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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령 님의 서재입니다.

얼음의 아리시아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을령
작품등록일 :
2015.03.16 00:00
최근연재일 :
2019.04.08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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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3.16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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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프롤로그

DUMMY

나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맑고 투명한 눈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디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까. 한참의 시간이 흘렀건만 그의 모습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마치 유리로 만든 석상처럼 조금의 움직임도 없이 나를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아마 내가 입을 열기 전까지는 저 모습 그대로 가만히 앉아 기다려줄 것만 같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참으며 낮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저의 이름은 이주은, 그러나 전······, 인간이 아닙니다.”


나는 그렇게 시작하기로 했다. 그는 아주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그렸다. 그 순간 나는 내가 무언가를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지금이 아니면 더 이상 누구에게도 내 자신에 대해 진실되게 이야기하지 못할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리고는 아주 먼 과거의 한 기억부터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내가 살던 곳, 그곳을 우리는 지구라고 불렀습니다.”


지금은 없는 별. 너무나 아름다운, 아니 아름다웠던 별. 나의 고향.

나는 내 눈으로 그 지구가 사라지는 것을 지켜봐야만했다. 그게 벌써 수백 년 전의 일이다. 눈앞에 떠오른 지구의 마지막 모습을 지우려 나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제 나이는······. 그러니까 제가 태어난 것은 그곳의 시간으로 정확히 사백칠십이 년 전이었습니다. 한국이라는 나라의 작은 도시 여주가 제가 태어난 고향입니다. 어릴 적, 저는 그다지 눈에 띠는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다만 제가 태어나 일곱 살이 될 때까지 전 아버지의 얼굴을 보지 못했습니다. 어머니께서 말씀하시길 아버지는 누명을 쓰고서 감옥에 투옥되신, 그러나 나라를 위해 싸우신, 훌륭한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머니에게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은 탓에 희생이란 말이 무엇인지, 정의로움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던 저였지만 아버지는 제 우상이었고, 믿음이었습니다.”


아무리 감정을 담아보려고 해도 이제는 감정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느낌마저 생경해서 무덤덤했다. 이렇게 아무런 감정도 없이 털어놓는 이야기가 그에게 제대로 전달 될 수 있을까? 순간 떠오른 의문에 나는 잠시 숨을 고를 수 밖에 없었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학교에 입학 할 나이가 되었을 때,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내 눈앞에 나타난 아버지는 그저 알콜에 중독된 술주정뱅이에 불과했습니다. 무심하던 그의 눈빛을 처음 대했을 때, 그때부터 저의 인생은 백팔십도로 달라졌습니다. 그동안 작은 분식점을 운영해 생활하던 어머니는 날마다 그의 술값과 도박비로 하루 매상의 대부분을 날려야했고, 그렇게 일 년쯤이 지난 후부턴 시도 때도 없이 시작되는 매질까지 견뎌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린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행여 매를 맞지 않는 날은 아버지의 술잔에 부어지는 술 소리가 멈출 때까지 잠을 이루지 못할 만큼 그렇게 많이 맞았습니다. 우상은 그렇게 사라졌습니다."


거기에서 말을 잠시 끊고서 나는 다시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언젠가 보았던 얼음조각상처럼 반짝거리는 그의 투명한 눈은 여전히 내게 고정되어 있었다. 나는 표현할 수 없는 낯선 기분을 접어두고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리고 그날, 반복되던 일상처럼 늦게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들어오자마자 냉장고를 뒤져 꺼낸 술을 병째 들이마시기 시작했습니다. 어디서 누군가에게 맞았는지 그의 눈가에는 시퍼런 멍 자국이 나 있었고, 터져나간 입술에서는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단숨에 술 한 병을 들이 킨 아버지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어머니를 향해 발길질을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이유도 모른 채 어머니는 갑자기 시작된 매질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했습니다. 접시가 날아가 깨지고, 낡은 싱크대 선반이 무너져 식기들이 모두 쏟아졌습니다. 그날 아마 아버지는 미쳤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버지의 발길질을 참아내던 어머니는 혼절해서 숨 조자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지만 아버지의 발길질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어머니를 향해 쏟아졌습니다. 참다못한 저는 그런 아버지에게 달려들고 말았습니다. 그때는 그저 아버지를 말려야한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어머니에게 달려가 어머니를 감싸 안았습니다. 아버지의 발길질, 주먹질이 저의 등으로 머리로 온몸을 가리지 않고 가해졌습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흐르자 아버지는 ‘다 죽여 버리겠어.’ 하고, 소리치며 조리대에 놓인 식칼을 뽑아들었습니다. 그때 저는······.”


나는 잠시 말을 끊고 앞에 앉아있는 존재의 얼굴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잔잔한 미소가 드리워져있었다. 마치 재미있는 동화 한 편을 듣고 있는 사람의 표정 같았는데 그것이 오히려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극히 의외의 일인데, 어릴 적 어머니에게서 받았던 것을 제외하고는 처음 느껴보는, 그런 기분이었다. 이 사람이 내 진짜아버지인지도 모른다. 나는 아주 잠깐 그런 터무니없는 생각을 했다.


“전, 그저 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아버지의 몸 어딘가를 그저 힘껏 밀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아버지는 죽었습니다. 그것도 마치 냉동고 속에 들어 가 있는 고깃덩이처럼 딱딱하게 얼은 채로 죽어버렸습니다. 집 안은 마치······.”


나는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차가운 냉풍이 불어오는 이곳은 희미하게 세어 들어 온 빛이 벽면에 얼어붙은 얼음들을 비추어 사방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었다.


“이곳처럼 하얀 성애로 가득 덮여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아버지를 바라보다가 전 혼절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그도 주위를 한 번 아주 조금의 고개 짓으로 바라보고는, 역시 아주 미세한 동작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깊은 잠에서 깨어났을 때, 제일먼저 보인 것은 하얀 가운을 입은 여러 명의 어른들이었습니다. 제 몸은 병원의 수술대 같은 곳에 발가벗겨진 채로 묶여있었습니다. 전 그곳에서 여러 가지 검사를 받았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저에게는 평범하지 않은 초능력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무언가를 한순간에 얼려버리는 알 수 없는 힘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일 년여를 보내는 동안 저는 그저 평범한 아홉 살 여자아이였습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에 제가 입원해 있던 병원으로 푸른 눈의 남자가 찾아왔습니다. 전 그를 따라 스위스의 어느 작은 마을로 갔습니다. 파렌이라는 그곳에는 스물일곱 명의 남녀가 있었습니다. 그중에선 제가 제일 어렸습니다. 처음에는 말도 통하지 않는 먼 곳까지 흘러가게 된 이유를 알 수 없어 오랫동안 우울해했습니다. 하지만 곧 알 수 있었지요. 그들은 모두 저처럼 무언가 특별한 능력을 지닌 초능력자들이었습니다. 저를 데리고 온 남자는 스코틀랜드인이었는데 서른두 살의 잘생긴 남자였습니다. 그는 강한 열을 발출해 무언가를 녹여낼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붉게 변한 그의 손안에서 녹아내리는 쇳덩이를 처음 보았을 때, 놀라고 있는 제게 지어준 그의 미소는 참······.”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리다 "아름다웠습니다." 하고 말을 끝마쳤다. 앞의 존재는 그쯤에서 한 번, 처음으로 소리 내 웃었다. 나는 그때서야 내가 했던 말을 되새기고는 무언가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딱히 무엇이라고 말을 할 수는 없지만 만약 내게 인간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면 얼굴이 붉어졌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나는 서둘러 말을 이었다.


“얼마 후 전 초능력자들이 모인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한 명의 예언가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아콥슨. 그가 어느나라 사람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발견 된 것은 알 수 없는, 지구에는 없는 광물로 된 커다란 비석이였고, 그 비석에는 서기2000년 이 후 지구에 일어나게 될 일들이 상세하게 기록되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록의 마지막 줄에는 십년 후, 그러니까 2029년 외계의 생물에게 공격받는 지구의 모습이 예언되어있었습니다. 그 비석에는 이미 십여 년의 세월이 정확하게 기록되어져 있었으므로 남은 이십 년의 기록을 의심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세계의 지도자들은 그에 따른 여러 가지 방비책을 강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무기를 개발하고, 먼 곳으로 우주선을 띄워 보내고, 지구 주위의 다른 행성들을 탐사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우리 같은 초능력자들을 양성하는 것도 그 계획들 중 하나였습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자신의 능력을 계발하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중국의 도인에게서 비전의 무술을 익혔고, 사격술과 폭탄 제조술을 익혔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 저의 힘을 제어하는 법을 익혔습니다. 처음 저의 의지로 한 일은 컵 안에 있는 물을 얼리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얼음탁자 위에 놓인, 역시 얼음으로 된 컵을 들었다. 컵에는 반쯤, 물이 담겨 있었는데 내가 약간의 냉기를 흘려보내자 얼음으로 된 컵과 하나가 된 듯이 얼어버렸다. 나는 컵을 앞의 존재에게 내 밀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내 눈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괜히 허탈해진 나는 컵을 내려놓고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이런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전 정말 놀랐습니다. 그리고 그 힘이 제 인생을 바꾸어 놓을 것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십년의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그리고 꼭 십년 째 되던 날, 정말 그들이 지구를 습격해 왔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카자르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의 모습은 인간과 매우 흡사했고 키가 두배쯤 켰으며 온 몸에 황금빛 털이 나있었습니다. 처음, 우리는 자신 있게 그들에게 대항했습니다. 하지만 그 후 다시 채 일 년도 지나지 않아 우리는 결국 허망하게 패하고 말았습니다. 지구에 살고 있던 인구의 팔할 이상이 사라지고 초능력자들 중 스물두 명이 적에게 당해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지구는 그들의 발아래 놓였습니다. 살아남은 인간들은 카지르인의 노예가 되었고, 지구의 모든 나라는 파멸했습니다. 하지만 그 마지막전투에서도 저는 살아남았습니다. 아니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죽었지만 다시 살아났습니다.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된 저를 지구의 과학자들이 살려냈습니다. 남은 여덟 명의 초능력자들 중 네 명이 반기계의 몸으로 만들어진 사이보그가 되었습니다.”


나는 다시 말을 끊고서 고개를 들었다. 사이보그라는 말을 조금 더 설명해 주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서였다. 나는 잠시 동안 앞의 존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앞의 존재는 역시 잔잔한 미소가 머문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만 있을 뿐, 더 이상의 어떤 의문도 나타내지 않았다. 잠시 망설이다가 나는 설명을 포기하기로 했다. 그리고 남은, 마지막 이야기를 마저 끝냈다.


“다시 십여 년 동안의 미미한 저항을 우리는 멈추지 않고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조금의 성과도 없이 우리의 저항은 끝에 다다랐습니다. 결국, 마지막 날, 끝까지 살아남은 다섯 명의 초능력자들은 마지막 계획을 세웠습니다. 피닉스라고 이름 붙여진 핵폭탄을 몸에 두르고 카자르인의 중앙기지로 잠입하는 계획이었습니다. 그 계획이 세워지던 마지막 밤, 마지막 점검을 위해 잠시 잠에 빠져들었다가 눈을 떴을 때, 전 작은 우주선에 태워져있었습니다. 우주선에서 깨어나 내가 처음 본 것은 사라져가는 지구의 모습이었습니다. 지구가, 그 아름다웠던 별이 산산이 부서지는 모습을 전 두 눈으로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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