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 모두 제국으로 가는 건가요?(5)
아리시아가 돌아왔을 때, 미리와 리아나는 말러와 용병들을 만나, 짧았지만 고단했던 시간의 해후를 풀고 있었다. 모여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들은 아리시아의 등장에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아리시아와 눈이 마주치자 괜히 고개를 외로 꼬며 다가오는 미리와 그런 미리의 등을, 아무 이유도 모른 채 다독이며 걸어 온 리아나가 먼저 입을 연다.
"다녀오셨어요?"
그 사이 미리는 아리시아의 몸을 흘끔흘끔 살펴보고 있었다. 그러나 먼지가 가득 싸여있는 그녀의 붉은 로브는 평소와 별반 다를 것이 없어서, 어디를 다녀온 것인지,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서로 눈치만 보고 있는 사이, 말러가 다가왔다.
"이제 어떡하실 생각이십니까?"
"전, 리아나를 데리고 제국으로 갈 생각입니다."
"그럼……."
말을 잇지 못하고 고민에 빠지는 말러를 대신해 라크가 머리를 긁적이며 다가왔다.
"저흰……. 메르넨을 찾아야합니다."
메르넨.
그들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겠지만……, 반마족에 대한 설명을 하지 않고는 그들을 설득시킬 방법이 없었다. 자연히, 아리시아의 시선이 미리에게로 옮겨갔다.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아리시아의 눈빛에 괜히 주눅이 들어 삐쭉거리며 딴청을 피우는 그녀에게 아리시아의 음성이 들려왔다.
“메르넨 양이 이상한 힘을 가진 자들에게 납치를 당했습니다.”
리아나와 미리에게 그간의 일을 설명하듯, 담담한 아리시아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인간과는 다른, 이상한 힘을 지닌 자들이었어요.”
말을 하는 중간, 미리와 눈을 마주쳤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인상을 굳힌 채 고개를 좌우로 흔드는 미리의, 무언의 대답뿐. 잠시, 그런 미리를 바라보다 아리시아는 고개를 돌렸다.
"우선, 자리를 옮기도록 해요. 말러님도, 마리엔님에게도 이곳은 그다지 좋은 장소는 아닌 것 같아요."
그녀의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며 각자의 짐을 챙겼다. 미리가 말없이 서있는 마리엔의 손을 잡아끌자 마리엔은 힘없이 그녀의 손길에 끌려왔다. 아리시아는 미리의 뒤를 따르고 있는 마리엔을 잠시 바라보다 앞장서 길을 열었다.
"대체 어디에 숨겨 둔 것이란 말이냐?"
리비안의 마탑 안, 마웅후작이 머물던 집무실 안에서 때 아닌 고성이 쏟아져 나왔다. 우레와 같은 소리로 화를 터트리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포라드 백작. 얼굴을 반쯤 덮고 있는 푸른색 수염이 마구잡이로 헝클어지도록 그는 분노하고 있었다.
"마탑 내 도서관은 물론 밀실들도 발견하는 즉시, 샅샅이 뒤지고 있습니다."
포라드백작 앞에 서서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겨우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고 있는 이는 포라드백작의 막내아들 제라드였다. 타지아의 임시영주를 맡고 있는 형 체도르트와 이제 곧, 왕궁마법사단으로 떠날 아버지를 대신해 이곳의 주인이 될, 누구하나 겁날 것이 없는 그였지만, 포라드 백작 앞에서 만큼은 고양이 앞의 쥐처럼 잔뜩 주눅이 들 수밖에 없었다.
"무리를 해서 므로도스가를 친 이유이다. 그것을 찾지 못하면 아무 의미가 없어."
정신 나간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며 날뛰는 포라드백작을 바라보며 숨을 죽인 체 서 있던 제라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쩌면 마리엔이……."
"마리엔? 그, 사라졌다는 후작의 손녀아이?"
제라드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희박하지만……, 아주 터무니없는 소리는 아니었다. 포라드백작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마웅후작이 아끼던 손녀……, 거기다 스물한 살의 나이에 4서클에 들어선 천재라고 했던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서둘러 집무실을 나서던 포라드 백작이 자신의 뒤를 따라 나서는 제라드를 돌아보며 또다시 호통을 내질렀다.
"너는 따라 올 필요 없다. 그럴 시간에 마법서나 더 찾아봐."
어쩔 줄 몰라 고개를 조아리는 제라드에게 끌끌, 혀를 차보이며 세차게 문을 닫고 나온 포라드 백작은 어디론가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검붉은 색으로 말라버린 꽃이 바스러진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화분, 깨진 거울과 바닥에 어지럽게 널려있는 옷가지와 깨진 유리병들로 인해 방금 도둑이라도 든 것만 같은 방에, 똑똑, 두 번의 노크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선다.
커튼이 가려진 어두운 방 한 편에 놓인,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초록색 천으로 반쯤 가려진 침대 위에서 부스럭, 인기척과 함께 누군가가 기다시피 앞으로 나와 고개를 내민다.
방안을 휘둘러보던 남자가, 침대 위에서 고개만 내밀고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어린 여자아이에게 환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했다.
"어떻게……, 지낼 만은 하십니까?"
지금 그녀의 신분은, 일단 크록후작의 막내 딸. 포이리안가로써는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귀빈으로, 나름대로 신경을 써서 내어 준 방이 공교롭게도 마리엔의 침실이었다.
"그럭저럭. 원래 이곳 마탑이 당신네 마탑보다 더 마음에 들었으니까."
어린아이답지 않은 말투. 평소 감정을 숨기기로는 따를 자가 없다고 스스로 자부하던 그도, 저 귀여운 표정에서 툭툭, 튀어나오는 술집 잡부같은 말본새에 저절로 인상이 구겨지는 것을 느끼게 되는,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는 말투였다. 그러나 지금은 어느때보다도 중요한 때, 별다른 내색 없이 고개만을 끄덕이는 그를 바라보며 여자아이가 짓궂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쪽은…… 잘 돼 가?”
“셀리오스백작이 북부를 완전히 장악했습니다. 크록후작님을 필두로 포이리안가와 왕가까지 우리의 편에 섰으니 이제 구부 능선은 넘었다, 생각됩니다.”
여자아이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축하해. 그나저나 그 딴 거 자랑 질 하려고 온 건 아닐테고?”
하하, 멋쩍게 웃음을 지어보인 남자 말했다.
"넨시님께 긴히 부탁드릴 일이 있어 왔습니다."
여자아이, 넨시는, 한 팔을 길게 뻗어 기지개를 늘어놓고는, 그럼 그렇지, 하고는 반라의 허리 아래를 덮고 있던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고 와 그 속으로 몸을 파묻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자는 말을 이었다.
"므로도스가의 여식하나가 탈출을 했습니다. 마리엔이라는 이름의 아이인데……."
잠시 말을 끊고서 넨시를 바라보지만, 이불 속으로 숨어 든 넨시는 조금의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므로도스가의 마법서가 그 아이의 손에 가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대가 찾던 그 마법서?"
이불 속에서 넨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렇습니다."
"그 리글리오스라는 아이에게 시켜."
"그게……."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지어지는 미소를 억누르느라 잠시 숨을 고르고는 말을 이었다.
"어제 설원의 마검사가 왔었습니다."
"정말?"
이불 속에서 넨시의 얼굴이 튀어 나왔다.
"성벽을 부수고 달아났습니다."
"이곳 외성의 벽을 부수었다고?"
"네."
그의 대답을 듣고도, 넨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단 한 번의 칼질로 베어냈다고 하는데, 성문 주위 약, 백 여미터가 전부 부서져 내리는 바람에 성 전체를 두르고 있던 7서클 보호마법이 완전히 깨어졌다고 합니다.”
"쉽지 않은 일인데?"
"그렇지요."
그러면서도 넨시의 입가에는 알 수없는 미소가 번진다.
"그녀의 뒤를 쫓고 있는 아이들이 전한 말로는 마리엔이라는 아이가 그녀와 합류한 듯합니다."
"좋아."
남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침대에서 뛰어내린, 넨시가, 바닥에 아무렇게나 놓인 옷을 주섬주섬 주워 전라의 몸을 가리기 시작했다.
발가벗은 몸으로 갑작스럽게 뛰어내린 넨시의 모습에 놀라 급히 뒤돌아선 남자의 입가에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가 지어졌다.
“그럼 넨시님만 믿겠습니다.”
하얀색 리본으로 머리를 묶던 손을 멈추고서 문을 닫고 나가는 남자를 바라보던 넨시가 고개를 저었다.
"흥, 하여간 어리석은 인간들……. "
알록달록, 꽃무늬가 수놓아진 드레스를 입고서, 깨진 거울 앞에서 빙그르르, 한 바퀴를 돌아 옷매무새를 확인한 그녀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거의 무너져 내린 유물 터를 바람막이 삼아 작은 모닥불이 피워져 있고, 그 앞에서 미리와 리아나가 불을 쪼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사위로는, 마치 그녀들의 이야기가 새어 나갈까 두렵다는 듯, 용병들의 코고는 소리가 쉴 새 없이 울려 퍼졌고, 그소리에 반응하듯, 모닥불이 세차게 흔들렸다.
잔뜩 몸을 움츠린 채로 잠에 빠져있는 마리엔의 빈 어깨에 담요를 끌어 덮어주고 돌아서는 리아나에게서 한숨 섞인 탄식이 흘러 나왔다.
“마법사가 실어증이라니…….”
“그러게 말이예요.”
고개를 끄덕이며, 미리가 마른 장작 하나를 불 속으로 집어 던졌다. 그 사이 제자리로 돌아와 담요로 어깨를 감싸고서 앉아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리아나가 미리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그나저나, 스승님은?”
“네?”
“스승님 말야, 어디 가셨어?”
“저야 모르죠?”
화들짝 놀라며 시선을 피해, 머리 위 둥근 달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미리를 리아나가 가늘게 뜬 눈으로 바라본다.
“뭔가 알고 있는 거 같은데?”
“제가 어찌……. 아리시아님께선 원래 신출귀물하시잖아요.”
“흠……, 미리, 너 어째 요즘 되게 수상하다.”
등 뒤로 흘러내리는 땀을 나 몰라라 무시하며 미리가 기습적인 질문을 던졌다.
“근데, 아가씬 요즘, 검술 연습 왜 안하세요?”
뭐라고 더 쏘아 붙이려고 입을 열던 리아나가 갑작스러운 질문에 다시 입을 다물고는 고개를 아래로 떨군다. 분명 리비안을 떠나온 이후로 그녀는 단 한 번도 검을 뽑지 않았다. 이 검술에 미친 아이가.
“미리, 사실……, 나 이제 검술이 싫어졌어.”
미리가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고서, 그녀를 바라본다.
“어쩌면 난 말야. 기사로서는 재능이 없는지도 모르겠어. 그냥, 우리 가문이 기사가문이니까……, 거기다 아버지에게는 아들도 없잖아. 자식이라곤 나 하나인데……. 근데 나……, 자신이 없다.”
미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도 괜찮다. 검을 놓고, 평범한 여인의 삶을 살아가는 것도……. 자신도 모르게 올라간 미리의 손이 리아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평소 같았으면 건방지다, 소리쳤을 리아나가, 아무 말 없이 여전히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서 앉아있는 폼이 여간 안쓰럽지가 않았다.
“어?”
“왜?”
시무룩한 표정으로 모닥불을 바라보고 있던 리아나가, 갑작스럽게 들려온 미리의 비명 같은 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머리를 쓰다듬던 미리가 어정쩡한 자세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미리를 따라 일어서며 그녀가 바라보는 곳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조금 전까지 죽은 듯이 누워 자고 있던 마리엔이 벌떡, 일어서 있었다.
“마리엔님?”
그녀가 부르는데도 마리엔은 그저, 어둠이 깔린 어느 한 지점을 지그시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미리와 리아나가 서로를 바라보며 의아해 하고 있는데 마리엔이 갑자기 발걸음을 옮겨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굴러 내릴 듯, 붉게 달아올라 있던 눈을 훔치며 리아나가 마리엔에게로 달려갔다.
“다들 태평하시구만.”
마리엔이 향하는 곳, 어둠 속에서, 여자아이 하나가 나타나 어슬렁어슬렁, 모닥불이 지펴진 곳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리아나님!”
미리의 외침이 고요한 밤, 스산한 공기를 가르며 울려 퍼졌다.
세일루니아 남쪽, 끝자락에 위치한 작은 도시 테비아. 그리고 그 서쪽 끝에 위치한, 작은 언덕 위에 생명의 여신, 페오노스를 섬기는 빛의 신전이 존재한다.
신전의 사제들도 다 알지 못하는, 지하 깊은 곳에 위치한, 어두운 밀실 안으로 두 명의 인영이 들어선다. 먼저 들어선, 지신의 이름을 페릭, 이라고 소개한, 다섯 개의 엠블렘을 지닌 빛의 대사제가 검은 머리의 여인에게 고개를 숙이고는 단상 위로 걸음을 옮긴다. 검은 머리의 여인, 아리시아는 아무런 말도 없이 그의 모습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의식을 거행 하겠습니다.”
아리시아를 바라보며 고개를 숙여 보인 대사제 페릭의 입에서 작은 주문소리가 흘러나왔다.
세 시간 전, 모두가 잠든 밤에 모닥불 앞에 홀로 앉아 책을 읽으며 불침번을 서고 있던 아리시아를 향해 하얀 새, 프리아가 날아왔다. 새의 다리에는 어느 때와 같이 작은 쪽지 한 장이 달려 있었다.
- 지금, 서남쪽, 록스리 백작의 영지 테비아에 빛의 사원으로.
또 단 한 줄의 쪽지.
아리시아는 미리를 깨워 대신 불침번을 맡긴 후에, 그 길로 백여 킬로미터를 달려 이곳 테비아의 빛의 사원에 도착해 있었다.
아리시아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주문을 외우다가 자리에서 쓰러진, 노사제가 하얀 눈을 까뒤집고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 아리시아.
곧, 온몸을 관통하며 전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 오랜만이야.
제대로 초점을 맞출만한 눈동자도 없었지만 왠지, 아리시아를 바라보고 있는 페릭의 새하얀 눈에는 알 수 없는 그리운 감정이 담겨있었다.
“세리안?”
- 그래, 나야.
잠시의 침묵이 흘렀다. 아리시아는 자신도 모르게 한 발, 앞으로 나가려는 자신을 애써 멈춰 세웠다.
“어디에 있지?”
- 마계에…….
조용하게 울리는 목소리. 그리고는 페릭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고 아리시아는 느꼈다. 다시, 자신도 모르게 한 발, 앞으로 다가서는 발걸음을, 그러나 이번에는 멈추어 세우지 못했다.
- 지금, 이야기를 길게 할 수 없어. 아리사아…….
아리시아도 알고 있었다. 머릿속에 수십 개의 질문이 한 순간에 떠올랐지만 입은 열리지 않았다.
- 아리시아, 마족이 소환 된 곳을 알아냈어. 리아센 제국 서쪽, 로혼의 사막, 결계의 땅이라고 불리는 곳이야.
아리시아는 여전히 아무 말 없이 듣고만 있었다.
- 그리고 아리시아. 케뮤랑크의 검, 너와 가까운 곳에 있어.
케뮤랑크의 검.
- 검을 지키는 자, 리오라는 이름의 반마족이 세일루니아 남쪽, 아벨 산맥 근처에서 그 검을 지키고 있을 거야. 위치는 미리가 알고 있으니까, 그곳에 가서……
잠시, 거기서 세리안은 말을 끊었다.
- 만약, 말러가 케뮤랑크의 검을 원하면 그에게 전해 줘.
뜻밖의 말에 아리시아는 놀랐다.
“그래도 괜찮아?”
- 글쎄, 아리시아가 함께 있을 테니까…… 리오에게 아리시아의 이야기를 해 두었으니까. 그를 만나면 아리시아가 알아서 해.
아리시아의 검은 눈동자가, 몇 번, 초점을 잃고 흔들렸다. 함정일 확률, 71.34퍼센트. 아슈타의 경고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세리안 넌, 정말 내 친구가 맞는 거지?”
- 맞아.
그때, 대사제의 몸이 휘청, 하고 흔들리다 무릎을 꿇었다. 시간이 없었다.
무엇을 물어야하지? 말러의 검? 므로도스가문? 메르넨? 금발의 반마족? 검을 얻은 반마족? 수없이 많은 의문들…….무엇을 먼저 물어야 할까? 다급히, 아리시아가 입을 열었다.
“세리안은…… 언제 와?”
-곧…… 만날 수 있을 거야.
언제? 하고 다시 물으려고 했지만, 끝내 입은 열리지 않았다.
- 아리시아, 므로도스가의 일은…… 정말 미안해…….
왜인지 모르지만, 진심이 담긴 사과가 세리안에게서 전해졌다. 그러나 그가 사과를 할 일은 아니었다. 아리시아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꾸만 얼굴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머릿속, 아슈타는 계속해서 오류라는 메세지를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에게 화를 내야할 이유는 8퍼센트도 되지 않는다. 그러니 진정하라고. 마치, 리비안의 성벽을 부수던 그 때와 같았다. 아슈타와 상반된 기분. 왜 일까?
원망…….
분명 그 감정이다. 원망의 감정 따위는 그녀에게 없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세리안을 원망할 이유가 아무것도 없었다. 아슈타는 정확하다. 그런데 왜…… 이 느낌은 뭐지?
“왜…… 내게 사과를 하지?”
애써 담담한 표정을 유지한 채로 아리시아는 겨우 입을 열었다.
“말러에게 가지 않았다면, 난 리비안을 떠났을 거야. 그 후에 므로도스가문이 어떻게 되었어도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야. 그러니 세리안이 사과할 일은 없어.”
하지만 내뱉는 말과는 다르게 어느새 아리시아의 흥분된 음성은 어두운 밀실을 가득 매우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세리안, 아니 바닥 위에 쓰러진 페릭의 입에서는 인간의 것이 분명한 신음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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