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을령 님의 서재입니다.

얼음의 아리시아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을령
작품등록일 :
2015.03.16 00:00
최근연재일 :
2019.04.08 22:19
연재수 :
72 회
조회수 :
37,657
추천수 :
775
글자수 :
553,977

작성
15.04.22 18:02
조회
378
추천
9
글자
21쪽

제7장 - 이렇게 쉽게 끝날리가 없지(7)

DUMMY

희미한 불빛에 반쯤 드러난 알카의 얼굴은 무척, 초취해 보여서 어딘가 병을 앓고 있는 사람 같았다. 그의 입에서 힘없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 자, 케뮤랑크의 검을 지키는 자와는 어떤 관계지?"


아무런 말도 없이 자신을 바라보며 서있는 아리시아에게 알카가 물었다. 아리시아의 눈이 아주 조금 가늘어졌다.

케뮤랑크의 검을 지키는 자, 말러를 이르는 것일까? 아니다, 검을 지키는 자라면 반마족, 아니면 적어도 신관을 이르는 그들만의 호칭, 세리안을 말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이자, 알카라는 이름의 반마족은 세리안을 만난 것이다.

세리안이 당했을까? 그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자는 검을 가지고 사라졌을 터였다. 세리안은 이곳 가까이에 있었다. 아리시아에게서 그녀답지 않은 조급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그를 만났나요?"


알카는 잠시 아리시아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어디에 있지요?"


알카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쩌면, 그녀는 검을 지키는 자는, 아닐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협상이 가능할지도 몰랐다. 아니 자신의 편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대는 검을 지키지 않나?"


아리시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검을 지킨다는 것. 아리시아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검을 지키고 있는가?


"난, 검을 지키지 않아요."


"그렇군. 아직 어디에도 뜻을 두지 않은 반마족이 남아있었다니, 반갑군."


아리시아와 알카의 눈이 마주쳤다. 알카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그런 알카를 바라보며 아리시아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난 반마족이 아닙니다."


미소를 머금고서 막, 무언가 입을 열려던 알카의 얼굴이 그대로 굳어졌다.


"반마족이…… 아니라고?"


아리시아는 작게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그런데……."


그런데 어떻게 그리 강할 수가 있는거지? 오랜 시간, 자신과 함께 했던 샤렛은 반마족 중에서도 꽤나 이름이 알려진 자였다. 나이는 어렸지만, 그 마성은 누구보다 짙어서, 그것을 자제하지 못하고 마치 폭주를 일으키는 마족처럼 날뛰기 시작하면 진정시키는 것도 만만치가 않았다. 더군다나 그러다, 무기라도 꺼내 드는 날이면 어떻게든 피를 봐야 직성이 풀릴 만큼 그 성격도 흉폭 하기 이를 데가 없는 자였다. 그런 실력자의 목을 단 한 번의 칼질로 날려버린 그녀였다. 보석처럼 빛이 나는 얼음 속성의 검을 만들어 내는 자. 알카는 이내 표정을 바로하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 중에서 그대처럼 강한 자는 좀처럼 만나보기 힘들어서 말이야."


특이한 능력을 지닌 여인. 그녀를 바라보는 알카의 얼굴에 착잡함이 스쳐지나갔다.


"우리를 도울 일은 없겠군."


아리사아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런 아리시아를 잠시 바라보다, 알카는 고개를 내저으며 한 발 앞으로 걸어 나왔다. 조금 가까워진 촛불에 그의 금빛 눈동자가 날카롭게 반짝였다.


"어쩔 수 없는 건가?"


3일 전, 그는 수도 근처, 센토나 강가에서 세리안과 마주쳤다. 단 한 번의 격돌이 있었고, 그는 무참히 패해 큰 부상까지 입고 말았다. 지금은 겉으로 보이는 상처가 모두 아문 상태였지만, 아직, 약간의 후유증이 남아 휴식을 취하고 있는 중이었다.

알카는 아리시아를 노려보며 한 팔을 들어 올렸다. 몸은 아직 회복되지 않았고, 그녀가 샤렛의 목을 벤 강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도 물러 설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사위는 다시 고요 속에 파묻혔고, 아리시아와 알카의 주위로 진한 긴장감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오른쪽 팔을 들어 올리는 금발의 반마족을 바라보며 아리시아는 아무 말 없이 철봉을 앞으로 들어 올렸다. 그에게서는, 전에 만났던 반마족여인처럼 아무런 무기도 보이지 않았다. 무슨 공격이 들어올까? 이제 겨우 두 명의 반마족을 상대해 본 그녀였지만, 그들의 위험성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어려운 것은 공격방법을 예측할 수 없다는 것.

남자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아리시아는 알카를 노려보았고, 알카는 그런 그녀를 또한 무시하지 못하고 빈틈을 찾아 금빛의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곧, 가늘게 떠져있던 알카의 눈이 번쩍 떠지고, 그의 몸이 조금씩 부풀어 올랐다. 그리고 천천히 그의 몸이 눈앞에서 사라져가기 시작했다. 아니 사라져가는 것이 아니었다. 어둠속에서, 마치 그 속으로 빨려들 듯이, 같은 색으로 변하며 스며들어 가고 있었다. 검은 색으로 물들고 있는 그의 피부가 어느새 주위를 잠식하고 있는 어둠 속에 파묻혀, 이제는 그가 입고 있는 옷만이 남아버릴 때쯤, 복도를 밝히고 있던 몇 개의 촛불이 일시에 꺼졌다. 순간, 복도는 완전한 어둠에 휩싸였고, 그와 동시에 무언가가 아리시아를 향해 빠른 속도로 날아들었다. 보통, 사람의 머리보다도 더 커다란 주먹이 아리시아의 가슴을 강타했다. 주먹이 가슴에 들어맞는 그 순간 아리시아가 자신의 가슴을 얼음으로 감싸지 않았다면 큰 타격을 입었을, 갑작스러운 공격이었다.


겨우 공격을 막아낸 아리시아가 몸을 살필 사이도 없이 또다시 나타난 주먹이 이번에는 아리시아의 얼굴을 향해 날아왔다. 이번에는 철봉을 휘둘러 커다란 주먹을 후려쳐 막아냈다. 하지만 금세, 다시 눈앞에 나타난 주먹이 이번에는 아리시아의 발밑으로 날아들었다. 급히 뒤로 몸을 굴려서 피하자, 곧 그녀가 서 있던 곳에서 커다란 굉음과 함께 강한 진동이 울려 퍼졌다. 천장에서 돌조각들이 떨어지며 만들어 낸 먼지구름이 사위를 뒤덮었다. 그러나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아리시아는 그 후로도 계속해서 날아드는 무수한 주먹을 쳐내거나, 묘기와 같은 재빠른 동작으로 피해내야만 했다.

사람 두 명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서 겨우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의 좁은 복도에서 커다란 크기의 주먹이, 마치 수십 명의 사람들이 달려드는 것처럼 연속해서 날아들었다. 아리시아가 얼음의 방패로 막고, 철봉으로 쳐내도 잠시 주춤 할 뿐, 주먹은 아무런 타격도 받지 않는지, 계속해서 나타나 아리시아의 온몸을 무차별로 공격했다.


어둠속에서 갑작스럽게 나타나 달려드는 공격에 아리시아도 처음에는 적지 않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상한 점은, 아리시아를 향해 날아드는 커다란 주먹의 실체가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사실 아리시아에게 어둠은 그다지 큰 장애가 되지 못했다. 마치 대낮처럼 사물을 구별할 수 있었고, 그래서 촛불이 꺼지는 그 순간에도 아리시아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그러나 버젓이 자신의 앞에 서 있던 알카의 몸은 사라지고 정말, 그녀의 동체가 따라잡지 못할 만큼 빠른 속도로 갑작스럽게 커다란 주먹이 공격을 가해온 것이었다.

아리시아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사이, 그녀의 등 뒤에서 또다시 주먹이 날아들었다. 급히 몸을 돌린 아리시아가 빠르게 뒤로 몸을 날리며, 자신의 가슴 깨를 향해 날아드는 주먹을 향해, 이번에는 그녀가 낼 수 있는 가장 강한 힘을 넣어서 세차게 철봉을 꽂아 넣었다. 검은색의 커다란 주먹에 아리시아의 철봉이 정확하게 꽂혔다. 얼음의 창날이 달린 철봉에 꼬치처럼 꽂힌 후에야, 급기야 모습을 드러낸 주먹은 마치 살아있는 문어가 움직이는 것처럼 손가락을 꿈틀거리다가 곧 차갑게 얼어버리며 움직임을 멈추었다. 아리시아는 그 얼어버린 거대한 손을 바라보다 그것을 바닥을 향해 힘차게 내리쳤다. 그러자 유리처럼 산산이 깨어져 바닥으로 흩어진 조각들이 검게 물들더니 이내 사라져 버렸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든 아리시아가 천천히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아무리 주의를 기울여 봐도 주먹의 주인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이처럼 빠를 수가 있지?

자신의 눈을 피해 숨어버린 반마족의 움직임에 아리시아도 긴장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와 같은 공격이 몇 번 더 이루어진다면, 꼭 이긴다는 보장을 할 수 없었다. 다시 돌아올 공격을 기다리며 복도 곳곳을 둘러보는데도 어쩐 일인지 알카의 공격은 더 이상 없었다.

계속 이어지는 정적.

어디로 숨어버린 거지?

마치 이곳에서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아니 정말 이곳에는 없다. 문득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든 아리시아가 급히 복도 끝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한달음에 계단을 뛰어내려온 메르넨은, 그러나 입구에서 몸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십여 명의 병사들이 말러와 용병들을 포박한 한 채로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메르넨은 입구 계단 쪽, 돌기둥 틈에 몸을 숨기고서 용병들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별다른 외상은 없이, 건강한 모습들이었고, 말러도 특별히 손에 은빛 수갑이 채워져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건강해 보였다. 간간이 들려오는 병사들의 이야기 소리로는 곧, 그들을 어딘가로 끌고 이동할 모양인 듯 했다. 머리 위에서는 아리시아와 의문의 남자가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 소리는 점점 격해지고 있었다. 아직은 그녀 말고는 눈치 챈 사람이 없었지만 곧 그들도 알아차리게 될 것이 분명했다. 어찌할 바를 몰라 머리를 굴리고 있는 그녀의 눈에 감옥 안, 계단 끝에 놓인 짐 꾸러미가 눈에 들어왔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대원들이 가지고 있던 가방과 무기들이 대부분, 그곳에 고스란히 놓여 있었다. 메르넨은 조심스럽게 몸을 옮겨 그곳으로 향했다.



"우릴 어쩔 생각이오?"


말러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병사의 머리 틈으로 마법사 아웬을 바라보며 물었다.


"알 것 없소. 그저, 이제 당신의 어리석음을 깨달을 차례라는 것만 알아두시오."


말을 마친 마법사의 로브 속에서 아주 작은 비웃음이 흘러나왔다.


"이제 가자."


아웬이 막 몸을 돌리려고 할 때, 머리 위에서 커다란 굉음이 터져 나오며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 건물이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어디선가 날아든 은빛 도끼에 아웬의 옆에 서 있던 병사의 머리가 갈라졌다. 그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시퍼런 날이 선 검이 아웬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인질로 잡아야만 한다.’


마법사는 주문을 외울 사이 없이 날아드는 기습에 약할 수밖에 없었다. 마법사를 향해 날아드는 검의 주인, 메르넨의 머릿속은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바로 마법사의 목 앞에서 검은 무언가에 부딪쳐 튕겨져 나왔고, 그 힘을 이기지 못한 메르넨 역시 저 멀리 날아가 바닥을 나뒹굴고 말았다.


그녀의 기습은 제법 훌륭했지만, 마법사 아웬은 이미 4서클에 들어선 마법사였다. 마법사에게 4서클의 등급이 가지는 의미는 남다른 것이었다. 1,2서클의 마법사가 그냥 마법사라는 칭호를 받는, 그저, 조금 특별한 능력을 지닌 자들이라고 한다면, 3서클은 누군가에게 마법을 가르칠 만큼의 능력을 지녔다는 것이고, 4서클의 마법사는, 그 완숙도를 인정받는 경지로, 기사로 치면 일종의 오러를 다루는 자만큼의 실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경지라 할 수 있었다. 5서클만 되어도 그 대우가 소위, 마스터라고 불리는 기사만큼의 대우를 받는 것을 감안하면, 4서클의 마법사인 그를 용병인 그녀가 홀로 상대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바닥에 쓰러졌다가 재빨리 몸을 일으키는 메르넨을 바라보며 마법사 아웬의 입에서 욕설이 쏟아져 나왔다.


"이건 또 웬 미친년이냐. 저년을 당장 잡아."


그의 명령에 그의 옆에 서 있던 병사들이 그녀를 향해 달려들자, 메르넨이 그런 병사들을 마주보며 검을 들어올렸다.


“자, 잠깐!”


막, 병사들이 메르넨을 향해 검을 내려치려는 순간, 그들을 막는, 아웬의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마법사 아웬이 메르넨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것이냐. 그 분은? 그 분은 어쩌고 네가 여기 있는 것이냔 말이다."


뜬금없는 소리에 의문에 찬 얼굴을 들어 올릴 뿐, 메르넨은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잠시잠깐, 분노한 나머지 여인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지만, 이내 이성을 찾은 마법사 아웬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왕자가 데려온 손님이라는 금발의 남자가 왜 여인을 원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눈앞의 검은머리 여인을 귀하게 여긴다는 것은 이미 아는 바, 왕자마저도 그의 앞에서는 한풀, 기가 꺾인 채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모습을 그는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었다.

병사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녀를 에워싸고 서있는 사이, 아웬 역시,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당신은 누구죠?"


메르넨이 로브 속에서, 살짝 모습을 드러낸 아웬의 각진 턱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나 그녀가 그에 대한 대답을 듣기도 전에 그녀의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오르는가 싶더니 누군가의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아왔다. 고개를 돌려 자신의 몸을 감아올린 자를 바라보니 온통 검은 얼굴빛의 금발의 남자가 금빛 눈동자를 번득이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메르넨은 자신도 모르게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그녀는 자신을 안고 있는 이 금발의 중년인이 조금 전, 보았던 그 자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커다란 덩치의 금발머리 남자는 그녀가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를 품속에 안고서 마치 나는 듯이 뒤돌아서 달려가기 시작했다.


"메르넨 고개를 숙여요."


외마디 비명을 지른 후에도, 뻣뻣하게 굳은 몸 때문에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저 멍한 얼굴로 남자의 품에 안겨있던 메르넨의 귓가에 아리시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황을 파악했다거나, 그녀를 믿어서 고개를 숙인 것이 아니라 정말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 머리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저절로 숙여졌다. 그리고 찰나의 순간, 메르넨의 머리 위로 무언가가 휙, 하고 지나쳐 갔다. 차가운 대검이 지나치며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 몇 가닥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빗나갔다.

아리시아는 다시 검을 그었다.

목, 단 번에 목을 베어야만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녀의 대검을 알카의 커다란 왼 손이 움켜잡았다. 검은색의 거대한 손에 잡힌 얼음의 검은 아리시아의 힘으로도 도저히 움직일 수 없었다. 아리시아의 눈이 조금 커졌다. 적어도 힘으로 대적할 만한 상대가 있으리라고는 생각해 보지 못했던 그녀였다. 알카의 입가에 연한 미소가 그려졌다. 바로 그때, 그가 채 그 미소를 거두어 들이기도 전에, 아리시아의 어깨 위에 차가운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더니 무언가가 빠르게 그의 얼굴을 향해 날아들었다. 깜짝 놀라 다급히 고개를 돌려 피해보았지만, 그보다 빨리 날아든 그것이 알카의 왼쪽 눈에 정확하게 날아가 박혔다. 얼음으로 만들어진 은빛의 창이 회전을 멈추지 않고 알카의 눈을 파들어 가고 있었다. 알카의 입에서 철판을 긁는 것 같은 외마디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손이 없는 오른 팔로 메르넨의 허리를 감고 있으면서도 그는 메르넨을 놓지 않았다. 이윽고, 얼음의 창이 사라지고, 알카의 눈에서도 검은 핏물이 멈추었다.

어느새 알카의 손에서 검을 빼낸 아리시아가 한쪽 눈을 잃은 알카를 향해 다시 얼음의 검을 들어올렸다. 그 때, 알카의 품에 안겨 있던 메르넨이 지금 것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알카의 눈에서 쏟아진 검은 핏물을 온통, 뒤집어 쓴 메르넨의 얼굴에서 감겨 있던 눈이 떠졌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검은 물을 뒤집어 써 검게 변한 그녀의 얼굴에 떠진 눈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곧, 검은 물이 묻어 있던 그녀의 얼굴이 이제는 붉은 물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은 물론 콧구멍과 귀, 입에서 붉은 피가 계속해서 쏟아져 나왔다. 마치 이지를 상실한 사람처럼 멍한 얼굴로 피를 토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너무나 괴기스러워서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다리에 힘이 풀릴 지경이었다.


“메르넨!”


라크의 외침이 들려왔다. 온몸이 쇠사슬로 꽁꽁 묶인 라크와 용병대원들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런 그들을, 놀란 병사들은 누구도 나서서 막지 못했다.

그때 쯤, 알카의 품에서 피를 쏟아내던 메르넨의 얼굴이 다시 검은 물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붉은 피가 검게 변한 것이었다.


“대체 메르넨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라크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지만, 누구도 그에 대해 답을 할 수 없었다. 그저, 라크를 잠시 바라보던 알카가 메르넨을 어깨에 둘러매고는 남은 한 팔을 아리시아를 향해 휘둘렀다. 마치 미사일이 발사되는 것처럼 알카의 팔뚝에서 팔이 떨어져 나가 아리시아를 향해 날아들었다. 날아가는 주먹은 점점 더 거대해지기 시작했다. 조금 전 아리시아가 부수었던 주먹과는 비교도 될 수 없을 만큼 크고 강력했다. 아리시아는 이번에도 얼음의 창을 만들어 그 주먹을 향해 힘껏 내리 꽂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주먹을 꿰뚫지 못하고, 오히려 주먹에서 튕겨진 철봉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그와 함께 온몸을 뒤덮으며 날아든 주먹에 맞아 아리시아의 신영이 저만치 벽을 뚫고 날아가 박혔다. 그 충격에 사방으로 돌무더기들이 떨어져 내렸다.


“아리시아님!”


이번에는 말러의 외침소리가 감옥 안을 들썩였다. 그러나 그의 메아리가 채 멈추기도 전에, 벽을 헤치며 모습을 드러내는 아리시아를 바라보며, 끌끌 혀를 내차던 알카가 어느새 회복되어 있는 왼 팔로 메르넨을 떠받치고는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계단을 뛰어올라 사라져버렸다.


"메, 메르넨!"


라크의 외침이 다시 한 번 울려 퍼지고, 아리시아의 신영이 급히 알카의 뒤를 따라 붙었다. 그러나 그녀는 곧,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알카가 빠져나간 계단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수십 번의 폭발음이 연속해서 울리더니 지금까지 느꼈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큰 진동이 건물 전체를 뒤흔들기 시작했다. 계단에서 뛰어 내려온 아리시아의 머리 위로 흙먼지가 쏟아져 내리더니 점점 더 커다란 돌덩이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무, 무너진다.”


천장과 벽이 쩍쩍, 소리를 내며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제야 사태를 파악한 병사들이 저마다 소리를 지르며 계단으로 달려가 무너져 내린 돌들을 치웠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건물이 무너지고 있어. 이대로 있으면 압사당하고 만다.”


라크의 옆에서 붉은 머리의 용병이 소리쳤지만, 온몸이 줄줄이 엮인 말러와 용병대원들은 울렁거리며 흔들리는 땅 위에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결국 중심을 잃고 바닥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 위로 돌무더기들이 마구 떨어져 내렸다.

잠시 무너져 내린 입구를 바라보고 서 있던 아리시아가 말러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리고는 그들의 머리 위로 쏟아지는 거대한 벽돌들을 하나하나 쳐냈다. 입구에서 돌을 치우던 몇 명의 병사들이 무너져 내린 돌덩이에 맞아 쓰러졌다. 점점 그 정도가 심해져 이제는 정말 천장 전체가 내려앉을 판이었다.

늘 침착하기만 하던 아리시아도 지금은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저택이 무너져 내린다고 해도, 그녀는 죽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구해낼 방법은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모두가 절망에 빠져 바닥에 엎드려 몸을 웅크리고 있을 때, 머리 위로 떨어지는 거대한 돌을 철봉으로 쳐낸 아리시아가 무너져 내리는 천장을 자신도 모르게 손을 들어 올려 받치고는 야앗,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그 순간, 금방이라도 사람들을 깔아뭉개 버릴 것만 같던 천장이 그 상태에서 움직임을 멈추었다. 머리 아래로 쏟아져 내리던 돌무더기와 흙먼지들이 순간에 멈추고 사위를 뒤덮고 있던 먼지가 걷히기 시작했다. 아직도 머리 위에서는 무언가 무너지고 부서지는 소리가 연신 들려왔지만, 적어도 이곳,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어둠이 내리깔린 감옥 안에서는, 어떠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곧 저택 전체가 모두 무너져 내렸는지 밖에서 들려오던 소음마저 멎어버리고, 고요가 찾아들었다. 먼지마저 모두 가라앉았는지 숨 쉬는 것도 이제는 나아졌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무슨 일인지 알 길이 없는 사람들이, 하나 둘,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2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얼음의 아리시아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4월 연재를 잠시 쉬겠습니다. 19.04.27 37 0 -
72 제10장 - 당신이 사라 시헤리드로군요(10) 19.04.08 57 1 13쪽
71 제10장 - 당신이 사라 시헤리드로군요(9) 19.04.06 53 1 13쪽
70 제10장 - 당신이 사라 시헤리드로군요(8) 19.04.03 55 1 13쪽
69 제10장 - 당신이 사라 시헤리드로군요(7) 19.04.02 63 1 17쪽
68 제10장 - 당신이 사라 시헤리드로군요(6) 19.03.29 59 1 12쪽
67 제10장 - 당신이 사라 시헤리드로군요(5) 19.03.27 56 1 15쪽
66 제10장 - 당신이 사라 시헤리드로군요(4) 19.03.25 106 1 13쪽
65 제10장 - 당신이 사라 시헤리드로군요(3) +1 15.06.09 411 4 18쪽
64 제10장 - 당신이 사라 시헤리드로군요(2) +1 15.06.02 372 7 12쪽
63 제10장 - 당신이 사라 시헤리드로군요(1) 15.05.26 484 9 15쪽
62 제9장 - 어둠의 신전으로 모시겠습니다.(6) +1 15.05.18 403 7 16쪽
61 제9장 - 어둠의 신전으로 모시겠습니다.(5) +1 15.05.15 402 7 17쪽
60 제9장 - 어둠의 신전으로 모시겠습니다.(4) 15.05.13 477 10 20쪽
59 제9장 - 어둠의 신전으로 모시겠습니다.(3) 15.05.12 353 8 24쪽
58 제9장 - 어둠의 신전으로 모시겠습니다.(2) +1 15.05.05 428 4 20쪽
57 제9장 - 어둠의 신전으로 모시겠습니다.(1) +1 15.05.04 484 6 18쪽
56 제8장 - 모두 제국으로 가는 건가요?(10) +2 15.05.03 464 11 22쪽
55 제8장 - 모두 제국으로 가는 건가요?(9) +1 15.05.02 387 5 19쪽
54 제8장 - 모두 제국으로 가는 건가요?(8) 15.05.01 450 9 15쪽
53 제8장 - 모두 제국으로 가는 건가요?(7) +2 15.04.30 381 6 19쪽
52 제8장 - 모두 제국으로 가는 건가요?(6) +1 15.04.29 335 7 23쪽
51 제8장 - 모두 제국으로 가는 건가요?(5) +2 15.04.28 462 10 17쪽
50 제8장 - 모두 제국으로 가는 건가요?(4) +2 15.04.27 436 9 22쪽
49 제8장 - 모두 제국으로 가는 건가요?(3) 15.04.26 416 10 21쪽
48 제8장 - 모두 제국으로 가는 건가요?(2) 15.04.25 496 9 19쪽
47 제8장 - 모두 제국으로 가는 건가요?(1) +2 15.04.24 477 7 20쪽
46 제7장 - 이렇게 쉽게 끝날리가 없지(8) +2 15.04.23 503 15 19쪽
» 제7장 - 이렇게 쉽게 끝날리가 없지(7) +2 15.04.22 379 9 21쪽
44 제7장 - 이렇게 쉽게 끝날리가 없지(6) +2 15.04.21 548 11 23쪽
43 제7장 - 이렇게 쉽게 끝날리가 없지(5) 15.04.20 459 10 17쪽
42 제7장 - 이렇게 쉽게 끝날리가 없지(4) +1 15.04.19 526 11 17쪽
41 제7장 - 이렇게 쉽게 끝날리가 없지(3) 15.04.18 534 15 20쪽
40 제7장 - 이렇게 쉽게 끝날리가 없지(2) +3 15.04.17 511 14 17쪽
39 제7장 - 이렇게 쉽게 끝날리가 없지(1) 15.04.16 399 10 19쪽
38 제6장 - 므로도스가의 마법사이십니까?(9) +2 15.04.15 566 11 22쪽
37 제6장 - 므로도스가의 마법사이십니까?(8) +2 15.04.14 347 14 20쪽
36 제6장 - 므로도스가의 마법사이십니까?(7) 15.04.13 424 14 27쪽
35 제6장 - 므로도스가의 마법사이십니까?(6) 15.04.12 533 12 19쪽
34 제6장 - 므로도스가의 마법사이십니까?(5) +2 15.04.11 501 8 16쪽
33 제6장 - 므로도스가의 마법사이십니까?(4) 15.04.10 464 13 16쪽
32 제6장 - 므로도스가의 마법사이십니까?(3) +1 15.04.09 591 11 15쪽
31 제6장 - 므로도스가의 마법사이십니까?(2) +3 15.04.08 408 11 11쪽
30 제6장 - 므로도스가의 마법사이십니까?(1) +1 15.04.07 626 12 17쪽
29 제5장 - 제게 검술을 가르쳐 주실 수 없나요?(8) +1 15.04.06 562 9 18쪽
28 제5장 - 제게 검술을 가르쳐 주실 수 없나요?(7) 15.04.05 504 13 18쪽
27 제5장 - 제게 검술을 가르쳐 주실 수 없나요?(6) +1 15.04.04 449 11 14쪽
26 제5장 - 제게 검술을 가르쳐 주실 수 없나요?(5) +1 15.04.03 421 12 17쪽
25 제5장 - 제게 검술을 가르쳐 주실 수 없나요?(4) +2 15.04.02 550 14 17쪽
24 제5장 - 제게 검술을 가르쳐 주실 수 없나요?(3) +1 15.04.01 463 15 16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