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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령 님의 서재입니다.

얼음의 아리시아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을령
작품등록일 :
2015.03.16 00:00
최근연재일 :
2019.04.08 22:19
연재수 :
72 회
조회수 :
37,663
추천수 :
775
글자수 :
553,977

작성
15.04.21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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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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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글자
23쪽

제7장 - 이렇게 쉽게 끝날리가 없지(6)

DUMMY

어둠이 덮인 좁고, 긴 복도를 두 명의 남자가 걷고 있다. 그 중 낡은 갈색 로브로 몸을 가리고 있는 남성이 왕국기사갑옷을 입은 남자에게 작은 서찰을 하나 건네며 물었다.


"이제야 조용해 진건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택이 떠나가라 소리치던 여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은 탓이었다.


"네, 어제 아침부터 입을 다물더니 이제는 식사도 제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건 그렇고 이게 무엇입니까?"


"왕자저하께서 보내셨네. 그대로 따르라 하시더군."


기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저하께서는 오시지 않으십니까?"


로브의 마법사가 귀찮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걸음을 잠시 멈추었다.


"저하는 이곳에 계시지 않네. 모든 것을 자네에게 맡겼으니 서찰을 읽어보고 알아서 처리하라 하셨네. 왕자님의 손님은 무얼 하고 계신가?"


기사는 잠시 서찰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이내 자신의 품속에 집어넣으며 대답했다.


"3일 동안 단 한발자국도 나오시지 않으셨습니다. 그게……."


다시 발걸음을 옮기려던 마법사가 석연찮게 말을 멈추는 기사에게 다시 고개를 돌렸다.


"시종을 불러 물어보니 어딘가 부상을 당하신 것 같다고 했습니다."


"부상?"


"확실한 건 아닙니다. 그냥 느낌에 그랬다는 것이지요. 피를 흘렸다거나, 따로 치료사를 부른 적은 없었습니다."


로브 속에서 마법사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시종은 가만 두고?"


마법사의 질문에 기사가 괜히 한쪽 머리를 긁었다.


"애교를 좀 부려보라고 했는데 눈길도 주지 않더랍니다."


"그, 검은 머리 여인에 대해서는 어떤, 다른 말은 없었고?"


"네, 내일쯤 여인을 데리고 떠나시겠다고 했습니다."


가만히 생각에 잠겼던 마법사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자작은 잘 있는가?"


"생각 외로 얌전히 있습니다."


어딘가 비웃음이 섞여든 웃음소리가 복도를 잠시 메웠다가 사라졌다.


"그 용병들도 잘 있고?"


"네, 그런데 그 용병들은 왜 살려두시는 겁니까?"


"그들은 따로 쓸 일이 있네."


로브의 마법사가 말을 마칠 때쯤, 두 사람은 복도의 끝, 거대한 프킬루스의 석상이 서 있는 곳에 당도했다. 마법사는, 마치 살아있는 마물처럼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프킬루스의 석상을 바라보며 말했다.


"혼자 가겠네."


기사는 아무런 말없이 품속에서 둥글고 기다란 금색의 봉, 한 개를 꺼내 마법사에게 건네고는 고개를 숙였다. 그것을 받아든 마법사가 자신의 로브 속에서 같은 모양의 봉을 하나 꺼내 푸킬루스석상의 구멍 난 두 눈에 하나씩 꽂아 넣자, 곧 기계음과 함께 바닥으로부터 작은 진동이 느껴지더니 석상이 놓여있던 받침대가 서서히 뒤로 밀리며 사람 한 명이 드나들 수 있는 넓이의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법사는 기사가 고개를 들기도 전에 터벅터벅,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침대에 걸터앉아, 창밖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하얀 달을 바라보던 여인이 헝클어진 검은 머리카락을 몇 번, 쓰다듬고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익숙하지 않은, 풍성하게 부풀어 오른 치마를 손으로 붙잡고서 창가로 향하는 발걸음에 맞춰, 그녀의 발밑에서는 둔탁한 쇳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두 발을 잇고 있는 족쇄가 바닥을 쓸며 울리는 소리였다.

검은 머리의 여인, 메르넨이 신경을 거슬리는 쇳소리에 잠시 인상을 구기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창가로 다가 섰다.

창밖의 풍경은, 저택보다 큰 키의 나무들이 사방을 뒤덮고 있어서 지금의 처지만 아니라면 더 없이 행복한 기분에 빠져들 만큼 평화로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어두운 숲속 사이로, 한 마리의 새가 날아올랐다가 다시 숲속으로 사라졌다.

그녀가 있는 곳은 3층에 위치한 방. 발목에 채워진 족쇄만 아니라면, 훌쩍 몸을 날려 뛰어내릴 수도 있는 높이였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지금 막, 두 명의 병사가 그녀가 서 있는 창문 아래를 걸어가다가, 한 명의 병사가 그녀를 향해 들고 있던 램프를 들어 올리며 이상한 몸짓으로 흔들어 대고는 자신들끼리 깔깔거리며 사라졌다.

똑똑.

막, 병사들이 건물의 모퉁이를 돌아 사라질 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메르넨의 몸이 반사적으로 창가에서 반바퀴 돌아섰다. 그와 거의 동시에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갈색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 넘긴, 광채가 날 만큼 반질반질하게 닦인 은빛의 왕국갑옷을 입은 남자였다. 남자는 빵과 우유가 담긴 쟁반을 한 손에 들고서 어딘가 어색한 미소를 지은 채로 들어섰다. 아첼로라는 이름의 왕궁기사대 소속의 기사로, 그는 지금까지 그녀가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오! 웃을 갈아입은 건가? 아주 잘 어울리는군."


아첼로의 눈에 살짝 이채로운 빛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끈적거리는 눈빛으로 메르넨의 전신을 훑으며 다가온 아첼로가, 역시나 훌륭한 장인에 의해 만들었을, 기사를 태우고서 하늘로 비상하는 프킬루스가 그려진 나무 탁자위에 자신이 들고 있던 쟁반을 내려놓았다.


"다른 대원들은 어디에 있죠?"


메르넨이 고개를 들고 물었다. 그를 만날 때마다 던졌던 질문이지만 그에게서는 단 한 번도 그녀가 듣고자 했던 답이 흘러나온 적은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와 얼굴이 마주칠 때마다 계속 같은 질문을 던졌다. 역시나 오늘도 아첼로의 입에서는 다른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이제 곧, 이곳을 떠나게 될 것이다. 꽤 긴 여행을 해야 할 테니, 준비 단단히 해둬. 뭐 용병 짓을 하고 다녔으니 웬만해서 우릴 힘들게 하지는 않을 꺼라 믿는다."


"떠나다니요?"


메르넨이 던진 질문에 기사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질문은 허용치 않는다. 넌 그냥 우리가 하라는 대로 따르기만 하면 돼."


"이 족쇄라도 풀어줘요."


메르넨이 자신의 두 발을 덮고 있는 치마를 들어올렸다. 치마가 들리며 그녀의 발목과 하얀 종아리가 드러났다. 그 동안, 먼지가 잔뜩 묻어있는, 남성용 여행자복을 입고 있던 그녀가 귀족 여성들이 입는 가슴이 파인 드레스를 입고 있자 그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졌다. 화장을 하거나 귀걸이 같은 장식으로 꾸며놓은 것도 아닌데 제법 고혹적인 느낌이 풍겼다.


"역시 힘으로 해결하는 수밖에는 없겠는데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메르넨에게 다가서던 아첼로가 우뚝, 걸음을 멈췄다. 메르넨의 시선이 자신의 뒤쪽, 어딘가를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불현듯 떠오르는 불길한 예감에 급히 고개를 돌리는 그의 등을 누군가가 세차게 떠밀었다. 어느새 등 뒤로 다가온 괴한이 자신의 팔을 꺾어 조금 전, 쟁반을 내려놓았던 탁자 위로 자신을 몸을 찍어 눌렀다.


"누, 누구냐?"


탁자에 엎드린 채로, 버둥거리던 기사 아첼로가 자신을 습격한 괴한을 향해 소리치며 고개를 돌렸다. 메르넨이란 이름의 여인과 같은 검은 머리의 여인이 차가운 검은색 눈동자를 바짝 들이밀고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름은?”


여인에게서 한겨울에나 느낄 법한 차가운 기운이 쏟아져 들어왔다.


“누, 누구요?”


오한과 함께 자신도 모르게 떨려오는 목소리를 겨우 진정시키며 입을 열었는데, 대답은 들려오지 않고, 대신 번쩍, 눈앞에 별이 보일 만큼 강한 충격이 그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질문에 대답만 해. 우리 대원들 어디에 있지?"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일그러뜨린 아첼로가, 팔을 빼내려고 잽싸게 몸을 돌렸다. 아니 그의 경험으로 자신의 팔을 잡고 있는 여인의 역방향으로 팔에 힘을 주고서 돌아서면, 분명히 그녀에게서 벗어나 역습을 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찌된 일인지 몸은 여전히 탁자 위에 그대로 짓눌려 있고, 여인에게 잡힌 손은 이제 감각마저 무뎌질 만큼 강한 힘에 조여들기 시작했다. 마치 돌덩이 밑에 깔린 것처럼 이제는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당황하고 있는 그의 귀에 다시 메르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묻는 말에 성심성의껏 대답해 주길 바래, 뒤에 계신 분은 너 정도의 기사 열 명쯤은 혼자 감당하실 만큼 대단한 분이시니까."


기사 아첼로에게서 침울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대체 어떻게 들어 온 거요?"





레이드의 부하를 술집 앞에 내려놓은 아리시아는 그 길로, 이곳까지 한달음에 달려왔다. 다행히 세 개의 왕궁별장은 수도의 북쪽 끝, 한적한 작은 숲속에 1킬로미터정도의 간격을 두고서 제법, 가까이 붙어있었다. 주로 왕가의 핏줄들만이 이용할 수 있는 별장이었는데, 별장이라고 해도, 웬만한 귀족들의 영주성만큼이나 켰다. 세 개의 저택 주변, 온갖 나무들로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는 이곳은, 주로 왕족들이 사냥놀이를 즐기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들어 둔 곳으로 세일루니아, 700년 역사동안 점점 그 넓이를 넓혀서 지금은 수도 퓨리스의 2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었다. 저택 모두 체일메일을 입은 수십 명의 병사들로 꽤나 삼엄하게 보호되고 있었는데 그중에 두 번째로 큰 3층 건물에 유독 많은 병사들이 모여 있고, 창문에서도 가장 많은 불빛들이 새 나오고 있었다. 저택 정문 앞에는 여섯 마리가 끄는 거대한 크기의 사륜마차 한 대가 서 있고, 서른일곱 개의 창 중에, 열두 개의 창으로부터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아리시아는 은밀하게 사륜마차의 뒤로 숨어들어 정문 앞을 지키는 병사들이 나누는 이야기 소리에 한동안 귀를 기울였다.

그들의 대화를 통해 알 수 있었던 사실을 종합해 보자면, 우선 세일루니아 왕이 쓰러졌다는 것. 그리고 그 일이 세 번째 왕자가 한 일이라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는 것. 또, 5일 전, 십여 명의 죄수들이 잡혀와, 한 동안 비어있던 감옥에 수감되어 있다는 사실과 검은 머리의 여인이 이 저택 3층에 감금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이야기를 듣고 곧바로 지하 감옥으로 향하려던 아리시아는 검은 머리의 여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는 잠시 고민에 빠져 있다가 저택의 뒤를 돌아 숲속으로 몸을 숨겼다.

멍한 얼굴로 머리 위에 떠있는 달을 바라보고 있던 메르넨은 갑자기 자신의 앞으로 뛰어오른 인영에 깜짝 놀라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지고 말았다.


"아, 아리시이님?"


정신을 수습하고서도 일어서지 못하고 멀뚱멀뚱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메르넨을, 아랑곳하지 않고 잠시 주위를 둘러 본 아리시아가 그녀를 향해 물었다.


"어떻게 된 거죠?"


그제야 조금 마음을 진정시킨 메르넨이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아리시아에게 이야기 했다.


"수도에 도착하자마자 성문 앞의 병사들에 의해 이곳으로 끌려왔어요. 눈을 안대로 가리고 있어서 여기가 어디인지는 몰라요. 아! 아리시아님은 이곳이 어디인지 혹시 아시나요?"


"수도 북쪽, 왕가의 별장이에요."


두서없이 던진 질문에 아리시아의 담담한 대답이 이어졌다. 고개를 끄덕이며 메르넨의 설명이 이어졌다.


"전, 이곳으로 오는 도중에 마차에서 내려져 따로 마차에 끌려왔어요. 그 후 계속 이곳에 갇혀 있다시피 했어요. 다른 사람들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해요."


메르넨은 자신의 발목에 채워진 족쇄를 들어 보였다. 하지만 아리시아는 그녀의 발목이 아닌 그녀가 입고 있는 귀족의 옷차림을 훑어보고 있었다. 자신의 전신을 훑는 아리시아의 시선을 느끼자 메르넨의 얼굴이 괜히 붉게 달아올랐다. 이 옷은, 메르넨이 이곳에 처음 감금 되었을 때, 기사 아첼로가 가져다 놓은 것이었다. 그러나 옷을 갈아입기는커녕, 밥도 먹지 않고, 씻지도 않은 채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난동만 부리던 그녀였다. 하지만 그것도 요 며 칠 사이에 지칠 대로 지쳐, 더 이상 다른 방법이 없던 메르넨은 마지막으로 미인계를 써볼 요량으로 옷을 갈아입고, 곧 저녁식사를 가져 올 기사 아첼로를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아! 이 옷은 제가 입으려고 한 게 아니구요……."


급히 변명하듯이 말을 꺼냈지만, 또한 미인계 부분에서 할 말이 막힌 메르넨은 다시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잠시 그녀의 말을 기다리고 있던 아리시아가 입을 열었다.


"용병들은 이곳 지하에 갇혀 있어요."


"지하에요?"


애타게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자신과 한 건물 안에 있었다니. 한 편으로는 다행스럽기도 했고, 한편, 왜 자신만 따로 가두어 두었는지 의문도 솟아나기 시작했다. 무엇을 하려는지 자신의 발아래 주저앉아 족쇄를 매만지는 아리시아를 바라보며 메르넨이 말했다.


"곧, 기사가 한 명 올 꺼예요. 몇 번 대들어봤는데 실력이 보통이 아니더라구요."


메르넨이 눈이 순간, 반짝하고 빛을 냈다.


"꽤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자 같았어요."





리비안의 마탑, 2층 므로도스가의 가주가 머무는 집무실 안.

손님을 접대하기 위해 한 편에 놓아 둔, 고급스러운, 갈색 소파 위에 자줏빛 머리카락을 곱게 기른 청년이 팔짱을 낀 채로 앉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두 명의 마법사를 향해 입을 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직 희망을 놓을 때가 아닙니다."


침울한 표정의 마웅후작과 마레드에게 오히려 왕자가 위로 건넸다.


"도대체 수도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입니까?"


사실, 므로도스 후작쯤 되면 지금 쯤, 어느 정도 사태를 파악하고 대책을 세워야 했지만, 그들은 알고 있는 사실이 아무것도 없었다. 말을 꺼내기도 부끄러운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어 착잡한 심정으로 물은 것이었다. 왕자가 인자한 미소를 띤 얼굴로 천천히 말을 이었다.


"왕께서 쓰러지신 건, 7일 전입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몰라요. 그 후, 경호대와 왕궁가사단장, 그리고 델로트 공작에 의해서 왕궁의 모처에서 치료를 받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위중함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 후, 다른 조치가 없는 것으로 봐서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계신 건 확실한 듯합니다."


"지병이 있으셨습니까?"


왕자는 침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렇듯 갑자기 쓰러져 의식불명에 빠질 만큼, 왕은 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신체능력은 지금의 젊은 자신보다도 더 나았었다.


"뭔가 음모가 있는 건 분명해요. 어찌된 일인지. 왕께서 쓰러지시고, 이틀도 안돼서 소문이 수도 전역에 퍼졌어요. 아시다시피 왕세자가 정해지지 않은 상황이니, 비밀로 붙이지 않는다면 큰 혼란이 일어날 것은 왕궁의 누구라도 알 수 있는 일이지요. 분명, 왕궁의 그 누구도 함부로 입을 놀리지 않았을텐데, 소문은 벌써 그리 퍼져 떠돌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그중에, 제가 아버님을 독살하려 했다는 소문도 함께 퍼졌어요."


첫째 왕자의 나이가 마흔두 살. 보통 그 정도의 나이라면 특별한 결격사유가 없는 한, 진작에 왕세자로 책봉이 되어야 했지만, 무슨 일인지 왕, 루즈덴드 폴 퓰리츠는 다음 왕위에 대해서는 조금의 언급도 하지 않았다.


"클록후작의 군대를 이끌고서 셀리오스백작이 수도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전 그 직후 수도를 빠져나와 이곳으로 왔구요. 곧, 그들이 수도 근처에 도착할 겁니다."


"그것도 이상하군요. 아무리 빨리 사태를 파악했다고 해도, 그들이 그렇게 빨리 움직이다니요. 첫째 왕자저하의 행동이 너무나도 의심스럽습니다."


왕이 쓰러지고 7일이 흘렀다. 그런 상황인데도 마웅후작 자신은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는데, 북부의 셀리오스백작이 벌써 군대를 움직여 수도에 다가와 있다니…….

셀리오스백작의 영지인 갈루아에서 수도까지 군대가 움직이려면, 적어도 10일은 넘게 걸린다. 군대를 끌어 모으는 데만도 아무리 빨리 준비를 한다고 해도 이틀은 소요될 터. 그런데 지금 수도에 근접해 있다면 적어도 왕이 쓰러지기 5일, 아무리 늦어도 3일 전에 이미 군대를 출발시켰다는 소리였다. 다시 그늘로 뒤덮이는 마웅후작을 향해 율란왕자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아니요. 그들은 어찌해볼 수 있습니다. 아직 왕께서 돌아가신 것도 아니고, 델로트 후작과 프킬루스기사단 때문에라도 그들의 군대는 함부로 수도 근처에 알짱거리지 못할 거예요. 그러나 그것보다 더 조심해야 할 문제는 형을 뒤에서 돕고 있는, 모종의 세력입니다."


마웅후작과 마레드가 의아한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들에게 율란왕자가 말을 이었다.


"두 분도 알고 계시겠지요. 기록되지 않은 역사, 검의 주인들의 이야기를."


마웅후작과 마레드의 미간이 함께 일그러졌다. 그들이 나타났단 말인가? 그리고 그들이 첫째 왕자를 돕고 있다는 말인가? 단 한 번도 본 적은 없었지만, 전설처럼 전해지는 이야기는 무수히 많다. 그런 마웅과 마레드에게 다시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율란이 말했다.


"그것보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마치 즐거운 일이라도 있다는 얼굴로 태연히 말을 꺼내는 율란 때문에 마웅과 마레드의 고개가 동시에 다시 왕자에게로 향했다.


"프킬루스의 서식지가 발견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웅과 마레드의 시선이 또 다시 동시에 서로를 향해 모아졌다.






"생각해 보셨습니까? 자작."


로브 속에 깊이 파묻힌 인영의 얼굴은 알 수 없었다. 다만 목소리로 유추해 보건데, 말러 자신보다 더 나이가 많은, 중년의 마법사라고 추측이 되어 질 뿐이었다.


"왕자저하는 오지 않으셨습니까?"


"이제 모든 일은 내가 맡을 것이오. 당신은 결정을 내리기만 하면 되오."


결정을 내리고 말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목숨이 두 개도 아닌데.


"제국으로 가겠소."


마법사의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그가 품속에서 작은 두루마리 하나를 꺼냈다.


"잘 생각했소. 당신은 이제 새로 태어나게 될 거요. 이 종이 위에 당신의 신상이 적혀있소. 그리고 이 마법스크롤을 이용해서 수도 밖으로 나가면 되오."


잠시 마법사의 손에 들린 두루마리를 바라보던 말러가 고개를 들고 말했다.


"그 전에,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철장 안으로 두루마리를 건네던 로브의 인영이 멈칫, 손을 멈췄다. 그리고는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뻣뻣하게 서서는 말러를 바라보기만 했다.


"저들, 용병들과 함께 가게 해주시오. 어차피 나 혼자서는 힘든 일입니다."


말러의 말에 마법사로 보이는 중년인의 고개가 천천히 좌우로 움직였다.


"불가하오. 그리고 당신이 우리와 한 배를 타는 순간, 이제 모든 것은 우리의 지시에 따라주어야만 하오. 시간이 별로 없소. 저들 용병 따위의 목숨을 걱정하다가 자신과, 또…… 당신의 가족이 아픔을 겪는 일이 없기를 바라오."


말러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용병의 목숨은 그저 그 따위 정도인가? 알 수 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이제 귀족이 된지 십 년이다. 리아나의 얼굴이 떠올랐다. 잘 있겠지. 아리시아라면 적어도 리아나 만큼은 누구보다 훌륭하게 키워줄 것이다. 어쩌면 자작이라는, 불안하기 짝이 없는 직위보다는 설원의 마검사의 제자라는 이름이 그 아이를 더욱 안전하게 지켜주리라. 말러가 고개를 들었다.


"저들과 함께 갈 수 없다면 이번 일은 못들은 걸로 하겠소."


마법사의 로브 속에서 작지만, 분명한 의미가 담긴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사람이군."






칠흑같은 어둠으로 덮인 방의 창문이 누군가에 의해 열리고, 곧, 열린 창문 안으로 두 명의 인영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 중, 상품의 검을 든 여인이, 붉은 로브를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있는 여인을 향해 의문스러운 눈빛을 보내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아첼로라는 이름의 가사에게서 지하 감옥의 위치를 알아낸 아리시아는 그의 품속에서 족쇄의 열쇠를 찾아내 메르넨의 발을 풀어주고는 곧바로 방을 나와 창문과 창문 사이를 통과해 가며 이곳 1층까지 내려왔다. 적어도 서른 명 가까운 병사들과 그 만큼의 하인들이 건물 안팎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이곳까지 내려오는 동안 메르넨은 단 한 명의 사람과도 마주치지 않았다. 아무리 넓은 저택이라 할지라도 이런 일이 가능할까? 그러나 아리시아에게 그것은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움직이는 사람은 발굽소리로, 서 있는 사람은 말소리나, 숨소리로 그 위치를 파악해서 그들을 피해 온 것이었다.

메르넨이 의문에 싸여 있거나 말거나 아리시아는 주저 없이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어둠 속에서 희미한 불빛을 발하고 있는 촛불에 의해 겨우 길을 파악할 수 있는 긴 복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적어도 이 복도만큼은, 몸을 숨길만한 조금의 공간도 없이 길게 뻗어나 있어서 아리시아도 조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멀리 프킬루스의 검은색 석상이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냈을 즈음, 무언가 머리 위에서 툭, 하고 아리시아와 메르넨에게로 떨어졌다. 바람을 가르는 아주 작은 소리를 듣자마자 메르넨의 손을 끌고 앞으로 달리지 않았다면 분명 무언가에 큰 화를 입었을, 아주 은밀한 공격이었다.

아리시아에게 이끌려 거의 끌려가다시피 복도를 미끄러져 가다 결국 복도 끝에 넘어진 메르넨이 고개를 들고 뒤를 돌아보니 그곳에 금발의 남자가 서있고, 아리시아가 자신의 앞을 막아서고는 그 남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메르넨을 향해 아리시아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먼저 내려가서 말러와 용병대원들을 구하세요.”


심상치 않은 아리시아의 목소리를 듣고 다시 한 번, 금발의 남자를 바라본 메르넨이 급히 몸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이제 은밀한 움직임도 이것으로 끝이었다. 그런 메르넨에게서 고개를 돌린 아리시아가 금발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축축한 마기가 흘러나와 아리시아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얼굴 또한 낯이 익었다.


"이렇게 다시 만났군."


금발의 남자, 아리시아는 그를 알고 있었다. 일전에 붉은 머리의 반마족 여인 샤렛과 함께 있던 남자였다. 비록, 먼 거리에서 한 번 본 것이 다였지만 그녀는 금발의 남자가 그 반마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알카라고 하네. 설원의 마도사라고 부른다지?"


금발의 남자는 귀족의 인사법으로 허리를 숙여 분위기에 맞지 않는 인사를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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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제10장 - 당신이 사라 시헤리드로군요(7) 19.04.02 63 1 17쪽
68 제10장 - 당신이 사라 시헤리드로군요(6) 19.03.29 59 1 12쪽
67 제10장 - 당신이 사라 시헤리드로군요(5) 19.03.27 56 1 15쪽
66 제10장 - 당신이 사라 시헤리드로군요(4) 19.03.25 106 1 13쪽
65 제10장 - 당신이 사라 시헤리드로군요(3) +1 15.06.09 411 4 18쪽
64 제10장 - 당신이 사라 시헤리드로군요(2) +1 15.06.02 372 7 12쪽
63 제10장 - 당신이 사라 시헤리드로군요(1) 15.05.26 484 9 15쪽
62 제9장 - 어둠의 신전으로 모시겠습니다.(6) +1 15.05.18 403 7 16쪽
61 제9장 - 어둠의 신전으로 모시겠습니다.(5) +1 15.05.15 402 7 17쪽
60 제9장 - 어둠의 신전으로 모시겠습니다.(4) 15.05.13 477 10 20쪽
59 제9장 - 어둠의 신전으로 모시겠습니다.(3) 15.05.12 353 8 24쪽
58 제9장 - 어둠의 신전으로 모시겠습니다.(2) +1 15.05.05 428 4 20쪽
57 제9장 - 어둠의 신전으로 모시겠습니다.(1) +1 15.05.04 484 6 18쪽
56 제8장 - 모두 제국으로 가는 건가요?(10) +2 15.05.03 464 11 22쪽
55 제8장 - 모두 제국으로 가는 건가요?(9) +1 15.05.02 387 5 19쪽
54 제8장 - 모두 제국으로 가는 건가요?(8) 15.05.01 450 9 15쪽
53 제8장 - 모두 제국으로 가는 건가요?(7) +2 15.04.30 381 6 19쪽
52 제8장 - 모두 제국으로 가는 건가요?(6) +1 15.04.29 335 7 23쪽
51 제8장 - 모두 제국으로 가는 건가요?(5) +2 15.04.28 462 10 17쪽
50 제8장 - 모두 제국으로 가는 건가요?(4) +2 15.04.27 436 9 22쪽
49 제8장 - 모두 제국으로 가는 건가요?(3) 15.04.26 416 10 21쪽
48 제8장 - 모두 제국으로 가는 건가요?(2) 15.04.25 496 9 19쪽
47 제8장 - 모두 제국으로 가는 건가요?(1) +2 15.04.24 477 7 20쪽
46 제7장 - 이렇게 쉽게 끝날리가 없지(8) +2 15.04.23 504 15 19쪽
45 제7장 - 이렇게 쉽게 끝날리가 없지(7) +2 15.04.22 379 9 21쪽
» 제7장 - 이렇게 쉽게 끝날리가 없지(6) +2 15.04.21 549 11 23쪽
43 제7장 - 이렇게 쉽게 끝날리가 없지(5) 15.04.20 459 10 17쪽
42 제7장 - 이렇게 쉽게 끝날리가 없지(4) +1 15.04.19 526 11 17쪽
41 제7장 - 이렇게 쉽게 끝날리가 없지(3) 15.04.18 535 15 20쪽
40 제7장 - 이렇게 쉽게 끝날리가 없지(2) +3 15.04.17 511 14 17쪽
39 제7장 - 이렇게 쉽게 끝날리가 없지(1) 15.04.16 399 10 19쪽
38 제6장 - 므로도스가의 마법사이십니까?(9) +2 15.04.15 566 11 22쪽
37 제6장 - 므로도스가의 마법사이십니까?(8) +2 15.04.14 348 14 20쪽
36 제6장 - 므로도스가의 마법사이십니까?(7) 15.04.13 425 14 27쪽
35 제6장 - 므로도스가의 마법사이십니까?(6) 15.04.12 533 12 19쪽
34 제6장 - 므로도스가의 마법사이십니까?(5) +2 15.04.11 502 8 16쪽
33 제6장 - 므로도스가의 마법사이십니까?(4) 15.04.10 464 13 16쪽
32 제6장 - 므로도스가의 마법사이십니까?(3) +1 15.04.09 591 11 15쪽
31 제6장 - 므로도스가의 마법사이십니까?(2) +3 15.04.08 408 11 11쪽
30 제6장 - 므로도스가의 마법사이십니까?(1) +1 15.04.07 626 12 17쪽
29 제5장 - 제게 검술을 가르쳐 주실 수 없나요?(8) +1 15.04.06 562 9 18쪽
28 제5장 - 제게 검술을 가르쳐 주실 수 없나요?(7) 15.04.05 504 13 18쪽
27 제5장 - 제게 검술을 가르쳐 주실 수 없나요?(6) +1 15.04.04 449 11 14쪽
26 제5장 - 제게 검술을 가르쳐 주실 수 없나요?(5) +1 15.04.03 421 12 17쪽
25 제5장 - 제게 검술을 가르쳐 주실 수 없나요?(4) +2 15.04.02 550 14 17쪽
24 제5장 - 제게 검술을 가르쳐 주실 수 없나요?(3) +1 15.04.01 463 15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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