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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령 님의 서재입니다.

얼음의 아리시아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을령
작품등록일 :
2015.03.16 00:00
최근연재일 :
2019.04.08 22:19
연재수 :
7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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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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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5
글자수 :
553,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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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4.25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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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제8장 - 모두 제국으로 가는 건가요?(2)

DUMMY

하늘을 향해 높게 올라간 두 개의 망루를 사이에 둔, 약 오백여 미터 길이쯤 되는 성벽 위에 수백 명의 궁수들과 함께 붉은 로브의 마법사들이 도열해 서 있었다.

궁수들 사이에서 붉은 로브를 나부끼며 서있는 백여 명의 마법사는 그것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적들의 사기를 떨어뜨릴 수 있을 만큼의 위압감을 내뿜고 있었다. 리비안의 반을 감싸고 있는 외성의 길이는 총 십여 킬로미터, 그중 북문과 서문을 중심으로 외성이 쌓여있고, 남쪽으로는 리비안의 마탑이 자리한 늪지대가 자리하고 있었다.

리비안의 북쪽 성문 위에서 마웅 후작을 비롯한 므로도스가문의 수뇌, 마법사들이 멀리 도열하고 있는 적들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저 앞에 하얀 말 위에 올라 타 있는 자가 리글리오스입니다.”


므로도스가의 화염의 기사단의 단장을 맡고 있는 중년의 기사 타베르가, 앞으로 손을 뻗으며 말했다. 그가 가리키는 곳에, 검은 빛의 커다란 대검을 입에 물고 있는 흰색 드래곤의 얼굴이 새겨진 은빛갑옷을 입은 금발의 남자가 하얀 말을 타고서 도열해 있는 기사들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호기심어린 눈빛을 그대로 드러내며 마법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로 향했다.


“저 엠블렘이······ 크록가문의 문양이였던가요? 타베르경?”


마웅 후작의 옆, 바람에 휘날리는 긴 수염을 손으로 정리하며 마로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사들의 가슴에는 물론, 병사들이 들고 있는 깃발과 병사들의 뒤로 보이는 수백 대의 마차들에도 검을 물고 있는 하얀 드래곤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크록 후작가문의 엠블렘은, 커다란 붉은 보석에 꽂혀있는 두 개의 검. 타베르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저 엠블렘의 정체는, 저로서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의 말에 마법사들이 몇 마디, 자신들의 견해를 나누며 소곤거렸지만, 그것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때 성 벽 위로 마법사 카리첼이, 네 명의 하얀 로브를 입은 사람들을 이끌고 올라왔다. 그 중, 카리첼의 바로 뒤를 따르는, 하얀색 로브로 몸을 감싼 백발의 노인에게로 마레드가 급히 걸음을 옮겨 다가갔다. 그의 가슴에는 붉은 태양이 그려진 엠블렘이 다섯 개, 달려있었다.


“리체로 대사제님 와주셨군요.”


다가오는 마레드에게 가볍게 고갯짓을 해보인 리첼로 대사제가 마웅후작을 바라보며 고개를 숙였다.


“올레아니스님의 가호가 므로도스가에 깃들길 바랍니다.”


“대사제께서 친히 납시어 주시니 감사할 따름이오.”


무표정한 얼굴로 인사를 건네는 마웅후작이었지만, 조금의 내색도 없이 리첼로가 답했다.


“므로도스가문에 머문 빛의 사제들 모두 이번 변고에 분노하고 있습니다. 시국이 어지러운 때에 사리사욕만 채우고자 달려드는 자들의 어리석음이 안타깝기 그지없군요. 저희 빛의 사제들 모두 힘닿는 데까지 므로도스가를 돕겠습니다.”


“고맙소.”


역시나, 형식적인 대답이 마웅 후작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것이 사제들과 마법사들과의 관계였다. 마법왕국이 대륙에 모습을 드러내기 전, 마법사라는 존재는 너무나 형편이 없어서, 신관들 중에서 가장 낮은 등급의 제1사제만큼의 대우도 받지 못했다. 그 당시 일부 신관들에 의해 마법사들은 사기꾼이나, 마녀 혹은 악마로 몰려, 마녀사냥을 당해 목숨을 잃는 일도 허다했다.

그러나 지금은 마법의 시대. 마법사들은 민중에게 신망의 대상이 되었고, 점차 신관보다는 마법사가 더 존경 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다만 빛의 사제들의 치유력만큼은 절대적으로 우위에 있었기에, 이런 경우 아주 무시할 수만은 없었고, 빛의 신을 따르는 신관들 또한 모른 척할 수 없어 이렇듯 어색한 만남이 이루어지고는 했다.


“어, 엄청난 대군이로군요.”


열을 맞춰 서 있는 이만여 명의 보병들과 긴 창을 높이 치켜들고서 말에 올라 있는 은빛 체인메일을 입은 수백 명의 기병들, 그리고, 이제 막,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태양빛에 반짝이는 은빛갑옷을 입고 있는 300여 명의 기사들이 내뿜는 위용에, 리첼로의 얼굴에 짙은 두려움이 깔렸다.

그가 태어난 시대, 세일루니아에는 단 한차례의 전쟁도 없었다. 더군다나 대므로도스가에게 영지전을 도전한 가문도 있을리 없었다. 앞으로도 그러하리라 여겼는데, 막상 적을 앞에 두고 바라보고 있자니 온 몸으로 식은 땀이 흘러내렸다.


“대사제께선,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들은 화살하나 쏘아보지 못한 채로 전멸의 길을 가게 될 테니까요.”


마레드가 대사제를 안심시키고 있을 때, 오른 쪽에, 성벽 보다 약 3미터 가량 높이 쌓아 올려진 망루 위에서 병사 하나가 붉은 기발을 흔들며 소리쳤다.


“적들이 움직입니다.”


약 오십여 명의 기사가 보병들 앞으로 말을 몰아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시작하려나 보군.”


마웅후작의 말에, 그의 주위에 모여 있던 노마법사들이 분주히 흩어지기 시작했다.


“리첼로 대사제님. 일단은 조금 물러나 계십시오.”


마레드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리첼로는, 신의 가호가······, 라는 말을 다시 한 번 남기고서 사제들을 이끌고 급히 성벽 아래로 몸을 피했다. 그와 함께 마법사 카리첼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화염의 마법사단은 각, 위치에서 준비한다.”


곧이어 기사단장 타베르가 소리쳤다.


“기사들은 마법사님들을 지킨다. 궁수들은 위치에 앉아 부대장의 신호를 기다린다.”


외성 안, 성벽 바로 밑에서도 징병되어 온, 리비안의 병사들이 대열을 가다듬고서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천의 보병이, 수십 명의 기사들과 함께 리비안의 성벽을 향해 진군해 오고 있었다.


“반도 안 되는 수로 무얼 하려는 수작이지?”


적을 노려보며 선, 마레드의 미간이 구겨졌다. 카리첼의 긴장감이 담긴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저들도 우리 마법사들의 존재가 부담이겠지. 먼저 힘을 빼놓을 속셈일 거야.”


“우리 므로도스를 정말 우습게 보는군.”


콧방귀를 뀐 마레드에게 기사단장 타베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적들이 사정권 안으로 들어섭니다.”


그와 함께 성벽 위에 띄엄띄엄 서 있던 병사들이 차례로 붉은 색 깃발을 하늘높이 들어올리고, 그 깃발을 신호로 줄을 맞춰 앉아있던 수백의 궁수들이 차례로 활시위를 당겼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궁수들 사이에 자리를 잡고 서 있던 백여 명의 마법사들의 입에서 일제히 마법주문을 읊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곧, 오천 명의 보병들을 향해 오백여 발의 화살이 일제히 날아들었다.

행군을 멈춘 보병들이 일제히 커다란 방패를 머리 위로 들어올린다.

그와 함께 방패위로 쏟아지는 화살들.

소나기가 퍼부어지듯, 곡선을 그리며 날아든 화살이, 채 적에게 닿기도 전에, 다시 열을 바꾼 궁수들이 화살을 날렸다. 그렇게 천여 발의 화살이 날아갔지만, 화살에 맞아 사살된 보병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방패는 물론, 푸른 색 잔디로 덮인 바닥 위에도, 제대로 꽂힌 화살은 단 하나도 없었다. 다만 화살 앞에 달린 하얀색 주머니가 적들과 닿을 때마다 팡팡, 소리를 내며 터지고, 그와 함께 쏟아져나온 무언가가 병사들의 몸을 적셨다.


“기름이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는 그 때, 성벽 위에 선 므로도스가의 마법사들의 어깨 위로 불의 구가 떠올랐다. 그리고 동시에, 지금 막, 기름칠로 범벅이 된 보병들에게로 불의 구가 쏟아져 내렸다.

하늘을 비상하며 날아든 불의 구를 피해 달아나보지만, 곧 보병들이 서 있던 곳, 여기저기로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이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머리위로 다시 수천 발의 화살비가 쏟아졌다. 이번에는 날카롭게 빛나는 촉이 달린 진짜 화살들이었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한 전장에서 지휘관의 후퇴명령이 떨어지고 포이리안군은 맥없이 뒤돌아 달아기 시작했다.

2000여 명의 사상자.

겨우 이천여 발의 화살과 마법사들이 쏘아올린 단 한 발의 1서클 마법이 이루어낸 결과였다. 리비안의 성벽 위에서 우렁찬 함성 소리가 연이어 터져 나왔다.





그 시각, 리비안의 마탑, 지하에 위치한, 일명 <이동의 방> 안에 열 명의 마법사가 서서 둥근 원형의 마법진을 지키고 있었다.

마치 시간이 정지한 듯, 정적만이 흐르는 이곳에 요란한 쇳소리를 내며 문이 열리고 십여 명의 기사들이 안으로 들어선다. 그 중, 중년의 기사가 노마법사를 향해 다가가 입을 열었다.


"브론님께서 계셔서 한결 마음을 놓을 수 있었습니다."


인자한 미소를 그리며 노마법사가 돌아섰다.

전쟁 중, 가장 위험한 것을 꼽으라고 한다면 이동 마법을 이용한 적의 침투일 것이다. 더군다나, 적은 므로도스가와 적대관계에 있는 마법의 명문가문 포이리안이었으니 더욱 신경이 쓰일 수밖에는 없었다. 그래서 도시 곳곳에는 이미 마법으로의 이동을 방해하는 마법석들이 심어지고, 주요 거점마다 이렇듯 병사나 마법사들이 배치되어 경비를 서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아이러니하지만 이런 경우에 가장 취약한 곳일지도 모르는 이곳, 중앙 마탑의 이동마법진은 특별히, 이번 센틀러의 장례를 위해 방문한 므로도스가의 혈족 중, 4서클의 마법사 브론자작이 지키고 있었다.


“경들이 더 고생이지. 나야 뭐하는 일이 있다고. 전세는 어떤가?”


기사 테일이 표정을 바로하며 말했다.


“아직 적들의 도발은 보고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기세로 봐서는 곧 시작 될듯합니다.”


브론의 얼굴에도 근심이 담겼다.


“안타깝군. 세일루니아가 그나마 지금의 형세를 유지할 수 있는 것도, 우리 마법사들의 힘이거늘, 그 두 가문이 싸우게 되다니.”


므로도스가의 먼 혈족이기는 하지만, 리비안에서 보는 일은 거의 없었던 노마법사는, 그러나 여타의 삐딱한 성격의 마법사들과는 달리 마치 동네의 어른처럼 인자하기 그지없었다.


“우리야 이곳만 잘 지키면 될 일. 수고 해주게.”


“마법사님들이 고생이십니다.”


어느새 마법사들의 옆으로 한 명씩 기사들이 다가가 섰다. 다시 고요가 찾아들 무렵, 어둠의 방의 문이 다시 열렸다. 그리고 들려오는 평온한 말소리가 무겁게 내려앉은 공간에 정적을 깨며 울려 퍼졌다.


“이런 변장까지 하고 다녀야하다니 한심하다 한심해.”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리비안의 병사들이 입는 가죽갑옷을 입은, 작은 키의 어린 여자아이였다. 어디서 났는지 모를, 커다란 가죽갑옷은 아이에게는 턱없이 커서, 아이의 한쪽 어깨가 드러나고, 머리에 쓴 투구가 자꾸만 앞으로 흘러내려 그녀의 반짝이는 푸른 색 눈동자를 가렸다. 그 모습이 너무나 귀여워 당장이라도 달려가 안아주고 싶을 만큼 깜찍한 목소리를 지닌 여자아이였다.


“어찌됐든 들키지 않고 잘 들어왔잖아.”


그리고 그 어린 여자아이를 따라 들어온 것은 이미터는 훌쩍 넘는 키에 어마어마하게 뚱뚱한 몸을 지닌 자였다. 그 역시 리비안의 병사갑옷을 입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너무나 작아서 들려진 갑옷과 잠가지지 않은 바지 때문에 커다란 배가 불룩하게 튀어나와 있고, 껑충하게 올라간 바지는 마치 반바지나 마찬가지로 무릎아래에서부터 맨발까지가 훤히 드러나 있었다.

걸어 들어온 여자 아이는 흘러내리는 투구를 들어 올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야아. 여기 꽤 맘에 드는데. 어둡고 조용하고.”


여자아이는 마치 우연히 놀이터라도 발견한 아이처럼 방긋 미소를 지었다.


“누구냐?”


둥그렇게 뜬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기사 테일이 한발 앞으로 걸어 나왔다. 여자아이와 거구의 뚱뚱보라니. 마탑의 주위에만 무려 백여 명의 병사들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그리고 마탑 안에도 꽤 많은 수의 마법사들이 아직 남아 돌아다니고 있었고, 더군다나 이곳, 이동의 방 앞에는 네 명의 기사가 보초를 서고 있었다. 그런데 저런 특이한 자들이 이곳까지 들어올 때까지, 밖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기사님이 눈치가 없으시네.”


아이의 말에 기사 테일은 멈칫, 어찌 해야 할지 몰라 브론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브론이 막 입을 열려고 할 때, 그의 말을 가로채며 웃음기가 담긴 아이의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늦었어, 아저씨.”


아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위기를 느낀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빼들었다. 그러나 그들이 걸음을 옮기기도 전에 푹, 하고 맨 왼쪽에 선 기사의 검이 마법사의 목을 꿰뚫었다.


“카빌!”


생각지도 못한, 어이없는 상황에 놀란 테일이 경악에 차 소리를 내질렀다. 카빌은, 테일이 속한 화염의 기사단 제3조에서 침착하기로 유명한 자였다. 또한 테일이 직접 발굴해 키운, 누구보다도 믿을 수 있는 기사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므로도스가문의 마법사에게 검을 들이 댄 것이었다. 마법사의 목을 찌른 검을 잡고서 바르르 떨고 있는 카빌의 얼굴이 테일보다 더 처참하게 구겨졌다.


“제가, 제가 한 게 아닙니다.”


그 순간, 또 다른 기사의 검이 그의 옆에 선 마법사의 목을 쳐냈다.

툭, 떨어져 나간 목이 또르르 앞으로 굴러가고, 뻣뻣하게 굳는 마법사의 몸이 피를 쏟아내며 쓰러졌다.

커다랗게 뜬 눈으로 기사들을 바라보던 마법사들이, 급기야 그들에게서 급히 뒷걸음질 쳐 물러서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일인가 테일 경.”


분노에 차, 소리를 내지르는 노마법사 브론에게로 테일이 돌아섰다.


“진정하십시오. 브론님, 절대로 저희가······.”


그러나 그는 채 말을 끝맺지 못했다. 어이없게도 자신의 검이 그에게로 뻗어져 나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순식간에 날아든 테일의 검이 브론의 가슴에 날아가 박혔다.


“테일 경······ 이게······.”


“······!”


경악에 차 동그랗게 뜬 눈을 채 감지도 못하고서 자신을 바라보며 무너져 내리는 노마법사의 가슴에서 뿜어져 나온 붉은 피가 그의 얼굴로 뿌려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 그와 함께 어느새 그들 앞으로 다가선 거구의 사내가 도망을 치고 있는 두 명의 마법사의 머리를 커다란 손으로 잡아 들어올렸다. 그와 함께 으드득, 머리뼈가 부서지며 마법사는 절명하고 말았다.

그 모든 광경을 경악에 찬 눈으로 지켜보는 테일의 앞으로 연신 흘러내리는 투구를 치켜 올리며 해맑게 웃고 있는 여자아이가 천천히 다가서고 있었다.





장내는 순식간에 정리가 되었다. 마법주문을 외우던 마법사가 중간에 입을 다물고는 거인의 앞으로 스스로 걸어가 그의 손에 잡혀 온몸이 찢겨 죽는가 하면, 여자아이에게 검을 들고 달려들던 기사의 목이 테일이 휘두른 검에 날아가기도 했다. 거인에게 들려 올려 진 기사는 저 멀리 벽으로 날아가 온몸이 부서져 죽었고, 여자아이를 향해 마법을 날리려던 마법사는 자신의 어깨 위로 둥실 떠오른 불의 구에 자신의 머리를 처박고 죽기도 했다.

그 모든 일이 불과 십여 분만에 벌어졌다.


“아! 나가기 싫다.”


목이 잘려나간 기사의 몸을 엉덩이 밑에 깔고 앉아, 짙은 초록색 머리카락을 손으로 배배꼬아가며 무료함을 달래던 여자아이가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럼 계속 있으면 되지.”


마법진 위에서 푸른색의 마법석 세 개를 꺼내 들고서 그것을 입으로 깨물어 보던 거구의 사내가 여자아이에게로 어슬렁어슬렁 다가왔다.


“안 돼, 페듀. 인간들의 눈에 띠면 골치 아파진다고.”


“넨시는 너무 어려워.”


여자아이가 까르르, 자신의 배를 움켜잡고서 웃었다.


“원래 여자는 다루기가 어렵지.”


“벨카루스는 남자지만 어려워.”


거구의 사내 페듀의 말에 여자아이, 넨시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그는······, 나도 모르겠어.”


“우린 이제 인간의 편에 서는 건가?”


“그럴 리가······, 하지만 역시 그의 생각은 너무나 어려워. 나도 뭐가 뭔지 몰라. 번거로운 건 질색이니까, 이만 가자.”


휘파람을 불며, 두 사람이 방을 나가고 잠시 뒤, 마법진 위로 붉은 빛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마법진 위에 은빛 갑옷을 입은 열 명의 기사들이 모습을 나타냈다.

눈앞을 가리는 금발머리를 손으로 빗어 넘기며 주위를 둘러보던 기사 리글리오스가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셀리오스백작께서 걱정하지 말라고 하시더니 정말 말씀대로 되었군요.”


옆에 선 기사의 말에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인 리글리오스가 바닥에 놓여있는 노마법사의 얼굴을 발로 걷어차며 미간을 구겼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한 편, 대부분의 주민들이 빠져 나간 텅 빈, 리비안 시내에 자리 한, 고급 여관 <마법사의 쉼터>에서, 갑자기 누군가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삼층 객실 안, 단정하게 묶어 올린 갈색머리의 여인이 분노에 젖어 온몸을 떨며 서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한 장의 종이가 들려 있었는데 그것을 읽고 있는 여인의 눈동자는 이글이글 타오르다 못해, 정말이지 금방이라도 불꽃을 내뿜을 듯 했고, 이마에는 핏줄마저 불거져 나와 있었다.



미리에게

미리, 우리가 이곳에 온지 오일이나 흘렀어. 돈 한 푼 없는 우리에게, 마리엔님과 그 분의 가족분들은 끝없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지. 그들에게 받은 은혜가 하늘과 같이 높은데 그들의 어려움을 모른 척 넘기고 있는 내 자신이 너무나 싫어.

미리, 넌 기사가문의 딸인 내 마음을 이해할 수 없을 거야.

기사로 태어나 한점의 부끄러움 없이 살아가는 아버지의 자랑스러운 딸, 아니 카니치트 가문의 영광을 위해 난 마리엔님을 돕기로 결정했어.

그러니 미리. 넌 이곳에서 몸을 피하고 있어.


추신, 만약 내가 죽거든 카니치트가문의 신념을 지키다가 부끄럽지 않게 죽었노라고 아버지께 말씀드려 줘.




다시 한 번, 편지를 읽은 미리의 손에서 무참히 구겨진 편지가 바닥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세차게 커튼을 걷어낸 미리의 신영이 창문 밖으로 떨어져 내렸다.


“기사의 신념은 개뿔, 그냥 좀이 쑤셨던 거지. 이······ 말썽꾸러기, 니가 기사면 난 마왕이다, 마왕.”


달려가는 미리의 외침에 리비안의 거리가 조금 시끄러워졌지만 그 뿐, 사위는 다시 고요 속으로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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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8장 - 모두 제국으로 가는 건가요?(2) 15.04.25 496 9 19쪽
47 제8장 - 모두 제국으로 가는 건가요?(1) +2 15.04.24 477 7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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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제6장 - 므로도스가의 마법사이십니까?(9) +2 15.04.15 565 11 22쪽
37 제6장 - 므로도스가의 마법사이십니까?(8) +2 15.04.14 347 14 20쪽
36 제6장 - 므로도스가의 마법사이십니까?(7) 15.04.13 424 14 27쪽
35 제6장 - 므로도스가의 마법사이십니까?(6) 15.04.12 532 12 19쪽
34 제6장 - 므로도스가의 마법사이십니까?(5) +2 15.04.11 501 8 16쪽
33 제6장 - 므로도스가의 마법사이십니까?(4) 15.04.10 463 13 16쪽
32 제6장 - 므로도스가의 마법사이십니까?(3) +1 15.04.09 590 11 15쪽
31 제6장 - 므로도스가의 마법사이십니까?(2) +3 15.04.08 408 11 11쪽
30 제6장 - 므로도스가의 마법사이십니까?(1) +1 15.04.07 626 12 17쪽
29 제5장 - 제게 검술을 가르쳐 주실 수 없나요?(8) +1 15.04.06 562 9 18쪽
28 제5장 - 제게 검술을 가르쳐 주실 수 없나요?(7) 15.04.05 503 13 18쪽
27 제5장 - 제게 검술을 가르쳐 주실 수 없나요?(6) +1 15.04.04 449 11 14쪽
26 제5장 - 제게 검술을 가르쳐 주실 수 없나요?(5) +1 15.04.03 421 12 17쪽
25 제5장 - 제게 검술을 가르쳐 주실 수 없나요?(4) +2 15.04.02 550 14 17쪽
24 제5장 - 제게 검술을 가르쳐 주실 수 없나요?(3) +1 15.04.01 463 15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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