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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령 님의 서재입니다.

얼음의 아리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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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령
작품등록일 :
2015.03.16 00:00
최근연재일 :
2019.04.08 22:19
연재수 :
7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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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5.12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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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쪽

제9장 - 어둠의 신전으로 모시겠습니다.(3)

DUMMY

리아센 제국의 동쪽, 황금들판의 끝자락에 자리한 몽트라므의 신전은 <욕망의 호수> 라고 이름 붙여진 호수의 중앙에, 작은 섬 위에 자리하고 있다. 호수를 가로질러 내려진 성 문을 지나 성 내로 들어서면 둥근 성 벽을 끼고 수십 개의 크고 작은 건물들이 둥글게 자리를 잡고 있으며, 그 중앙에 마치 마법의 탑처럼 솟아나 있는 신전을 발견하게 된다.

둥근 탑 행태의 2층 건물.

처음에는 검은 색을 띠고 있었을, 푸른 이끼들로 가득 덮여 있는 건물에는 아치형의 문이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있고 그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서면 대강당이 모습을 드러낸다. 수천 개의 의자가 놓여 있는 대강당의 끝에는 위층으로 향하는 계단이 각각 네 개씩 자리하고 있었다.

신전의 지붕 위에는, 일곱 개의 날개를 활짝 펴고서 하늘로 비상하는 검은 새 모양의 몽트라므 동상이 자리하고 있는데, 그 모습을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면 거대한 새가 둥지 위에서 날아오르려고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어둠의 신전 2층에 위치한 대사제의 집무실에서 어둠의 사제복을 입은 두 명의 인물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세일루니아는 이미 왕세자에 의해 대부분 장악이 된 상황인 듯해요.”


검은색 후드로 얼굴을 모두 가리고 앉아있는 인영에게서 차분한 여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의 반대편에 서서 테이블 위에 놓인 찻잔에 차를 따라 그녀의 앞에 내려놓은 민머리 노인이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자리에 앉았다.


“어째서, 그런 일을 벌인 걸까요?”


검은 로브의 인영이 고개를 저었다.


“이유는 아직 파악된 바가 없어요. 다른 왕자들의 행방도 묘연하고, 모든 것이 우리가 무엇을 해보기도 전에 끝이 난 상황이라 저희도 적잖이 당황스러워 하고 있는 중이예요.”


여인이 자신의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한 모금 차를 넘기고는 말을 이었다.


“그 짧은 기간에 므로도스후작가와 멜터르 백작가, 또 아론드 백작가를 비롯한 여덟 개의 크고 작은 가문이 깨끗이 사라졌어요.”


“므로도스후작가문이?”


“친 왕파의 대표적인 가문들은 모두 사라졌다보면 맞겠지요. 왕이 쓰러지고 채 이십여 일도 지나지 않아 내전이 종식 되었어요. 그러니까 왕의 독살 시도부터, 모든 것이 철저한 계획 하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좋지 않군요. 리아센도 요새는 잔뜩 들떠있는 분위기 인데.......”


잠시의 침묵이 흐르고 다시 노인이 고개를 들었다.


“모겐님에게서는 아직 좋은 소식이 없었습니까?”


노인의 질문에 여인이 고개를 저었다.


“계속 그의 뒤를 쫓고 계세요.”


“모겐님께서 직접 나서신 일인데, 의외로군요.”


“록스록터의 검을 가져간 그 자, 새로 모습을 드러낸 반마족의 ‘혼의 무게’가 제법 무거워 모겐님께서도 고전하고 계신 모양이에요. 조금 더 많은 지원을 해드리면 좋겠지만........”


그때 문밖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모린 대사제님, 어둠의 기사 차터님과 크레이트님께서 뵙기를 청하십니다.”


문밖에서 들려온 소리에 노인과 검은 로브의 여인이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시만 기다리시라 이르게."


말을 마친 노인, 라모린 대사제가 여인과 작은 고갯짓으로 인사를 나눈 후에 벽에 놓인 촛대 두 개에 불을 붙였다. 그 사이 검은 로브의 여인은 헌 책장 옆에 뚫린, 어둠이 내려앉은 좁은 입구로 급히 몸을 숨겼다. 촛대에 환하게 불이 밝혀지자 놀랍게도 책장이 옆으로 스르르 이동하며 그 입구를 막았다.




신전 내 2층에 자리한 조그만 크기의 접대실.

인간의 몸을 뜯어먹고 있는 몽트라므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는 나무문이 열리고 대사제 라모린이 두 명의 어둠의 사제를 이끌고서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등장에 둥근 탁자에 앉아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일행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털이 수북하게 덮인 얼굴 위로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머금은 차터가 먼저 입을 열었다.


“대사제님, 특이한 손님들을 모시고 왔습니다.”


예의 그 호탕한 웃음을 말꼬리에 붙이며 혼자 즐거워하고 있는 그를 놓아두고 대사제 라모린의 시선이 크레이트를 지나 아리시아일행을 차례차례 지나쳐갔다.

신전에 들어서기 전, 성내에 위치한 잡화점에 들려 옷을 갈아입고 온 일행의 행색은 그나마 많이 향상되어 있었다. 평민 여인들의 외출복 차림의 아리시아와 마리엔, 그리고 남성용 작업복을 골라 입은 리아나와는 달리, 미리는 푸른색 레이스가 겹겹이 달린 풍성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로 인해 일행의 유일한 자금 줄이던 아리시아의 골드마저 끝내 바닥이 난 상태였지만 그 누구도 미리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가슴이 깊게 파인 화려한 드레스 탓인지, 라모린의 시선이 유독 미리에게 오래 머물다가 다시 차터에게로 옮겨갔다.


"어둠의 기사 차터. 이분들은 누구신가?"


차터가 곁에 선 크레이트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황금벌판에서 길을 잃고 떠돌다가, 설상가상으로 뮬르켄들에게 위협을 받고 계시던 분들을 크레이트가 구해내 모셔 왔습니다.”


“그게 아니라.......”


그의 설명을 듣고 있던 크레이트가 정색하며 끼어들었다. 도움을 주려 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오히려 도움을 받게 된 쪽은 그였으니, 분명히 집고 넘어 갈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그의 말은, 대사제의 앞으로 불쑥 다가가 다짜고짜 고개를 숙이며 수다를 떨기 시작하는 미리로 인해 다시 끊어지고 말았다.


“미리라고 합니다. 여기 계신 르마스님을 모시고 있어요. 크레이트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우린 정말 죽었을지도 몰라요. 욕망의 신 몽트라므님의 은총이 함께 한 이유겠지요.”


대사제 라모린이 의아한 눈으로 미리를 바라보다 물었다.


“몽트라므님의 신도십니까?”


미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조금 전부터 그러기로 했어요.”


잠시 멍하게 그녀를 바라보던 라모린이 차갑게 식어가는 자신의 눈빛을 감추려 고개를 돌렸다. 공교롭게도 그의 시선이 마리엔에게로 향했다.


"이곳 어둠의 사원의 대사제를 맡고 있는 라모린이라고 합니다."


난처한 빛으로 어쩔 줄 몰라하는 마리엔을 대신에 미리가 이번에도 먼저 나서 일행들을 소개 했다.


"이분은 마리엔님이십니다. 원체 과묵하신 분이라 말씀이 없으시죠. 전 미리라고 하고, 이분은 아리시아님. 그리고 이분은 제가 모시고 있는, 르마스님이십니다. 어둠의 기사, 크레이트님의 청으로 잠시 이곳에 머물게 되어서 대사제님께 인사를 드리려고 이렇게 찾아뵈었어요."


미리의 부산한 설명에 귀찮은 표정으로 일관한 대사제 라모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러시군요. 비록, 신전의 사제들을 위해 마련된 작은 마을이지만, 잡화점을 비롯해서 작은 여관도 하나 있으니 누추하나마 지내시기는 어렵지 않을 겁니다. 몽트라므님의 욕망의 기운이 성공의 끝까지 신도님들과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그럼 전 이만 급한 볼일이 있어서 먼저 나가보겠습니다."


자신의 할 말만을 남기고 뒤돌아서 나가려는 라모린의 앞을, 미리가 급히 따라가 막아섰다.


"대사제님!, 드릴 말씀이 있는데......."


잠시 멈칫, 걸음을 멈추고서 고개를 드는 그의 얼굴에 불쾌한 감정이 그대로 묻어나왔다.


"무엇이요?"


그러거나 말거나 정작 심각해진 얼굴로 미리가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다시 멍하니 미리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니, 옆에 서있던 어둠의 사제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대사제께서 그리 한가한 분이 아니십니다. 잠시 뒤에 제가 찾아 뵐 터이니 그때 제게 말씀해 주십시오.”


그런 그의 가슴 깨로 미리의 시선이 내려갔다. 은빛 달 모양의 엠블렘 세 개가 반짝이고 있었다. 고작 어둠의 제3사제. 그녀의 고개가 가차 없이 라모린에게 돌아갔다.


“그게 상당히 중요한 이야기라........”


귀찮게 달라붙는 통에 라모린의 두 눈에도 결국 노기가 번득였다.


"그러니 사제를 보낸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게 아니구요. 은밀하게 전해 드릴 말씀인지라........"


이제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져 나올 것만 같은 얼굴로 서서 웅얼거리고 있는 미리를 향해 라모린의 경멸에 찬 시선이 닿았다. 사원에 드는 일반인들을 대사제인 그가 일일이 만나는 일은 없었다. 어둠의 기사인 차터와 크레이트가 직접 찾아오지 않았다면 이런 만남도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인데 독대를 청하다니. 노기 어린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던 사제들이 급히 다가가 미리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매몰차게 돌아서서 접대실 밖을 나가는 그를 난감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미리에게, 오히려 차터가 더 무안해하며 입을 열었다.


“제가 나중에 자리를 마련해 드리리다.”


그러나 그의 위로가 그녀에게 들려 올 리 없었다. 울먹이며 자신의 팔목에 차여있는 팔찌를 매만지고 있는 미리의 등을 리아나가 급히 달려가 다독거려 주었다.


“지, 진정해 미리. 인사고과 생각해야지.”


무슨 영문인지 몰라 크레이트가 다가가 말을 붙였다.


“무슨 일인지 제게 말씀해 주실 수는 없습니까?”


“조용히 계세요. 폭발일보 직전이니까.”


그렁하게 눈물이 맺힌 눈으로 날카롭게 째려보는 미리 때문에 어안이 벙벙한 채로 서 있는 크레이트에게 리아나가 난처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크레이트에게만은 너무했다 싶었는지 눈물을 훔친 미리가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어둠의 사제 아니랄까봐 노인네가 되게 팍팍하네요.”


“그나저나 당장 오늘 밤을 어떡하냐?”


숙박비를 빼야한다는 모두의 의견을 완전히 묵살한 채 자신 있게 마지막 금화까지 탈탈 털어 옷을 사버린 미리의 씀씀이로 인해 벌어진 일이었다.


“하는 수 없어 미리....... 너 입고 있는 그 옷, 다시 팔자.”





그날 밤, 몽트라므를 섬기는 어둠의 신전 2층에 위치한 대사제의 집무실에 좀처럼 듣기 힘든, 대사제의 떨리는 목소리가 작게 떠돌고 있었다.


"진작 말씀을 해주셨더라면......."


"말을 하려고 했지요, 근데 대사제께서......“


분을 이기지 못해 말도 채 끝내지 못하고 입을 닫아버린 미리가 대사제를 째려보다, 결국 다시 소리를 질렀다.


“이 꼴을 좀 보시라고요.”


그녀의 복장은 수수한 아낙네의 긴 갈색 원피스, 치맛자락 중간에 제법 정성스럽게 수놓아진 푸른 꽃 모양이 수놓아져 있는 옷이었지만 미리는 이 원피스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몰라 뵈어 정말 죄송합니다.”


대관절 그녀가 입고 있는 원피스가 어떻다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대사제는 일단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여 미안함을 표했다.


“대사제님을 탓할 일이 아니예요. 나도 몰랐는 걸요. 사밀리아.”


그때, 대사제의 뒤에서 들려 온 여인의 목소리에 미리와 그녀의 옆에서 말없이 서 있던 아리시아의 시선이 그리로 향했다.

책장이 밀려나며 드러난 작은 문을 통해 모습을 드러낸 검은 로브의 인영이 얼굴을 가리고 있던 후드를 걷어내고는 아리시아와 미리를 향해 미소를 지어보이며 다가왔다. 엉클어진 하늘색 머리카락을 손으로 한 번 다듬고서 다가온 여인이 대사제를 향해 유난히 붉은 입술을 움직여 말했다.


“늦어서 죄송해요.”


늦었거나 말거나 지금 대사제의 입장에서는 천군만마보다 더한 지원군이 와준 것이라 더할 나위 없이 기뻤다.


“제가 알아 뵙지 못하고 늦게 연락을 드렸으니 제 잘못이 큽니다.”


그런 대세제를 향해 피, 하고 입을 삐쭉거리고 있는 미리에게 여인이 웃으며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정말 반가워요. 사밀리아. 제국으로 들어온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설마 이곳으로 올 줄은 몰랐어요. 조금도 변하지 않았군요."


미리가 꾸벅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오랜만예요. 샤이님.”


“이게 몇 년 만이지요?”


“23년쯤 됐어요.”


샤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요. 왕께서 케뮤랑크의 검을 찾아 세일루니아로 떠나신 게 20년쯤 됐었으니.......”


홀로 추억에 젖어드는 샤이에게 미리가 아리시아를 소개했다.


“아시죠? 이분이 설원의 마검사, 아리시아님이세요.”


자신을 향해 푸른색 눈동자를 반짝이며 온화한 미소를 보내는 샤이에게, 아리시아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샤이라고 해요.”


“절 아십니까?”


아리시아의 질문에 샤이가 더욱 짙어진 미소를 붉은 입술 위에 그리며 말했다.


“그럼요. 세일루니아의 수도 퓨리스 근처에서 모겐님을 뵈었다지요? 청색머리의 어린 반마와 검을 나누셨다고 들었어요. 그 뿐만이 아니지요. 설원의 마검사님은 이미 우리 인간의 편에 선 자들과는 깊은 사이니까요.”


샤이의 입가에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가 다시 지어졌다. 그런 샤이를 대신에 미리가 다시 끼어들었다.


“샤이님은 제국 내에서 인간의 편에선 자들을 이끌고 계시죠.”


“이끌다니요. 왕을 모시는 사밀리아님에 비교 할 바가 아니지요. 거기다 전 제국의 동쪽을 맡고 있어요.”


그녀의 말에 이번에는 미리가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러나 샤이는 그저 온화한 미소만 보일 뿐 그녀의 질문에 제대로 대답해 주지 않았다.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미리가 작은 쪽지를 대사제 라모린에게 전했다.


“거기 적힌 이름이 우리 일행이예요. 잠시 제국을 돌아봐야만 할 것 같으니, 새로운 신분을 만들어 주세요. 그리고.......”


다시 하얀 보자기에 싸인 긴 물건을 샤이에게 건넸다. 그것을 건네 받은 샤이가 하얀 손을 들어 보자기를 펼치니 자주빛 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리오르트님께서 맡고 계시던 카에디아의 검이에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받아든 그녀가 고개를 들고서 물었다.


“케뮤랑크의 검은.....?”


잠시 망설이다 미리가 사실대로 대답했다.


“사라졌습니다.”


일순간 미소가 사라진 샤이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그러나 그 모습조차도 너무나 단아해서, 반마족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면, 흡사 빛의 신족의 후예라고 해도 믿을 만큼, 몸짓 하나하나에 기품이 흘러나오는 신기한 반마족이었다.


“반갑지 않은 소식이군요.”


심각해지는 샤이의 눈치를 살피며 미리가 다급하게 말했다.


“내 잘못이 아닙니다, 샤이님. 아시다시피 왕께서 친히 지키시던 검이예요. 거기다 마족이 나타났다구요. 제 힘으로는 이 카에디아의 검을 회수하는 일만으로도 벅찼어요.”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굴 듯, 그렁그렁한 눈물이 맺힌 눈으로 말을 하고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이 연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모를 리 없는 샤이였다.


“자세히 말씀해주시겠어요.”


미리가 긴 한숨과 함께, 마족 펠츠르토의 출현과 리오리토의 죽음, 그리고 아리시아와 펠츠르토의 결투를 전했다.

미리에게서 흘러나온 것치고는 제법 차분하고 담담하게 이어지는 이야기였지만, 그 이야기를 듣고 있는 대사제 라모린에게는 그것이 그렇게 담담하게 들려오지 않았다.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여있던 땀에 젖은 두 손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세상에 마족을 상대한 인간이라니.’


인간 중에 반마족을 상대하는 인간들은 더러 존재한다. 검술에 끝에 선 마스터라 불리는 기사들이나 7,8클레스를 뛰어넘은 대마법사들이 소위 ‘전해지지 않은 역사’ 속에서 그들을 상대로 밀리지 않는 결투를 벌였다는 이야기가 종종 전해져와 그도 들은 바가 있었다. 그러나 마족이라니....... 대사제 라모린은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추억을 더듬듯 이야기를 꺼내 놓는 미리의 말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리오르트님께서......."


미리의 이야기가 끝나고 샤이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런 그녀에게 미리가 다시 덧붙여 말했다.


“케뮤랑크의 검은 말러자작의 손에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아리시아님 말씀에 따르면 67.35퍼센트의 확률이라네요. 그리고.......”


잠시 숨을 고른 미리가 반마족 넨시에 대한 이야기도 덤덤히 전했다. 모든 이야기가 끝나고 나서도 샤이는 오랜 동안 생각에 잠겼다.


“록스록터의 검을 가져간 그 어린 반마도 그렇고 우리가 파악하지 못한 반마들이 그렇게 많이 나타나다니.......”


거기다가 모두 엄청난 혼의 무게를 지닌 자들. 무언가 다시 입을 열려다 말고 샤이가 대사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우선 리오르토님의 거처로 수색대를 파견해 주세요. 전 이 사실을 하루빨리 왕국에 전해야겠어요.”


라모린이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라모린에게서 고개를 돌린 그녀의 입에서 낮고 조용한 혼잣말 소리가 흘러 나왔다.


“무언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어.”


그러자 애잔함이 듬뿍 담긴 미리의 음성이 샤이의 상념을 깨우며 들려왔다.


“저기....... 그 전에 돈, 조금만 주세요. 우리 밥 먹을 돈도 없어요.”






다음 날 이른 아침.

새벽같이 여관을 찾아와 문을 열고 들어서던 크레이트가, 여관 뒤편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기합소리에 문을 도로닫고서, 기합소리의 주인공을 찾아 여관 건물을 돌아갔다.

땀에 젖은 금빛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뒤덮은 리아나가 온정신을 집중한 채로 검술을 펼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그녀의 움직임이 어딘가 요상했다.

너무나 느린 동작. 마치 춤을 추고 있는 듯, 그녀의 모습은 자못 우스꽝스럽게도 보였다. 한참을 그녀의 수련 모습을 바라보고 았자니 결국 인기척을 느낀 리아나가 고개를 돌린다.


"아! 크레이트님."


고개를 숙이는 리아나에게 크레이트가 다가갔다.


"방해를 하고 말았군요. 죄송합니다."


“아니예요. 이제 그만 두려던 참이었어요.”


“그런데....... 한 가지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리아나가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실례지만 지금 수련하고 계셨던 검술을 누구에게 사사받으신 건지 알 수 있을까요?"


그의 물음에 잠시 고민하던 리아나가 대답했다.


“아리시아님이요. 사실 아리시아님께 검술을 배운 건 채 한 달도 되지 않았구요. 어렸을 때는 아버지로 부터 배웠어요.”


하지만 이미 잔뜩 미간을 구긴 채 생각에 잠긴 크레이트에게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뒤에 말은 들리지도 않았다.

아리시아라는 이름의 사기꾼 마법사.


‘이제는 검술지도까지 한단 말인가? 정말 가지가지 사기를 치고 다니는 구나,’


순간 리아나가 한없이 가여워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에 잡힌 굳은살만 보아도 그녀의 노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알고도 남을 일. 그런 그녀의 노력이 한 명의 사기꾼에 의해 물거품이 될지도 몰랐다. 생각이 깊어질수록 크레이트의 미간에 잡힌 구김살의 골도 더욱 깊어져만 갔다.


“실례되는 말씀인 줄은 알지만 지금 익히시는 검술이 리아나님께 그다지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아 보이는 군요.”


뜬금없는 말에 리아나가 의아한 눈빛을 담아 그를 바라보았다.


“많이 이상한가요? 하긴 스승님께서도 누굴 가르쳐 본 건 처음이라고 하시긴 하셨어요.”


‘그래도 양심은 있구나.’


멋쩍게 웃으며 크레이트가 덧붙였다.


“이상하다기 보다....... 그러니까, 더 쾌적한 환경에서, 지금 배우고 계신 검술보다 더 좋은 검술을 배우실수 있는 길이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십여 년 전, 제국의 여마스터이신 사라님께서 여인들의 기사학교를 세우셨습니다. 그곳에 조금 연줄이 닿아 있는데 도와 드릴 수 있.......”


“아니요.”


갑자기 정색하며 거절을 표하는 리아나 때문에 중간에서 말을 끊은 크레이트가 난처한 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크레이트의 호의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라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타지아의 여관에서 만났던 사기꾼 사라가 떠올라 리아나는 더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전 지금도 만족해요. 또 아리시아님보다 뛰어난 여검사는 세상에 없어요. 전 행운아인 걸요.”


‘대체 그 사기꾼 여인이 이 어린 아이의 마음을 무엇으로 꼬드긴 것일까?’


크레이트의 고민이 점점 더 깊어만 갔다. 심각한 얼굴의 크레이트가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서 있자, 이내 어색하고 무거운 침묵이 찾아왔다. 미안해진 리아나가 크레이트에게 물었다.


“저 크레이트님의 오러는 왜 회색빛이죠?”


상념에서 깨어난 크레이트가 가만히 그녀의 말을 듣고 있다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우리 어둠의 기사는 일반 기사들과 그 수련 방법이 조금 다릅니다. 저희의 오러는 사실 오러라기 보다는 신력이거든요.”


리아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오러와 신력이 다른 건가요? 어제 뮬르켄을 무찌르시는 모습은 그냥 오러 같았는데.......”


크레이트의 입가에 조금은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오러는 수순한 수련의 결과이고 신력은 신께서 내려 주시는 힘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더 약한가요?”


“강약의 차이는 각자가 다르지요. 다만 신을 믿는 의지에 따라 더욱 강한 힘을 낼 수 있는 게 우리 어둠의 기사의 마기에요.”


잠시 생각에 잠겼던 리아나의 눈빛이 순간 반짝였다.


“그럼, 그 중에 여인들도 있나요?”


“어둠의 기사들 중에는 여인이 더러 있습니다.”


반짝이는 리아나의 눈을 바라보며 크레이트가 덧붙였다.


“하지만, 리아나님은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크레이트의 대답에 리아나가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


“왜요?”


그의 입가에 더욱 쓸쓸한 미소가 그려졌다.


“어둠의 기사가 된다는 것은 외롭고 힘든 길입니다. 어둠의 기사의 힘은, 신의 힘을 빌려오는 편법 같은 것이예요. 그래서 일반 기사들은 저희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크레이트 그도, 서른 살이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오러를 다루는 기사들과 대등한 힘을 얻었지만, 그것은 제국에서 조차 인정을 받지 못하는 반쪽짜리 힘이었다. 그래서 어둠의 기사는 아직 그에 따른 작위를 얻을 수 없었다. 해서 어둠의 기사에게 경이라는 호칭을 쓰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어둠의 사제들끼리 편의상 높여주는 의미로 쓰는 경우가 있었지만.

크레이트의 우려는 그저 우려 일뿐 리아나의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그녀는 이제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강해져야만 했으니까.

그때 여관 뒷문을 열고 길게 기지개를 켜며 미리가 나타났다.


“아가씨 식사하세요. 어? 크레이트님? 아! 어제 꿔간 숙박비 받으러 오셨구나. 새벽같이도 오셨네.”


크레이트를 바라보며 혀를 끌끌 차고 있는 미리에게 리아나가 다급한 걸음으로 다가가 물었다.


“미리, 스승님 어디 가셨는지 알아?”


턱이 빠져라 하품을 하며 주머니에서 금화를 꺼내 세고 있던 미리가 눈물이 맺힌 눈으로 리아나를 바라보다 건성건성 대답했다.


“뭐 언제 아리시아님이 밥을 드시던가요. 새벽같이 신전에 가셨어요. 도서관에요. 뭔 놈의 책을 그리 좋아하시는지. 밥도 안 드시고.......”


그러나 이미 리아나의 신영은 여관 건물을 돌아 큰길가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크레이트의 얼굴에 알 수 없는 그늘이 드리워졌다.


작가의말

  어제 올렸어야 했는데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내일 수요일에 올리고, 금요일에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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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의 아리시아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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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4월 연재를 잠시 쉬겠습니다. 19.04.27 37 0 -
72 제10장 - 당신이 사라 시헤리드로군요(10) 19.04.08 57 1 13쪽
71 제10장 - 당신이 사라 시헤리드로군요(9) 19.04.06 53 1 13쪽
70 제10장 - 당신이 사라 시헤리드로군요(8) 19.04.03 55 1 13쪽
69 제10장 - 당신이 사라 시헤리드로군요(7) 19.04.02 63 1 17쪽
68 제10장 - 당신이 사라 시헤리드로군요(6) 19.03.29 59 1 12쪽
67 제10장 - 당신이 사라 시헤리드로군요(5) 19.03.27 56 1 15쪽
66 제10장 - 당신이 사라 시헤리드로군요(4) 19.03.25 106 1 13쪽
65 제10장 - 당신이 사라 시헤리드로군요(3) +1 15.06.09 411 4 18쪽
64 제10장 - 당신이 사라 시헤리드로군요(2) +1 15.06.02 372 7 12쪽
63 제10장 - 당신이 사라 시헤리드로군요(1) 15.05.26 484 9 15쪽
62 제9장 - 어둠의 신전으로 모시겠습니다.(6) +1 15.05.18 403 7 16쪽
61 제9장 - 어둠의 신전으로 모시겠습니다.(5) +1 15.05.15 402 7 17쪽
60 제9장 - 어둠의 신전으로 모시겠습니다.(4) 15.05.13 477 10 20쪽
» 제9장 - 어둠의 신전으로 모시겠습니다.(3) 15.05.12 353 8 24쪽
58 제9장 - 어둠의 신전으로 모시겠습니다.(2) +1 15.05.05 428 4 20쪽
57 제9장 - 어둠의 신전으로 모시겠습니다.(1) +1 15.05.04 484 6 18쪽
56 제8장 - 모두 제국으로 가는 건가요?(10) +2 15.05.03 464 11 22쪽
55 제8장 - 모두 제국으로 가는 건가요?(9) +1 15.05.02 387 5 19쪽
54 제8장 - 모두 제국으로 가는 건가요?(8) 15.05.01 450 9 15쪽
53 제8장 - 모두 제국으로 가는 건가요?(7) +2 15.04.30 381 6 19쪽
52 제8장 - 모두 제국으로 가는 건가요?(6) +1 15.04.29 335 7 23쪽
51 제8장 - 모두 제국으로 가는 건가요?(5) +2 15.04.28 462 10 17쪽
50 제8장 - 모두 제국으로 가는 건가요?(4) +2 15.04.27 436 9 22쪽
49 제8장 - 모두 제국으로 가는 건가요?(3) 15.04.26 416 10 21쪽
48 제8장 - 모두 제국으로 가는 건가요?(2) 15.04.25 496 9 19쪽
47 제8장 - 모두 제국으로 가는 건가요?(1) +2 15.04.24 477 7 20쪽
46 제7장 - 이렇게 쉽게 끝날리가 없지(8) +2 15.04.23 503 15 19쪽
45 제7장 - 이렇게 쉽게 끝날리가 없지(7) +2 15.04.22 378 9 21쪽
44 제7장 - 이렇게 쉽게 끝날리가 없지(6) +2 15.04.21 548 11 23쪽
43 제7장 - 이렇게 쉽게 끝날리가 없지(5) 15.04.20 459 10 17쪽
42 제7장 - 이렇게 쉽게 끝날리가 없지(4) +1 15.04.19 526 11 17쪽
41 제7장 - 이렇게 쉽게 끝날리가 없지(3) 15.04.18 534 15 20쪽
40 제7장 - 이렇게 쉽게 끝날리가 없지(2) +3 15.04.17 511 14 17쪽
39 제7장 - 이렇게 쉽게 끝날리가 없지(1) 15.04.16 399 10 19쪽
38 제6장 - 므로도스가의 마법사이십니까?(9) +2 15.04.15 566 11 22쪽
37 제6장 - 므로도스가의 마법사이십니까?(8) +2 15.04.14 347 14 20쪽
36 제6장 - 므로도스가의 마법사이십니까?(7) 15.04.13 424 14 27쪽
35 제6장 - 므로도스가의 마법사이십니까?(6) 15.04.12 533 12 19쪽
34 제6장 - 므로도스가의 마법사이십니까?(5) +2 15.04.11 501 8 16쪽
33 제6장 - 므로도스가의 마법사이십니까?(4) 15.04.10 464 13 16쪽
32 제6장 - 므로도스가의 마법사이십니까?(3) +1 15.04.09 591 11 15쪽
31 제6장 - 므로도스가의 마법사이십니까?(2) +3 15.04.08 408 11 11쪽
30 제6장 - 므로도스가의 마법사이십니까?(1) +1 15.04.07 626 12 17쪽
29 제5장 - 제게 검술을 가르쳐 주실 수 없나요?(8) +1 15.04.06 562 9 18쪽
28 제5장 - 제게 검술을 가르쳐 주실 수 없나요?(7) 15.04.05 504 13 18쪽
27 제5장 - 제게 검술을 가르쳐 주실 수 없나요?(6) +1 15.04.04 449 11 14쪽
26 제5장 - 제게 검술을 가르쳐 주실 수 없나요?(5) +1 15.04.03 421 12 17쪽
25 제5장 - 제게 검술을 가르쳐 주실 수 없나요?(4) +2 15.04.02 550 14 17쪽
24 제5장 - 제게 검술을 가르쳐 주실 수 없나요?(3) +1 15.04.01 463 15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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