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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령 님의 서재입니다.

얼음의 아리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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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령
작품등록일 :
2015.03.16 00:00
최근연재일 :
2019.04.08 22:19
연재수 :
72 회
조회수 :
37,672
추천수 :
775
글자수 :
553,977

작성
15.04.27 08:52
조회
436
추천
9
글자
22쪽

제8장 - 모두 제국으로 가는 건가요?(4)

DUMMY

들썩…….

아수라장으로 변한 리비안의 북쪽 성문 앞 광장에서 반파 된 채, 웅덩이에 처박힌 수레가 몇 번, 들썩이더니 급기야 기우뚱, 반대편으로 넘어가며 완전히 부서져버린다. 그리고 흙탕물이 잔뜩 고인 웅덩이에서 사람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게 뭔 일이냐……."


주위는, 이미 아비규환의 현장으로 변해있었다. 리아나를 찾아 전장을 헤매던 미리는 갑자기 성문을 부수며 날아 들어온 물줄기와 그 힘에 떠밀려 날아온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말과 수레등과 함께 멀리 날아가 처박히고 말았다.


흔히, 물의 뱀이라고 일컬어지는 5서클 마법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깊은 웅덩이와 함께 그 위로 수백 명의 시체가 떠올랐고, 죽어가는 병사들의 신음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울려 퍼졌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할 뿐, 곧 성문으로 들이닥친 수백의 기사들과 기병들이 닥치는 대로 휘둘러대는 칼질에 물줄기의 수마 속에서 겨우 목숨을 건진 병사들도 하나 둘, 피를 뿌리며 쓰러져갔다.

미리는 그 와중에도 이리저리 리아나를 찾아 분주히 돌아다녔다. 분명 이곳으로 왔다면 마리엔을 찾아가려했을 터, 어쩌면 이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전장 속에서 괜한 목숨을 잃었을 수도 있었다.





전장에 처음 당도했을 때만해도 리아나는 마리엔을 찾아가 그녀의 곁을 지켜주고자 했었다. 그러나 성벽 위에서 붉은 망토를 휘날리며 도열해 있는 마법사들 뒤로 그들을 지키고 선 기사들을 바라보며 주저하다가, 결국 병사들의 끼니를 담당하는 여인들에게로 다가가 그녀들을 돕기 시작했다.

수레에 밀가루가 담긴 부대자루를 쌓고, 그 수레를 뒤에서 밀어 옮기고 있을 때, 대피명령이 떨어졌다. 망설이고 있는 리아나에게 함께 일을 하고 있던 중년 여인 미얀스부인이 말했다.


“앞 전투도 부상자 하나 없이 적들을 물리쳤어, 성 위에 므로도스가의 마법사님들을 보라고, 이번도 금방 끝날 거야.”


그녀의 말에 대피소로 함께 들어오기는 했지만,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그녀는, 결국 창문 틈사이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정말, 처음에는 므로도스가의 마법사들이 적들을 향해 백 여 개의 불의 구를 날리며 선전하고 있었다. 그 장관을 바라보고 있자니 므로도스가의 힘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고, 마리엔이 부럽기까지 했다.

자신들은 이런 영지전을 치뤄보지도 못하고 도망치듯 영지를 떠나왔으니까.

그 때, 므로도스가의 화염의 기사들이 성벽위로 뛰어 오르는 것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그 민첩한 몸놀림에 놀라, 다시 감탄이 어린 탄성을 지르고 있는데, 어처구니없게도 성벽 위로 오른 그들이 무방비로 서 있는 마법사들과 화염의 기사들을 향해 검을 휘둘러 대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곧 아군이 아군을 공격하는 어이없는 혼전상황이 벌어지고, 전장은 대혼란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마리엔님이 위험해."


리아나는 문으로 달려가, 문을 가로지르며 걸려있는 커다란 잠금 장치를 들어올렸다. 그런 그녀에게 함께 대피소 안에 들어와 있던 병사들이 달려들었다.


“무슨 짓이야!”


“성 안에 적들이 있어요. 그들이 마법사들을 공격하고 있다구요.”


“뭐라고?”


병사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르마스군, 위험해, 어서 안으로 들어가자."


미얀스 부인이 리아나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때, 거대한 진동이 땅 밑에서부터 전해오더니 성이라도 무너지는지, 커다란 굉음과 함께 거대한 힘이 건물을 요동시켰다. 그리고 그 충격에 리아나와 미얀스부인, 그리고 병사들이 멀리 날아가 나자빠졌다.

즉시 몸을 일으킨 리아나는 득달같이 달려가 잠긴 문을 열고서 밖으로 뛰쳐나왔다. 하지만, 그녀의 앞에는 그녀의 발길을 붙잡는 수많은 장애물들이 있었다.


“르마스군 돌아와.”


등 뒤로 미얀스 부인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무시한 채, 리아나는 성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발목까지 잠기는 물웅덩이 때문에 제대로 속도를 낼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달려가야만 했다.


"으악!"


정신없이 앞만 바라보며 달려가던 리아나는 자신의 발밑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에 놀라 급히 걸음을 멈췄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다리가 반쯤 뜯겨져 나간 병사가 허벅지를 붙잡고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는데, 그의 발을 자신이 밟고 있는 것이었다.


"으악!"


너무나 놀라, 자신도 모르게 옆으로 펄쩍 뛰어오른 리아나는, 그러나 다시 한 번, 물컹, 하고 자신의 발바닥에 느껴지는 무언가에 기겁해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사방으로 흙탕물을 튀기며 엉덩방아를 찧고서 나자빠진 리아나의 옆에 무언가가 둥실하고 떠올랐다.


"우욱……."


얼떨결에 그것을 바라본 리아나는 자신도 모르게 뱃속으로부터 올라오는 무언가를 끝내 이기지 못하고 토악질을 내뱉고 말았다. 물 위로 떠오른 것은 자신 또래의 어린 소년병사. 그의 부서진 머리에서 흘러나온 뇌수와 눈알이 붉은 피와 섞여 자신을 향해 흘러오고 있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그녀가 보아왔던 어떤 모습보다도 참혹한 것이었다. 급히 뒷걸음질을 치며 일어섰지만, 그 후로 그녀는 단 한 발자국도 발을 뗄 수가 없었다. 점점 물이 빠지고 난 웅덩이 속에서는 그녀가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는 모습의 시체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고, 그 모습들을 차마 바라볼 수가 없어서 고개를 돌리려고 해도 어디하나 시선을 고정해 둘 자신이 없었다. 언제 뽑아들었는지 모를 검은, 그러나 바들바들 떨리는 손 때문에 금방이라도 바닥으로 떨어질 것처럼 힘없이 흔들거렸고, 그 사이 성벽 위에서는 계속, 붉은 로브의 마법사들이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 사이, 부서진 성문으로 달려들어 온 적의 기사들과 기병들이 그나마 정신을 차리고서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는 병사들을 하나 둘, 베어죽이기 시작했다. 리아나는 그 자리에 꼼짝도 하지 못하고 서서 그런 그들이 죽어나가는 모습을 바라며 헛구역질을 해댈 수밖에 없었다.






한참동안 속을 비워내고 있는 리아나를 향해 무언가가 날아와 퍽, 하고 그녀의 얼굴을 때리고는 떨어졌다. 그 충격에 중심을 잃고 다시 나자빠진 그녀의 얼굴로 흙탕물이 튀겼다. 얼굴로 튄 물방울에 깜박, 눈을 감았다가 떠보니 자신의 다리 사이에 무언가가 흘러와 멈춰선다. 금방이라도 말을 걸 듯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중년 남자의 머리였다. 그것을 바라보던 리아나는 결국 의식을 잃고 그 자리에서 힘없이 쓰러졌다.

그녀의 몸이 첨벙, 하고 웅덩이 속으로 떨어질 때, 그녀의 등을 누군가의 팔이 붙잡아 일으켰다.


"다행히 늦진 않았네."


그대로 리아나를 둘러업고 자리에서 일어선 미리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무슨 정의의 기사가 이렇게 담이 약합니까. 그나저나 이건…….”


두리번거리다 시선이 멈춘 곳에는 여지없이 누군가가 시체가 되어 나자빠지고 있었다.


“완전히 예상을 빗나간 일이 벌어졌어.”


성벽 위에서 붉은 망토를 걸친 므로도스가의 마법사들이 아래로 떨어졌다.


“므로도스가문이 이대로 무너지는 건가?”


그렇다고 이렇게 넋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고개를 세차게 저은 미리가 리아나를 한 번, 힘주어 치켜 올리고서 피할 곳을 찾았다. 그때, 성벽 아래로 또다시 두 명의 마법사가 떨어지고 있었다. 서로를 안고서 떨어지던 그들은 기병을 덮치고서 튕겨져 나와 바닥을 세차게 굴러 멀리감치서 멈춰 섰다. 자리에서 떠나려던 미리는 걸음을 멈춰 세울 수밖에 없었다.


“어쩌지?”


반마족인 그녀는, 규약에 따라 인간들의 일에 관여할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이런 전쟁과 같은, 역사에 영향을 줄만한 일에는 더욱 조심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대로 도망치면 아리시아님이 엄청 화를 내시겠지?”


미리는, 도망치는 병사의 등에 창을 꽂으려는 기병을 향해 물위에 떠다니던 무언가를 잡아 그대로 내 던졌다. 마침 눈에 보인 리아나의 검이었다.

검은 기병의 목을 꿰뚫었고, 기병은 힘없이 말 위에서 떨어졌다. 기병의 곁으로 달려가 그의 목에서 검을 뽑아낸 미리는, 기병이 타고 있던 말 위에 리아나를 엎어서 얹어 놓고는 즉시 마리엔에게로 달려갔다.

마리엔은 리아나보다도 더 좋지 못한 상태였다. 반쯤 정신이 나가 멍하니 앉아 있는 마리엔을, 안장위에 엎어져 있는 리아나의 위로 포개어 얹고서 미리는 그대로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뒤에서는 계속해서 창칼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고, 사람들의 비명소리와 그 소음을 뚫고 더욱 크게 울리는 리글리오스의 쇳소리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을 달리다가 잠깐 뒤를 돌아 본 미리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변해버렸다.


“므로도스가가 이렇게 됐으니……, 세리안님, 아리시아님께 우린 둘 다 죽었어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미 전의를 상실한 므로도스의 병사들이 하나 둘, 검을 내려놓고 그 자리에 엎드리기 시작했고, 마리엔과 리아나를 태우고서 달리는 말은 그 병사들 사이를 지나쳐 빠르게 전장을 빠져나갔다.





하나 둘, 검을 내려놓고 자리에 부복해 쓰러지는 므로도스가의 병사들을 바라보며, 그제야 마웅후작과 타베르의 목이 꽂힌 검을 내려놓은 리글리오스가 다가 온 기사에게 고개를 돌렸다.


“뒷처리는 자네에게 맡기겠네.”


말을 마친 리글리오스가 검을 공중으로 휘두르자, 검에 꽂혀 있던 두 사람의 머리가 날아가 바닥을 뒹군다. 검을 들어, 뚝뚝 흘러내리는 혈흔을 바라 본, 리글리오스가 다시 한 번, 공중을 향해 검을 휘두르자 핏물이 공중으로 뿌려지고 검의 면이 매끈하게 닦여나갔다. 검을 바라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어보인 그가 검을 검집에 꽂아 두고서 걸음을 옮기려고 할 때, 저 멀리, 빠르게 전장을 빠져나가고 있는 한 필의 말이 눈에 들어왔다. 개운하지 않은 무언가가 머릿속을 지나쳐 갔다.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런 리글리오스를 바라보며 옆에 선 기사가 급히 소리쳤다.


“당장, 잡아들이겠습니다.”


서너 명의 기사와 병사들을 데리고 사라지는 기사를 바라보다 리글리오스는 다시 고개를 돌려 말을 찾았지만, 이미 건물 사이로 사라진 말은 보이지 않았다.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방, 이곳은 리비안의 시내에 위치한 자그마한 가정집이었다. 그 방 안에서 젊은 여인과 노인이 나누는 이야기가 작게 들려왔다.


“도와주세요.”


메마른 목소리가 여인에게서 흘러나왔다.


“참으로 곤란한 부탁을 하시는 군요.”


어렵게 대답을 꺼낸 노인의 말이 멈추고, 잠시의 침묵이 흐른 뒤, 긴 한숨을 내뱉은 노인에게서 알 수 없는 주문소리가 흘러나오더니, 이번에는 너무나 밝은 빛이 사위를 밝혔다. 점점 밝아지는 빛에 모습을 드러낸 노인의 모습은, 하얀 로브로 몸을 감싸고 있는 리첼로 대사제. 그의 옆에 서서 이야기를 주고 받고 있던 여인은 미리였다. 사방을 환하게 비추며 빛을 발하던 여러 개의 구가 리첼로 대사제가 들고 있던 지팡이에서 날아가, 침대위에 누워있는 마리엔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뒤, 다시 빛이 사라진 어두운 공간에 다시 그의 목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제가 해드릴 수 있는 일은 이것이 전부입니다. 규약에 따라 정해진 규율은 반드시 지켜져야만 하는 일이니까요.”


“당연합니다. 하지만 리첼로 대사제님께서, 뭔가 착각을 하고 계십니다만, 전 규율을 어기지 않았어요. 적어도 지금 이곳에 오기까지 저의 힘을 사용한 적은 없습니다.”


“저희에게, 빛의 인을 보내지 않으셨습니까?”


빛의 인.

인간의 편에 선, 검을 지키는 자들이 빛의 신관이나 어둠의 신관에게 도움을 청할 때 남겨두는 표식을, 그들은 빛의 인, 또는 어둠의 인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받는 신전에서는, 만사를 제쳐두고 검을 지키는 자들을 도와야만 했다.


“당연합니다. 이번 전쟁으로 저기 누워있는 소녀가 위급한 상황에 처했으니까요. 전 그녀를 지키는 자, 그것도 왕께서 직접 명령하신 일입니다.”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제가 미리님과 저기…….”


리첼로의 시선이 침대 위에 누워있는 마리엔과 리아나에게로 향했다.


“저분들을 도와 성문을 여는 일에 동참하는 순간, 규율은 깨지겠지요.”


“그것을 왜 규약으로 얽매려 하십니까? 그 이전에 저분은 므로도스가에 혈족이십니다. 이미 마웅후작님과 마레드님, 그 외에 다른 마법사님들이 여럿 돌아가셨다, 대사제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정녕 므로도스가가 이대로 사라지길 바라십니까?”


리첼로의 입에서 긴 한숨이 섞인 대답이 흘러나왔다.


“다릅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먼 옛날, 규약이 정해질 때, 그분, 당신들의 왕께서 직접하신 말씀을.”


미리는 굳어진 얼굴로 리첼로를 바라보다, 피식 웃음을 흘리고는 두 팔을 들어 팔짱을 끼었다. 그리고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분위기로 말을 이었다.


“하는 수 없군. 대사제. 난 이제 봉인을 풀 것이다. 후에 일어날 일은 내가 책임을 지지. 그대는 앞으로 이곳 리비안에서 일어날 일에 대해 입만 다물어 주길 바래.”


“그, 그게, 무슨…….”


미리의 협박에 가까운 말에 리첼로가 갑자기 몸을 떨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난 이대로 봉인을 풀고 이들을 데리고 리비안의 성벽을 넘을 것이다. 그때, 사람들이…… 조금 다치겠지? 그 뒤처리만 해줘. 최대한 작게 만들어 달라고…….”


미리의 입에서 비릿한 미소가 흘러나왔다. 반대로 리체로는 놀라 다리에 힘이 풀릴 지경이 되었다.


“그것은.…….”


리첼로가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는 고개를 흔들다가 말을 이었다.


“좋습니다. 제가 도와드리지요.”


그가 품에서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 미리에게 건넸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것을 받아든 미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서 리첼로의 설명을 기다렸다.


“5서클의 이동마법스크롤입니다. 이곳으로 부터 동서쪽, 약 8킬로미터 떨어진 곳까지 이동을 하실 수 있습니다. 다만 지금은 전시 중이라 마법석을 제거할 시간이 필요하니 오늘 하루는 숨어계셔야만 합니다."


그의 말에 미리가 다급히 소리쳤다.


“그건 안 돼.”


“무엇 때문입니까? 하루도 기다리시지 못하시다니요?”


미리는 잠시 망설이다가 쩝쩝, 입맛을 한 번 다시고는 입을 열었다.


“그게……, 곧 누군가가 이곳으로 올 텐데 말야. 그분이 오시면 일이 걷잡을 수 없게 커져버려. 그대도, 나도 그 분을 막을 수 없을 거야.”


"무슨……. 그 누가 규약을 어기고 인간의 일에 개입한다는 말입니까?"


"그 분은……, 반마족이 아니야."




작아진 달 주위로 다시 희미한 햇빛이 비춰들고 있는 새벽 녘, 듬성듬성, 푸른 나무가 자라난 언덕 위에, 푸른색으로 빛이 나는 작은 원이 그려지더니, 급기야 그 원에서 작은 불빛이 솟아오르며 세 명의 인영이 모습을 나타냈다.


"에고야, 다행이다."


주위를 둘러보다 자리에 주저앉아버린 미리의 등을 리아나가 다가와 다독거린다.


"수고했어. 미리, 네가 정말 애를 많이 썼다. 내가 했어야만 하는 일인데……."


리아나는 진심으로 미안해하고 있었다. 그녀가 깨어난 것은 리첼로대사제가 집을 떠나가고 난지 서너 시간이 흐른 후였다. 깨어나 보니 미리가 마리엔의 옆에 앉아 그녀의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주며 간호를 하고 있었다. 연약하기만 한 미리가, 그 아수라장을 뚫고서 어떻게 자신을 구해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전장 속에서 혼절해버린 스스로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라 도저히 그 때의 일을 꺼내 물을 수가 없었다. 어쨌든 마리엔도 자신도 모두 그녀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던 것만은 사실 인 듯 했다. 다만…….

리아나의 고개가 절로 마리엔에게로 돌아갔다. 마리엔은 여전히 넋이 나간 얼굴로 서서 멀리 보이는 하늘 어딘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깨어난 후 지금까지 계속 이런 상태.


"그나저나 이제 어쩌죠?"


미리가 허리를 두드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신들이 서있는 곳은 어딘지도 모르는 허허벌판, 거기다 짐은 모두 리비안의 숙소에 놓고 온 상태로 당장 마실 물도 없었다.


"어!"


망연히 서서, 밝아오는 대지를 바라보고 있던 미리의 눈빛이 반짝였다. 저 멀리 어둠속에서 이곳을 향해 누군가가 달려오고 있었다. 미리는 급히 리아나와 마리엔을 등 뒤로 숨기고서 한 발 앞으로 나갔다. 그런 미리의 앞으로 리아나가 다시 튀어나와 검을 뽑아 든다.


‘잉?’

위급한 중에도 그런 리아나가 어이없어 그녀의 뒤통수를 바라보고 있는데 리아나에게서 뜻밖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스승님!!”


고개를 들어보니 달려온 인영이 서서히 속도를 늦추고는 터벅터벅 자신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아리시아님……."


갑자기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입안에 침이 바싹바싹 말라갔지만, 그런 자신의 심정은 아는지 모르는지, 리아나는 아리시아에게 달려가 그녀의 품으로 날아들었다. 자신의 목을 끌어안고서 울고 있는 리아나를 대롱대롱 매단 채로 다가 온 아리시아가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딸꾹.”


시작된 딸꾹질은 멈추질 않았다. 아니 차라리 멈추지 말아라. 미리는 간절히 바랬다.






성벽 위에는 마웅후작을 비롯한 마레드, 마로쉘, 등 익히 알고 있던 므로도스가문의 수뇌부 일곱 명의 얼굴이 꼬챙이에 끼워진 채, 널려 있었다. 그리고 성 벽 위에는 역시나 아리시아에게 너무나 낯이 익은 푸른색의 드래곤이 웅크리고 앉아있는 포이리안가문의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아리시아가 무심한 눈을 들어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사이, 성문을 지키고 있던 은빛 갑옷을 입은 기사가 창을 든 병사들, 서너 명을 데리고 달려오며 아리시아에게 소리쳤다.


"누구냐? 므로도스의 마법사인가?"


붉은 색 로브를 입고 있었지만, 그녀의 로브에는 아무런 표식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표식도 없는 건가?’


기사는 조금의 위축된 것 없이 도전적인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서 있는 여인에게서 괜한 불길함을 느꼈다.


"수상한 자로군. 연행해."


기사의 말에 아리시아에게 달려든 병사들이 그녀의 양쪽 팔을 붙잡았다. 그리고는 그녀의 손에서 철봉을 빼내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의 힘을 한 낱, 병사가 당해낼 수 있을 리 없었다.


“이게…….”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병사가 난처한 얼굴로 옆에 선, 자신의 동료에게 고개를 돌렸다.


“손을 놓아라.”


쩔쩔매고 있는 병사들을 바라보다 화가 난 기사가 결국, 호통을 쳤지만 아리시아는 전혀 그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대신,


‘나는 므로도스가의 마법사인가?’


센틀러는 자신을 제자로 삼았다. 그러나…….

또한 마웅후작은 그녀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신도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머릿속에서는 계속해서 돌아가라는 아슈타의 명령어가 떠다녔고, 그녀도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성벽 위에서 센틀러와 너무나 닮은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마웅 후작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니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자꾸만 아슈타의 명령어를 지워버리고 있었다.


“어? 어?”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앞으로 걸어 나가고 있었다. 그녀가 걸음을 옮기자 그녀의 양 팔을 붙잡고 서 있던 두 병사가 그녀의 힘에 질질 끌려왔다.

한걸음, 또 한걸음 아리시아가 걸음을 내 딛을 때마다 그녀의 주위로 차가운 바람이 일어났다. 너무나 차가운 한기에 그녀의 주위에 모여 있던 병사들이 하나둘, 그 자리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아리시아의 앞을 막아서고 있던 기사는 자신도 모르게 떨려오는 턱을 진정시킬 사이도 없이 뒷걸음질 치다가 부끄러움도 잊은 채 도망을 쳐버렸다. 그녀의 손에 들린 철봉은 이미 지금까지 본 적 없는, 그녀의 손까지도 하얀 얼음으로 싼 거대한 대검으로 변해 있었고, 그녀의 머리카락과 붉은 망토가 휘날릴 때마다, 그곳에서, 마치 유리가 깨지는 기괴한 소리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그녀가, 아직도 부서진 잔해 가 널려있는 성문 안으로 들어섰을 때, 눈앞에 펼쳐진 참혹한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녀의 몸은 얼음덩이로 덮여, 마치 얼음으로 만든 갑옷을 입은, 기사처럼 변해 있었다. 투명한 얼음갑옷은 달빛에 반짝이며 주위의 모든 것을 얼려버리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멀리서 수십 명의 기사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들은 성문 앞에서 마치 얼음의 신처럼 서 있는 아리시아를 바라보며 자신들도 모르게 검에 오러를 담기 시작했다. 아리시아의 거대한 검이 높이 솟아올랐다. 그리고 그 순간…….

으악!

누군가의 비명소리에 아리시아가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성벽 아래에, 다리를 잃은 어린아이가 얼굴에 잔뜩 피 칠을 하고 앉아있는 어미에게, 깽깽이 발로 달려가 안기고 있었다. 살을 에는 추위 속에서 어미는 다리를 잃은 아이를 안고서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이미 갑옷을 입은 기사들과 병사들도 쓰러져 있는 곳에, 아이의 어미는 아이를 살려내겠다는 듯이 그 추위를 견디며 아이를 부여안고서 버티고 있었다.


기사들은 이제 아리시아에게 서너 걸음만 달려오면 닿을 거리까지 와있었고, 그녀의 검은 하늘 높이 올라간 상태였다. 얼음의 검을 강하게 감아 쥔 아리시아의 고개가 다시 그 여인에게로 향했다. 그리고는 휙, 그녀는 얼음의 대검을 세차게 한 번 휘두르고서 몸을 돌렸다. 그녀가 성문을 빠져나가자 곧, 와르르르 지축을 울리며 성이 무너지고, 성문 위에서 아리시아를 내려다보고 있던 마웅후작과 마레드의 목이, 그 옆에서 나부끼던 포이리안가의 깃발과 함께 무너져 내렸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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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2

  • 작성자
    Lv.2 겸용
    작성일
    15.04.27 18:55
    No. 1

    좋은 글 감사합니다. 첫 글 보고 정신없이 빠져들었네요. 오늘 가입한 뉴비라 추천버튼이 있는줄도 모르고 있다가 위에 공지 글 보고 추천버튼 찾아서 누르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89 티말
    작성일
    15.04.27 18:59
    No. 2

    제대로 된 생존자는 얼마나 될 것인가?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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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제10장 - 당신이 사라 시헤리드로군요(9) 19.04.06 53 1 13쪽
70 제10장 - 당신이 사라 시헤리드로군요(8) 19.04.03 56 1 13쪽
69 제10장 - 당신이 사라 시헤리드로군요(7) 19.04.02 63 1 17쪽
68 제10장 - 당신이 사라 시헤리드로군요(6) 19.03.29 59 1 12쪽
67 제10장 - 당신이 사라 시헤리드로군요(5) 19.03.27 57 1 15쪽
66 제10장 - 당신이 사라 시헤리드로군요(4) 19.03.25 106 1 13쪽
65 제10장 - 당신이 사라 시헤리드로군요(3) +1 15.06.09 411 4 18쪽
64 제10장 - 당신이 사라 시헤리드로군요(2) +1 15.06.02 373 7 12쪽
63 제10장 - 당신이 사라 시헤리드로군요(1) 15.05.26 484 9 15쪽
62 제9장 - 어둠의 신전으로 모시겠습니다.(6) +1 15.05.18 403 7 16쪽
61 제9장 - 어둠의 신전으로 모시겠습니다.(5) +1 15.05.15 402 7 17쪽
60 제9장 - 어둠의 신전으로 모시겠습니다.(4) 15.05.13 477 10 20쪽
59 제9장 - 어둠의 신전으로 모시겠습니다.(3) 15.05.12 353 8 24쪽
58 제9장 - 어둠의 신전으로 모시겠습니다.(2) +1 15.05.05 428 4 20쪽
57 제9장 - 어둠의 신전으로 모시겠습니다.(1) +1 15.05.04 484 6 18쪽
56 제8장 - 모두 제국으로 가는 건가요?(10) +2 15.05.03 464 11 22쪽
55 제8장 - 모두 제국으로 가는 건가요?(9) +1 15.05.02 387 5 19쪽
54 제8장 - 모두 제국으로 가는 건가요?(8) 15.05.01 450 9 15쪽
53 제8장 - 모두 제국으로 가는 건가요?(7) +2 15.04.30 381 6 19쪽
52 제8장 - 모두 제국으로 가는 건가요?(6) +1 15.04.29 335 7 23쪽
51 제8장 - 모두 제국으로 가는 건가요?(5) +2 15.04.28 462 10 17쪽
» 제8장 - 모두 제국으로 가는 건가요?(4) +2 15.04.27 437 9 22쪽
49 제8장 - 모두 제국으로 가는 건가요?(3) 15.04.26 416 10 21쪽
48 제8장 - 모두 제국으로 가는 건가요?(2) 15.04.25 496 9 19쪽
47 제8장 - 모두 제국으로 가는 건가요?(1) +2 15.04.24 477 7 20쪽
46 제7장 - 이렇게 쉽게 끝날리가 없지(8) +2 15.04.23 504 15 19쪽
45 제7장 - 이렇게 쉽게 끝날리가 없지(7) +2 15.04.22 379 9 21쪽
44 제7장 - 이렇게 쉽게 끝날리가 없지(6) +2 15.04.21 549 11 23쪽
43 제7장 - 이렇게 쉽게 끝날리가 없지(5) 15.04.20 459 10 17쪽
42 제7장 - 이렇게 쉽게 끝날리가 없지(4) +1 15.04.19 526 11 17쪽
41 제7장 - 이렇게 쉽게 끝날리가 없지(3) 15.04.18 535 15 20쪽
40 제7장 - 이렇게 쉽게 끝날리가 없지(2) +3 15.04.17 512 14 17쪽
39 제7장 - 이렇게 쉽게 끝날리가 없지(1) 15.04.16 399 10 19쪽
38 제6장 - 므로도스가의 마법사이십니까?(9) +2 15.04.15 566 11 22쪽
37 제6장 - 므로도스가의 마법사이십니까?(8) +2 15.04.14 348 14 20쪽
36 제6장 - 므로도스가의 마법사이십니까?(7) 15.04.13 425 14 27쪽
35 제6장 - 므로도스가의 마법사이십니까?(6) 15.04.12 533 12 19쪽
34 제6장 - 므로도스가의 마법사이십니까?(5) +2 15.04.11 502 8 16쪽
33 제6장 - 므로도스가의 마법사이십니까?(4) 15.04.10 464 13 16쪽
32 제6장 - 므로도스가의 마법사이십니까?(3) +1 15.04.09 591 11 15쪽
31 제6장 - 므로도스가의 마법사이십니까?(2) +3 15.04.08 408 11 11쪽
30 제6장 - 므로도스가의 마법사이십니까?(1) +1 15.04.07 627 12 17쪽
29 제5장 - 제게 검술을 가르쳐 주실 수 없나요?(8) +1 15.04.06 563 9 18쪽
28 제5장 - 제게 검술을 가르쳐 주실 수 없나요?(7) 15.04.05 504 13 18쪽
27 제5장 - 제게 검술을 가르쳐 주실 수 없나요?(6) +1 15.04.04 449 11 14쪽
26 제5장 - 제게 검술을 가르쳐 주실 수 없나요?(5) +1 15.04.03 421 12 17쪽
25 제5장 - 제게 검술을 가르쳐 주실 수 없나요?(4) +2 15.04.02 550 14 17쪽
24 제5장 - 제게 검술을 가르쳐 주실 수 없나요?(3) +1 15.04.01 463 15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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