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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령 님의 서재입니다.

얼음의 아리시아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을령
작품등록일 :
2015.03.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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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08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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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4.06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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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쪽

제5장 - 제게 검술을 가르쳐 주실 수 없나요?(8)

DUMMY

코넬의 서문을 나서면, 펠버르트 백작의 영지 세브론까지, 장장 150여킬로미터에 이르는 대 평원지대가 자리를 하고 있다. 원래, 세일루니아가 대륙에 세워지기 이 전, 이곳에는 나름대로 도시형태를 이룬 마을들이 곳곳에 있었다. 그러나, 역시 <하르테론의 대재앙> 이 후, 새롭게 등장한 마물들로 인해 땅의 지기가 급격하게 피폐해지고, 결국에는 사람이 살수 없는 땅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로인해 지금도 평원의 곳곳에는 버려진 유적들이 황폐한 평원에서 쉽게 발견되는데 사람들은 이곳을 이르러 <잠을 먹는 유령의 땅>이라고 불렀다. 보통 마차를 이용하면 하루에 건널 수 있는 거리였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평원의 중간쯤에 자리한 오랜 유적지에서 하루 쯤, 노숙을 해야만 했다. 그런데 간혹 그 밤사이에 이유를 알 수 없이 정신을 놓아 미쳐버리거나, 심한 경우는 깨어나지 못하고 죽어버리는 사람들이 생겨나고는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평원에서 하룻밤을 지새우는 일을 무척이나 꺼려했다. 일종의 인간의 혼을 빼앗아 먹는 유령이 존재한다는 소문이 수백 년 째, 이어지고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때문에 여행자들은, 조금 더 험난하고 위험 부담이 높은 나반으로 가는 협곡을 이용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물론 그 미신 같은 현상들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 평온해 보이기만 하는 땅을 더 선호하기도 했지만 이곳에 대해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 사실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지금, <잠을 먹는 유령의 땅>의 한 벌판에 자리한 반쯤 무너진 옛 석조건물을, 약 100여미터의 간격을 두고서 차지한 채 나뉘어 자리한 두 무리가, 마치 혈투를 치르기 전 상대를 탐색하듯이 모여앉아 심각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중 조금 위쪽, 아마도 먼 옛날 꽤나 부유했던 가문의 집이었다고 짐작 되어지는, 넒은 분수의 흔적이 남아있는 석조 건물 안에서 부서진 문틈으로 바라다 보이는 어느 한 지점을 향해 시선을 고정시킨 채로 대머리의 건장한 남성이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저들 나반으로 간다면서…….”


자신의 왼편에 앉아서 철그릇에 담긴 스프를 게걸스럽게 먹고 있는 붉은 머리의 청년에게로 고개를 돌린, <은빛도끼 용병대>의 대장 라크가 물었다. 붉은 머리의 청년이 철그릇을 입에서 때고서, 팔뚝으로 입을 한 번, 쓱, 문지르며 말했다.


“그러게 대장도 보셨잖아요. 테그란에서 마차를 팔고 비까지 쫄딱 맞으면서 걸어 온 거……, 그리고 나서 저기, 저 허여 멀건하게 생긴 녀석이 우리를 따라 코넬로 들어와서는 용병을 구한답시고, 사방팔방 들쑤시고 다니면서 설치고 다녔잖아요. 그 이유가 뭐겠어요?”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하얀 로브의 남자가 작은 목소리로 거들었다.


“나중에 한 무리 우루루 이끌고서 코넬을 나갔었지.”


하얀 로브의 남자에게로 고개를 돌린 라크가 괜히 역정을 담아 소리쳤다.


“근데 왜 저것들이 이곳에서 우릴 따라오고 있냐구.”


“이렇게 된 거. 차라리 의뢰를 받아들이자.”


검은머리의 여검사, 메르넨이 자신의 그릇을 내려놓고는 라크를 바라보았다.


“쓸데없는 소리, 잘못하다 간 우리가 자원하려던 벨로프남작의 군대에게 우리가 쫓기는 수가 있어. 이럴 땐, 모른 척 하는 게 최선이야.”


그가 자신의 앞에 놓여있는 식지 않은 스프를 목 안으로 부어버리고는, “확 돌아 가 버릴까?” 하고는 다시 고개를 문밖으로 돌렸다.


“아닌 게 아니라 이대로 함께 가다가 마물이라도 만나게 되면 어차피 함께 싸워야하지 않겠어요? 그게 아니더라도 저녁에 <살아있는 자의 쉼터>에서 노숙을 하려면 어쩔 수 없이 함께 하게 될 테구요.”


붉은 머리의 청년이 자신의 철그릇에 물을 부어 헹궈내며 라크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지 말고 우리가 잡아서 벨로프자작에게 넘겨요. <배신자 카니>라고, 평판도 좋지 않던데요? 인원도 고작 다섯 명이고, 그중에 세 명이 여자예요.”


조금 떨어진 곳에서 갑옷을 벗어, 깨끗하게 닦고 있는 근육질의 젊은 청년에게 라크가 고개를 저어보이며 말했다.


“페페, 네가 아직 어려서 모르는 소리를 하는 거야. <배신자 카니>라고 비꼬기는 해도, 저 말러자작, 최소한 오러를 다루는 기사야. 우리 열 명이서 피해 없이 잡는 건 불가능해.”


그 옆에 앉은 흰색 로브의 남자가 말을 이었다.


“그래, 귀족들 문제는 귀족들 끼리 풀어야 해. 벨로프남작이 현상금이라도 걸었다면 모르지만, 우리가 귀족에게 먼저 칼을 들이대서 좋을 거 하나도 없어. 코넬시에도 아직 아는 사람이 없던 걸? 그런 상황에서 의뢰도 받지 않고, 독단적으로 일을 벌여서 좋은 꼴 나는 거 못 봤어.”


흰색 로브의 남자가 말을 끝내자마자 누가 말한 것도 아닌데 모두의 시선이 부서진 문밖으로 향했다.




한편, 반대 쪽 상황 역시 심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르마스, 용병들은 협곡을 지나 나반을 간다며, 저 사람들 쫓아가면 된다며……?“


말러가 또한 무척이나,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르마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르마스가 그의 시선을 피하며 뒷머리를 긁는다.


“이상하네요. 분명히 어제 저기 붉은 머리가 나반으로 간다고 했던 거 같은데, 이 길은 걸어서 가면 하룻밤 노숙을 해야 한다면서…… 잘못 들었나?”


"또 노숙해야 해요?"


미리의 입술이 한 뼘쯤 튀어나왔다.

눈살을 찌푸리던 말러가 입에 문 육포를 거칠게 뜯어내고서 고개를 돌리다가 조금, 떨어진 자리에 홀로 앉아 있는 아리시아를 발견하고는 르마스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나저나 아리시아님은 또 왜 저러신대?“


아무것도 모르는 냥, 고개만 내젓는 르마스를 대신해서, 옆에서 육포를 조물락거리고 있던 리아나가 속삭였다.


"무서워서 말도 못 붙이겠어요. 아버지.“


또 다시 말러의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어째 처음 만났을 때만큼 차가워진 거 같다."


"그때보다 더 한 거 같아요. 자…… 필립님. 그땐 제가 팔에 매달려서 떼를 써도 뭐라 하시지는 않았었는데, 지금은 진짜 말붙이기가 왠지 두려워요."


온몸에 한기가 스미는지, 미리는 진저리까지 쳐댔다.


“르마스, 니가 가서 좀 풀어드려라. 어디 무서워서 같이 다니겠냐?”


그러나 르마스 역시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몇 번 흔들다가 시선을 리아나에게로 돌렸다. 르마스의 시선을 느낀 리아나도 딱딱하게 굳어진 채로 고개를 저었다. 그 때 말러가 리아나에게 속삭였다.


“아! 그렇지, 리아나야, 니가 가서 아리시아님께 검술 좀 가르쳐주세요, 하고 부탁이나 해봐라.”


“이 상황에서 어떻게 그런 걸 물어봐요 아버지. 그리고 아리시아님은 봉술을 쓰시지 검을 쓰지 않으세요.”


말러가 깜짝 놀란 눈으로 리아나를 바라보았다.


“어, 리아나 너 모르고 있었냐? 설원의 마검사?”


“그게 뭐예요?”


아버지 말러를 바라보는 리아나의 눈빛이 왠지 유난히 순수해 보였다. 말러가 한쪽 눈을 찌푸리며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리아나야, 아렌마을의 여검사말이다. 니가 찾아가려고 했던. 아리시아님은 대마법사이시기도 하지만, 검술도 하실 줄 알아. 일종의 마검사시지.”


“하지만 아리시아님은 봉술을…….”


“됐고. 일단 이거 가지고 가서 부탁해 봐.”


더 말을 이으려는 리아나의 손에 억지로 다 식어버린 찻잔을 쥐어 주고는 말러가 딸의 등을 떠밀었다. 용기를 낸 리아나가 두 손으로 찻잔을 움켜쥐고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아리시아님, 이거 좀 드셔보세요."


아무런 대답도 없는 아리시아를 곁눈질로 바라보며 리아나가 그녀의 옆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저기…… 아리시아님? 저번에…… 아리시아님께서 제게 봉술…… 가르쳐 주신다고 하셨잖아요.”


그제야 아리시아가 옆에 앉은 리아나를 바라보았다. 리아나가 들고 있던 찻잔을 아리시아에게로 내밀었다. 잠시 첫잔을 내려다보던 아리시아가 잔을 받아 들었다. 그런 아리시아를 바라보며 리아나가 방긋, 미소를 지었다.


“저, 아리시아님…….”


리아나가 찻잔을 들어 마시는 아리시아를 잠시 동안 바라보고 있다가 용기를 내서 말을 이으려는데, 그때, 그들의 앞쪽에서 누군가의 외침소리가 울렸다.


"마물이다 조심해."


곧, 땅으로부터 작은 진동이 느껴지더니, 라크의 용병대가 머물고 있던 무너진 건물 터에서 커다란 검은색 물체 하나가 땅을 뚫고서 솟아올라왔다. 그와 함께 건물 밖으로 튀어나온 용병들이 그 물체의 주위를 둘러싸며 하나 둘씩, 자신들의 무기를 빼들었다. 말러와 아리시아도 거의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물은, 온통 검은색의 몸통에, 긴 목이, 마치 뱀처럼 구불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는데, 짧은 네 개의 다리로 중심을 잡고서서 목 언저리에 붙은 두 개의 지느러미 같은 것을 휘저으며 용병들을 위협하고 있었다. 쇠를 긁어대는 듯 한 괴성을 연신 질러대고 있는 마물의 이름은 ‘샤코로스’라고 하는데, <하르테론의 대재앙> 이후 대륙에 등장한 변종의 마물 중에 하나였다.

<녹색독사카니>를 빼어든 말러가 아리시아를 바라보며 ‘아리시아님 마법을 부탁드립니다.’ 하고 소리친 후에 그녀의 대답도 듣지 않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갑작스러운 마물의 등장에도 침착한 표정을 유지한 채로, 자신의 등 뒤에 매달려 있던 은색의 도끼를 빼어든 라크가 소리쳤다.


“샤코로스다, 모두 전투 대형을 유지하고, 빌은 마법을 준비해.”


라크의 목소리에, 화살을 든 다섯 명의 궁수들이 라크의 뒤에 도열해 서고, 하얀 로브의 남자가 그들과 몇 미터 더 떨어진 곳에서 마법의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곧 궁수들이 활을 쏘기 시작했고, 그 와 함께 앞 쪽에 서 있던 라크와 메르넨, 그리고 붉은 머리의 청년과 미처 웃통을 챙겨 입지 못한 청년이 샤코로스에게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에워싸고서 화살이 멈추기를 기다렸다. 그들만의 전술인 듯, 라크의 한마디에 그들의 움직임은 잘 짜여 진 연극처럼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태양빛에 반짝거리는 샤코로스의 갑옷 같은 살갗은 대부분의 화살들을 튕겨내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궁수들이 쏘아대는 화살은 대부분 마물의 머리 쪽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샤코로스의 눈에 맞으면 좋고, 아니면 일단 대원들이 대형을 잡기까지 시야를 방해하는 작전인 것 같았다. 그 의도대로 긴 목을 이리저리 휘저으며 화살을 피하던 샤코로스가 당황하며 조금 뒷걸음질까지 치기 시작했다. 곧 화살이 멈추고 이번에는, 그 사이 마법주문을 완성한 하얀 로브의 남자에게서 날아간 불타는 구 하나가 샤코로스의 가슴에 정확하게 맞고 터져나갔다. 그리고 그 순간, 가자! 하는 라크의 신호와 함께 마물을 에워싸고 서 있던 네 명의 용병이 일제히 마물을 향해 몸을 날렸다. 검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날아든 메르넨과 그녀 보다 조금 빨랐지만, 또한 조금 늦게 도달한 라크의 은빛도끼가 샤코로스의 오른 쪽 다리에 칸칸이 나있는 작은 틈으로 날아가 박혔다. 그리고 그와 비슷한 시간에 왼쪽 다리를 향해 날아 든 붉은 머리의 청년과 웃통을 벗고 있는 청년이 역시나 무릎사이에 난 관절의 틈으로 검을 쑤셔 박았다. 검이 꽂힌 곳에서 검은 색의 핏물이 뿜어져 나오고 곧, 무기를 회수한 네 명의 신영이 동시에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잠시 중심이 흐트러졌던 마물은 쓰러지지 않고, 그들을 향해 다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번으로 안 되나? 다시!”


마치 또 다른 마물의 외침처럼 울려 퍼지는 라크의 목소리에 다시 화살들이 마물을 향해 쏟아져 날아갔다. 그리고 다시 화살이 멈추고, 라크가 다시 은빛 도끼를 거세게 움켜잡았다. 그러나 그가 몸을 움직이기 전에 어느새 달려든 말러가 샤코로스의 앞으로 달려가, 조금 전, 용병들이 상처를 냈던 왼쪽 다리를 녹색의 검으로 그었다. 그러자 검은 물을 줄줄이 쏟아내던 다리에서 마치 물꼬가 터진 듯이 검은색 피가 세차게 뿜어져나오며 샤코로스의 몸이 한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한 번에 갈랐다. 역시 오러기사였나?’


쓰러지는 마물을 피해 멀리 날아가 선 말러를 잠시 바라보던 라크가 주위에 선 대원들을 한 번 휘둘러 바라보며 소리쳤다.


“마무리 하자.”


다시 뛰어 오른 그들이 쓰러진 샤코로스의 목에 동시에 검을 쑤셔 넣었다. 그런데 그 순간, 그들이 날아오른 바로 그 지점에서 작은 진동이 울리더니 또 한 마리의 샤코로스가 갑자기 튀어나와 마침 외우고 있던 주문을 멈추고서 다가서고 있던 하얀 로브의 남자에게로 달려들었다.


“피해, 빌!”


깜짝 놀란 라크와 용병들이 급히 검을 회수하고 돌아보았지만, 샤코로스의 긴 목은 이미 빌이라고 불린 하얀 로브의 남자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모두가 놀라 눈을 감는 그 순간,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샤코로스의 긴 목이 반대쪽으로 돌아가 사라졌다.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이 채, 사태를 파악하기도 전에, 어느새 샤코로스의 얼굴에 철봉을 박아 넣은 아리시아가 그대로 그 철봉을 바닥에 꽂아 넣었다. 아리시아의 철봉을 따라 샤코로스의 육중한 몸이 공중으로 떠올라 반바퀴 회전을 하고는 그녀가 착지한 곳을 넘어 그대로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조금 전, 땅을 울리던 것과 같은 진동이 또 한 번, 바닥을 흔들어대며 그와 함께 자욱한 먼지가 사방을 덮어버렸다. 그리고 그 먼지가 모두 사라질 때까지, 한 동안 오랜 침묵이 흘렀다.





“마법사가 아니었네.”


겨우 내뱉어진 라크의 한 마디에 모두가 마법에서 풀려 난 듯, 정신을 차렸다. 지금까지 그녀가 싸우는 모습을 제대로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말러도, 리아나도, 하물며 르마스마저도 연기인지 뭔지 모를 놀라움에 젖은 표정으로 입을 벌리고 서 있었다.

그런 르마스를 한 번 바라보고서, 잠시 눈을 가늘게 뜬 아리시아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조금 전 자신들이 있던 곳을 향해 아무 말 없이 걸어갔다. 그때 누군가가 그녀의 앞으로 달려와 그녀의 걸음을 막아 세웠다. 고개를 들고 바라보니 검은 머리의 메르넨이 의문에 찬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 검은 머리이면서 하룬족이 아니라고 했지…… 혼혈인가?”


그러나 아리시아에게서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무언가 조바심이 들어 찬 표정으로 메르넨이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 어떻게 그렇게 강한거지? 하룬족은 마법의 종족이야. 그들은 검을 사용하지 않아. 거기다 여인의 몸으로…….”


순간, 아리시아의 검은 눈동자가 그녀의 주홍빛 눈동자와 마주쳤다.

내 힘은 무엇이지?

자신이 지니고 있는 힘, 정령의 힘 이외에 저런 커다란 덩치의 괴물을 들어 메칠 수 있는 힘은 분명 기계의 힘이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인간이 아니라고, 난 인간이 아니야, 라고 말을 해야하나? 그녀의 시선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르마스에게로 향했다.




깊은 고뇌에 빠진 아리시아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녀의 괴력에 놀라 여전히 놀란 얼굴로 서 있던 말러의 귓가에 딸아이의 어여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


말러가 말없이 고개를 숙여 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직도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멍한 얼굴로 아리시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 저 드디어 사부로 모실 분을 찾았어요.”


말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지금까지 저렇게 강한 여인은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이야기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 옛날 <검의 여제>라고 칭해지던, 샘프리드는 저만큼 강했을까? 샤코로스가 마물 중에서는 그나마 상대하기 쉬운 마물이라고는 해도, 그 힘도 빠르기도 보통의 인간이 홀로 대적할 수준은 되지 못했다. 자신 역시도, 오러의 기운을 모두 담아 한 번에 다리를 잘라내기는 했지만, 그건 용병들이 그만큼 마물의 정신을 빼놓은 덕분이었다. 거기다 그녀처럼 저 덩치를 메다꽂는 일은 더욱,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완숙함의 끝에 들어선 기사들이 오러의 기운을 몸에 담을 수 있게 되면 그 근력이 수 십 배로 늘어날 수 있었다. 소위 그들을 마스터라고 부르지 않던가? 처음 설원의 마검사 라는 말을 들었을 때도, 그녀의 경지가 자신을 압도 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적어도 검술에서 만큼은.

그러나 지금, 말러는 자신이라도 가르침을 청하고 싶은 심정에 휩싸여 있었다. 하물며 십오 년, 평생을 여검사를 찾아다닌 리아나는 어떻겠는가? 만약, 이 천운이 닿아 딸이 아리시아의 제자라도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자신의 카니치트가문은 지금과는 차원이 다른 힘을 얻게 되리라.


“정중히 부탁 드리거라. 행여 거절하시더라도, 좌절하지말고, 알았지?”


걱정스럽게 딸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준 말러가 이번에는 천천히 딸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리아나는 굳은 결의에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아리시아를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그녀의 팔을 잡았다.

메르넨의 질문에 잠시 고민에 빠져 있던 아리시아가 자신의 팔을 잡고서 흔들고 있는 리아나에게로 고개를 숙였다.


“아리시아님, 말씀 다 나누셨으면 잠시만 비켜주세요.”


아리시아의 대답은 듣지 않고 몸을 돌린 리아나가 검은 머리의 메르넨에게 고개를 숙였다.


“여검사님 저에게 검술을 가르쳐주세요.”


주홍빛 눈동자를 반짝이며 서 있던 메르넨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어린 소녀를 멍한 표정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리아나의 등 뒤에서는 뒷목을 잡고 쓰러진 말러를 부축하는 르마스와 다급하게 필립님! 을 외치며 울고 있는 미리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리아나의 귀에는 지금 눈앞에 서 있는 멋진 여검사를 향해 요동치고 있는 자신의 심장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정신 차리십시오. 자작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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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제6장 - 므로도스가의 마법사이십니까?(8) +2 15.04.14 348 14 20쪽
36 제6장 - 므로도스가의 마법사이십니까?(7) 15.04.13 425 14 27쪽
35 제6장 - 므로도스가의 마법사이십니까?(6) 15.04.12 533 12 19쪽
34 제6장 - 므로도스가의 마법사이십니까?(5) +2 15.04.11 502 8 16쪽
33 제6장 - 므로도스가의 마법사이십니까?(4) 15.04.10 464 13 16쪽
32 제6장 - 므로도스가의 마법사이십니까?(3) +1 15.04.09 591 11 15쪽
31 제6장 - 므로도스가의 마법사이십니까?(2) +3 15.04.08 408 11 11쪽
30 제6장 - 므로도스가의 마법사이십니까?(1) +1 15.04.07 626 12 17쪽
» 제5장 - 제게 검술을 가르쳐 주실 수 없나요?(8) +1 15.04.06 563 9 18쪽
28 제5장 - 제게 검술을 가르쳐 주실 수 없나요?(7) 15.04.05 504 13 18쪽
27 제5장 - 제게 검술을 가르쳐 주실 수 없나요?(6) +1 15.04.04 449 11 14쪽
26 제5장 - 제게 검술을 가르쳐 주실 수 없나요?(5) +1 15.04.03 421 12 17쪽
25 제5장 - 제게 검술을 가르쳐 주실 수 없나요?(4) +2 15.04.02 550 14 17쪽
24 제5장 - 제게 검술을 가르쳐 주실 수 없나요?(3) +1 15.04.01 463 15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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