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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령 님의 서재입니다.

얼음의 아리시아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을령
작품등록일 :
2015.03.16 00:00
최근연재일 :
2019.04.08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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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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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553,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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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4.23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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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9쪽

제7장 - 이렇게 쉽게 끝날리가 없지(8)

DUMMY

"됐습니다."


남자의 목소리가 끝나기가 무섭게 번쩍, 작은 불빛이 일어나더니 사위가 아주 조금 밝아졌다.


"이제 좀 살 것 같네."


걸쭉한 목소리의 주인공, 라크가 방금 불이 붙은 횃불을 들고 일어나 이리저리 주위를 둘러본다. 겨우 정신을 수습한 사람들이 그가 들고 있는 횃불이 비추는 곳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러다 갑자기 걸음을 멈춘 라크의 입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이게 뭐야?"


라크의 동그랗게 뜬 눈이 말러를 향했다. 라크뿐만 아니라 불빛을 따라 함께 주위를 살피던 다른 사람들의 얼굴에도 마찬가지로 놀라움이 가득, 들어 찼다. 천장은 물론 벽마저도 온통 얼음으로 뒤덮여 반짝거리고 있었다. 마치 한겨울, 얼음 동굴 속에 들어와 있는 것만 같은 신비한 모습에, 사람들은 자신들이 처한 상황도 잊은 채, 잠시 황홀경에 빠져들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분명, 건물 전체가 무너지는 것만 같은 강한 진동이 오랜 시간동안 이어졌다. 지금 그들이 딛고 선 바닥에도, 천장에서 쏟아진 수많은 돌덩어리들이 떨어져 있고, 발을 옮길 때마다 일어난 먼지가 풀풀 공중으로 휘날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던 천정이, 아니, 이미 주저앉아 볼록해진 천장을 단단하게 언 얼음의 벽이 받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부터 유난히 차갑게 느껴지던 공기도, 이제야 그 원인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멍청하게 서서 얼음으로 뒤덮인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는 사람들의 귀가에 아리시아의 무심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것도 그리 오래 버티진 못할 겁니다."


말러를 비롯한 용병들과 상처 입은 병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아리시아에게로 향했다.


"이거……, 아리시아님께서 펼치신 마법입니까?"


말러의 질문에, 뭐라고 대답하기가 애매해진 아리시아는 그저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그녀가 한 것은 맞지만 마법이라고는, 당연히 말을 할 수 없었다. 그 보다는 자신의 정령력이라고 해야 그나마 맞는 말이었지만, 그 마저도 그녀가 마음먹고 한 일은 아니다. 간혹 가다가 그녀도 모르게, 그녀의 힘이 예상을 뒤엎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 올 때가 있었다. 아주 가끔씩…….

그러나 어찌되었든 사람들은, 자신들이 아리시아의 도움을 받아 살아남게 되었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깨달았다. 모두들 서로 눈치만 보며 두리번거리고만 있을 때, 라크가 아리시아에게로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또 한 번, 신세를 졌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아리시아는 왠지 이 상황이 어색해서 그저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말을 돌렸다.


"빨리 빠져나갈 방법을 찾아야만 합니다."


그녀의 말에 잠시 넋을 놓고 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 정신을 차리고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용병들이 부상을 입은 병사들에게로 다가가 그들을 살폈고, 또 몇 명이 바닥에 떨어진 초를 들고 와 불을 붙였다. 라크와 말러, 그리고 그나마 상처가 덜한 용병들이 벽을 더듬으며 출구를 찾았다. 아리시아의 말대로 곧 얼음이 하중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그렇게 되면 이제는 아무런 가망도 없었다. 그들에게 다시 아리시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우리는 지하, 5미터 되는 지점에 있어요. 천장이 받치고 있는 전체 하중은 약 476톤, 가장 적은 곳이 약 288톤이에요."


그녀의 설명을 듣고 있던 사람들이 멀뚱멀뚱 아리시아를 바라보았다. 대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가? 갑자기 찾아온 어색한 기운을 물리치며 말러가 라크를 향해 물었다.


"입구는?"


라크와 몇 명의 용병들이 급히 출구 쪽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곳은, 무너져 내린 돌 더미가 쌓여 더 이상 그 형체도 알아 볼 수 없었다.


"다른 방법을 생각해 봐야겠는데요?"


라크가 고개를 저으며 뒤돌아섰다. 그의 눈에, 바닥에 쓰러져 기절해 있는 마법사 아웬의 모습이 들어왔다.






"저하께선 앞으로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가만히 앉아, 붉은 빛깔의 와인을 들어 마시고 있는 율란 왕자에게, 마레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마웅 후작은 오랜 시간동안 아무런 말도 없이 앉아서 율란 왕자의 이야기만을 듣고 있었다.


"당분간, 세상을 돌아볼 생각입니다."


"세상을 돌아보신다니요?"


깜짝 놀란 마레드가 자신도 모르게 다시 한 번, 물었다. 예의에 어긋난 행동이었지만 율란은 아무런 노여움도 없이, 오히려 입가에 짓궂어 보이는 미소만을 지은 채로 입을 열었다.


"뭐 당장 왕위가 결정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 사이 왕께서 깨어나시면 더 좋구요."


"혹시 제국으로 가실 생각이십니까?"


내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던 마웅후작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율란은 대답 없이 입가에 미소만 지어보였다. 마웅후작은 그런 율란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그저 작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필요하신 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잠시 마웅후작을 바라보던 율란이 그답지 앉게 살짝, 얼굴까지 붉히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


"딱히 물질적인 도움은 원치 않습니다. 당분간은 할 수 있을 때까지는 신분을 숨기고 싶으니까요. 다만……."


율란 왕자가 잠시 말을 끊고서 마웅과 마레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함께 동행을 부탁할 분이 있습니다."


그 때, 율란의 말을 끊으며 다급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의 시선이 문으로 향했다. 붉은색의 곱슬머리를 휘날리며 마리엔이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마리엔!"


마레드의 질책이 담긴 목소리에도 고개를 돌린 마리엔의 표정에서는 다급함이 지워지지 않았다. 아버지를 향해 급히 달려들던 그녀의 눈이, 자줏빛 머리를 곱게 기른 청년의 눈과 마주쳤다. 멈칫, 잠시 가쁜 숨을 고른 마리엔이 그 자리에 한쪽 무릎을 굽히며 앉았다.


"왕자저하를 뵙습니다."


율란의 입가에 다시금, 미소가 피어났다.


"일어나세요. 마리엔 마법사. 정말 오랜만이오. 4서클에 들어섰다지요?"


"운이 좋았습니다."


율란의 입가에서 시원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침 그대에 대해서 할 이야기가……."


웃음을 멈춘 율란이 어딘가 난처한 기색을 띄우며 말을 꺼내려고 했지만 이내, 다급하게 끼어든 마리엔의 음성에 묻혀 그 끝을 맺지 못했다.


"왕자저하, 무뢰한 줄은 알지만, 잠시만……, 그보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놀란 왕자는 아랑곳 하지 않고 급히 몸을 일으킨 마리엔이 마웅후작을 향해 뛰다시피 다가가 무언가를 건넸다. 평소에 너무나도 침착하기만 한 마리엔 이어서 마웅후작과 마레드는 미처 그녀의 행동을 책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의아한 눈빛으로 편지를 받아든 마웅후작을 대신해서 겨우 정신을 차린 마레드가 마리엔을 꾸짖으려 입을 열려는데 마리엔의 낮은 목소리가 그것을 다시 막았다.


"영지전이 들어왔습니다."


"뭐?"


마레드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며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가 떨어지기 무섭게 문을 열고 수십 명의 마법사들이 마웅후작의 집무실 안으로 달려 들어왔다. 잠시 그들을 바라보던 마웅 후작도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서 급히 봉투를 뜯었고, 율란 왕자도 예상치 못한 듯, 민망해서 붉어진 얼굴을 어느새 바로하고서 마웅후작이 꺼낸 편지로 시선을 던졌다. 봉투에는 한 장의 편지가 들어있었는데, 그리 긴 내용은 아닌지 마웅후작은 금세 읽어 내렸다. 다만 그것을 읽는 마웅 후작의 표정만이 점점 굳어질 뿐이었다.


"어찌 된 일입니까? 스승님."


마웅 후작이 굳었던 표정을 풀며 율란과 마레드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클록후작이 영지전을 신청했습니다."


율란 왕자가 미간을 구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도로 향하는 것이 아니었군요. 정말 생각지도 못했는데……."


제대로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 들었다. 생각해보니, 그의 형이 왕권을 잡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왕의 직속부대인 프킬루스기사단과 수도를 지키는 델로트 공작가문의 텐마르트기사단, 그리고 자신의 측근인 므로도스가를 제일 먼저 장악하려 할 터였다. 그러고 보니 므로도스가의 마법사들이 아직은 왕궁마법사단에 제법, 잔존해 있을 텐데도 므로도스가에 조금의 소식도 전해지지 않게, 철저한 비밀이 유지되고 있었던 것만 봐도 충분히 짐작할 만한 일이었다.


"형님께서 생각보다 빠르게 움직이는 군요."


"아무리 그래도 왕가에서 저희 가문을 너무 업신여기고 계십니다."


마레드가 불쾌한 심정을 그대로 드러냈다. 700년간 세일루니아를 지켜온 후작가문이다. 아무리 권력을 잡기 위해 벌이는 일이라고 해도, 왕국을 위해 700년 동안을 봉사 해 온, 자신들에게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칼을 들이대는 것은 무척이나 섭섭한 일이었다. 아니 당장 편하게 정권을 잡을 수 있겠지만, 남쪽의 제국과 무수한 왕국들을 앞으로 무슨 수로 감당한단 말인가? 끓어오르는 분노에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마레드와는 달리 침착하게 편지를 접어 다시 봉투 속에 넣는 마웅후작이 마리엔과 마법사들을 향해 낮고 강한 어조로 말했다.


"즉시, 비상계엄을 선포한다. 한 시간 후, 회를 소집할 터이니 3서클 이상의 마법사들은 모두 참석하라 일러라."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복잡한 심정에 허둥거리며 들어섰던 마리엔도, 마웅 후작의 침착하고 단호한 눈빛에 금세 진정이 되었는지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목소리로 대답을 마쳤다. 그녀의 얼굴은 어느새 그녀 특유의 도도함이 흐르는 얼굴로 돌아와 있었고, 율란은 자신을 향해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아무 말 없이 밖으로 향하는 마리엔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을 수밖에는 없었다.

마법사들과 함께 문 밖으로 사라지는 마리엔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마웅이 고개를 율란 왕자에게로 돌렸다.


"저하께서는 서둘러 몸을 피하십시오."


율란은 잠시 고개를 숙이고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도울 일은 없겠소?"


그러나, 지금은 아무런 힘도 없는 그저, 왕위 서열 세 번째에 놓인 왕자의 신분일 뿐이었다. 자칫 나섰다가 이곳에서 목숨이라도 잃게 되면 그야말로 개죽음일 터, 마웅 후작은 오랜만에 얼굴에 미소를 띠우고는 율란을 바라보았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다행히 아버님의 장례를 치른 후라, 가문의 마법사들이 거의 모두 리비안에 모여 있습니다. 지금 리비안은 어떤 적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부르르, 온몸으로 전해오는 음습한 한기에 한차례 몸을 떤 마법사 아웬이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떴다. 눈을 떴음에도 쉽게 밝아지지 않는 시야에 몇 번, 눈을 껌뻑 거리자 그제야 시야가 조금 밝아졌다. 그것도 겨우 바로 앞의 형체만 식별할 수 있을 만큼, 사위는 어두웠다. 차가운 바닥에 늘어진 손에서 돌가루들이 느껴졌다. 그제야, 조금 전 상황이 떠올랐다. 지붕에서 쏟아지던 돌덩이들을 피해 이리저리 몸을 피하다가 무언가에 머리를 맞고 쓰러졌었다.

살아있는 건가?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머릿속을 휘젓는 의문들에 쌓여 일어날 생각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누워있는데, 그의 얼굴 앞으로 꼬질꼬질 때가 덮인 금발의 사내가 불쑥 얼굴을 들이 밀었다.


"일어났군. 마법사."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마법사 아웬이 몸을 일으켰다. 금발머리의 사내, 말러가 그런 마법사에게 다가가 그의 등을 두드렸다.


"우리 할 이야기가 좀 있지?"


아웬은 두 손으로 말러를 밀쳐내고서 거의 기어가다시피 몸을 피하며 슬쩍 자신의 품 속을 더듬거렸다.


"이걸 찾고 있나요?"


웬 여인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검은 머리의 여인이 두루마리 하나를 들고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말러에게 전해 주려던 이동마법스크롤. 그는 그것을 이용해서 이곳을 빠져나가려고 했었다.

침착해야만 해.

마른 침을 꿀꺽, 목 안으로 삼킨 아웬은 제법 침착하게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폈다. 거의 무너진 감옥 안에는, 잡혀왔던 말러와 용병들이 제각각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고, 다른 한 편에 병사 몇 명이, 부상을 입고 쓰러진 다른 병사들을 살피다가, 역시 자신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아웬은 급히 자신의 마법지팡이를 찾았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봐도 마법지팡이는 보이지 않았고, 그 사이 용병들이 다가와 자신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그는 뒷걸음질을 치며 소리치듯이 말했다.


"내가 누군지 아느냐? 내 몸에 난 털끝하나 건드리는 날에는 너희 모두 목숨이 없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걱정도 팔자시네. 여길 빠져나가지 못하면 어차피 우린 모두 죽은 거요."


라크가, 자신의 손날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하며 비웃음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했지만, 그 말은 듣지도 않고 아웬은 아리시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들고 있는 이동마법스크롤, 그것만이 이곳을 나갈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4서클 이동마법진이로군요. 좌표는 수도의 외성 밖, 동쪽으로 4킬로미터쯤 떨어진 지점이고."


성인 세 명 정도가 이동할 수 있는 마법스크롤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곳의 갇혀있는 인원은 모두 열일곱 명. 원래는 스물세 명이었지만, 여섯 명의 병사들은 돌무더기에 깔려 즉사하고 말았다. 그리고 병사 세 명의 상처도 만만치 않게 위독했다.

아웬이 조금은 진정이 된 듯, 자리를 털며 일어섰다.


"그대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내게 손을 댄 것은 큰 실수를 저지른 것이오."


다가오는 용병들을 피해 뒷걸음질을 치던 그의 등이 차가운 벽에 가 닿았다.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피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 제의를 하나 하지."


그도 눈이 있어 조금 전, 정체를 알 수 없는 금발의 괴물과 싸운 아리시아의 실력이, 자신은 상대도 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당신과 나, 그리고 말러자작, 이렇게 세 명이서 나갑시다. 다른 떨거지들이야 어차피 있으나 마나한 천한 것들이니."


그의 말에, 잠시 걸음을 멈췄던 용병들의 얼굴이 잔뜩 험악해졌다. 그러나 아웬은 조금의 위축도 되지 않는 듯, 그들을 향해, 흥, 하고 코웃음을 한 번, 흘리고는 주문을 외우려 눈을 감았다. 그런 그의 귀가로 아리시아의 심드렁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힘 빼지 마십시오. 작은 충격만으로도 이곳은 무너질 수 있습니다."


주문을 외우던 아웬이 멈칫, 주문을 멈추고 눈을 떴다. 그리고는 아리시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가 걱정하는 것은 단 하나. 그녀가 마법스크롤을 이용해서 혼자 도망치는 일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리시아에게서 다시 담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당신은 따로 할 일이 있어요."


아웬이 의아한 눈으로 아리시아를 바라보고 있을 때, 라크용병대의 1서클 마법사 빌이 작은 가방을 들고 아리시아에게 다가왔다.


"찾았습니다. 아리시아님. 근데……."


가방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머리를 긁적이던 마법사 빌이 난처한 낯빛을 드러내며 말을 이었다.


"염색종이와 바반트가루는 있는데, 스크롤을 그릴 도구가 조금 부족합니다."


"괜찮아요.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여전히 의문으로 가득한 눈으로 아리시아를 바라보던 빌이 마지못해 가방 안에서 열 장의 염색 종이와 바반트가루가 들어있는 통. 그리고 펜을 꺼내 건네주었다. 아리시아는 미리 마련해 놓은 자리로 그것들을 가지고 가서는 털퍼덕 자리에 앉았다. 빌이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자와 컴퍼스를 조심스럽게 꺼내 놓고는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아리시아는 그가 내려놓은 도구는 쳐다보지도 않고, 종이를 맨 바닥 위에 깔았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빌은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스크롤제작법을 연습하기 위해 몇 개 사놓은 것이었지만, 마땅한 도구는 구비하고 있지 못했다. 그나마 자와 컴퍼스 하나가 구비한 것에 전부였는데 그것으로는 몇 시간이 주어져도 마법스크롤 하나 그려내기 힘들었다.

그런 빌과 아웬의 의문을 담은 눈초리는 아랑곳하지 않고서 바닥에 엎드린 아리시아는, 마치 종이 위에 그림을 그리듯이 염색종이 위에 펜을 가져가서는 무언가를 열심히 그리기 시작했다. 한 장, 한 장, 그녀의 옆에 종이가 쌓여갔다. 잠시 침묵의 시간이 흘러갔다. 너무나도 진지한 그녀의 모습에 아무도 말을 꺼내는 이는 없었다.

이윽고 다섯 장 째, 그림을 완성한 아리시아가 다시 한 번, 한 장씩 챙겨가며 스크롤을 재확인해 보고는 그것을 들고 아웬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어디서 주워왔는지 모를 마법지팡이와 스크롤을 아웬에게 내밀었다.


"마법을 부여하세요."


아웬이 양 미간을 찌푸리며 소리를 질렀다.


"날 놀리는 거요?"


그러나 아리시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여전히 그녀가 내민 손에는 지팡이와 종이뭉치가 들려 있었다. 아웬은 우선 지팡이를 건네받고서, 마법스크롤 뭉치들을 한 장씩 살폈다. 처음에는 설마, 하고 속으로 미친년, 이란 욕을 퍼부어 대던 그의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밖으로 튀어나올 만큼 커졌다.


"이……."


아리시아와 마법스크롤을 번갈아 바라보던 아웬이 이번에는 용병들을 바라보았고, 그런 그의 모습에,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어 의아한 표정으로 서 있던 용병들을 헤치며, 마법사 빌이 다가와 곁눈질로 스크롤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자신도 모르게 달려들어 아웬의 손에서 마법스크롤을 낚아 챈 빌이, 조금 전, 아웬이 짓던 표정과 다름없는 얼굴로 아리시아를 바라보며 소리치듯 말했다.


"아리시아님,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그의 말에 아웬이 다시 목이 찢어져라 소리를 질렀다.


"니들이 나를 놀리고 있는 것이냐?"


그때, 어느새 그의 목을 움켜잡은 아리시아에게서 담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당장 치료를 해야만 하는 부상자들이 몇 명 있습니다. 조금 서둘러주세요."


갑자기 등줄기를 타고 밀려드는 한기에 아웬의 턱이 딱 딱 딱,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그럼에도 그는 이 의문을 풀지 않고는 어떠한 일도 할 수 없었다.


"설명해라. 이 사기꾼 마법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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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제10장 - 당신이 사라 시헤리드로군요(8) 19.04.03 55 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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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제9장 - 어둠의 신전으로 모시겠습니다.(1) +1 15.05.04 484 6 18쪽
56 제8장 - 모두 제국으로 가는 건가요?(10) +2 15.05.03 464 11 22쪽
55 제8장 - 모두 제국으로 가는 건가요?(9) +1 15.05.02 387 5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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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제8장 - 모두 제국으로 가는 건가요?(3) 15.04.26 416 10 21쪽
48 제8장 - 모두 제국으로 가는 건가요?(2) 15.04.25 496 9 19쪽
47 제8장 - 모두 제국으로 가는 건가요?(1) +2 15.04.24 477 7 20쪽
» 제7장 - 이렇게 쉽게 끝날리가 없지(8) +2 15.04.23 504 15 19쪽
45 제7장 - 이렇게 쉽게 끝날리가 없지(7) +2 15.04.22 379 9 21쪽
44 제7장 - 이렇게 쉽게 끝날리가 없지(6) +2 15.04.21 548 11 23쪽
43 제7장 - 이렇게 쉽게 끝날리가 없지(5) 15.04.20 459 10 17쪽
42 제7장 - 이렇게 쉽게 끝날리가 없지(4) +1 15.04.19 526 11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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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제6장 - 므로도스가의 마법사이십니까?(9) +2 15.04.15 566 11 22쪽
37 제6장 - 므로도스가의 마법사이십니까?(8) +2 15.04.14 347 14 20쪽
36 제6장 - 므로도스가의 마법사이십니까?(7) 15.04.13 424 14 27쪽
35 제6장 - 므로도스가의 마법사이십니까?(6) 15.04.12 533 12 19쪽
34 제6장 - 므로도스가의 마법사이십니까?(5) +2 15.04.11 501 8 16쪽
33 제6장 - 므로도스가의 마법사이십니까?(4) 15.04.10 464 13 16쪽
32 제6장 - 므로도스가의 마법사이십니까?(3) +1 15.04.09 591 11 15쪽
31 제6장 - 므로도스가의 마법사이십니까?(2) +3 15.04.08 408 11 11쪽
30 제6장 - 므로도스가의 마법사이십니까?(1) +1 15.04.07 626 12 17쪽
29 제5장 - 제게 검술을 가르쳐 주실 수 없나요?(8) +1 15.04.06 562 9 18쪽
28 제5장 - 제게 검술을 가르쳐 주실 수 없나요?(7) 15.04.05 504 13 18쪽
27 제5장 - 제게 검술을 가르쳐 주실 수 없나요?(6) +1 15.04.04 449 11 14쪽
26 제5장 - 제게 검술을 가르쳐 주실 수 없나요?(5) +1 15.04.03 421 12 17쪽
25 제5장 - 제게 검술을 가르쳐 주실 수 없나요?(4) +2 15.04.02 550 14 17쪽
24 제5장 - 제게 검술을 가르쳐 주실 수 없나요?(3) +1 15.04.01 463 15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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