니까! 대가를 주신다 하셨는데... 그것도 첫해만.. 지난 한 해의 값은 어찌... 애초에 제가 그 놈이 저를 잘 보좌할 것을 기대하고 높은 값에 데려왔사온데 그럼에도 무녀님께...”


“아... 이런... 기생반 그 분은 얼마 전에 임나가야(任那加耶)로 떠나셨습니다. 두 해 동안 무럭무럭 자라나셨을 뿐 아니라 문무(文武)에 출중한 능력을 갖추게 되셨지요. 임나가야의 좌군(左軍)에 입대하셨으니 이제 곧 가야와 삼한에 위명(威名)을 떨치시게 될 겁니다! 이건 제 예언으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헛... 임나가야... 같은 연맹이긴 하지만 우리와는 적대적인 나라인데... 그놈이 노예 신분을 벗고 출세를...”


“한기 공께서는 온 가야를 아우르는 본국왕(本國王)이 되실 것이니, 적대적인 임나가야라 해도 언젠가는 품에 안으셔야 하겠지요. 기생반님은 그리 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우실 겁니다! 그리고 중랑장께서 계속 데리고 계셨다면 그 분은 능력을 펴보지도 못하고 중랑장의 노리개 노릇만 하다 일생을 마쳤겠지요...”


조랑은 흠칫 놀라며 구시렁거렸다.


“아니.. 그걸.. 또... 어떻게... 흠흠... 그럼 어쨌든 한 해 값은 주셔야...”


“호호호호.... 앗하하하하....”


춘일이 갑자기 크게 웃자 조랑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한기 공께서는 중랑장을 곧 제(齊)나라에 사신으로 파견할 생각을 하고 계십니다! 사신으로 다녀오시면 기생반 그 분의 값은 비교도 안 되는 엄청난 이익을 보시게 될 텐데요. 굳이 그걸 마다하시겠다면 한기 공께 다른 분을 추천해드려야...”


“핫,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알겠어요... 다시는 넙바위의 넙 자도 꺼내지 않겠사옵니다! 제나라에 가는 사신이라니... 감사드리옵니다! 황공하옵니다, 왕... 왕비 전하!”


조랑은 무릎까지 꿇고 춘일에게 절한 뒤 일어나 물러나갔다. 춘일은 비웃음이 섞인 득의양양한 미소를 띠고 조랑이 나간 쪽을 바라보았다.


‘이것이 다 온 가야를 기생반 그분과 내게 복속시킬 준비를 하는 일이다! 열심히 밥상을 차려놓거라... 앗하하하하....’


같은 달, 춘일의 예언대로 조랑은 한기 하지의 명을 받고 사신으로 남제(南齊)를 향해 떠났다. 사신단은 서쪽 산지를 넘어 오월의 심국부(沈國府)와 교역하는 무역상을 자처하며 신미 지역을 지나면서, 벽비리국에 기거하던 모대와 부여루의 눈을 따돌리고 가야 연맹의 군대가 주둔한 안창도(安昌島: 신안 안좌도)까지 나아가 직통 항로를 통하는 무역선을 탔다. 백제, 삼한의 우산을 벗어나 ‘독자노선’을 모색하는 그들이 찬수류는 물론 월지향 상단과 집아관의 경계까지 피해 건강성 황궁에 입궐했을 때에야 집아관과 오월의 백제인들이 사신단의 정체를 알아챘으나 이미 어찌할 도리는 없었고, 귀국을 막을 명분도 없었다. 음력 10월 말, 먼 길을 다녀온 사신단의 수장 조랑이 남제 고제(高帝) 소도성의 책봉 조서를 바치자 한기 하지는 뛸 듯이 기뻐했다.


“크하하하... 어서 낭독을 해보라!”


“널리 헤아려 비로소 조정에 올라오니, 멀리 있는 오랑캐가 두루 덕에 감화됨이라. 가라왕 하지(加羅王) 하지는 먼 동쪽 바다 밖에서 폐백을 받들고 관문을 두드렸으니, 보국장군 본국왕(輔國將軍 本國王)의 벼슬을 제수함이 합당하다.” *


조서 낭독이 끝나자 한기궁에 모인 신료들은 모두 만세를 불렀다.


“가라 본국왕 만세, 만만세!”


“자, 이제 전열을 정비하여 저 서쪽 방장산(方丈山)*을 돌아가 기문국(己汶國)으로 진군한다. 이미 약속이 되어 있으니 안라국도 수군을 동원할 것이다. 열흘 내로 준비를 끝마치도록!”


“아닙니다, 전하! 안 됩니다!”


춘일이 고개를 세게 저었다.


“아니 왕비, 어찌 그러시오?”


“기문국의 코앞 벽비리국에 다음 진왕(辰王)이 될 모대 왕자가 신미와 축자의 강군(强軍)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지금 기문을 도모한다면 크게 패하고 말 것입니다! 시일을 두고 준비하시지요...”


“흠... 그렇구려. 게다가 그들은 우리 사신단을 막지 못하여 잔뜩 독이 올라있을 터... 명을 거두겠다. 지금은 기다려야 하지만 오래지 않은 시일 내에는 기문과 기문하(基汶河)*를 도모할 수 있도록 만전을 기하라!”


하지의 하명에 신료들이 자신감 있는 표정으로 답했다.


“예, 전하!!”



음력 10월 그믐이 다 되어 가는 어느 날, 백제의 서북쪽 바다를 건너고 태항산(太行山)을 넘어 북막(北漠)의 초입까지 가야 닿을 수 있는 북위(北魏)의 수도 평성(平城)의 황궁, 중년의 나이에도 여전히 차가운 미모를 유지하는 이 나라의 최고 권력자 풍태후(馮太后)가 열 세 살의 황제 탁발굉(拓跋宏)과 독대하여 정사(政事)를 논하고 있었다.


“오늘은 시급한 외치(外治)에 관해 대책을 논하도록 하지요. 얼마 전 고구려군이 동남쪽으로부터 요서(遼西)의 북쪽에 진군하고, 유연(柔然)의 기병대가 서북쪽으로부터 진군하여 지두우(地豆于)를 협공, 그들의 땅을 분할했다 합니다.”


“지두우라면, 유연과 비슷한 동북 대초원지대의 야만족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황상. 지두우가 밀려 거란의 땅으로 내려와 혼란을 초래하여 거란의 8개 부족 연맹체가 해체되고, 그들 중 일부가 우리나라에 귀부(歸附)하는 격변이 벌어지고 있지요!”


“유연이야 주적인 우리를 견제하려는 의도이겠고, 우리와 화친 관계에 있는 고구려가 지두우를 치는 의도는 무엇이겠습니까? 지두우나 거란이 가졌던 그 땅은 우리 타브가치(拓跋鮮卑)의 고향 아닙니까, 태후 폐하.”


“‘우리’ 타브가치는 아니지요, 황상.”


“참, 그렇습니다. 태후 폐하는 화하(華夏)의 적통이시지요.”


풍태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황상. 황상은 비록 타브가치의 피를 가지고 있으나 화하의 예법과 문명을 끊임없이 배워야 중원의 유일한 천자(天子)가 되실 수 있음을 항상 명심하세요.”


“명심하겠사옵니다. 태후 폐하.”


“고구려의 거련왕 그 분은 보면 볼수록 대단한 지략을 가지고 있습니다. 단순한 노익장이 아니지요. 네 해 전 남쪽으로 백제의 왕도 한성을 직접 쳐서 함락시키며 멸망의 위기로 몰아넣더니, 이번에는 서북쪽 초원지대까지 군사를 보내 물길(勿吉)이 우리에게 통하는 길을 끊고 경고를 보낸 게지요!”


“경고요? 우리에게 말입니까?”


“그렇지요. 유연과 동맹을 맺으면서 우리가 협공의 다음 목표가 될 수도 있다고 경고한 겁니다. 거란의 일부 부족과, 습(飁), 해(奚), 실위(室韋) 등 작은 오랑캐들이 두 나라에 밀려 우리에게 신속하기는 했지만, 사실 그들도 우리에게 머리만 수그릴 뿐 고구려와의 관계를 끊으려 하지는 않아요. 또 이번 전역(戰役)은 그 분이 직접 군사를 이끌었을 것 같지는 않고 나운(羅雲)이라는 손자를 보내 경험을 쌓게 했을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당분간 고구려와 대립할 수밖에 없군요. 저들의 연합에 대해 고립되는 형국이니 말입니다.”


“맞습니다, 황상. 이번에는 어쩔 수 없이 그래야 하지요! 고구려는 이번 전역으로 좋은 철의 산지와 말 목장을 얻은 격이니 더욱 강대해졌습니다.”


소년 탁발굉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태후 폐하께서는 이렇게 적국이 될 수 있는 오랑캐 나라의 왕을 ‘그 분’이라 부르시니 짐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더구나 폐하의 조부님을 죽인 사람인 데도요!”


풍태후가 미소를 띠며 말을 받았다.


“비록 오랑캐 나라의 늙은 왕이고 가문의 원수이기는 하나 배울 점이 많은 ‘어른’이라 여기고 있지요. 내 조부의 일도 그렇습니다. 내가 거련왕이라 해도 자기에게 망명한 군주가 자신의 처지를 망각하고 다른 살길을 찾아 외국의 군병을 끌어들인다면 같은 선택을 했을 겁니다! 황상께서도 거련왕의 노회한 지략과 시야, 꼼꼼히 살펴 나라를 지켜내고 확장하는 치밀함과 끈기를 잘 살펴 배우시고 그 만큼 그 분을 예우하세요. 그것이 고구려와 관계가 좋지 않더라도 파탄에는 이르지 않게 하고, 또 군사적 손실 없이 주변으로부터 우리나라가 완전히 고립되지 않게 하는 지름길입니다!”


“과연 그렇겠군요. 유념 하겠사옵니다, 태후 폐하!”


풍태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화제를 돌렸다.


“이제 남쪽의 주적 도이(島夷)를 생각해볼까요?”


“도이... 섬 오랑캐... 제(齊)나라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얼마 전 왕실을 차지한 소씨(蕭氏)는 한문(寒門)이라고는 하나 난릉(蘭陵)에서 내려간 화하인이라고 들었습니다만...”


“가문의 피를 가지고 도이라 일컫는 것이 아닙니다. 회수(淮水)의 남북에 흩어진 바다 오랑캐들의 도움을 받아 왕조를 일으켰으니 그리 부르는 것이지요. 사관(史官)들과 국서를 쓰는 이들에게는 이미 계속 그렇게 명칭을 사용하라 명을 내렸습니다.”


“회수의 남북... 특히 북쪽에 있는 바다 오랑캐들은...”


풍태후가 탁발굉의 말을 이었다.


“예, 바로 우리나라 동해안... 수년 전 새로 설치한 해안 주(州)들에 사는 자들이지요. 주로 부여인이나 백제인들이지 않습니까. 모용선비(慕容鮮卑)가 망한 뒤 우리의 강대함에 귀부를 청하여 우리 백성이 되었기는 합니다만...”


탁발굉은 잠시 침묵에 잠긴 풍태후의 입에 눈길을 주었다.


“우리나라가 화하의 강대국이 되어 제나라를 멸하고 통일을 이루려면 이제 농본(農本)의 원칙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이제까지 초원에서 살던 타브가치의 습속을 타파해나가야 함은 물론이고 바다에서 장사나 무역을 하는 오랑캐들도 이주를 시켜 땅을 개간하는 건실한 농민으로 교화해야지요! 황상께서도 이미 화하족 출신 신료들로부터 건의를 들으시겠지만, 그들이 토지제도의 개혁과 사민(徙民)정책에 대해 열심히 궁리하고 있습니다. 몇 해 안에 실행할 수 있도록 말이지요.”


“흠... 그렇군요. 소자... 짐도 열심히 공부하여 보탬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진지한 표정의 탁발굉이 고개를 다시 끄덕였다.


“그런데 우리나라 해안의 부여인이나 백제인들은 그리 교화시킬 수 있을지 의심스럽습니다. 수백 년 동안 그렇게 살아왔고, 또 제나라와의 전쟁터인 회남(淮南)과 제나라 땅인 오월의 바다 오랑캐들과도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니 말입니다! 강제적인 조치가 불가피할 것 같아 걱정이 되지요... 최악의 경우에는 군사력을 동원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예... 상황을 잘 알겠습니다. 짐도 숙고하겠사옵니다.”


“휴... 그래요.”


풍태후는 한숨을 쉰 뒤 말을 이었다.


“외치와 내정을 논함은 이 정도로 하지요. 참, 황상께선 오늘 밤에도 고귀비(高貴妃)의 처소로 드실 것인지요? 요즘 듣기에 황후보다는 임귀비(林貴妃)나 고귀비의 처소로 자주 드신다고요?”


탁발굉의 얼굴이 굳었다. 황후 역시 풍씨인데 풍태후의 조카였기 때문이다.


“아, 예... 그렇잖아도 오늘은 황후의 처소로 들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요, 화하족의 피를 한 방울이라도 더 가진 황손을 얻도록 노력하셔야지요, 호호호...”


풍태후는 웃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해가 지는 시각이었다. 대단한 위세로 전설 속의 신 서왕모(西王母)라 불리기도 하는 풍태후의 얼굴에 석양이 비쳤다.


작가의말

* <남제서>만동남이전 고제 원년(479) 가라 본국왕 책봉기록

* 방장산: 지리산

* 기문하: 섬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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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장기 휴재 공지 (11월 복귀) +2 18.07.23 173 0 -
공지 6월까지 주1회 연재 공지 18.05.18 109 0 -
공지 5월 15일 연재 재개 공지 18.04.27 122 0 -
공지 4월 13일 연재 재개 공지 18.04.06 135 0 -
공지 2월 27일 연재 재개 공지 18.02.19 141 0 -
공지 1월 19일 연재 재개 공지 및 향후 간단 줄거리 18.01.09 255 0 -
공지 <백가제해> 1부를 시작하며 17.12.06 417 0 -
62 62. 동성왕 즉위 (1부 완결) 19.04.10 170 3 16쪽
» 61. 전환(轉換)의 해 (2) 19.04.03 98 1 22쪽
60 60. 전환(轉換)의 해 (1) 19.03.27 94 1 14쪽
59 59. 상봉(相逢) 19.03.20 61 1 12쪽
58 58. 일식(日蝕)과 참새 19.03.13 106 1 15쪽
57 57. 탈환(奪還) 19.03.06 99 1 12쪽
56 56. 두 번째 사신단 19.02.27 88 1 17쪽
55 55. 백강격변(白江激變) (3) 19.02.20 117 1 11쪽
54 54. 백강격변(白江激變) (2) 19.01.30 84 1 14쪽
53 53. 백강격변(白江激變) (1) 18.12.26 107 1 14쪽
52 52. 강좌일변(江左一變) (3) 18.12.19 89 1 17쪽
51 51. 강좌일변(江左一變) (2) 18.12.12 109 1 16쪽
50 50. 강좌일변(江左一變) (1) 18.12.05 113 1 13쪽
49 49. 미대(尾代)의 전쟁 18.11.28 153 1 16쪽
48 48. 기생반(紀生磐) 19금 18.11.21 64 1 10쪽
47 47. 문주왕 붕(崩) 18.11.14 137 1 14쪽
46 46. 모반(謨反)의 기운 18.07.17 187 1 11쪽
45 45. 새로운 국면 18.07.10 234 1 15쪽
44 44. 회생 18.07.03 135 1 13쪽
43 43. 꼬리를 적시다(濡其尾) 18.06.26 134 1 11쪽
42 42. 추격 저지 18.06.19 133 1 13쪽
41 41. 계획 18.06.12 132 1 10쪽
40 40. 미제(未濟) 18.05.29 205 1 11쪽
39 39. 대치(對峙) 18.05.22 182 2 11쪽
38 38. 경각(頃刻) 18.05.15 153 1 11쪽
37 37. 흑룡(黑龍) 출현 18.04.24 181 1 9쪽
36 36. 불길한 기회 18.04.21 169 1 8쪽
35 35. 배신 혹은 충성 18.04.17 174 2 12쪽
34 34. 당부 18.04.13 161 1 11쪽
33 33. 승낙의 조건 18.04.03 158 1 11쪽
32 32. 웅진성의 술렁임 18.03.30 220 1 10쪽
31 31. 곤지(昆支) 귀국 (2) +2 18.03.27 267 2 12쪽
30 30. 곤지(昆支) 귀국 (1) 18.03.23 182 1 10쪽
29 29. 해구(解仇) 복귀 18.03.20 242 1 13쪽
28 28. 신미(新彌)의 이무기 두 마리 18.03.16 228 1 14쪽
27 27. 서쪽 바다의 방벽 18.03.13 196 1 11쪽
26 26. 백강의 풍랑 18.03.09 205 1 14쪽
25 25. 강좌(江左)의 정쟁(政爭) 18.03.06 216 1 10쪽
24 24. 집아관 살인 사건 18.03.02 217 1 12쪽
23 23. 서신(書信)과 속도전 18.02.27 207 1 11쪽
22 22. 다섯 번째 이름 18.02.16 190 1 12쪽
21 21. 하내(河內)의 봄에서 한성의 가을까지 18.02.13 222 1 19쪽
20 20. 13년 전: 곤지왕(昆支王) 즉위 18.02.09 253 1 14쪽
19 19. 13년 전: 지옥원정대 18.02.06 192 1 12쪽
18 18. 13년 전: 섬왕자 (嶋君) 18.02.02 264 2 13쪽
17 17. 14년 전: 도피와 음모 18.01.30 239 1 13쪽
16 16. 14년 전: 애증(愛憎)의 후폭풍 18.01.26 254 1 9쪽
15 15. 14년 전: 도미부인 (2) 19금 18.01.23 143 3 12쪽
14 14. 14년 전: 도미부인 (1) 19금 18.01.19 167 2 11쪽
13 13. 때를 기다리다 18.01.09 274 1 10쪽
12 12. 협박과 환대 18.01.05 327 2 11쪽
11 11. 피난과 질책 18.01.02 343 1 12쪽
10 10. 열도(列島)와 군도(群島) 17.12.29 408 2 14쪽
9 9. 탈취(奪取) 17.12.26 419 2 12쪽
8 8. 마주침 17.12.22 529 3 9쪽
7 7. 곰나루에 모여 논하다 (2) 17.12.19 540 3 9쪽
6 6. 곰나루에 모여 논하다 (1) 17.12.15 590 3 10쪽
5 5. 너는 누구냐 17.12.12 745 4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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